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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털과개털 2020. 10. 19. 20:14

<남원윤씨 윤돈 가계표>

파란색 인물은 난중일기와 장계문에 등장하는,이순신과 함께하신 분들입니다.

빨간색 인물은 중요인물입니다.

 

동복오씨 오억령과 오백령 형제는 남원윤씨 윤돈과 혼반이 있습니다.

윤돈의 행장은 성호 이익이 썼습니다. 여기에는 오백령의 아들인 오자가 오굉(吳竤)으로 되어있습니다. ->성호전집 66권 죽창 윤돈 행장

윤돈(尹暾),文

이충무공 통제사 종사관

;흥의수(興義守 )이의린(李義麟)

;흥의수(興義守 )이수기(李壽麒)

外祖:우언겸(禹彦謙)

 

 

윤형준(尹衡俊)

;정천경(鄭天卿),진주정씨

;정인덕(鄭麟德)

;윤벌(尹橃)

오자(吳玆)

동복오씨

父;오백령(吳百齡)

오정(吳靖),

父;오억령(吳億齡),동복오씨

;오정규(吳挺奎)

;이여황(李如璜) ,監司

廣州人

祖;이덕형(李德馨),領議政

外祖;우준민(禹俊民)

윤선도(尹善道) 號;고산(孤山)

;윤유기(尹唯幾),

生父;윤유심(尹惟深)

윤인미(尹仁美)

윤의미(尹義美)

윤예미(尹禮美)

심광면(沈光沔)

항상 감사드립니다
오억령의 1자 오익, 2자 오정, 3자 오전 이십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늘 처음처럼 열심히 활동하는 모습
보기 좋습니다.

 
 
 

이순신과 함께한 사람들

범털과개털 2020. 10. 18. 20:20

권율 장군과 이치대첩비,금곡사 오류 -변국간(卞國幹) 오류

 

권율 장군의 이치대첩비를 각 문중에서 많이 인용한다.특히 임진왜란사와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등을 제대로 분석안하고 이상한 연구자들도 그냥 쉽게 인용하기도 한다.

 

그런데 오류가 있는 것은 잘 모른다.

 

예를 들어서 아래 변국간을 보자.변국간은 임진왜란 전에 전라좌수사로 있던중 진중에서 죽었다.그러니까 임진왜란때 권율과 관련된 공적이나 사실이 전혀 없는 것이다.그런데 금곡사에 배향되어있다...참 웃기는 일이다.

 

금곡사에 배향된 인물을 선별해야한다.안그러면 관련없는 자까지 배향된 의미나 가치가 없는 곳이 된다.

 

링컨대통령과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인 롬맬과 아이젠하워 장군,엘리자베스 여왕까지 배향하면 누가 뺨을 때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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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곡사 참모제공 사실

권율 장군과 이치대첩비 그리고 변씨

 

충장사(일명 금곡사)에 배향된 변씨들

<서벽>

卞德璜 草溪人

卞弘達 草溪人

卞弘亮 草溪人

卞弘洲 草溪人

<동벽>

卞國幹 草溪人

⑥卞弘建 草溪人

총 6명

 

 

