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Gijuzzang Dream 2008. 1. 22. 23:13

 

 

 

 세종대왕의 리더십

 

 

 

지두환 (국민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 부인, 후손

 

세종대왕의 부인은 총 8명이고 자녀는 18남 4녀를 두었다.

왕비는 소헌왕후(昭憲王后)로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 1375~1418)의 따님 청송 심씨(靑松沈氏)이다.

소헌왕후의 외조부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안천보(安天保)이다.

세종이 잠저(潛邸)에 계셨을 때에, 태종께서 선택하여 배필로 삼은 것이었다. <안천보 실록졸기>

소헌왕후은 어려서 외가인 안천보의 집에서 자라 외조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임금이 이르기를,

중궁이 어려서부터 외조 영돈녕(領敦寧) 안천보(安天保)의 집에서 커서

은의가 지긋이 두터운 사이다. 이제 천보가 이미 늙어 중궁을 보고파 하니,

중궁으로 하여금 그 집에 나가서 보게 하고, 어미도 또한 그 집에 와서 보도록 하는 것이 어떠냐”

하니, 모두 그렇게 하면 가하다 하였다.<세종실록 권26. 6년 11월 2일>

 

소헌왕후는 슬하에 8남 2녀를 두었다.

후궁은 영빈 강씨(令嬪姜氏), 신빈 김씨(愼嬪金氏), 혜빈 양씨(惠嬪楊氏), 숙원 이씨(淑媛李氏),

상침 송씨(尙寢宋氏), 장의궁주(莊懿宮主) 박씨(朴氏), 명의궁주(明懿宮主) 최씨(崔氏)이다.

세종대왕은 후궁과의 사이에 군(君) 10명, 옹주(翁主) 2명을 두었다.


신빈김씨 혜빈양씨 - 갈라지는 이야기, 수양대군 관련


수양대군은 문종의 대상이 끝나자 대권 탈취를 위해 빠른 행보를 취한다.

단종 2년(1454) 8월 28일 세종 서2남으로 신빈김씨 소생인 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 1427~1464)과

세종 서1녀의 부마인 영천위(鈴川尉) 윤사로(尹師路)로 하여금

세종 6남인 금성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가 세종 서1남인 화의군(和義君) 이영(李瑛)과 함께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고하게 한다.

이는 장차 세종과 문종의 특명을 받아 궁중의 내정을 총괄하고 있는 세종 후궁 혜빈 양씨를 비롯한

궁정 내의 단종 보호 세력을 제거하고자 하는 음모의 시작이었다.

 

- 계양군(桂陽君)의 생모인 신빈 김씨는 원래 내자시(內資寺)의 종이었다.

세종의 눈에 띄어 궁인이 된 다음 다섯 왕자를 낳아 빈(嬪)에 이르렀다.

워낙 출신이 미천하였기에 궁중에서 대접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그 소생 왕자들은 항상 불만이 많았었다.

그래서 이들 신빈 소생 왕자들은 기존 질서를 깨뜨리려는 수양대군 편에 서서 적극 그를 돕는다.

윤사로 역시 부인 정현옹주가 출신이 미천한 상침송씨(尙寢宋氏)의 소생이었기에

함께 수양대군 편에 섰던 것이다.

수양대군은 이런 왕실내의 불만 세력들을 규합하여 단종의 보호 세력에 대항하게 하는 한편

어린 단종으로 하여금 방탕하게 하려는 계책을 세워 사냥이나 활쏘기에 정신이 팔리게 하려고 한다.

 

- 혜빈 양씨는 소헌왕후(昭憲王后) 승하 후에 궁중의 내정을 총괄해 왔다.

문종은 단종의 배필로 박문규나 최도일의 딸을 생각하였던 듯 하다.

그러나 수양대군이 단종을 감시하기 위해

강제로 송현수(宋玹壽)의 딸 여산 송씨(礪山宋氏)를 왕비로 삼았던 것이니

혜빈이 오히려 왕비의 감시로부터 단종을 보호하려고 더욱 예민하게 대처하였을 것이다.

