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를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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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5. 5.

<토지>를 읽었다.

 

도중에 쉬면 완독 하지 못할 거 같아서 매일 계속 읽었더니 3개월이 걸렸다.

여행이 그렇듯 독서도 고강도의 정신적 정서적 육체적 노동이다.

온몸이 하는 그 일에는 불편과 낯섦, 즐거움 등이 골고루 섞여 있다. 

 

독서는 타인의 문법과 사유를 문자로 만나는 경험이어서 나름의 고충이 있다.

<토지>도 방언과 작가 고유의 표현 방식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경상도 방언 대화체가 많은 <토지>는 요즘 글이 아니고 내가 살던 시대가 아니어서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는 상당한 인내를 요구했다.

 

 

사실 그동안 마음의 빚이었다.

유명 외국 소설을 읽을 때마다, 토지가 언급될 때마다 갈등했는데

무엇보다 토지를 읽지 않은 이유는 분량 때문이었다.

스무 권은 쓰는 사람뿐만 아니라 읽는 사람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지금 이 포스트처럼 장황한 말과 글은 언제나 약점이니까.

 

아무튼 나는 토지를 읽었다.

이유야 빤하다.

괴로움보다는 즐거움이 더 컸기 때문이다.

 

 

 

 

 

 

 

 

 

겁간, 외부요인에 의해 급변하는 폐쇄적 세계

 

토지는 닫힌 사회인 농촌 평사리에서 시작한다.

시대 배경은 신분과 직업이 세습되고 서로 다른 계층 간 혼인을 금기로 여긴

폐쇄적 사회인 구한말이다.

 

외골수인 최참판댁 당주 최치수가 외부자에 의해 살해되고 폐쇄적 계층구조의 정점에 자리한

윤씨부인이 하층계급인 평민 김개주에게 겁간을 당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평사리 밖으로 전개된다.

 

 

역사에서 종종 일어나는 모순처럼 견고한 벽에 균열이 생기자 흘러 움직이는 생명력이 탄생한다.

일제강점과 조준구의 출현, 김환의 출생과 변모는 그 변동성의 산물이다.

 

김개주의 겁간이 김환의 출생으로 이어지고 서희에게서 생모를 앗아가지만

동학난 때 최참판가를 지켜주는 결과로 나타나는 모순이 뒤섞인다.

 

이용과 임이네의 순간적 욕정에 의해 태어난 이홍도 인연의 연결성과 삶의 복잡성,

상호의존성이 형상화된 인물이다.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는 사이에 일제 침략이 한반도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친일파와 일본의 자기합리화도 난무한다.

마치 조준구가 자기 탐욕이 아니라 어린 서희를 위해 최참판가 재산을 가로채기라도 한 것처럼.

작가는 그 파렴치한 변명을 여러 번 질타한다.

 

고정적이던 조선 사회와 평사리도 급변하다.

몸에 침입한 균에 대항해 몸이 본능으로 싸우듯 평사리 농민들도 조준구와 일본, 

강요된 다른 층위의 억압과 위계에 나름의 방법으로 저항한다. 

 

 

 

 

 

 

 

 

 

 

 

 

화간, 내부요인에 의한 생존 전략의 변화

 

개방적인 세계는 폐쇄적인 사회보다 불안정한 혼란기를 거치지만 훨씬 풍요로워진다.

평사리와 구한말 한반도도 신분제 등의 고정성에 틈이 생기자 좀더 복합적인 세계로 진화한다.

 

일본은 조선을 병합해 대륙으로 진출하고 친일파는 일본에 2세들을 유학시키며 발빠르게 공생한다.

그 2세들은 교육을 마친 후 귀국해 조선 땅에 일본 문화를 심는 데 앞장선다.

독립투사들은 외부에서 내부의 도움을 받아 활로를 개척한다.

 

외부자인 김환은 금기를 넘어 별당아씨와의 공존을 모색하고

서희와 이용, 정석 등도 수직적 계급 차이가 큰 서로의 도움을 받아 살길을 개척한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생존을 지향하는 생명의 본능은 국가나 민족, 신분 등을 극복하는 민첩성과 강인성을 발휘한다.

 

 

윤씨부인은 겁간을 당했지만, 며느리 별당아씨는 화간을 했다.

 

3·1운동이 보다 젊은 광주학생운동으로 이어지듯 생명의 몸부림이 어느새 능동적으로 진화했다.

살고자 하는 생명의 이기적 몸부림은 과소평가나 과대평가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당연하다.

 

 

 

 

 

 

 

 

 

결혼, 전략적 선택과 이혼 가능성

 

서희의 배우자 선택 기준은 분명하고 단순했다.

자신에 대한 길상의 헌신처럼 반드시 그 자신의 생존에 유리해야 했다.

조준구에 대한 복수처럼 현실적 이해타산이 곧 목적이었는데 친일파와 일본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서희의 조모인 윤씨의 삶이 겁간이라는 치욕적이고 수동적인 방식으로 변했다면

생모인 별당아씨는 화간이라는 보다 자발적인 방식으로 삶을 모색했다.

 

별당아씨의 경우 쌍방간의 합의였지만 불법이었다.

서희는 한 단계 더 나아가 혼인이라는 법적 계약을 선택한다.