<원문>

元帥權公梨峙大捷碑

嗚呼歷選徃古以文武全才克贊中興大業赫赫然爲萬邦之憲者如周之方召唐之郭李是已若我穆陵之世都元帥忠莊權公庶幾其人而豊功巍烈昭著耳目雖興儓婦孺至于今稱頌無窮焉曷不休哉公先有梨峙之捷後奏幸州之蹟而幸州則勒碑頌功獨於梨峙闕然公之後孫昌燮盡然興歎將謀建立遣其從子在箕請不侫記之謹按公諱慄字彦愼安東人領議政轍之子也公身頎八尺容貌魁偉世篤忠良經術是崇晩登朝籍人皆以黼黻弘猷期之萬曆壬辰島夷猖獗乘我不戒長驅入來擧國劻勷上曰權慄才可試之拜光州牧使方朝臣視兩南爲死地公獨慷慨受命單騎甫及州京城已不守車駕西巡公痛哭曰此非臣子坐待國亡日也遂傳檄榜郡得兵千五百進至全州時敵踰嶺阨以窺全湖重峰先生與公約討錦山之敵公以兵未鍊精移書改期而趙先生已抵錦境敗績殉義公聞之謂姪慶升曰賊必乘勝由梨峙向犯湖南矣爾領一枝軍踰熊峙伏於永貞谷斷其歸路又以同福縣監黃進爲先鋒曰梨峙固賊我必爭之地若不先據難可圖也使趨進而公亦與參謀諸公繼之遇賊於嶺上奮身直前曰今日之戰有進無退有死無生鏖戰良久黃公中丸而退一軍爲氣沮公挺劒大呼先冒白刄戰士賈勇無不一當百走阪之勢建甁之形崩騰若風雨奔北如羊豕驅之於三十里長谷而數萬之賊擧皆殲殄敵將隆景收拾散卒走貞谷又爲伏兵所厮殺於是公全勝而歸點考士卒死者十一人欲索尸夜出軍門檢得將還之際賊衆猝圍公用劍自衛銃丸莫入劍光閃閃便成一大火塊銀缸漸漸離地盤旋於空中敵大駭曰此神也各自逃竄公設壇祭戰亡將卒使鄭公忠信奏捷于行在所 上大悅以公爲羅州牧使諸將授職有差尋陞全羅監司九月勤王至水原禿城出奇兵以挫敵鋒翌年二月移軍於幸州山城大戰又捷以資恢復之績天子聞而喜之差鴻爐寺官宣諭東征將士以謂權家軍與他軍自別儘眞將也經略宋應昌移諮本國另行將賞曰權慄板蕩忠臣中興名將倭酋亦問其起居此可見公之威名慴伏華夷也宣廟奬諭前後備至至曰忠勞茂著勇略超世又曰非卿國家何以得至今日噫公之勳庸雖一國之人家尸而戶祝不爲過矣况此梨峙者旌纛之所臨喑啞之所被其凛然之氣如秋霜白日久而不滅則豈使公效忠之地忍廢於荒蕪之中徒爲行路之所指點也哉山高水淸豊碑載屹斯司以勸忠義於千百世之下其將有來讀而墮淚者矣

開國四千三百十八年丙戌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兼成均館祭酒侍講院贊善經筵官書筵官德殷宋秉璿撰

 

主壁

權慄 安東人

 

西壁

黃進 長水人 權升慶 安東人 魯認 咸平人 任啓英 長興人

金克秋 金海人 柳思敬 文化人 魯鴻 咸平人 梁應源 南原人

宣居怡 寶城人 文緯世 南平人 成允文 昌寧人 蘇櫅濟 晉州人

沈敏謙 靑松人 金彦恭 金寧人 安信孫 順興人 申汝極 高靈人

金彭壽 慶州人 崔希說 隋城人 李大胤 全州人 金慄 靈光人

李仁傑 慶州人 白民秀 修院人 鄭思竣 慶州人 李光先 咸平人

蔡禹齡 平康人 朴應賢 順天人 丁傑 靈光人 張以慶 興德人

權悏 安東人 朴興男 密陽人 柳忠恕 高興人 柳淳 高興人

朴光年 密陽人 金萬齡 安山人 金斗男 金海人 金曄 義城人

金晏 義城人 鄭水仁 河東人 朴仁卿 咸陽人 李曄 全州人

朴天鵬 密陽人 鄭思鈜 慶州人 金光鋏 金寧인 金鵬萬 金海人

杜起文 杜陵人 文弘凱 南平人 梁載賢 濟州人 文紀房 南平人

卞德璜 草溪人 丁淵 靈光人 卞弘達 草溪人 卞弘亮 草溪人

梁彭 濟州人 卞弘洲 草溪人 安世琛 順興人 宋世潑 礪山人

朴希壽 忠州人 李世環 光山人 朴大壽 忠州人 金敬立 金海人

權萊 安東人 金璡 慶州人 鄭賢輔 晋州人 蔡宗海 平康人

田鳳 潭陽人 金彦慶 金海人 白光彦 水原人 孫從傑 密陽人

李潛 全州人 鄭繪 河東人 柳濂 文化人 高世忠 長澤人

 

 

