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토지> 서문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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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된 공감

2019. 12. 25.

 

"앞으로 나는 내 자신에게 무엇을 언약할 것인가?

포기함으로써 좌절할 것인가, 저항함으로써 방어할 것인가, 도전함으로써 비약할 것인가.

다만 확실한 것은 보다 험난한 길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다."

 

박경리 작가가 1973년 6월 3일 밤에 쓴 서문 중 마지막 문단이다.

 

 

 

2001년 작가는 2002년 판 <토지> 서문을 아래 문단으로 시작한다.

 

"서문 쓰는 것이 두렵다. 할 말을 줄이고 또 줄여야 하는 인내심에는 억압적 속성이 있으며, 부정적 성향에다

모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늘 현실도피를 꿈꾸고 있기 때문인데 내게는 어떤 것도 합리화할 용기가 없다.

 

(……)

 

집으로 돌아와서, 지금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은 <토지>에 나오는 인물 같은 평사리마을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주머니, 그리고

아저씨들의 소박하고 따뜻한 인간의 향기뿐 아무것도 없다.

충격과 감동, 서러움은 뜬구름 같이,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같이 사라져버렸다.

다만 죄스러움이 가끔 마른 침 삼키듯 마음 바닥에 떨어지곤 한다."

 

 

 

 

 

1.

나이 50을 목전에 두고 하루 8시간 이상 3개월 넘게 의무처럼 읽은 <토지>는

 작품과 나의 관계를 재설정했다.

아마도 20대나 30대가 아니어서, 그 시기를 통과하며 쌓은 여러 경험과 기질 탓에 그랬다.

 

완독 이후로 시력은 한층 약해졌지만,

나는 지금도 <토지>와의 만남을 다행으로 여긴다.

잃은 것보다는 얻은 것이 많아서 내게는 남는 장사였다.

블로그 포스트를 다 지워도 <토지>를 읽으며 끄적인 감상만은 남겨두고 싶다.

 

 

 

 

2.

<토지>는 도서관 대출로 읽었다.

똑같은 표지의 책 20권이 책꽂이나 집 한쪽에 자리한 모습은 생각만으로도 답답했다.

 

다 읽은 후 추억 삼아 작가 서문으로 여는 1권과

월선의 죽음을 묘사한 8권을 두 판본으로 구매했다.

생각날 때마다 언제든 꺼내 안부를 확인할 수 없는 아쉬움에 전권 구매를 망설이다가도 마음을 접었다.

 

 

 

 

3.

<토지>를 읽는 동안 나의 감상은 봄꽃처럼 부풀었고

잘생긴 여름 잎과 가지처럼 쭉쭉 뻗어 나갔다.

 한겨울 땅속 씨앗과 뿌리처럼 가만가만 심호흡하고 꼼지락거리면서

작품 속 인물들과 과거의 인연들에게 엽서를 적어 보냈다.

 

 

 

 

4.

어느 시기 끄트머리서 꺼내 읽는 작가의 서문 구절은 

차츰 군더더기를 버려 맨몸인 겨울나무처럼 공들여 자랑할 게 없다.

 

한 점 흐트러짐 없고 시름없으나, 마른 잎처럼 남모르게 몸을 뒤친다.

 '세상에 태어나 삶을 잇는 서러움'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