때문에 수양대군은 혜빈 양씨와 금성대군을 처단하지 않고서는

대권 탈취가 불가능한 것을 알게 되었다. (출전: 조선왕조 충의열전)

 


- 세종 생애

 

세종대왕은 태조 6년(1397) 4월 10일 한양(漢陽) 준수방(俊秀坊) 잠저(潛邸)에서

태종(太宗)과 원경왕후(元敬王后)의 셋째 아들로 탄생하였다.

한양 준수방은 현재 서울시 종로구 통인동 137번지이다. <서울 정도 600년 인물편>

 

처음에 상왕이 잠저(潛邸)에 있을 적에

원경왕후(元敬王后)의 꿈에 태종이 임금을 안고 햇바퀴[日輪] 가운데 앉아 있어 보이더니,

얼마 안 있어 태종이 왕위에 올랐고, 이에 이르러 임금이 또 왕위를 계승하였다. <세종실록>총서

 

 

세종대왕

 

 

1397년(1세) 4월 10일(양력 5월7일) 태종의 셋째 아들로 한양에서 탄생하다. 
1408년(12세) 2월 충녕군에 책봉되고 결혼하다. 
1412년(16세) 5월 충녕대군에 진봉되다. 
1418년(22세) 6월 왕세자로 책봉된다.
1418년(22세) 8월 10일 왕위에 오르다. 
1419년(23세, 세종  원년)  6월 대마도를 정벌하다.
1420년(24세, 세종   2년)  3월 집현전의 기구를 확장, 궁중에 설치하다.
1421년(25세, 세종   3년)  3월 주자를 만들어 인쇄술을 개량하다. 
1423년(27세, 세종   5년)  9월 조선통보 화폐제를 창설하다. 
1430년(34세, 세종 12년) 12월 [농사직설]을 전국에 펴내다. 
1430년(34세, 세종 12년) 12월 아악보를 이룩하다.
1431년(35세, 세종 13년)   3월 [태종실록] 편찬을 마치다. 
1431년(35세, 세종 13년)   4월 광화문을 세우다.
1432년(36세, 세종 14년)   1월 [팔도 지리지]를 편찬하다. 
1432년(36세, 세종 14년)   6월 [삼강 행실도]를 편찬하다. 
1433년(37세, 세종 15년)   6월 사군을 설치하여 국경이 압록강에 이르게 하다. 
1433년(37세, 세종 15년)   8월 혼천의(천체 측정기)를 제작하다. 
1434년(38세, 세종 16년)   7월 동활자 갑인자와 물시계(새로운 자격루)를 사용하다.
1434년(38세, 세종 16년) 10월 앙부일구(해시계)를 제작하다. 
1435년(39세, 세종 17년)   7월 경복궁 안에 주자소를 설치하다. 
1437년(41세, 세종 19년)   4월 일성정시의(주야측우기)를 만들다. 
1437년(41세, 세종 19년)   9월 여진을 정벌하고 6진 설치, 국경이 두만강에 이르게 하다.
1441년(45세, 세종 23년)   8월 측우기를 제작, 이듬해 5월에 측우하는 제도를 실시하다. 
1442년(46세, 세종 24년)   8월 [고려사]를 편찬하다. 
1443년(47세, 세종 25년) 11월 전제를 정하는 관서(전제 상정소)를 설치하다. 
1443년(47세, 세종 25년) 12월 [훈민정음](한글)을 창제하고 언문청을 설치하다. 
1445년(49세, 세종 27년)   4월 [용비어천가]를 짓다.
1446년(50세, 세종 28년)   9월 [훈민정음](한글)을 반포하다. 
1447년(51세, 세종 29년)   7월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을 편찬하다. 
1447년(51세, 세종 29년)   8월 숭례문(남대문)을 개축하다. 
1447년(51세, 세종 29년)   9월 [동국정운]을 편찬하다. 
1448년(52세, 세종 30년)   7월 궁 안에 불당을 건립하다.
1449년(53세, 세종 31년) 12월 [석보상절],[월인천강지곡]을 간행하다. 
1450년(54세, 세종 32년) 2월 17일(양력 3월 16일) 승하하다.

