동행

dante 2021. 2. 9. 17:22

어떤 사람에겐 의미 없는 이름이 어떤 사람에겐 타임머신입니다.

오늘 아침 신문에서 본 이름, 조지 슐츠 (George P. Shultz) 덕에 잠시

1980년대 중반을 다녀왔습니다. 제가 코리아타임즈 정치부 기자로서

외무부 (현 외교부)를 출입하던 시절입니다.

 

그때는 전두환 씨가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를 때라 그이가 좋아하는

기사 말고는 기사를 쓸 수가 없었습니다. 요즘처럼 언론의 자유가

무제한으로 주어지는 시대에선 상상하기도 힘들겠지만, 

대통령이나 정권을 비판하는 기사는 생각하기조차 어려웠고

특히 정치나 외교 기사는 청와대에서 쓰라고 하는 것만 쓸 수 있었습니다.

 

언론 통폐합이 이미 이루어진 후라 외무부 기자실에는 기자가

열한 명뿐이었습니다. 국문 신문, 영자 신문, 방송 몇 개, 그리고 연합통신.

전국을 통틀어 일간지 정치부 여기자는 저 하나뿐이어서

외교부 기자실에도 여기자는 저 홀로였습니다.

 

기사를 마음대로 취재할 수도 없고 쓸 수도 없다 보니

몸은 편했지만 마음엔 늘 울분이 가득했습니다.

시대의 불행을 함께 앓으면서 기자들은 기자실에서 자주 만나고

비슷한 울분을 느끼는 외무부 공무원들과 점심을 먹곤 했습니다.

 

어느 날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부근에서 함께 점심을 먹고

청사 정문으로 들어가는데, 청사 일층 로비 가운데에 정복 차림의

미군이 셰퍼드 한 마리와 함께 부동자세로 서 있었습니다.

 

다른 기자들은 무심히 보고 들어갔지만 저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형편없는 나라라 해도 한국은 주권국가인데

그 국가의 중요 정부 부처들이 모여 있는 종합청사에 왜 다른 나라

군인이 개와 함께 서 있는 것인지,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 군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습니다. "개가 참 잘 생겼네요.

이름이 뭐예요?' 그는 '치코'라고 말했습니다.

치코가 무슨 뜻이냐 물으니 '꼬마'를 뜻한다고 했습니다.

아, 그러냐고, 그런데 왜 여기 서 있는 거냐고 물으니

조지 슐츠 국무장관이 총리실인지 외무장관실인지를 방문하게

되어 있어서 폭발물 탐지차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군인에겐 웃으며, 아, 그러냐고 하고 돌아섰지만

참 기분이 나빴습니다. 한국에도 폭발물 탐지하는 전문가들과

탐지견이 있을 텐데 한국팀을 믿지 못해 자국의 탐지팀을

데려온 것 아닌가, 한국을 얼마나 우습게 보는 소치인가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미국이 전두환 씨의 반란을

눈감아 주었다 해서 반미 감정이 팽배할 때였습니다.

 

그날 오후 그 얘기를 기사로 쓰고 기자실의 동료 기자들에게도

그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가능한 한 많은 언론이 보도하도록 해서

미국에게 한국인의 자존심이 살아있음을 보이고 싶었나 봅니다.

 

저를 비롯한 조간 기자들이 쓴 기사는 다음날 아침 신문에 실렸습니다.

제가 그 얘기를 동료들에게 해준 시각엔 이미 석간 1, 2판 마감이 끝난 후이니

석간의 경우에도 다음날에 실리는 게 순리였습니다.

 

그러나 석간 기자 한 사람이 자신이 특종을 한 것처럼 부장에게 얘기해

무리해서 석간 3판에 실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다른 석간 기자들이

각기 부장에게 혼이 난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 약삭빠른 사람 (혹은 거짓말쟁이)은

그때부터 저와 다른 기자들을 슬금슬금 피해 다니는 것 같았는데,

나중에 그 신문의 편집국장까지 역임했으니 그렇게 살아야 출세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 그 기사를 쓸 때는 잘 몰랐지만, 슐츠 장관은 냉전 종식에 기여한

훌륭한 외교관이었다고 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아래에

그의 타계 기사를 옮겨둡니다. 