東壁

鄭忠信 錦城人 黃璞 紆州人 金齊閔 義城人 高成厚 長興人

魏大器 長興人 金憶熙 金海人 金忠善 金海人 邊以中 黃州人

金益福 扶安人 羅德明 羅州人 朴繼成 竹山人 洪千璟 豐山人

申汝樑 高靈人 鄭見龍 晋州人 申汝楨 高靈人 金益壽 慶州人

尹趌 坡平人 宋大立 礪山人 金復興 順天人 金汝健 靈光人

鄭弘壽 河東人 鄭賓 慶州人 吳宥 同福人 鄭凰壽 羅州人

朴長卿 咸陽人 周封 鐵原人 金夢龍 淸道人 蘇滉 晋州人

崔永吉 全州人 安徵 順興人 金定 慶州人 鄭思悌 晋州人

邊士貞 長淵人 金昕 義城人 卞國幹 草溪人 卞弘建 草溪人

吳繼壽 羅州人 梁大鏷 濟州人 姜克孝 晋州人 金漢 金海人

池繼漼 忠州人 金汝璹 靈光人 白應希 水原人 崔彦浚 全州人

李忠立 咸平人 李完根 光山人 金致謜 光山人 崔虎 耽津人

孔時憶 曲阜人 宋商輔 礪山人 趙汝忠 平壤人 咸德立 江陵人

李楠 原州人 李永福 全州人 羅德元 羅州人 朴宗挺 咸陽人

李忠良 全州人 朴敬立 順天人 尹孝敏 坡平人 蔡閏栢 平康人

安得 順興人 吳景舜 同福人 吳竹齡 同福人

 

追記

於戱故都元帥權忠莊公與參謀諸公梨峙大捷碑我淵翁秉筆也過者必式永有辭於天下後世矣卵育莫禦島夷再狺執國命奪人紀之變百浮於壬丁致天厭而作窮寇肆毒行悖甚至於碎諸捷碑而極矣然理無終夜竟授首而復韓祚百廢歸整碑之重修亦所汲汲而慕夏堂肖孫金雅日淳殫竭數年與守義堂後孫杜炳頊推中齋柳公後孫永求望庵後孫邊東烈及錦山諸章甫謀同義而新之 不惟行路改觀亦使賣國者鬼自知其無所禱矣其於彰前徵後功豈云少噫碑甁於癸卯而改於周甲亦異事也此或天使然歟略書顚末以副金雅諸賢之請歲癸卯上元蔚山金載石謹撰

礪山宋成鏞謹書

 

<번역>

도원수권공이치대첩비(都元帥權公梨峙大捷碑)

아아! 역대로 지나간 옛날을 보니 문무(文武)의 재주를 지니고 중흥의 대업을 능히 도와 빛나게 만방(萬邦)의 모범이 된 사람은 예컨대 주(周)나라의 방숙(方叔)과 소호(召虎), 당나라의 곽자의(郭子儀)와 이광필(李光弼)이 바로 그들이다. 우리 선조대왕 때의 경우 도원수 충장공(忠莊公) 권공이 거의 그러한 사람에 가까우니 크고 높은 공렬이 사람들의 눈과 귀에 환하게 드러나 비록 하인이나 부녀자, 어린아이일지라도 지금까지 칭송이 끝이 없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 공은 먼저 이치(梨峙)의 승리를 거두고 뒤에 행주(幸州)의 공적을 이루었는데 행주에는 비석을 새겨 고적을 칭송하고 있지만 유독 이치에는 갖춰지지 못하였다. 공의 후손 창섭(昌燮)이 분연히 탄식하며 장차 비 세우기를 계획하고 그 조카 재기(在箕)를 보내 나에게 기록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삼가 살피니 공의 이름은 율(慄), 자(字)는 언신(彦愼)이고 본관은 안동으로 영의정 철(轍)의 아들이다. 공은 키가 헌칠하여 팔 척이고 용모가 장대하였다. 대대로 독실하게 충성스럽고 어질었으며 유학을 숭상하여 늦게 조정의 관직에 올랐으나 사람들이 모두 큰 계책을 보좌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만력 임진년(선조 25, 1592년)에 섬나라 오랑캐가 기승을 부려 우리가 경계하지 않은 것을 틈타 승승장구하며 들어오니 온 나라가 급하게 허둥대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권율의 재주를 시험해 볼만하다.”라고 하고 광주목사(光州牧使)에 임명하였다. 당시 조정의 신하들은 영남과 호남을 사지(死地)로 보았는데 공은 유독 강개하여 명을 받자 단기(單騎)로 내려갔다. 겨우 광주에 이르렀는데 서울은 이미 지킬 수가 없어 임금의 행차가 서쪽으로 피난을 가니 공은 통곡하며 “신하된 자가 앉아서 나라가 망하는 날을 기다릴 수는 없다.”라고 말하고는 마침내 이웃 고을에 격문을 전하여 병사 1,500명을 얻고 나아가 전주(全州)에 이르렀다. 이때 적병은 험준한 고개를 넘어 전주와 호남을 노리고 있었다. 중봉선생(重峰先生 : 조헌(趙憲))은 공과 함께 금산(錦山)의 적을 토벌하기로 약속하였는데 공은 병사가 훈련이 잘 되지 않았으므로 기일을 바꾸자고 편지를 보냈지만 조 선생은 이미 금산에 도착하여 적에게 패배하고 의롭게 전사하였다.