 

 

12세 : 태종 8년(1408) 2월 11일에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지고,

                                2월 16일에 우부대언 심온의 딸 청송심씨[소헌왕후]와 혼인하였다.

 

16세 : 태종 12년(1412) 5월 3일 충녕대군(忠寧大君)으로 진봉(進封)되었다.

 

22세 : 태종 18년(1418) 6월 2일 의정부와

          삼공신(三功臣)ㆍ육조(六曹)ㆍ사간원(司諫院)ㆍ사헌부(司憲府) 등에서

          세자[양녕대군]를 폐하여 외방에 내치기를 청하였다.

          그리하여 태종 18년 6월 3일 세자를 폐하고 충녕대군[세종]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태종은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민하고 또 학문에 독실하며 정치하는 방법 등도 잘 안다” 하여

          그를 세자로 책봉하도록 결정을 내렸다.

          이처럼 충녕대군에 대한 세자책봉은 태종의 뜻에 따라 극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대부분의 신하들도 이를 환영하였다.

 

22세 : 태종 18년(1418) 8월 8일에 태종 임금이 세자에게 국보(國寶)를 주고,

                                                연화방(蓮花坊)의 옛 세자궁(世子宮)으로 이어(移御)하였고,

                                 8월 10일에 내선(內禪)을 받고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하였다.

 

24세 : 세종 2년(1420) 7월 10일에 어머니 원경왕후께서 승하하였다.

26세 : 세종 4년(1422) 5월 10일에 아버지 태종(太宗)께서 승하하였다.

50세 : 세종 28년(1446) 3월 24일 소헌왕후(昭憲王后)가 수양대군의 제택(第宅)에서 승하하였다.

54세 : 세종 32년(1450) 2월 17일(양력 4월 8일) 세종대왕이

                                                                   영응대군(永膺大君)의 집 동별궁에서 승하하였다.

 

문종 즉위년(1450) 6월 12일 소헌왕후가 안장된 영릉(英陵) 서실(西室)에 합장하였다.

문종 2년(1452) 2월 20일 세종대왕의 신도비를 영릉에 세웠다.

                                   공조판서 정인지가 비문을 짓고 안평대군 이용이 전액을 썼다.

                      4월 10일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신주를 종묘에 부묘하였다.

문종 2년(1452) 2월 22일 <세종대왕실록>을 편찬하기 시작하였다.

단종 2년(1454) 3월 30일 춘추관에서 <세종대왕실록> 편찬을 완성하였다.

예종 1년(1469) 3월 6일 영릉(英陵)을 여흥부치(여주)의 북쪽 성산의 남향안 언덕에 천장하였다.



심온옥사 / 강상인의 옥

태종은 세종 1년(1419)에 강상인의 옥을 일으켜

병조판서 박습(朴習), 태종의 가신이었던 병조참판 강상인(姜尙仁), 이관(李灌),

세종의 장인인 심온(沈溫)과 그의 동생인 심정(沈泟)을 처형한다.

심온이 세종 즉위년(1418)에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이 때에 그의 동생 심정(沈泟)이 병조판서 박습과 같이 상왕인 태종의 병권 장악을 비난한 것이

화근이 되어 이듬해 귀국 도중에 의주에서 체포되어 수원으로 압송 사사(賜死) 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심온이 국구로서 세력이 커짐을 염려한 태종과 좌의정 박은(朴誾)의 무고로 밝혀져,

뒤에 세종은 심온의 관직을 복위시키고, 안효(安孝)라는 시호를 내렸다.

심온은 죽음에 임하여 유언으로 박씨와 혼인하지 말도록 당부하니, 오랫동안 지켜졌다 한다.

 

 

양녕대군 대우 - 광해군 비교

 

- 세종의 양녕대군 대우

태종 18년(1418) 6월 2일

의정부와 삼공신(三功臣)ㆍ육조(六曹)ㆍ사간원(司諫院)ㆍ사헌부(司憲府) 등에서

세자[양녕대군]가 간신(奸臣)의 말을 믿고 불의(不義)를 자행하니,

이를 폐하여 외방에 내치기를 청하였다.

