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Gijuzzang Dream 2008. 1. 20. 19:35

 

 

 

 

  정조대왕

 

 생몰년 : 1752-1800
 재위년 : 1776.3-1800.6 (24년 3개월)

 

1752년(영조 28)     사도세자(추존 장조)와 혜빈 홍씨(추존 헌경왕후)의 둘째아들로 출생.
1759년(영조 35, 8세) 왕세손에 책봉됨.
1762년(영조 38, 11세) 김시묵의 딸(10)과 가례(효의왕후).

                                아버지 사도세자(28), 뒤주에 갇혀 죽음.
1764년(영조 40, 13세) 사망한 큰아버지 효장세자의 후사로 입적.
1775년(영조 51, 24세) 연로한 할아버지 영조(82)를 대신하여 대리청정.
1776년(정조 즉위년, 25세) 조선조 제22대 왕으로 즉위. 
                               양아버지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양어머니 효장세자빈 조씨를 효순왕후로 추존.
                               친아버지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추존,

                               친어머니 혜빈 홍씨(42)를 혜경궁으로 올림.
                               부친의 죽음에 관여한 홍인한(혜경궁의 숙부) 등의 죄를 물음. 
                               이 과정에서 고모인 화완옹주(39)를 폐서인하고

                               영조 후궁인 숙의 문씨를 사사함.
1777년(정조 1, 26세) 역모 사건으로 서출아우 은전군 찬(18) 사사.
1778년(정조 2, 27세) 노비추쇄법 폐지.
1779년(정조 3, 28세) 홍국영 축출.
1782년(정조 6, 31세) 후궁 성씨(30, 뒤의 의빈), 맏아들 형(문효세자) 출산.
1784년(정조 8, 33세) 규장각 완성. 원자 형(3)을 왕세자로 책봉.
1786년(정조 10, 35세) 왕세자 형(5) 사망. 왕세자의 생모 의빈 성씨(34) 사망.
1787년(정조 11, 36세) 박준원의 딸(18)을 후궁으로 간택(수빈 박씨).
1790년(정조 14, 39세) 수빈 박씨(21), 둘째아들 공(순조) 출산.
1791년(정조 15, 40세) 신해통공 실시.
1793년(정조 17, 42세) 장용영 제도 완성.
1796년(정조 20, 45세) 화성 완공.
1800년(정조 24, 49세) 원자 공(11)을 왕세자로 책봉. 등창으로 사망(재위 24년 3개월).

 

 

 

 

 정조의 개혁과 좌절 (1) 

 

 

조선시대 역대의 군주들 속에서 특별히 세종과 정조에게 문화군주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다.

세종은 왕조체제가 안정기를 누릴 때 여러 문화적 업적을 이룩했다.

이와 달리 정조는 조선후기 왕조체제가 흔들릴 때 이를 수습해야 할 역사적 과제를 안고

여러 개혁을 단행했다.

정조는 1776년 왕위에 올랐다. 그는 늘 검소한 생활을 했다. 평상복은 무명으로 지어 입었고 닳으면 기워 입었으며 수라상의 반찬은 다섯가지쯤으로 제한했다.

쇠고기 따위의 고급 음식은 되도록 올리지 못하게 했다.

또 화려한 자기 따위를 방 안에 벌여놓지 않았다.

스스로 백성과 벼슬아치들의 모범을 보인 것이다.

그가 왕위에 오른 뒤 맨 먼저 궁녀의 수를 줄였다.

궁녀는 일종의 궁중 노예였다. 그들 중 일부는 정5품까지 승진을 할 수 있었다. 물론 결혼할 수도 없었다.

보수는 하급인 무수리의 경우를 보더라도 한 달에 쌀 4말, 한 해에 명주와 무명 각 한 필씩을 받았으며 때로 특별 하사품을 받았다.

이를 보아도 궁녀들의 보수가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다.

대체로 궁녀의 수는 500명 또는 600여 명을 헤아렸다.

임금이 있는 대전에는 적어도 100여 명이 복무하고 있었다.

정조가 궁녀를 없애려 하자, 할머니인 정순대비가 완강하게 반대했다. 첫 시련이었다.

정조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수발하는 대전의 궁녀만 없애버렸다.

궁녀를 없앤 것은 국가의 재정을 절약하면서,

결혼도 못하고 일생을 궁중에서 사는 여성의 한을 달래주려 한 것이다.

더욱이 궁녀들이 온갖 음모에 동원되는 오랜 궁중의 폐단도 없애려 했다.