 

‘냉전종식 설계자’ 조지 슐츠 전 美국무장관 타계…향년 101세

미국과 옛 소련의 핵무기 감축 조약을 주도해 냉전 종식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받는 조지 슐츠 전 미국 국무장관이 6일(현지 시간) 타계했다. 향년 101세.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시절인 1982년 7월~1989년 1월 국무장관을 지낸 그는 1987년 레이건 미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중거리핵전력조약(INF)’을 체결할 때 실무를 담당했다. 중단거리 미사일의 생산 및 배치를 전면 금지한 이 조약은 양국의 군비경쟁을 끝낸 합의로 꼽힌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성명을 통해 “그의 비전과 헌신으로 미국이 가장 위험했던 시기를 지나 냉전 종식의 길을 열 수 있었다. 전 대통령들처럼 그의 도움을 구할 수 없어 안타깝다”고 애도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모든 후임 국무장관이 그를 추종했다. 국무부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인물로 미 외교관계를 강화하고 이익을 증진시켰다”고 가세했다.

슐츠 전 장관은 1920년 뉴욕에서 독일계 이민자 후손으로 태어났다. 2차 세계대전 때 미 해군으로 복무했고 프린스턴대를 거쳐 매사추세츠 공대(MIT)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땄다. MIT와 시카고대 등에서 교수를 지냈고 1969년 리처드 닉슨 정권의 노동장관으로 발탁돼 공직에 입문했다. 이후 백악관 예산관리국장, 재무장관 등을 거쳐 국무장관에 올랐다. 

그는 퇴임 후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 특별연구원 등을 지내며 최근까지 저술 활동을 했다. 지난해 11월 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바뀐 세계 역사를 서술한 ‘역사의 결정요소’란 책을 공동 저술했다. 100세 생일을 맞은 한 달 후에는 워싱턴포스트(WP) 기고문을 통해 “100세가 되면서 많은 걸 배웠다. 특히 신뢰가 최고의 가치임을 알았다”고 강조했다.

  

https://www.donga.com/news/Inter/article/all/20210208/105338190/1

아,슐츠 정관께선 펑화주의자셨군요
세계경찰을 자부한 미국이 지금은 많이 노쇠했고 국력도 약해지고 있어 격세지감입니다
지구상에 영원한 제국은 없으니 순리지만 힘을 빼고 합리적으로 마무리하는 지혜를 발휘했음 좋겠습니다.
베트남에선 종전선언 전에 평화협정부터 맺어놓고, 대한민국에선 정전협정부터 맺어서 68년째 이어오고 있으니 공정한 경찰국가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발 추한 모습으로 물러나지 말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소임을 마치길 기대합니다!

 
 
 

동행

dante 2021. 2. 6. 12:39

입춘인 3일 밤 옥상에서 펑펑 내리는 눈을 맞으며

눈사람을 만들어 집으로 안고 왔습니다.

 

눈사람을 만들며 눈사람의 생애가 사람의 생애와

다르지 않구나 생각했습니다. 처음엔 잘 뭉쳐지지 않았지만

계속 만지니 쉽게 부서지지 않는 작은 덩어리가 되었고,

일단 덩어리가 되니 그 다음에 키우기는 별로 어렵지 않았습니다.

 

베란다의 둥근 화분 받침을 기단 삼아 눈사람을 앉히고

활짝 피었다 시든 후 돌돌 말려 떨어진 덴마크 무궁화 꽃잎으로

눈썹을 만들고, 조그만 돌로 눈을, 귤 껍질로 코를 만들었습니다.

눈사람은 나면서부터 묵언 중이니 입은 필요할 것 같지 않았는데

코 아래 자연스레 주름이 생겨 입처럼 보였습니다.

 

그렇게 계속 제라늄 옆에서 천리향 향기를 맡을 것 같더니

어느 순간 눈사람이 앉은 자리에 그대로 누웠습니다.

눈, 코, 눈썹 모두 떨어진 얼굴에서 입만 슬며시 웃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눈사람이 누웠던 자리엔 한 줌 흙만

남아 있었습니다. 눈사람이 사라진 자리엔 눈물이 남으리라 생각했는데

흙이라니! 그러다 문득 깨달았습니다. 

아, 사람이든 눈사람이든 만물의 끝은 흙이로구나!

같은 끝, 좋은 끝이구나. 

세익스피어의 희곡 제목처럼 '끝이 좋으니 다 좋구나!'  

이러시니 영낙없는 시인이십니다~~~!
눈 사람이 녹았는데 이리 촌철 시와 철학을 탄생시키섰으니~~^^

 
 
 

동행

dante 2021. 2. 3. 22:38

펑펑 내리는 눈을 맞으며 눈사람을 만들어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문득 윤동주의 시 구절이 떠오릅니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