그리하여 태종 18년 6월 3일 세자를 폐하고 충녕대군[세종]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세종 5년(1423) 5월 4일 세종은 헌릉(獻陵) 소상제(小祥祭)를 지내는데 양녕대군을 참여하게 하였고,

세종 6년 10월 27일 갑사(甲士) 지영우(池英雨)가 양녕대군이 병권(兵權)을 장악하려한다는

난언(亂言)을 하였다 하여 처벌하였다. 그 후에도 매년 술과 고기 등 찬물을 내려주고,

궁중의 연회에 참여시키는 등 형으로의 대우를 해주었다.

 

이에 세종 13년(1431) 1월 1일 지평(持平) 허후(許詡)가 양녕대군은 부왕(父王)께 죄를 지었으니

대내(大內)에 유숙하게 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아뢰었고,

세종 14년 대사헌 신개(申槪) 등도 같은 이유로 상소하였다.

그러나 세종대왕은 이후에도 양녕대군을 형으로 대우해 주고,

세종 22년(1440) 12월 27일에는 회례연(會禮宴)과 대소의 연향(宴享)에

양녕대군(讓寧大君)을 참여시키는 내용의 전지를 내렸다.


- 광해군의 임해군 대우

선조 41년(1608) 2월 1일 선조대왕이 승하하고

2월 2일 광해군(光海君)이 정릉동 서청(西廳; 지금의 덕수궁) 즉위하였다.

광해군 즉위년(1608) 2월 14일 형 임해군(臨海君)을 진도(珍島)에 안치하였다.

광해군 즉위년(1608) 3월 2일 강화도 교동현으로 이배하였다.

5월 27일 추국청에서 임해군 일당의 역모가 드러났다고 아뢰었다.

광해군 1년(1609) 4월 29일 친형 임해군을 위소(圍所)에서 죽였다.

 

 

- 세종대왕의 업적

 

세종대왕은  주자성리학에 입각하여 요순사회 같은 이상사회를 추구하였다.

그래서 성리학을 연구하여 임금에게 성리학을 가르쳐주는 경연전담기구를 집현전으로 만들었다.

집현전은 철학서로 사서오경과 성리대전 등을 연구하고

 역사서로 자치통감 자치통감강목 등을 연구하여 경연에서 세종에게 가르쳤다.

그리고 이를 종합하는 대학연의를 경연에서 강하였다.

 

이러한 성리학을 바탕으로 패도정치가 아닌 왕도정치를 시행하고

이에 따른 경제정책으로 정전제를 전분육등 년분구등법의 공법(貢法)으로 시행해갔다.

그리고 사대교린정책으로 명나라에 사대하고

왜와 여진은 대마도정벌 사군육진개척을 하여 회유 교린해갔다. 

그리고 농사직설을 지어 강남농법을 받아들여 휴한법단계에 있던 농법을 연작법 단계로 발전시켰다.

면포를 장려하여 일본에 수출하게 하여 일본에서 금은동이 들어오게 하였다.

이와함께 화포 배를 개발하여 약탈에 대비하였다.

 

그리고 복지정책으로 구휼정책, 의방유취 향약집성방을 편찬 의료정책,

천문 역법 자격루 측우기 등의 과학발전을 이루었다. 그리고 세종실록지리지를 편찬하였다.

그리고 윤리를 확립하기 위해 한글을 창제하고

정몽주를 충신으로 하는 삼강행실도를 짓고 세종실록오례의를 만들었다.

속육전을 만들어 법전을 완비하였다. 

   

 

- 세종대왕 기념사업회

 

세종대왕 구(舊) 영릉(英陵) 의 신도비 등 석물

원래 세종대왕의 릉은 지금의 헌인릉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예종(睿宗) 즉위년(1468)에 여주로 천장(遷葬)하면서

원래의 석물들은 인릉의 으슥한 곳에 그대로 묻었다고 한다.