그리고 대전에는 하급 벼슬아치를 두어 일을 맡게 했다. 대비는 이 조치를 대단히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가 맨 먼저 설치한 새로운 기구는 규장각(奎章閣)이다.

그는 세손으로 있을 적부터 오랜 구상을 한 끝에 왕위에 오르자마자 규장각을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창덕궁 안에 둔 규장각의 건물은 6개월의 공사 끝에 완성되었다.

그 설치 목적은 역대 임금들의 초상화와 인장, 책 등을 보관하는 곳임을 표방했다.

규장각은 최초의 왕립도서관 또는 박물관의 구실을 했다.

하지만 이는 표면적 이유였음이 곧 드러났다.

뒤이어 만들어진 조직과 기능을 보면 이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다시 말해 친위세력을 키우는 장소로 만든 것이다.

규장각의 책임자는 제학(提學)이다.

정조는 제학으로 홍국영, 채제공 등 근신을 임명했다.

또 핵심적인 실무를 맡은 검서에는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등

참신하고 당파와 관련이 없는 인사 또는 서자 출신을 임명했다.

규장각 건물과 인원 수는 가장 규모가 큰 홍문관의 배가 넘었으며

소속 벼슬아치들은 특별 권한을 누렸다.

각신은 임금이 새벽이나 밤에 대신을 만나

정사를 논의하는 장소에도 참여했다.

승지가 입시할 적에도 배석해 의견을 낼 수 있었으며

벼슬아치의 부정이나 과실을 적발해 탄핵하는 권한도 주었다.

규장각의 각신과 검서는 임금이 외부로 행차할 때마다 수행했으며

밤늦도록 임금과 함께 학문과 국사를 토론했다.

또 밤에 근무를 하거나 독서를 할 때 음식을 내려 보살펴 주었다.

이들이 바깥 출입을 할 적에는 궁중의 말을 내주었으며

녹봉의 지급도 넉넉했다.

정조가 일세의 인재들을 모았던 탓으로 세상 사람들은

“임금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고 출세를 보장받은 벼슬아치”로 칭송하여 부러움을 샀다.

규장각 설치의 의도는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다.

 

첫째, 외척의 발호를 막으려는 장치였다. 역대 왕조는 늘 외척들의 발호에 시달렸다.

그는 규장각을 외척을 배제하고 측근의 신하를 등용하는 기구로 활용했다.

둘째, 문풍의 진작에 두었다. 당시 선비와 문사들은 퇴폐풍조에 빠져 있었다.

셋째, 당파에 따라 인재를 등용치 않고

탕평(蕩平) 정책의 일환으로 당파의 인사를 고루 등용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인재의 고른 등용으로

친위세력을 키워 이들을 활용해 개혁정책을 펴겠다는 의도를 지녔던 것이다.

당연히 도서관이나 학술기구로서의 기능보다도

정치기구 또는 친위세력을 키우는 기능을 맡았던 것이다.

다음 규장각이 안정기에 접어들었을 때인 1781년 초계(抄啓) 문신을 두었다.

한번 과거에 합격하면 거의 학문이나 문자를 접하지 않은 폐단을 없애려 한 것이다.

초계 문신은 37세 이하의 중간 벼슬아치를 뽑아 3년 동안 특별교육을 시키는 제도였다.

처음 당파를 망라하여 20여명을 뽑았다.

이들에게 실직을 떠나 잡무에서 해방시켜주고 명예직을 주어 승진에 지장을 받지 않게 했다.

이들에게 경서를 다시 익히고 시사를 공부케 하고 문체 작법을 배우게 했다.

한 달에 한번씩 경서를 시험하는 시강(試講), 글을 짓는 시제(試製)를 보였다.

성적이 좋은 자에게는 승진, 성적이 나쁜 자에게는 승진에서 제외시키고 벌을 내렸다.

19년 동안 초계 문신 138명이 선발되었다. 그 가운데 정약용도 포함되었다.

이들을 어찌나 혹독하게 다루었는지 정약용은

“어린애같이 때리고 학생같이 단속했다”(‘경세유표’)고 기록했다.

하지만 이들은 정조의 충실한 신하가 되었으며 개혁의 추진세력이 되었다.

따라서 규장각의 각신과 초계 문신들은 정조의 지원을 받아

새 바람을 일으켜 문예부흥의 한 표상이 되었다.

정조는 이런 바탕 위에서 인재를 기르고 한 단계씩 개혁정책을 폈다.

그는 강력한 힘을 기초로 해야 바른 개혁을 이룩할 수 있다고 보고 군사지휘권의 일체화를 도모했다.

당시 군사 조직은 5군영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5군영의 장수들은 군사동원에서 군무직의 최고 책임자인 병조판서의 지휘를 받지 않았다.

