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남한산성>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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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된 공감

2019. 12. 31.

 

소설 <남한산성>은 이렇게 시작한다.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그 첫 문장 바로 앞서 작가는 '하는 말', 즉 서문을 썼다.

 

 

 

 

 

 

 

 

"허송세월하는 나는 봄이면 자전거를 타고 남한산성에서 논다.
봄비에 씻긴 성벽이 물오르는 숲 사이로 뻗어 계곡을 건너고 능선 위로 굽이쳤다.
먼 성벽이 하늘에 닿아서 선명했고, 성 안에 봄빛이 자글거렸다. 나는 만날 놀았다.

(……)

밖으로 싸우기보다 안에서 싸우기가 더욱 모질어서 글 읽는 자들은 갇힌 성 안에서 싸우고 또 싸웠고,
말들이 창궐해서 주린 성에 넘쳤다.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나는 다만 고통 받는 자들의 편이다."

 

 

 

 

 

 

눈을 부릅뜨고 객기를 부리는 글이 있다.
선 굵고 점잖은 어휘를 골라 쓰지만 음흉한 속내가 빤히 비치는 글도 숱하다.

그런 실없는 글에는 공간이 없다.
반면에 김훈 작가의 글에는 너른 산과 들을 건너다보고,
여러 가지 작은 꽃들이 핀 집 뒤란을 볼 수 있는 통풍이 잘되는 대청 같은 공간이 생긴다.

그의 글은 병산서원 누각 만대루에 올라야 비로소 병산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쉬어가듯이,
독자를 소란 없는 공간에 초대하고선 말없이 차 한잔 내놓고 정작 주인은 물러난다.


김훈 작가는 저마다가 숨겨뒀음직한 마음속 풍경을 표나지 않게 복원한다.
설득이 불가능한 타인을 설득하려 애쓰기보다,
수정이 불가능한 역사를 애써 고치려 하기보다
역사가 지은 현실의 외곽 남한산성에서 다만 현재의 서울을 바라보며 한숨짓되,
양희은 씨처럼 한없이 쓸쓸하지만 처량하게 늘어지지는 않는 태도로 사는 일의 쓸쓸함을 노래한다.

그것이 별다른 재미 없어도 그의 글을 읽게 만드는 그만의 매력이다.

먹거나 입을 수 없는 글 따위 정말 사는 데 아무 효용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산과 강과 바다와 달과 별이, 
살아있는 것들을 대하며 어정거리는 시간이,
읽고 쓰는 행위가 삶의 누추를 견디는 힘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