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칼럼

dante 2009. 10. 31. 10:21

최진실씨가 몸을 버린 지 2주가 되었지만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49재전이라 영혼이 이곳에 머물고 있어서일까요? ‘국민요정’ 생각을 하니 ‘국민엠씨’ 유재석씨가 떠오릅니다. 1990년대 연예계를 대표한 배우 최진실씨와 2000년대 후반 텔레비전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연예인 유재석씨가 나눠 가진 ‘국민’이라는 접두어 때문이겠지요. 지난 주 한국방송이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유재석씨는 현재 예능 프로그램 회당 최고의 몸값인 900만원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가 일면식도 없는 유재석씨에게 글을 쓰게 된 건 몸값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최고 몸값으로도 해소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을 위로하고 싶어서입니다. 최진실씨는 수많은 사람을 충격에 빠뜨렸지만 화면을 통해 알던 사람들이 느끼는 슬픔과 유재석씨가 느끼는 슬픔은 비교할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긴 무명시절 자신의 재능을 눈여겨보고 방송국 프로듀서에게 추천해준 은인을 잃은 상실감. 대부분의 사람들이 올라가보지 못한 ‘별’의 자리에 오른 동료로서의 동질감.

 

-슬픔이라는 거울-

 

‘국민요정’을 잊지 못하는 대중은 핏발선 눈으로 그녀가 떠난 이유를 찾고 있습니다. 나쁜 일이 일어날 때 가장 하기 쉬운 건 희생양을 찾는 일. 최진실씨에 대해 나쁜 소문을 퍼뜨린 ‘살인마’ 백모씨에 관한 정보가 인터넷에 떠돌고 ‘평생 저주’를 다짐하는 댓글이 넘쳐납니다. 그러나 온갖 역경에서도 밝은 미소를 잃지 않던 최진실씨에게 그런 식의 추모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외침과 손가락질을 멈추고 그녀의 죽음을 거울삼아 각자의 지금을 비춰보는 것, 그것이 그녀를 기리는 옳은 방법일 겁니다.

 

타고난 외모와 재능이 있어야 들어설 수 있었던 연예계가 성형외과의 도움과 훈련으로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영토가 되면서, 먼 곳의 사랑이었던 ‘별’은 누구나 될 수 있는 ‘우리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생후 2, 3년 된 아기들이 연예인의 몸짓과 말투를 흉내 내어 박수를 받고, 자녀를 ‘별’로 만들려는 엄마들 덕에 연기학원은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습니다.

 

나라는 유례없는 연예공화국이 되었지만, 카리스마와 신비를 먹고 살던 연예인들은 만인의 노리개로 전락했습니다. 연예인들의 인간적이다 못해 어리석은 면을 부각시키는 프로그램이 대세를 이루면서 유재석씨는 그런 프로그램이 가장 선호하는 진행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최고라는 명예의 뒷면엔 늘 책임이라는 빚이 따라옵니다. 민주공화국 대통령의 책임이 국민을 편안케 하며 나라의 미래를 준비하는 거라면, 연예공화국 대통령의 책임은 국민이 즐거운 오늘을 통해 보람찬 내일을 준비하도록 돕는 일입니다.

 

-연예공화국 대통령-

 

유재석씨! 부디 최진실씨가 남긴 슬픔의 거울을 통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발견하기 바랍니다. 100세의 나이로 타계할 때까지 대중에게 웃음을 주며 자신의 이름 속 ‘희망’을 나눈 봅 호프처럼 살 것인지, 9살에 강간, 14세에 출산 등 숱한 고난을 딛고 텔레비전 역사상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 프로그램의 주인공이 된 오프라 윈프리처럼 살 것인지, 아니면 신혼의 아내와 더불어 한국판 ‘브란젤리나 (브래드 피트와 안젤리나 졸리의 결합을 이르는 말)’를 이룰 것인지...

 

이들은 모두 대중의 사랑을 받았으나 대중의 노리개가 되지 않았으며, 자신보다 불운한 타인을 위해 나누는 삶을 살았거나 살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유재석씨는 이미 소리 없이 나누는 삶을 살고 있다고 하니, 이제 남은 일은 오직 한 가지, 자신과 동료 연예인들을 노리개로 만드는 천박한 말의 난장을 벗어나 방송 문화의 격조를 회복하고, 대중과의 진정한 ‘해피투게더’를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변덕스런 대중이 회당 900만원이라는 몸값에 문득 분노하며 질투와 비난의 화살을 쏘아대기 전에 말입니다.

