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끓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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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2. 7.






"한밤중에 배가 고파서

국수나 삶으려고 물을 끓인다

끓어오를 일 너무 많아서

끓어오르는 놈만 미친 놈 되는 세상에

열받은 냄비 속 맹물은

끓어도 끓어도 넘치지 않는다 (……)'









과거라는 드넓은 허무와

미래라는 막연한 적막이 만연한 허허벌판에

홀로 우뚝 선 태양이 하릴없이 열을 내기에

지구의 바다와 하늘은 푸르고

달은 또 은은하고

꽃, 풋고추, 상추 자라는 일 반갑다.


사는 일은 열 내지 않으면 못 살아.

더운 열기 화악 불어대는 오븐이 없다면 아무리 반죽을 치댄들 빵이 될까.

'너 있어야 살겠다', '너 때문에 못 살겠다' 붉으락푸르락 하는 일도 없겠지.



지지리 가난하던 이 나라가 '핫'하다는 한류를 전파하며 그나마 방귀깨나 뀌는 행세를 하고,

민주주의를 넘어 '공정'을 운운할 수 있는 것은

사회적 체면과 실리의 외피를 쓰고 자신을 감춘 이들이 아니라,

 눈치 없이 열을 내며 남이 그어놓은 한계에 맞서 씩씩거린 이들이

시시포스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직면한 한계치를 조금씩 조금씩 밀어냈기 때문이야.  



쇠를 다루든, 음식을 조리하든, 시대를 조명하든 그 기본은 불 조절이지. 

고기가 좀 탔다고 어떻게 가스불에 그 책임을 묻겠어.


알몸의 두 사람이 흥분하고 열중하고 열성을 보이며 열 내지 않았다면 누군들 세상에 있을까.


그늘은 왜 만드냐고 햇빛에 추궁할 수 없듯이,

열을 내며 화산폭발과 지진을 일으킨 지구의 역동성을 탓하지 않듯이,

인류 문명이 불을 피운 단순함에서 유래했듯이

속 끓이며 열을 낸 태양은 아무 잘못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