공은 이 소식을 듣고 조카인 경승(慶升)에게 이르기를 “적들은 반드시 승세를 타고 이치(梨峙)를 경유하여 호남을 침범할 것이니 너는 부대 하나를 이끌고 웅치(熊峙)를 넘어 영정곡(永貞谷)에 매복하였다가 그들이 돌아가는 길을 끊도록 하라.” 말하고 또 동복(同福)현감 황진(黃進)을 선봉으로 삼고 “이치는 바로 적과 우리가 반드시 전투할 장소이니 만일 먼저 점거하지 못한다면 일을 도모하기 어렵다.”라 말하며 달려 나가게 하고는 공도 또한 참모, 여러 공들과 함께 뒤따랐다.

적과 고갯마루에서 만나서 몸을 떨쳐 앞으로 나가며 “오늘의 전투는 나아감만 있고 물러남은 없으며 죽음이 있고 사는 것은 없다.”라고 말하였다. 격렬한 전투가 얼마 지나자 황공이 총알을 맞아 퇴각을 하니 군대의 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공은 칼을 빼고 큰 소리를 외치며 앞장서서 칼날을 무릅쓰니 군사들이 용기를 발휘하여 일당백이 아닌 사람이 없었다. 비탈길을 달려 내려가는 기세와 물을 쏟아 붓는 형세에 무너지는 것이 마치 비바람 같고 패배하여 도망하는 것은 양이나 돼지떼 같았다. 삼십리의 긴 골짜기를 추격하니 수만의 적들이 거의 다 죽고 적장인 융경(隆景 : 小早川隆景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이 남은 군졸을 모아서 정곡(貞谷)으로 도망했는데 또 다시 복병에 의해 죽음을 당하였다. 이에 공은 전승을 거두고 돌아와서 병졸을 점검하니 죽은 사람이 11명이었다.

시체를 수색하고자 밤에 군문을 나가 찾아서 장차 돌아올 때 제 적의 무리가 갑자기 포위하니 공은 칼을 휘둘러 막는데 총알이 뚫고 들어가지 못하고 검광이 번쩍이니 곧 하나의 큰 불덩어리가 되고 은(銀) 등잔불이 점점 땅을 떠나 공중에서 빙빙 돌아다녔다. 적들은 크게 놀라 “이것은 귀신이다.”라 말하고 각기 도망쳐 버렸다. 공은 제단을 쌓고 전사한 장수와 병졸을 제사지내고는 정충신(鄭忠信)으로 하여금 행재소(行在所 : 임금이 피난하여 임시로 머물러 있는 곳)에 승리를 아뢰도록 하였다. 임금이 크게 기뻐하며 공을 나주목사(羅州牧使)로 삼고 여러 장수들에게 차등 있게 직책을 내렸다.