따라서 장수들은 5군영의 군사들을 가병(家兵)처럼 부릴 수 있었다.

 

정조는 5군영을 3군영으로 개편하고 그 지휘권을 병조판서에게 주었다.

또 새로운 군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해 친위부대로 만들었으며 그 책임자를 근신으로 임명했다.

장용영은 왕궁이 있는 서울과 서울 주변의 방위임무를 맡았다.

장용영의 군사는 특별히 정예병으로 양성했다. 아주 의미심장한 새 군영의 설치였다.

그는 결국 병조판서와 장용영을 직접 지휘할 수 있게 하여 군사 동원의 일원화를 만들어냈다.

이렇게 해서 무예를 진작시키고 자신이 직접 군을 동원할 수 있게 했다.


- 규장각의 성쇠… 정조 사후 당쟁소굴 전락 -

규장각은 도서관 기능으로도 큰 업적을 남겼다.

많은 도서를 수집하고 보관했는데 ‘규장총목’에 따르면 정조 당시 3만여권을 수집해 보관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야말로 무식쟁이도 규장각의 각신이 되어 거들먹거렸다.

규장각은 문벌과 당파의 소굴로 변질되었다.

오히려 양식 있는 선비 출신의 벼슬아치들은

이 시기에 와서는 각신에 드는 것을 수치로 여길 지경이었다.

1894년 개화파에 의해 여러 개혁조치가 이루어졌을 때

규장각 폐지 조항이 들어있었다.

그 폐단을 없애려 한 것이다. 그 뒤에 많은 논란을 빚다가

마침내 1910년 나라가 병합될 때 공식적으로 없어졌다.

하지만 그 유산은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입했을 때

강화 유수 관아 안에 있던 외규장각의 의궤 등 많은 도서와 보물들이 약탈되었으며 건물과 많은 도서들은 불태워졌다.

오늘날 그 반환문제가 프랑스와 한국 사이에

외교문제로까지 비화되고 있다.

규장각 도서는 1911년 도서 10만여 책, 각종 기록 1만1천여 책이

조선총독부로 이관되었다가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졌다.

오늘날 서울대학교에서는 규장각관을 설립해 이들 도서를 소중하게 보관 관리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등 국보급에 해당하는 도서들이다.

그리하여 규장각관은 우리나라 최대의 한국학 관련자료를 모은 한국학의 산실이 되고 있다.

- 2004년 11월 10일, 경향, 한국사 다시보기,  이이화/ 역사학자

 

 

 

 정조의 개혁과 좌절 (2)  

  

 

정조는 도성을 화성으로 옮기는 거대한 사업을 추진했다.

이어 내정의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정조는 백성의 고통을 말할 때마다 눈물을 글썽거렸다 한다.

먼저 수령권의 강화를 도모했다. 다시 말해 지방관의 권력을 확대해준 것이다.

지방관들은 왕권을 대행하면서 많은 부정을 저질렀다.

하지만 지방 사대부와 토호의 위세에 눌려 소신껏 행정을 펼 수 없는 처지에 늘 몰렸다.

 

정조는 “나의 생각은 오직 백성들이 평안하게 사느냐, 근심에 찌들어 사느냐에 모아 있다.

이는 수령의 손에 달려 있다”(‘홍재전서’)고 했다.

정조는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현지로 부임하는 수령을 만나 여러 가지 현지 실정을 묻고 선정을 당부했다. 그리고 15개월의 임기를 보장했다. 이어 수령들이 부정을 저지르면 늘 관대하게 조치했다. 부정 탐학을 방조하는 것이 아니라 수령권을 존중해 사기를 높이고 사족 토호들을 억제하려는 정략이었다.

정조가 임명한 수령들은 사족과 토호들이 조세와 환곡의 일에 간섭하지 못하게 했으며 군역의 부정을 적발해냈다.

사족 토호들이 거세게 저항했으나 임금의 비호를 받는 수령들에게 밀렸다. 정조는 승지나 각신 등 측근 세력을 곧잘 수령에 내보냈다.

수령들이 여러 폐단을 적은 응지소(應旨疏)를 올리면 일일이 읽고 대책을 내렸다.

행차길 백성이 징을 치면 恨을 풀어주었는데,

그렇다고 수령의 부정행위를 눈감아 주는 것은 아니었다.

정조는 암행어사를 적극 활용했다.

종전의 암행어사는 특수한 일을 처결키 위해 특정 지역에 파견되어 일을 처리했다. 한데 정조는 암행어사의 권한을 확대해

지나는 골골을 모조리 감찰케 했다.

