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2022년 01월

27

합의된 공감 달마의 뒤란 / 김태정

어느 표류하는 영혼이 내생을 꿈꾸는 자궁을 찾아들듯 떠도는 마음이 찾아든 곳은 해남군 송지하고도 달마산 아래 장춘이라는 지명이 그닥 낯설지 않은 것은 간장 된장이 우리 살아온 내력처럼 익어가는 윤씨 할머니댁 푸근한 뒤란 때문이리라 여덟 남매의 탯줄을 잘랐다는 방에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고 모처럼 나는 피곤한 몸을 부린다 할머니와 밥상을 마주하는 저녁은 길고 따뜻해 이 세상이 이 세상 같지 않고 개밥바라기별이 떴으니 누렁개도 밥 한술 줘야지 뒤란을 돌다 맑은 간장빛 같은 어둠에 나는 가만가만 장독소래기를 덮는다. 느리고 나직나직한 할머니의 말맛을 닮은 간장 된장들은 밤 사이 또 그만큼 맛이 익어가겠지 여덞 남매를 낳으셨다는 할머니 애기집만큼 헐거워진 뒤란에서 태아처럼 바깥세상을 꿈꾸는 태아처럼 웅크려 앉아 ..

21 2022년 01월

21

합의된 공감 동백나무 그늘에 숨어

목탁 소리 도량석을 도는 새벽녘이면 일찍 깬 꿈에 망연하였습니다 발목을 적시는 이슬아침엔 고무신 꿰고 황토 밟으며 부도밭 가는 길이 좋았지요 돌거북 소보록한 이끼에도 염주알처럼 찬 이슬 글썽글썽 맺혔더랬습니다 저물녘이면 응진전 돌담에 기대어 지는 해를 바라보았습니다 햇어둠 내린 섬들은 마치 종잇장 같고 그림자 같아 영판 믿을 수 없어 나는 문득 서러워졌는데 그런 밤이면 하릴없이 누워 천정에 붙은 무당벌레의 숫자를 세기도 하였습니다 서른여덟은 쓸쓸한 숫자 이미 상처를 알아버린 숫자 그러나 무당벌레들은 태아적처럼 담담히 또 고요하였습니다 어쩌다 밤오줌 마려우면 천진불 주무시는 대웅전 앞마당을 맨발인 듯 사뿐, 지나곤 하였습니다 달빛만 골라 딛는 흰고무신이 유난히도 눈부셨지요 달빛은 내 늑골 깊이 감춘 슬픔을..

28 2021년 12월

28

합의된 공감 영화의 '됨됨이'를 잘 보여준 "파워 오브 도그"

영화가 거침없이 미끈하고 감미롭다. 극의 긴장도와 몰입감이 높아서 러닝타임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피아노》로 널리 알려진 '제인 캠피온' 감독이 뉴질랜드에서 찍은 영화는 누에고치에서 뽑아낸 실을 균질하고 치밀하게 직조한 실크처럼 모든 대사와 장면의 앞뒤 아귀가 딱딱 맞아서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영화의 미장센은 어수룩한 구석을 찾기 힘들고 영상미도 굉장히 수려해서 온갖 물감이 든 빛의 팔레트를 펼친 것처럼 때깔이 좋다. 그것의 크기가 크든 작든, 인간은 누구나 자기만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고 지키려는 본능을 지니고 있고, 각자에게는 저마다의 꿍꿍이가 있다. 영화에는 산그림자로만 나타나는 짖는 개가 등장한다. 그 모습은 좀체 남의 눈에 띄지 않는데, 사람의 내면에 검은 그늘이 드리..

댓글 합의된 공감 2021. 12. 28.

11 2021년 11월

11

합의된 공감 "이건 정말 나체화구나 하는 느낌이 처음으로 가슴에 팍 부딪쳐옵디다"

"빗속에서 사람들이 경찰하고 한참 대결하는 중이었죠. 최루탄에 투석으로 맞서고 있었어요. 솔직히 얘기해서 난 비에 젖은 사람들이 똑같이 비에 젖은 사람들을 상대로 싸우는 그 장면에 그렇게 감동하지 않았어요. 그것보다는 다른 걱정이 앞섰으니까요. (······) 그런데 잠시 지켜보고 있는 사이에 장면이 휘까닥 바꿔져버립디다. 삼륜차 한 대가 어쩌다 길을 잘못 들어가지고는 그만 소용돌이 속에 파묻힌 거예요. 데몰 피해서 빠져나갈 방도를 찾느라고 요리조리 함부러 대가리를 디밀다가 그만 뒤집혀서 벌렁 나자빠져버렸어요. 누렇게 익은 참외가 와그르르 쏟아지더니 길바닥으로 구릅디다. 경찰을 상대하던 군중들이 돌멩이질을 딱 멈추더니 참외 쪽으로 벌떼처럼 달라붙습디다. 한 차분이나 되는 참외가 눈 깜짝할 새 동이 나버립..