 
 
 

한국일보 칼럼

dante 2009. 10. 31. 10:18

금융대란 속에서 널뛰기하는 주가와 금값 소식을 읽다가 집을 나섭니다. 뉴스가 없는 곳을 그리며 어찌어찌 가다보니 북촌입니다. 안국동과 삼청동 사이 고즈넉이 들어앉았던 동네의 모습이 예전 같지 않습니다. 문득문득 솟은 현대식 건물들 사이 낮은 기와집들이 초라해 보이고 구불구불 좁게 흐르던 골목이 넓어져 자동차들이 속력을 냅니다.

 

보행자를 위한 길은 없다시피 하지만 모든 길의 주인은 사람 아닌가, 오히려 느릿느릿 걸어봅니다. 정독도서관과 아트 선재센터가 만나는 너른 길에 이르니 커피 향내가 가득합니다. 미국풍 유럽풍 성업 중인 카페들이 경쟁적으로 커피를 볶아대며 행인을 유혹합니다. 여러 십년 동안 즐겨 마시던 커피지만 향기가 너무 짙으니 오히려 마시고 싶은 마음이 달아납니다.

 

카페에 들어가는 대신 도서관 마당의 벤치에 앉습니다. 바랜 노란 색 도서관 건물과 가을빛을 띠기 시작한 나뭇잎들이 이루어내는 평화 속으로 커피 냄새가 진군해옵니다. 오랜 독재 정권이 키워준 획일화에 대한 반감과 의문이 솟구칩니다. 녹차, 국화차, 모과차, 유자차, 그 차들의 향내는 다 어디로 갔을까. 이곳에 일렁이던 오래된 시간과 바람의 향기는?

 

-커피 향기 속 신자유주의-

 

제가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건 1970년대 초입니다. 소위 시카고학파경제학자들 사이에서 신자유주의 이론이 등장하던 시기이지요. 소득 평준화와 완전 고용을 통한 복지국가 실현을 위해 정부가 시장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케인즈 경제학을 부정하며 무한 경쟁을 주창하는 이론입니다.

 

제가 커피에 중독되는 동안 세계는 신자유주의 물결에 젖어들었고, 커피 농업과 거래에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수확이 느리나 자연친화적인 ‘그늘 농법’대신 수확이 빠르고 대량 생산이 가능하나 비료와 살충제에 크게 의존하는 ‘일광 농법’이 확대되었고, 무수한 중간상들의 개입으로 불공정 거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국제 시장에서 커피 값이 얼마나 오르든 생산 농민의 삶이 악화일로를 걷는다는 게 알려지면서 ‘공정 거래’ 커피도 나타났습니다.

 

사람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고 돈이 중심인 자본주의 세계에서 커피의 ‘전락’이 특이할 것은 없습니다. 식량마저 돈벌이의 수단이 된 오늘이니까요. 식량 가격 폭등으로 금년 말쯤엔 10억 명의 세계인이 굶주림으로 고통 받게 되리라는 게 유엔식량농업기구의 얘기입니다. 식량 생산을 2배로 늘리고 기아를 퇴치하기 위해선 매년 300억 달러의 돈이 필요하지만, 금융 위기 속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쓰는 돈을 제일 먼저 줄일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합니다.

 

-인본(人本)은 좌파?-

 

금융은 한 마디로 돈놀이입니다. 사람에게 필요한 걸 만들어 돈을 버는 대신 돈을 이리저리 돌려 이익을 챙기는 것이지요.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금융이 전례 없는 위기에 처했으니 그 꽃의 수명이 다한 건 아닌지, 정말 꽃은 꽃인지 의심해야 할 때인지 모릅니다. 신자유주의를 강매하다시피 하던 미국 정부가 시장 개입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으니 이참에 세상의 운행 방향이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돈이 근본(資本)’인 세상에서 ‘사람이 근본(人本)’인 세상으로요. 네? 자본주의의 종말을 꿈꾸면 좌파라고요? 부자의 손해보다 가난한 사람의 배고픔을 먼저 생각하는 게 좌파라면 좌파가 되는 게 옳겠지요.

 

나뭇잎 사이로 바람은 불어도 커피 냄새는 사라질 줄 모릅니다. 잘 사는 나라에서 1 파운드(약 373 그램)당 9달러에 팔리는 과테말라 커피 원두, 그것을 생산하는 농부가 받는 돈은 50센트라고 합니다. 머리가 지근지근 아파 옵니다. 다시 사람이 주인인 곳을 찾아 걸음을 옮겨야겠습니다. 어쩌면 오늘 밤 장대비가 쏟아져 저 횡포한 냄새를 지워줄지 모릅니다. 우주는 균형을 지향한다는 그 말을 믿고 싶습니다.