그래서 여주로 새로이 쓴 영릉의 석물들은 예종 때 새로이 조성한 것들이다.

원래 영릉 자리에 묻혀있던 구 영릉의 석물들은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 의하여

1974년에 발굴되어 현재 동대문구 청량리에 있는 세종대왕 기념사업회 경내에 있다.

신도비의 귀부(龜趺) 만이 아직 발굴되지 못한 상태이다.

 

 

세종대왕 신도비

비의 받침은 거북받침돌을 잃어버려 자연돌로 대신하였고 그 위에 비몸을 올렸으며,

용을 조각한 머릿돌은 비몸과 한돌이다.

비문의 글씨는 알아보기 힘든 상태이나, 비문의 내용을 실은 책이 전하고 있어서,

세종대왕의 업적과 왕후, 빈(嬪), 그 소생에 관해 간단히 적고 있다 한다.

앞면의 비이름은 정인지의 글씨이고, 뒷면에 새긴 글은 김요가 지은 글에

안평대군 이용이 글씨를 쓴 것이다.

제작은 정분과 민신의 지도아래 150여 명의 석공이 동원되어 2년만에 완성하였다.

 

문종 2년(1452)에 세운 비로, 강남구 내곡동의 구 영릉(舊英陵)터에 묻혀있던 것을,

영릉이 여주로 천장될 때 다른 석물들과 함께 땅에 묻혔었는데 숙종 때 장마로 자연 노출되자

순조의 릉인 인릉의 하단 서쪽으로 다시 옮겨 묻었으며

영조 때 일시 발굴, 다시 매장되었다가 1974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 의해 최종 발굴되었다.

쌍용을 조각한 이수와 비신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를 떠받치는 귀부는 아직 발굴되지 않아 현재는 자연석으로 만든 귀부로써 대신하고 있다.

 

 


※ 위 내용은

  제 112회 우리문화사랑방 강좌(2007.9.8)에서 배부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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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종시대의 회의, 경연

- 경연(經筵)이란 왕과 신하들이 고전(經)을 놓고 함께 공부하면서 회의하는 자리(筵)
- 경연참석자 : 고전강독을 맡는 언관들과 정책의 실무자인 재상들,

   그리고 국왕 바로 앞에 앉아서 토론 내용을 빠짐없이 기록하는 사관들이 참여(《경국대전》).
- 처음에 언관들이 책 내용을 가지고 회의를 이끌어 가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재상들이 나서서 그와 관련된 국정현안을 토론
- 세종은 월 6.7회꼴로 경연 개최.

  태조 때 23회, 태종 때 80회에 불과했던 경연을 무려 1,898회까지 개최해 국정 토론의 중심지로 만듬.

  


2. 세종의 정치교과서, <대학연의>

- 세종은 즉위한 지 두 달 만에 처음 연 경연의 첫 교재로 <대학연의>를 채택.

5개월 만에 그 책을 완독한 그는 “다 읽었지만 또 읽고 싶다”고 말한 뒤 연이어 2차, 3차 강독에 들어감.
- 《대학연의(大學衍義)》는 고려말에 성리학과 함께 들어온 제왕학 교과서.

저자인 송나라의 진덕수는 요.순을 비롯한 제왕들의 행적을 사서의 하나인 <대학>의 체제에 맞춰 설명.

사례와 이론을 적절히 결합해 놓은 책.

 

- 왜 <대학연의>였을까?
 ①《대학연의》에는 세종의 정치이념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음.

<즉위교서>에서 “인(仁)을 베풀어 정치를 펴겠다[施仁發政]”고 말했는데,

이것은 <대학연의> 안의 맹자와 제선왕의 대화 속에 나타난 여민동락(與民同樂)의 이념과 같음.


 ②《대학연의》에는 국가경영의 요체가 압축되어 있었음.