 

 

최참판댁 여인 삼대는 겁간과 화간과 결혼이라는 방식으로 타인과 관계한다.

그 경로는 국권 침탈, 친일파와 일본의 동거, 

해방이라는 공통의 목표 실현을 위해 각 계층이 손을 맞잡은 이 땅의 변천사와 유사하다.

 

결혼이나 생명의 진화, 문명의 역사가 그러하듯 

개인의 삶도 모순을 만나 수용과 극복 사이에서 절충점을 찾는 과정이다.

 

작가가 '토지 5부' 결말에서 보여주는 지리산에서의 회합은 각 계층이 참여하고 

그 장소가 지리산이라는 상징성에서, 

불교의 연기설이라는 비유 때문에 화해와 치유를 상징하지만, 

한편으론 길상과 서희의 갈등을 드러내고 이범준이라는 인물을 등장시킴으로써 

모든 결혼에 이혼의 가능성이 내포되듯

이 땅에서의 이데올로기 대립을 암시한다.

 

<토지>는 갈등을 지리산으로 수렴하면서도 <태백산맥> 탄생을 예고한 셈이다.

 

 

 

 

 

 

 

 

 

 

 

나와 무관한 존재는 없다

 

"도대체 왜 그렇게 살았습니까?" 

 

이 질문을 임이네와 귀녀, 김두수와 조준구 등에게 했다면 

틀림없이 자기 안의 타고난 생명력인 포악한 야성을 답으로 내세웠을 것이다.

그들은 시종일관 누군가의 연민을 이용했을 뿐 타자를 연민하지는 않았다.

 

만약 같은 질문을 강쇠와 김환, 공월선과 이용, 한복과 관수, 영산댁 등에게 했다면 

굴욕적 태생이 가져다 준 한이었다고 답했을 것이다.

그들은 연민마저 없다면 인간의 삶이 너무도 비천하다는 사실을 몸으로 알았다.

 

 

혼돈의 시대를 살다간 평사리 사람들의 중심엔 북극성을 중심으로 뭇별들이 돌아가듯 최참판댁이 있었지만,

최서희의 회복과 귀향은 주종 관계였던 길상 뿐만 아니라 도피를 도운 봉순과 월선,

조준구를 상대로 제갈량 같은 활약을 펼친 공노인과 석이 등의 헌신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다.

 

이 땅이 해방된 결정적인 이유도 일본의 패전이었지만 

그 과정엔 수많은 이들의 오랜 헌신이 함께 했다.

 

역사에는 그런 상호의존성과 관계의 다양성이 골고루 펼쳐져 있다. 

 

 

 

 

 

 

 

 

 

 

 

 

'한과 연민의 대속(代贖), 우리 다 서러운 놈들끼리......'

 

토지가 쓰인 시대적 한계는 분명하다.

작가의 일본론과 생명론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대화체로 구성된 시국관, 사상관, 문화관 등은 4부와 5부의 주를 이루지만

소설의 서사성과 읽는 재미를 독자에게서 앗아간다.

 

부록처럼 느껴지는 그 토론은 소설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술자리와 함께

마치 잔소리인 듯 물리고, 작가가 난데없이 무성영화의 변사처럼 소설에 개입할 때는 당혹스러웠다.

긴 집필 기간 변화한 신체적 정신적 상태 때문이라 생각하는데

아마도 작가 또한 수많은 회의와 좌절감을 극복해야 했을 것이다.

 

 

여권과 비행기 티켓 없이도 떠날 수 있는 내밀한 여행이 독서다.

나는 살면서 경험한 많은 장면과 질문과 의문과 모순과 결핍과 약점들을 다시 <토지>에서 만났다.

 

<토지>에는 척박한 터전에서 싹을 틔우며 고난기를 살다간 생명에 대한 애정과 연민,

빼어난 사유가 수두룩하다.

더구나 번역문이 아닌 마음에 착 안겨오는 모국어다.

모국어라는 문화유산을 상속받은 나는 문화의 힘을 신뢰하는 작가와 함께 매우 즐거운 여행을 한 셈이다.

 

 

최참판댁 여인들과 주요 인물들의 삶에는 승패가 없었다.

있는 것이라곤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없는 생명과 인연의 이동, 그 자체뿐. 

지천(支川)을 받아들이고 흘려보내는 것은 섬진강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이 살기 위해 반드시 하는 일이다.

 

어느 곳이든 삶의 터전에는 희망과 함께 갈등과 분열이 움튼다.

 

생명이 가진 본능은 언제나 위험하다.

그 사실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항상 조심하며 서로에 대한 연민을 잃지 않아야 한다.

연민은 최선책이 결코 아니지만 최선책이 아니라 하여 아예 무용하다고 단정할 순 없다.

 

단 한 번만 살아 있는 목숨은 누구나 서럽다.

 

 

 

 

 

 

햇발과 바람이 고른 날 서둘러 밀린 빨래를 했다.

보송보송 잘 마른 빨래를 걷어 차곡차곡 개어놓았다. 후련하다.

 

 

 

- 작가는 1969년에 토지 집필을 시작해 1994년 8월 15일에 탈고했다.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던 작가는 2008년 오늘, 타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