얼마 있다가 전라감사로 승진하였고 9월에 근왕병(勤王兵)이 수원의 독성(禿城)에 이르러서 기병(奇兵 : 기습병)을 내어 적의 예봉을 꺾었다. 다음해 이월에 군대를 행주산성으로 옮겨 크게 싸워 승리를 거두니 국가를 회복시킬 수 있는 기틀이 되었다. 천자가 듣고 기뻐하며 홍려시(鴻臚寺 : 외국에 대한 사무나 조공을 담당하는 관청)의 관원을 파견하여 선유(宣諭 : 황제의 뜻을 선포하고 효유하는 것)하였고 우리나라에 온 명나라 장병들도 권율의 군대는 다른 군대와 차이가 있어 모두 진정한 장수라고 여겼다.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도 본국에 자문(諮問)을 보내 별도로 상을 주라고 하며 “권율은 나라가 어지러울 때의 충신이요, 중흥의 명장이다.”라고 말하였고 왜(倭)의 우두머리도 또한 그 안부를 물었으니 공의 위명이 중국과 오랑캐를 두렵게 하고 굴복시켰음을 알 수 있다.

선조임금이 장려하신 것도 전후에 지극히 갖추어져 “ 충성과 공로가 크게 드러났고 용맹과 기략은 세상에 뛰어나다.” 라고 말하시기에 이르렀고 또 “경이 아니었다면 국가가 어찌 오늘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아! 공의 공훈은 비록 온 나라 안의 집이 신주를 모시고 집집마다 축원하더라고 과하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이곳 이치(梨峙)는 공의 정독(旌纛 : 깃발)이 임한 곳이고 암아(喑啞 : 호령)가 닿은 곳이니 그 위엄 있는 기운이 마치 가을 서리, 밝은 태양과도 같아 오래 되어도 없어지지 않을 것인즉 어찌 공이 충성을 바친 땅을 차마 잡초가 우거진 가운데 폐해져서 한낱 길을 지나는 사람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이 되게 하겠는가?

산 높고 물 맑은 곳, 큰 비석 이에 우뚝하여 천백세후에도 충성과 의리를 권장하노니 장차 오는 사람들은 읽고서 눈물 흘릴 것이로다. 개국(開國) 4218년(고종 23, 1886년) 병술년

가선대부 대사헌 겸 성균관제주 시강원찬선 경연관 서연관 덕은(德殷) 송병선(宋秉璿)은 글을 짓다.

<도원수 이치대첩비는 전혜경 번역을 그대로 따름>

 

주벽

권율 안동인

 

서벽

황진 장수인 권승경 안동인 노인 함평인 임계영 장흥인

김극추 김해인 유사경 문화인 노홍 함평인 양응원 남원인

선거이 보성인 문위세 남평인 성윤문 창녕인 소제 진주인

심민겸 청송인 김언공 금녕인 안신손 순흥인 신여극 고령인

김팽수 경주인 최희열 수성인 이대윤 전주인 김율 영광인

이인걸 경주인 백민수 수원인 정사준 경주인 이광선 함평인

채우령 평강인 박응현 순천인 정걸 영광인 장이경 흥덕인

권협 안동인 박흥남 밀양인 유충서 고흥인 유순 고흥인

박광년 밀양인 김만령 안산인 김두남 김해인 김엽 의성인

김안 의성인 정수인 하동인 박인경 함양인 이엽 전주인

박천붕 밀양인 정사횡 경주인 김광협 금녕인 김붕만 김해인

두기문 두릉인 문홍개 남평인 양재현 제주인 문기방 남평인

변덕황 초계인 정연 영광인 변홍달 초계인 변홍량 초계인

양팽 제주인 변홍주 초계인 안세침 순흥인 송세발 여산인

박희수 충주인 이세환 광산인 박대수 충주인 김경립 김해인

권래 안동인 김진 경주인 정현보 진주인 채종해 평강인

전봉 담양인 김언경 김해인 백광언 수원인 손종걸 밀양인

이잠 전주인 정회 하동인 유염 문화인 고세충 장택인

 

