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Gijuzzang Dream 2008. 1. 23. 22:15
 

 

 

 

“충녕(세종)대군을 세자로”… 명의 승인 받은 통역관 원민생 

 


셋째 아들을 세자로 책봉해 놓고 불안해하던 태종의 고민을 해결…

중국어 실력 탁월, 명의 조공품에서 금·은을 빼는 등 뛰어난 외교력 보여…
그가 죽자 세종이 직접 제문 써

 

“경은 타고난 천성이 부지런하고 민첩하며 행실은 공정하고 청렴하였도다. 일찍이 사신이 될 만한 재주를 가졌으며 어려서부터 중국말의 음훈을 잘 알아 소고(昭考·태종)의 인정을 받았고 거듭 칭찬을 받았도다. 나를 보좌하게 됨에 더욱 은총을 입었고 험난한 만리길을 직접 오가며 상세히 황제의 궁궐에다 우리의 바람을 아뢰었도다.”

 

세종 17년 7월 30일 당대 최고의 통역관 원민생(元閔生)이 사망했을 때 세종대왕이 직접 써서 내린 제문(祭文)의 일부다.

 

조선시대 때 국왕의 제문은 적어도 판서 이상은 되어야 내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과연 원민생은 어떤 인물이었기에 역관임에도 불구하고 세종이 친히 제문을 내린 것일까?

 

먼저 그의 이름에 담긴 비밀부터 풀어야 한다.

 

원래 그는 고려 말 중추원 부사를 지낸 원빈(元賓)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마도 적자가 아니고 서자였던 것 같다. 이후 그는 민부(閔富)라는 사람의 양자로 들어갔고 덕생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오랫동안 민덕생으로 살던 그는 세월이 한참 흘러 사역원 부사에 오른 다음

원래의 성을 되찾고 이름도 민생으로 고쳤다.

즉 그의 이름 원, 민, 생 석자에는 그가 겪었던 세월의 풍파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통사로서 원민생의 이름이 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태종 2년(1402) 7월 2일이다.

전국적으로 가뭄이 심하게 들어 백성의 고통을 걱정하던 태종이 원민생을 불러

명나라에서 돌아오던 길에 본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의 가뭄 현황에 대해 상세하게 묻고 있는 대목에서다.

이후 거의 매년 통사로 명나라를 다녀오던 원민생은 태종 17년 4월 4일 극비보고를 올렸다.

“명 황제가 미녀를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이 일이 원민생의 인생을 확 바꿔놓게 된다.

그 동안 명나라를 14차례 다녀왔지만 신분은 늘 통사였다.

그런데 원민생은 드디어 5월 17일 황제에게 헌납할 처녀들의 프로필을 들고

명나라에 들어가는 ‘처녀 주문사(處女 奏聞使)’가 되어 명나라를 향해 떠나게 된 것이다.

명칭은 다소 불명예스럽지만 어쨌거나 처음으로 ‘사신’이 된 것이다.

 

당시 사신은 2품 이상의 고위직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그래서 국내 직위도 ‘좌군 첨총제’라는 무관 고위직을 하사받았다.

 

아마도 이후 원민생이 헌납한 처녀가 마음에 들었는지

이듬해 3월 2일 그는 오늘날의 차관급에 해당하는 참판직인 공안부 윤에 임명된다.

당시 실록에 그 배경을 이렇게 적고 있다.

“원민생은 사람됨이 정교하고 지혜롭고 언변이 좋고 중국어를 잘해

임금이 중국 조정의 사신들과 이야기할 적에는 반드시 원민생으로 하여금 통역을 하도록 했다.

황제도 그를 사랑하여 명나라 서울에 가게 되면 비밀리에 불러 이야기를 하고 비단옷 등을 선물했다.” 

3개월 후인 6월 3일 태종은 양녕대군을 폐세자하고 셋째 아들 충녕대군을 세자로 삼았다.

문제는 명나라의 승인을 받아내는 일이었다. 명나라 입장에서는 부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될 경우 장차 양녕 세력이 역모를 꾸밀 가능성이 있고

그렇게 되면 조선 정국이 불안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태종으로서는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고민을 풀어줄 수 있는 적임자가 바로 원민생이었다.