댓글 합의된 공감 2021. 11. 11.

10 2021년 11월

10

합의된 공감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가급적이면 나는 램의 편에 서고 싶었다. 그러나 디킨즈의 궁둥이를 걷어찰 만큼 나는 떳떳한 기분일 수가 없었다. (······)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에 불과한 것이었다. 자기 자신을 상대로 사기를 치고 있는 것임을 나는 솔직히 자백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분노란 대개 신문이나 방송에서 발단된 것이며 다방이나 술집 탁자 위에서 들먹이다 끝내는 정도였다. 나도 그랬다. 내 친구들도 그랬다. 껌팔이 아이들을 물리치는 한 방법으로 주머니 속에 비상용 껌 한두 개를 휴대하고 다니기도 하고, 학생복 차림으로 볼펜이나 신문을 파는 아이들을 한목에 싸잡아 가짜 고학생이라고 간단히 단정해버리기도 했다. 우리는 소주를 마시면서 양주를 마실 날을 꿈꾸고, 수십 통의 껌값을 팁으로 던지기도 하고, 버스를 타면서..

댓글 합의된 공감 2021. 11. 10.

16 2021년 10월

16

합의된 공감 "오징어 게임", 희망 있는 지옥에서 살아남기

전 세계 주류 매스컴(mass communication)이 무시할 수 없는 유행 아이템이 된 "오징어 게임"을 보았다. 나는 요즘, 불편과 결핍이 일상이어서 다들 그러려니 하며 살던 시절의 상징 같은 달고나와 구슬, 딱지, 오징어 게임 등이 지구촌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얼떨떨한 시간을 보낸다. 그 덕분에 어린 시절과는 다른 운율과 속도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되뇌는 재미를 맛봤다. 승자 독식 경쟁을 부추기는 나 사는 현실에서는 돈 벌려다 목숨을 잃는 이야기가 흔하게 들린다. 연줄이 없어 외줄에 의지해 고층건물 청소를 하다 추락사한 청년이 있고, 주식, 코인, 부동산 시장에는 배달 노동자가 신호 떨어지기 무섭게 내달리듯 남보다 1초라도 먼저 매수 매도 타이밍을 잡으려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글로벌 대..

댓글 합의된 공감 2021. 10. 16.

13 2021년 05월

13

합의된 공감 모퉁이에서 바라보는 정면(正面)과 이면(裏面), 영화 "스모크"

드물게 좋은 영화를 만났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지난주에 본 같은 영화가 그렇다. 영화 는 도입부부터 나를 홀리고 꼬시다가 몸이 풀리면 빌드업을 하고 마침내 역전골 같은 펀치 라인이 나오는 영화가 아니라, 빽빽한 여백을 선명하게 적어놓은 시처럼 자유로운 상상을 부추겼다. 그런 작품은 시간이 흘러도 쉽게 휘발되지 않은 채 마음에서 살아 숨을 쉰다. 뭐랄까, 곤히 잠든 강아지의 다스운 체온과 보드라운 털을 쓰다듬는데 강아지가 슬그머니 몸을 쭉 펴며 기지개 켤 때 느끼는 기쁨 같고, 건조기에서 막 나온 빨래에 남은 따스한 온기 같았다. '오기'는 매일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조막만한 자기 가게 반대편에서 사진을 찍는다. 그는 그 일을 별 회의 없이 계속한다. 그가 찍은 사진에는 사람들이 아..

05 2021년 05월

05

합의된 공감 약속된 땅이 없어도...<노매드랜드>

"춥고 황량한 우주를 향해 나아가려면 웅장한 설계도 같은 것은 잊어야 한다. 입자에게는 목적이 없으며, '우주 깊은 곳을 배회하면서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궁극의 해답' 같은 것도 없다. 그 대신 특별한 입자 집단이 주관적인 세계에서 생각하고, 느끼고, 성찰하면서 자신의 목적을 만들어 내고 있다." 중에서 나의 조상이 내 몸에 새겨 놓은 유전자 덕분에 나는 종종 일탈을 꿈꾼다. 현재 누리는 삶이 안온하고 익숙하며 일상이 지나치게 확실해서 외려 불확실하거나 미묘한 곳으로 떠나는 때가 있다. 바람 한점 없는 따뜻한 날씨 같은 풍요 속에도 고달픈 부분이 있어서 그 평범한 생활로부터 나를 소외하며 집이 아닌 노지나 호텔로 향한다. 나는 그렇게 살도록 생겨 먹은 사람이지만 내가 직면한 현실은 나의 탈출을 쉽게 허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