동벽

정충신 금성인 황박 우주인 김제민 의성인 고성후 장흥인

위대기 장흥인 김억희 김해인 김충선 김해인 변이중 황주인

김익복 부안인 라덕명 나주인 박계성 죽산인 홍천경 풍산인

신여량 고령인 정견룡 진주인 신여정 고령인 김익수 경주인

윤길 파평인 송대립 여산인 김복흥 순천인 김여건 영광인

정홍수 하동인 정빈 경주인 오유 동복인 정황수 나주인

박장경 함양인 주봉 철원인 김몽룡 청도인 소황 진주인

최영길 전주인 안징 순흥인 김정 경주인 정사제 진주인

변사정 장연인 김흔 의성인 변국간 초계인 변홍건 초계인

오계수 나주인 양대박 제주인 강극효 진주인 김한 김해인

지계최 충주인 김여숙 영광인 백응희 수원인 최언준 전주인

이충립 함평인 이완근 광산인 김치원 광산인 최호 탐진인

공시억 곡부인 송상보 여산인 조여충 평양인 함덕립 강릉인

이남 원주인 이영복 전주인 나덕원 나주인 박종정 함양인

이충량 전주인 박경립 순천인 윤효민 파평인 채윤백 평강인

안득 순흥인 오경순 동복인 오죽령 동복인

 

추기

아 고 도원수 권율 충장공과 참모 제현공 이치대첩비는 우리 연재 송병선이 쓴 것이다. 지나는 사람은 반드시 천하 후세까지 영원한 긍지로 자랑할 것이다. 천지가 지극히 크거늘 사기(邪氣)가 그 사이를 범하여 흉포한 짓을 하고 잔악한 짓을 하는데도 제멋대로 날뛰도록 내버려두니 도이가 다시 나라의 운명을 잡고 으르렁거리고 인륜의 기강을 빼앗는 변을 일으켰다. 백성들은 도탄에 빠짐이 임진왜란이나 정유재란보다 더하여 마침내 하늘이 싫어함을 입을 정도였다. 그리고 몸소 해적의 행동을 자행하고 독행은 강상을 무너뜨리리고 심지어 대첩비까지 부수어 버렸다. 당연한 이치가 끝이 없으니 밤에 목숨을 내놓고 다시 복구 하니 한조백이 버려진 비를 바르게 하여 중수하는데 마음을 썼다. 그리고 모하당 김충선의 후손 김아가 수의당 두정란 후손 두병욱과 추중재 유충서 후손 유영구와 망암 변이중 후손 변동렬 날마다 정성스레 힘을 다하기를 수 년을 했다. 이에 금산의 여러 학덕있는 분들과도 뜻이 하나가 되어다. 마침내 비를 새롭게 세웠는데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보게하는 것뿐만 아니라 나라를 팔아먹은 자들에게 스스로 기도할 바가 없음을 알게하고 싶다. 이치 전투를 증명하고 그 때 인물의 공을 드러냄이 어찌 작은 일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아 비가 계묘년(1903년)에 세워지고 그로부터 60년 뒤인 계묘년(1963년)에 개수되니 이 또한 이상한 일이다. 이것은 혹 하늘이 그렇게 시킨 것은 아닐까? 이에 나는 김아와 제현들의 청에 도움을 받아 전말을 간략히 기록한다. 때는 계묘년(1963년) 정월 울산 김재석이 삼가 찬한다.

여산(礪山) 송성용(宋成鏞)이 삼가 글씨를 쓴다

[출처] 권율 장군과 이치대첩비 그리고 변씨 |작성자 우보

 

 
 
 

임진왜란 자료

범털과개털 2020. 8. 3. 01:24

임진왜란때 호남에서 피난생활하면서 피난일기 '쇄미록'을 남긴 오희문 선생이 있습니다.광해군때 영의정을 지낸 오윤겸의 부친입니다.

쇄미록을 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전남  담양의 옥천사(현재 법운산 법주사)의 '의승장 인준'이란 분이 의승 200여명을 거느리고 장수현에 도착한 장면입니다.쇄미록 전 8권중 1권 258 페이지에 있습니다.

 

이런 의승병,의승군에 관한 내용을 조계사에서 알고 있는지?전남도나 담양군,옥천사에서는 앍 있는지?

검색해보니 잘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담양군과 전라남도는 천년고찰 옥천사를 복원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안내게시판 하나를 멋지게 만들어 놓으면 관광객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줄 것입니다.

 

담양군에서는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분도 학술회의를 하던지 해서 자료를 정리해서 군지에 같이 실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