<대학연의>는 “천하(天下)와 국가(國家)를 다스리는 아홉 가지 요체[九經]”로서

수신(修身) 존현(尊賢) 친친(親親) 경대신(敬大臣) 체군신(體群臣) 자서민(子庶民) 래백공(來百工),

회원인(柔遠人) 회제후(懷諸侯). 한마디로 자기경영으로부터 시작해 세계경영에 이르기까지의

순서에 따른 리더의 책무와 조건을 말하고 있음.


 ③ 세종은 《대학연의》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곤 했음.

즉위년 11월 29일에 세종은 <대학연의>의 내용 중

“당나라의 대장군 우문사급이 당태종에게 궁중의 수목이 아름답다며 탄복했다”는 대목에 이르러서

“예로부터 간사하고 아첨하는 신하가 임금에게 아양으로 기쁘게 하는 모양이 이와 같다”고 말함.

이어서 그는 “그러나 그 끝을 잘 보전하는 자가 없었다”며, 주위의 아부꾼들을 경계함.

이는 태종에게 잘 보이려고 세종의 장인인 심온의 처단을 요구하는 등 충성경쟁을 하던

좌의정 박은 등에게 들으라고 한 언중유골.

- 세종실록아카데미 자료 중에서

 

 

 

 

 

 세종의 부활

 

 

세종이 즉위하던 1418년,

조선은 ‘7년 큰가뭄’에 접어든다.

22세의 젊은 왕은 지금의 세종로 사거리에 가마솥을 걸고 죽을 쒀 나눠주도록 했다.

어느 날부터는 경회루 동쪽에 초가를 지어 거기서 살았다.

왕비와 신하들이 “침전에 드시라”고 호소해도

“백성이 굶는데 편하게 잘 수는 없다”고 답했다.

 


▷ 세종의 삶은 고통으로 점철됐다.

 

재위 중에 부모, 큰아버지, 아내, 딸을 잃었고

각기병 피부병으로 움직이지 못하던 때도 있었다.

훈민정음 반포 무렵에는 당뇨 합병증으로

시력을 거의 잃어 2m 앞의 사람도 못 알아봤다고 한다.

신하들이 ‘검은 염소를 고아 드시기를’ 청하지만

“임금 병 고치자고 남의 나라에서 온 짐승 씨를 말릴 수는 없다”며 거절했다.

 

1980년대 드라마 ‘조선왕조 500년’과 영화 ‘세종대왕’(1978년)의 작가 신봉승 씨는

“성군(聖君)을 넘어 성자(聖者)”라며

“세종을 두고 멀리 외국에서 리더십 모델을 찾는 것은 딱한 일”이라고 꼬집는다.

 


▷ ‘세종의 수성 리더십’  ‘세종 조선의 표준을 세우다’ 

    ‘조선의 정치가 9인이 본 세종’ 

 

‘창조의 CEO 세종’ 등에 이어 ‘나는 조선이다’  ‘왕의 투쟁’ 등 세종을 다룬 책들이 나왔다.

TV 대하드라마 ‘대왕 세종’(KBS1)도 내년 1월 5일 선보인다.

세종은 위대한 지도자였지만 32년 재위 기간 ‘스캔들’이 없어서인지

사극 주인공으로 재등장한 것은 30여 년 만이다.

 


▷ 세종의 부활은 그의 리더십이 이 시대에 재현되기를 바라는

    대중심리를 반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세종 리더십, 그 핵심은 ‘진정한 애민(愛民)’이다.

한글 창제도, 관노 출신 장영실을 파격 등용해 자격루(시계)를 만들게 한 것도,

수확량을 두 배로 늘린 간종법을 보급한 것도 자나 깨나 백성을 걱정한 결과다.

 

‘백성 사랑’은 병마와 참척의 고통을 견디며 학문에 매진하고,

일과 능력 중심으로 인재를 등용한 동력이었다.

앞으로 대한민국의 지도자들은 외국의 리더십 모델을 벤치마킹하기에 앞서

세종의 리더십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이해하고 닮아 보려고 애쓸 일이다.

세종실록 안에 답이 있다.  

