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게 없는 인생을 나는 얼마나 많이 손으로 달아보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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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or 한담

2018. 8. 17.

 

1.

이번 여름은 누구에게나 아마 처음일 것이다.

 

폭염경보는 일 최고기온이 35도 이상인 상태가 2일 이상 지속하면 발효되는데

요새 하도 놀라서인지 이젠 35도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다.

 

 

어젯밤엔 기계 도움 없이 잠을 잤다.

초저녁부터 점점 내려가기 시작한 기온은 자정쯤엔 가을날씨 같은 23도였다.

습도도 50%로 적정했다.

대기 질도 좋았다.

창문을 활짝 열었더니 상큼한 바람이 확 밀고 들어왔다.

애면글면 기다리던 가을 같아 반가웠다.

기분 좋은 심호흡을 하며 사는 재미가 이런 거구나 싶어 온몸 세포를 다 동원하다가

한편으론 좀전의 그 열기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신기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사라지는 인간사의 덧없음 마냥

해가 뜨고 지는 시각은 매일매일 변한다.

 

날씨가 선선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공기를 식혀주는 기계는 무용지물이다.

공기를 걸러주는 공기청정기와 공기와 물을 데우는 보일러가 필요하다.

 

 

 

 

 

 

 

 

 

 

 

 

 

 

<마리 로랑생이 그린 샤넬의 초상화>

 

 

 

 

2.

'괜히 왔다 간다.'

채신머리없는 걸레 스님으로 불린 중광은 살아서 미리 자신의 묘비명을 썼다.

 

널리 알려진 대로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는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다.

 

넘치게 풍요한 세상에 떠도는 언어를 포집해 체에 거르면 마지막에는 어떤 문장이 남을까.

'미운 놈이 아직도 미워요!'는 아닐 것이다.

 

 

 

3.

코코 샤넬은 장식적인 전통 여성복을 거부하고 심플하고 입기 편한 옷을 디자인했다.

그녀와 동갑인 마리 로랑생은 그 단순성마저도 거추장스럽게 여겼을까,

그녀는 샤넬이 전혀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샤넬을 그렸다.

 

진취적이고 당당한 모습을 원한 샤넬의 바람을 마리 로랑생은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모든 날에는 환한 낮과 함께 밤이 있듯이,

아마도 한낱 옷으로는 감출 수 없는 인간의 내면이 빤히 드러난 탓이지 싶다.

 

샤넬은 어느 날 '가슴이 답답하니 문을 열어달라'고 가정부에게 말했다.

그것이 그녀의 마지막이었다.

 

 

 

4.

"무게 없는 인생을 나는 얼마나 자주 손으로 달아보았던가."

 

이 글은 우아한 색채를 사용하며 세상과 끊임없이 화해를 시도한 마리 로랑생이 사랑한 남자 

기욤 아폴리네르의 묘비에 적힌 글이라고 한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이 흐르고 우리 사랑도 흐르는데.....'라는 시구로

보잘것없는 미라보 다리를 사람들 마음에 각인한 그 남자가 맞다.

 

"무게 없는 인생을 나는 얼마나 많이 손으로 달아보았던가."

 

부사 '자주'를 '많이'로 바꿔도 짙은 호소력이 변하진 않는다.

그런데 이 글은 이런저런 매체를 통해 퍼질 뿐,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 건 아니다.

 

 

기온이 좀 낮아지고 바람이 불 뿐인데

신세가 많이 편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