보기를 들면 호남지방을 감찰할 임무를 띤 암행어사는

지나는 연로인 경기도 · 충청도까지 그 범위를 넓혀준 것이다.

암행어사도 부정을 저지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하여 수행 군관을 암행어사가 스스로 골라 데려가는 것을 금지시켰으며,

선정을 베풀었다는 수령이 뒤에 부정사실이 적발되면

그 암행어사를 처벌했다.

정조는 재위기간 동안 110회 이상 암행어사를 보냈는데 여느 임금의 두 배가 넘는 숫자였다.

또 이들의 반수 이상이 규장각 초계문신 출신들이었다.

정조는 직접 백성의 소리를 들으려 했다.

정조는 수원에 자주 행차했으며 민생을 돌보려 여러 곳을 찾아다녔다.

정조는 백성들이 임금이 행차하는 연로에서 격쟁(擊錚)을 하게 했다.

곧 억울한 일이 있으면 징을 쳐서 이를 알리게 하는 제도였다.

격쟁을 통해 알린 민원은 3일 안에 처리케 했다.

정조는 격쟁을 하는 백성을 불러 사안을 알고 스스로 그 결정을 낱낱이 챙겼다.

정조 재임 기간은 격쟁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너무 격쟁이 요란하자 궁궐 앞의 세 곳을 지정해 격쟁을 허가하는 정도로 제한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과거의 잘못된 여러 제도를 하나씩 고치는 조치를 내렸다.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해본다. 적자와 서자의 차별은 조선 초기부터 있었다.

그 개선책이 자주 논의되었으나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정조는 서자 출신이라도 과거에 합격하면 성균관에 들게 해 고위직 진출의 길을 열어주었다.

중인의 승급제한을 철폐했다.

중인들은 잡과를 거쳐 기술직에 종사하면서 고위직에 오를 수 없는 제한을 받았다.

이들을 고을 수령으로 보내기도 하고 비록 영직(影職, 실직이 아니나 높은 품계를 주는 것)이나마

높은 품계에 임명했다. 이때 화가 김홍도는 수령으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형벌 · 지역차별 등 폐단 타파 진력

 

18세기에 들어 많은 노비들이 신공의 고통을 벗어나려 도망쳤다.

포졸들과 상전들은 이들을 체포하려 고유 업무를 팽개치고 부산을 떨었다.

중앙에서도 노비추쇄도감을 설치하고 노비 잡는 일을 맡겼다.

도둑 잡는 일 따위의 고유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정조는 그 관련 기구를 폐지하고 노비 잡는 일을 중지시켰다.

고문으로 죽음에 이르는 가혹한 형벌을 완화케 했다.

예전부터 곤장은 등과 관절을 때리지 못하게 하거나 3일 안에 다시 치지 못하게 하는 등

일정한 규정을 두어 시행케 했으나 이를 어기고 과도하게 때려 목숨을 잃는 일들이 많았다.

이를 엄하게 규정을 지키거나 완화케 했다.

역적과 명화적, 강도와 절도에게는 난장질과 주리를 틀고 불로 지지는 고문을 가했다.

또 얼굴에 강도라고 쓰는 자자형(刺字刑)을 가하기도 했다.

난장형과 주리형, 자자형을 금지시켰다.

또 범죄자가 유배를 갈 때 가족들이 함께 유배를 가는 연좌죄를 없앴다.

또 죄수들에게 형틀을 씌우는 형구를 없애버리게 했다.

춘향이도 이 형벌을 받으면서 고통을 당하지 않았던가?

수령이건 형리건 남형(濫刑)을 일삼는 담당관을 적발해 엄한 처벌을 내렸다.

또 그 규정을 확실하게 해두는 조치를 병행했다.

이어 억울한 죽음을 막으려 ‘증수무원록’을 간행하여 지침서로 삼게 했다.

이어 ‘대전통편’을 만들어 성문법으로 그 규정을 확실하게 했다.

이 조치야말로 정조의 인권의식을 확실하게 엿볼 수 있는 것들이다.

지역 차별을 철폐하는 조치를 내렸다.

조선 초기부터 서북 등 지역 차별이 계속 강화되었으며

후기에는 전라도·경상도의 일부 인사들도 차별을 받았다.

정조는 특정 지역 출신의 인사를 고루 등용케 하라는 지시를 여러차례 내렸다.

어진 이를 추천 받아 벼슬에 임명하기도 하고

과거에 합격한 자들에게는 실직의 임명에 불이익을 받지 않게 했다.

특히 할아버지 영조가 실시했던 탕평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아 강력하게 추진했다.