- 2007년 12월 26일, 동아사이언스, [횡설수설/ 허문명 동아일보 논설위원]

 

 

 

 

 


 세종의 리더십

“정치의 요체는 인재를 얻는 것이 가장 급선무다.
동반(문관) 6품과 서반(무관) 4품 이상은

현직과 전직 구분없이 인재 3인씩을 천거하라.

내 한몸으로 어진 인재를 어떻게 다 살필 수 있겠는가.
잘못 천거하여 국가와 국민에 해를 끼친 자는

율문을 살펴 엄히 죄를 가하라.”(세종실록) 

 

 

세종대왕의 인사시스템은 남달랐다.

끊임없이 숨어 있는 인재를 발굴하고, 인재선발권도 모두 이조판서에게 위임했으며, 간택 - 평론(評論) - 중의(衆議 · 여러 사람의 의견을 수렴) 과정을 거쳐 임용하는 시스템을 활용했다.

그리고 관료 중 능력 있는 인사가 있으면 발탁해서 중책을 맡겼다.

대표적인 인물로 조선 최고의 청백리 황희 정승과 과학자 장영실, 최윤덕 장군 등을 들 수 있다.

 
황희는 충녕대군의 왕위 등극을 반대한 인물이었다.
더구나 강릉부사 황군서와 노비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서얼 출신이었다.

특히 종과 간통을 하다 들통나 자신의 집에 도망온 고향마을 부녀자를 숨겨주면서

부적절한 관계를 가진 인물이었다.

 
동북개척의 주인공인 최윤덕 역시 부모없이 경남 합포(마산) 인근 천인 집안에서 자란 인물.
활쏘기에 능해 지방 수령(서거정의 아버지 서미경)의 눈에 띄어 추천됐다.
그는 세종대왕에 의해 발탁, 김종서 장군과 함께 동북공정과 대마도 정벌 등 큰 공을 세워
좌(左)윤덕, 우(右)종서라는 평가를 받았다.
 
아버지가 원나라 사람이고 어머니는 기생이었던 천민 출신 장영실 역시 상식을 뛰어넘는 발굴이었다.
세종은 장영실을 명나라에 1년 과학연수를 보낼 정도로 그의 능력을 믿었다.

이들을 등용할 때 출신성분과 도덕성 때문에 신료들의 반대가 드셌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세종은 인물위주의 인사원칙을 굽히지 않았다.
세종의 이같은 리더십으로 조선은 당시 세계 최고 수준의 전성기를 누렸다.

- 문화일보, [오후여담]. 2008-06-10 오창규 / 논설위원

 

  

 

 

 

 세종대왕은 ‘앉아있는 종합병원’이었다

 

 

"주상은 사냥을 좋아하지 않지만 몸이 비중하지 않소?

마땅히 때때로 나와 놀면서 몸의 균형을 유지해야 합니다.

(主上不喜游田 然肌膚肥重 須當以時出遊節宣)"( < 세종실록 > '즉위년조')

1418년 10월, 태종이 막 즉위한 아들 세종에게 한마디 충고를 던진다.

임금의 몸이 뚱뚱하니 운동으로 살 좀 빼라는 얘기였다. 다 알다시피 세종은 '끔찍한' 책벌레였다.

 


■책을 1100번 읽은 세종

"(세종은) 책을 100번씩 반복해서 읽었다. <좌전(左傳)> 과 <초사(楚辭)> 같은 책들은 200번 읽었다.

몸이 아파도 마찬가지였다. 보다못한 아버지(태종)가 환관을 시켜 책을 다 거두어갔다.

그런데 <구소수간(歐蘇手簡 · 구양수와 소식의 편지모음집)> 한 권이 병풍 사이에 남아 있었다.

세종은 이 책을 1100번이나 읽었다."( <연려실기술> )

집현전으로 쓰였던 경복궁.

 

 

세종은 재위 32년동안 날마다 새벽 2~3시에 일어나 하루 평균 20시간씩 격무에 시달렸다.

여기에 육식을 어지간히 즐겼다.

태종이 "주상이 고기가 아니면 밥을 먹지 못하는데…"라고 걱정하는 유언을 남겼을 정도였다.