 
 
 

한국일보 칼럼

dante 2009. 10. 31. 10:14

대학이 개강을 하니 동네가 살아납니다. 중년의 조바심을 아랑곳 않고 천천히 흐르던 젊은 인파가 아예 서버립니다. 유명한 프랜차이즈 도넛 가게가 ‘그랜드 오프닝’을 하고 있습니다. 오색 풍선이 재색 보도에 색을 입히고, 주홍과 빨강으로 장식한 가게 안에도 웃는 얼굴이 가득합니다. 이 가게가 누구의 무덤 위에 세워졌는지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3년 전 겨울, 마음이 새 동네에 정붙이지 못할 때면 언제나 이리로 발을 옮기곤 했습니다. 건물마다 1개에서 4개에 이르는 분식집들이 텅 빈 채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고 있어 지나치기 괴로웠지만, 이곳에 이르면 오래 살던 동네에 온 듯 마음이 문득 편안했습니다.

 

한참 닦지 않아 선팅을 한 것처럼 보이는 유리창, 책을 들여다보기엔 너무 어두운 조명,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처세술 책들과 약간의 문방구류, 펼친 노트만한 텔레비전에 눈을 고정하고 앉아 있는 주인. 그래도 책방은 책방이라 먼지 쌓인 책꽂이에서 책을 꺼내다보면 가슴에 알 수 없는 기쁨이 솟고, <푸슈킨 비밀 일기>의 몇 구절이 떠올라 혼자 웃기도 했습니다.

 

“책장을 여는 건 여자의 다리를 벌리는 것과 같다. 지식이 내 눈 앞에 드러난다는 점에서 그렇다. 모든 책들은 각각 제 나름의 냄새를 지니고 있다. 책을 하나 열고 숨을 들이쉬면 잉크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데, 책마다 그 냄새가 다르다... 아무리 바보스러운 책이라도 처음 그 책을 여는 순간엔 내게 기쁨을 준다.” 평생 뭇 여성을 사랑하다 연적과의 결투에서 얻은 상처로 사망한 푸슈킨다운 비유입니다.

 

-- 문 닫는 가게들 --

 

우리 동네에서 사라진 건 그 서점만이 아닙니다. 김밥과 떡볶이에서 해장국까지 수십 가지 음식을 팔던 꼬마 식당들, 치킨 집, 생맥주집, 아이 옷집, 어른 옷집, 비디오와 책 대여점, 헤어숍, 가방 가게, 꽃집, 목욕탕까지, 기억조차 어려울 정도로 많은 집들이 사라졌습니다.

 

경제전문가들은 나라가 잘 살게 되면 자영업자의 수가 줄어든다고 합니다. 1인당 GDP가 1만 달러 이하일 때는 자영업자의 비율이 20 퍼센트가 넘지만, GDP가 2만 달러쯤 되면 20 퍼센트 이하로 떨어지는 게 일반적이라는 겁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엔 GDP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자영업자의 비율이 떨어지지 않고 있지만 결국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문제는 가게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잘 모르고 정부나 언론도 열심히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특수법인으로 설립된 소상공인지원센터가 있어 자영업컨설팅을 해준다고 하지만 예산 때문에 도움 받을 사람의 수를 제한합니다. 홈페이지에는, 올해 3월부터 “예산 소진시”까지 자영업컨설팅 신청을 받는다는 소식 몇 줄 건너, 7월 3일 18시 현재 신청건수가 2008년도 정부지원 예산범위를 초과하여 신청을 마감한다고 쓰여 있습니다.

 

정부의 기능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 제일 중요한 건 개인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을 일깨우는 겁니다. 무수한 분식집들을 보고도 또 하나를 시작하려는 사람에게 그 사실을 상기시키고, 이 나라 자영업의 어두운 미래를 경고하며 맞춤한 중소기업에 취업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 그것이 경제를 살리겠다는 약속으로 당선된 대통령의 정부가 해야 할 일입니다.

 

자영업의 앞길이 아무리 험해도 꼭 그 길을 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명지대 앞으로 오십시오. 분식집이나 가방 가게 말고 책방이나 북 카페를 하십시오. 반경 몇 킬로 안에 서점다운 서점 하나 없고 북 카페도 하나 없으니 분명히 잘 될 겁니다. 주인이 텔레비전 대신 책을 보고, 가끔 유리창도 닦고 하면 말입니다. 겨울 방학쯤이면 저 도넛 가게 때문에 시름시름하다 문 닫는 집이 서넛은 나올 테니 그 때 오십시오. 흘러넘치는 음식의 거리에서 오히려 허기진 영혼을 위한 집을 세워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