물론 당파를 고루 등용하여 남인인 채제공, 정약용 등이 주요 인사로 발탁되었다.

하지만 문벌과 당쟁의 뿌리를 완전히 불식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였으며

인사권을 쥔 인사들의 방해를 완전하게 잘라내지 못했다.

기득권세력 뿌리 못뽑아 좌절어쨌든 정조는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손을 대지 않은 곳이 없었다.

때로는 과감한 결단을 보였다.

하지만 기득권 세력의 뿌리를 완벽하게 뽑지 못했고, 그들의 방해를 끊임없이 받았다.

정조가 49세의 나이로 불의에 죽은 것도 이와 맞물려 있을 것이다.

기득권 세력의 자기 방어는 완강했던 것이다.

정조를 반대하는 벽파 또는 일부 노론들이 집권한 뒤에 정조의 여러 개혁정책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정조는 영조가 만들어놓은 기초 위에서 열렬한 개혁의지를 보였으나 끝내 그 좌절을 맛본 것이다.

뒤따라 등장한 문벌정치는 부정과 불법, 벼슬의 독점 등 반동정치를 자행했다.

결국 이들은 조선 말기를 파탄으로 몰아넣었으며 끝내 나라가 유리되는 현실을 빚었다.

개항기 국력이 기울어졌다.

국력의 소진은 지배 세력과 피지배 세력이 갈등을 빚어 내부의 분열이 가중된 데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빛나는 개혁정치는 빛을 잃었다.

하지만 그 유향은 우리 역사에서 길이 변색되지 않을 것이다.

- 증수무원록은 어떤 책 -

세종은 무고한 죽음에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

그리해 사망 원인을 철저히 가려내는 법의학서를 만들려 했다.

마침 원나라에서 편찬한 ‘무원록’을 보고 주를 달아 다시 펴냈다.

그러나 풀이가 너무 간단해 이해하기가 어려웠으며 용어도 중국의

방언을 그대로 사용하는 따위로 난해해 이용하기에 불편했다.

영조는 이 책의 결함을 여러모로 바로잡고 보충하는 작업을 벌였으나

마치지 못하고 죽었다. 정조는 이 작업을 떠맡았다.

서유린에게 이 일을 맡겨 1792년 완성을 보아

‘증수무원록’이라는 이름으로 간행케 했다.

이 책을 관련기관에 배포하여 널리 이용되었다.

이 책의 제목을 비록 '증수'라 했으나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는 사례를 담았으며

검시의 과학적 방법과 공정함을 기저로 한 법의학서였다.

또 언해로 번역해 누구나 쉽게 읽도록 했다.

내용을 요약하면

죽은 사람이 자살인지 타살인지를 검사케 하고,

시체를 계절에 따라 검안하는 방법,

뼈와 살이 상한 경우 판별하는 방법,

땅에 묻은 시체를 판별하는 방법,

목매 죽었을 경우 스스로 목을 맸는지 남이 목을 맸는지,

물에 빠져 죽었을 경우 스스로 빠져 죽었는지 남이 빠뜨려 죽였는지,

매맞아 죽었을 경우 어떻게 맞았는지 무엇으로 맞았는지,

칼에 찔려 죽었을 때 스스로 찔렀는지 남이 찔렀는지,

불에 타 죽었을 경우 실화로 죽었는지 방화로 죽었는지 따위를 가리게 한 것이다.

더욱이 약물중독으로 죽었을 경우 생전에 중독되었는지, 사후에 중독되었는지,

독약 · 벌레 · 독초로 중독되었는지도 가리게 했다.

그밖에도 여러 죽음에 대한 검시방법을 제시했다.

현대의학이 수용되지 않은 시기에 참으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을 요모조모로 제시했다.

이 책이 출간되자 죄인을 다스리는 담당관들의 필독서가 되었으며

중국과 일본에서도 가져가 중요한 참고서적이 되었다.

더욱이 정약용은 이 책의 내용을 토대로 하여 ‘흠흠신서’를 저작했다.

적어도 이 책은 근대 이전시기, 법의학서의 길잡이가 되었다.

정조는 이를 토대로 하여 인권을 중시하고 죄인의 형벌에 공정성을 기약하려 노력했던 것이다.

- 2004년 11월 17일 경향, 한국사 다시보기,  이이화/ 역사학자

 

 

 

 

 

담아가요~
이제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되네요.
비가 자주 와요. 가을 지나 겨울을 재촉하는 날씨가 가깝겠죠.
곱던 단풍 떨어져 발밑에 바스락거리는 낙엽 쌓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