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정말 나체화구나 하는 느낌이 처음으로 가슴에 팍 부딪쳐옵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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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11. 11.

"빗속에서 사람들이 경찰하고 한참 대결하는 중이었죠.
최루탄에 투석으로 맞서고 있었어요.
솔직히 얘기해서 난 비에 젖은 사람들이 똑같이 비에 젖은 사람들을 상대로 싸우는 그 장면에
그렇게 감동하지 않았어요. 그것보다는 다른 걱정이 앞섰으니까요.

 

(······)

그런데 잠시 지켜보고 있는 사이에 장면이 휘까닥 바꿔져버립디다.
삼륜차 한 대가 어쩌다 길을 잘못 들어가지고는 그만 소용돌이 속에 파묻힌 거예요.
데몰 피해서 빠져나갈 방도를 찾느라고 요리조리 함부러 대가리를 디밀다가 그만 뒤집혀서 벌렁
나자빠져버렸어요.

누렇게 익은 참외가 와그르르 쏟아지더니 길바닥으로 구릅디다.
경찰을 상대하던 군중들이 돌멩이질을 딱 멈추더니 참외 쪽으로 벌떼처럼 달라붙습디다.
한 차분이나 되는 참외가 눈 깜짝할 새 동이 나버립디다. 진흙탕에 떨어진 것까지 주워서는 어적어적 깨물어 먹는 거예요.

먹는 그 자체는 결코 아름다운 장면이 못 되었어요. 
다만 그런 속에서도 그걸 다투어 주워먹도록 밑에서 떠받치는 그 무엇이 그저 무시무시하게 절실할 뿐이었죠.


이건 정말 나체화구나 하는 느낌이 처음으로 가슴에 팍 부딪쳐옵디다.
나체를 확인한 이상 그 사람들하곤 종류가 다르다고 주장해온 근거가 별안간 흐려지는 기분이 듭디다.
내가 맑은 정신으로 나를 의식할 수 있었던 것은 거기까지가 전부였습니다."

 

윤흥길 단편소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중

 

 

 

 

 

1.

권씨가 언급하는 사건은 1971년에 발생한 '광주대단지사건(경기도 성남시)'이다.
박정희 씨가 서울의 화려한 외관을 위해 폼 나지 않는 도시 빈민을 지금의 성남시에 몰아넣은 다음 

생계 문제 등에 말을 바꾸고 딴청을 부리자 일어난 사건이다.


2.

얼핏보면 권씨는 이렇게 얄미운 놈이 있나 싶을 정도로 개념 없고 대책 없는 인간이다.
사람이 모름지기 갖춰야 할 최소한의 교양과 기본적인 예의마저 그에게는 별무소용이다.


3.

"이래 봬도 나 대학까지 나온 사람이오."

권씨는 누가 묻지 않아도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고 외치던 《타짜》의 정마담같은 말을 내뱉는다.
그가 구두 등으로 자의식을 밝히는 일은 주류에 안착하려는 열등감으로 읽혀야 마땅한데,
권씨의 알량한 그 허위는 "참외쪽으로 벌떼처럼 달라붙"는 삶의 알몸을 보며 

별 수 없이 허망해지고 만다.

 

4.

도시 빈민과 거리를 두던 권씨는

욕망에는 다닥다닥 붙은 판잣집처럼 높낮이가 없음을 꿰뚫어 보고 아수라장 속으로 뛰어든다. 

 

시대가 국군을 만들고 인민군을 만들었듯이 그 역시 그 자리에 운 나쁘게 서 있었다.


5.

그 정면 대결 결과 계급을 뛰어넘는 연대에 앞장선 그는 전과자로 낙인찍혔다.

권씨의 삶도 시위 현장처럼 무정부 상태로 무질서해졌고

희생자는 지금처럼 권력이 아닌 '개인'이었다.
영광은 국가가 독차지하고 대부분의 문제는 '개인의 영역'으로 축소되었다.

 

 

6.

아홉 켤레 구두를 남기고 사라질 권씨가 말을 걸고 있다.

도시재개발과 철거, 부동산 투기 등 개발 독재 이데올로기는 50년이 흐른 2021년에도 진행 중이지 않느냐고.
읽는 사람에 따라, 당신의 맘에 따라 나(권씨)에 대한 평가는 계속 바뀌겠지만,
주의 깊게 찬찬히 들여다보면 비루한 세입자를 은근히 힐난하고 의뭉 떠는 오 선생과 

비루한 현실에 맞서 싸운 권씨에 대한 평가가 뒤바뀔 수 있는 것 아니냐고.

이 소설이 우스운 한 인간의 우스운 꼴과 

조롱과 연민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우리의 모습을 드러내는 허구일 뿐이냐며,
한 덩어리로 뭉친 국가가, 한 덩어리로 서로 연결한 연대가,

한 줌의 체면이 굶주림 앞에서 싹 사라지는,

우습고 슬프고 무서운 나체화를 똑똑히 목도한 권씨가,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