세종은 지금으로 치면 '앉아있는 종합병원'이었다.

'걸어다니는~'이 아니라 '앉아있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이유가 있다.

움직이는 것을 매우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세종은 평생 당뇨병과 함께, 풍질과 부종, 임질, 수전증 같은 병을 안고 살았다.

특히 35살 이후에는 당뇨병 때문에 하루에 물을 한 동이 넘게 마실 정도였다.

당뇨 후유증 때문에 시력이 급격하게 떨어졌고, 부종 때문에 마음대로 돌아 누울 수도 없었다.

여기에 임질에 걸려 정사를 돌보지 못할 정도였다니….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조선의 왕으로 살아가기> (돌베개)에서)

왕의 이동식 변기, 매우틀.

 

 

 

■격무에 시달린 지도자

 

비단 세종 뿐인가. 조선의 역대 임금의 평균수명은 47세에 그쳤다.

27명 가운데 병없이 건강했던 왕은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태조 · 정종 · 태종 등은 뇌출혈(중풍), 세종 · 숙종은 당뇨병, 선조 · 영조는 폐렴,

문종 · 성종 · 순조는 패혈증(종기), 연산군 · 현종 · 경종은 전염병 등으로 승하했다.

(김정선의 박사논문 <조선시대 왕들의 질병치료를 통해 본 의학의 변천> 에서)

영양섭취는 지나친 반면, 몸은 움직이지 않고….

여기에 하기야 나라와 백성을 지켜야 할 임금이었으니 스트레스는 또 얼마나 엄청났을까.

오죽했으면 숙종은 "노심초사 때문에 수염이 하얗게 셀 정도였다"지 않는가.

더욱이 그는 "성격이 급해 닥친 사무를 버려두지 못하며, 식사도 때를 어겨 노췌하고 현기증이 있다"

고도 했다. 전형적인 '일중독 환자'였던 것이다.

세종과 숙종이 아니더라도 임금은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밤 11시까지 경연(經筵)에, 정무에 시달렸다.

'임금이 곧 태양'이니, 임금은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야 한다나 어쩐다나.

그런데도 조선이 건국하자 마자 신료들은 "국왕이 게으르다"며 질타했단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신하들도 어지간히 임금의 속을 썩였다.

 


■왕의 스트레스를 폭발시킨 신하들

광해군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1619년 7월, 당시 요동을 점령하면서 욱일승천하던 청나라가 편지를 보냈다.
"명나라와 관계를 끊고 우리(청)와 맹약을 맺자"는 편지였다.

광해군은 "이 편지를 의논하여 처리하라"고 명했다.

 

광해군은 '지는' 명나라와 '뜨는' 청나라 사이에서 적절한 등거리 외교를 펼치려 했다.

반면 신하들은 명나라와의 의리를 내세웠다. 3개월이나 '몽니'를 부리며 차일피일 미뤘다.
광해군이 불같이 화를 냈다.

그러면서 당시 우의정인 조정(1551~1629)에게 "당신이 처리하라"고 했다.

그러자 조정은 "제가 왜 책임지냐"면서 "다른 사람에게 맡기라"고 회피했다.

 

광해군이 한탄했다.
"당신이 맡지 않는다는데, 어느 누가 맡겠는가.

나 혼자 고민하다 병이 됐으니 나라 일이 한심하다. 생각하면 가슴이 섬짓하다.(思之膽汗)"

광해군의 화는 부하가 말을 듣지 않아 생긴 전형적인 '업무 스트레스'였다.

이밖에 태종은 풍질(류머티즘성 관절염)로, 선조는 오랜 전란이 안겨준 편두통 때문에 고생했단다.
예나 지금이나 지도자는 '고독하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한몸 바쳐야 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역사의 평가'다.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쉼없이 공부하고 백성을 어루만졌던 세종을 보라.

당대에는 '해동(海東)의 요순(堯舜)'으로, 후대에는 '만고의 성군'으로 추앙받은….

- 2011년 12월 21일 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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