6월 9일 원민생은 충녕을 세자로 봉해주기를 청하는 주본(奏本)을 들고

북경(北京: 베이징)을 향해 떠났다. 이때 태종은 반드시 8월까지는 돌아와야 한다고 당부했다.

서둘러 왕위를 물려주기 위함이었다.

태종은 마음이 바빴다. 서둘러 왕위를 물려준 다음 국왕수업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원민생이 아직 돌아오지도 않은 8월 8일 태종은 충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즉 중국의 승인여부와 관계없이 양위를 해버린 것이었다.

다행히 8월 22일 한양으로 돌아온 원민생은

명 황제가 7월 27일자로 충녕의 책봉을 승인했다고 보고했다.

자칫 중대한 외교적 문제가 발생할 뻔했으나 아무 탈없이 넘어간 것이다.

 

그 과정에는 당시 조선을 자주 찾았던 환관 출신의 명나라 사신 황엄의 역할이 컸다.

원민생이 중국에 들어갔을 때 우선 황엄을 찾아갔다.

그때 원민생이 황엄에게 “세자를 바꾸기를 청합니다”라고 말하자

황엄은 “필시 충녕을 봉하도록 청하는 것이리라”라고 말한다.

이미 한양에 왔을 때 충녕대군을 본 적이 있는 황엄이었다.

세종대왕의 즉위에는 이처럼 황엄과 원민생의 외교적 협력이 크게 작용했다.

 

이후 원민생의 인생은 탄탄대로였다.

세종은 원민생을 통해 명 조정의 정보도 입수하고 새로운 무기도 입수토록 밀명을 내리는 등

그에 대한 무한한 총애를 보여주었다.

특히 세종 6년 4월 1일 주문사로 명나라에 가는 원민생을 불러 세종은 특명을 내렸다.

“북경에 가거든 연전(連箭·연발식 활)을 구하고 아울러 쏘는 방법도 배워오라.”

그런데 이때 북경에 들어간 원민생은 황제로부터 큰 곤욕을 치르게 된다.

 

그를 부른 황제는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한다.

“노왕(태종)은 지성으로 나를 섬기어 건어(乾魚)에 이르기까지 진헌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소왕(세종)은 그렇지 못하다. 짐은 늙었다. 입맛이 없으니 조선의 새우젓과 문어 등을 올리게 하라.

현인비(조선에서 헌납한 황제의 비)가 살았을 적에는 진상하는 식품이 모두 마음에 들더니

죽은 뒤에는 음식이나 술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머니가 조선인이라는 설이 있는 영락제는 조선 음식을 좋아했던 것이다. 물론 조선 여인도 좋아했다.

 

상황이 어색해지자 명나라 내시 해수가 민생에게 “좋은 처녀 2명을 진헌하라”며 중재에 나섰다.

실은 음식보다 여자를 원했던 것이다. 영락제는 크게 웃으면서 20세 이상 30세 이하의 음식 만들고 술 빚는 데 능한 여인 5, 6명도 함께 뽑아오라고 말한다.

우여곡절 끝에 2명의 처녀가 영락제에게 바쳐지기 위해 10월 17일 길을 떠났다.

 

이 때 황엄과 원민생이 함께 동행했다.

그런데 당시 처녀 중 한 명이 북경으로 가던 도중에 배가 아프다면서 김칫국을 먹고 싶다고 했다.

이에 황엄은 그게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러자 원민생은 황엄에게 김치 담그는 법을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

실록의 설명이 재미있다.

“사실 그 처녀는 이미 이웃사람과 관계를 하여 임신한 상태였기 때문에 김칫국이 먹고 싶었던 것이다.”

그 후 그 처녀가 북경에 들어가서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외교관으로서 원민생이 남긴 가장 중요한 업적은

명나라에 보내는 공물 중에서 금과 은을 면제받은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태종 때부터 대명외교에서 가장 절실한 과제였다. 그러나 명나라는 완강했다.

황엄도 적극적으로 도왔지만 쉽게 풀리지 않았다.

 

세종 11년 7월 30일 세종은 황희와 맹사성을 불러 다시 이 문제를 논의한다.

누구를 사신으로 보내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에 관해서였다.

이렇게 해서 왕실의 공녕군 이인을 사신, 원민생을 부사로 삼아 사신단을 파견했다.

이미 사신을 여러 차례 지낸 원민생을 부사로 삼았다는 것은

이때의 사신단이 그만큼 중요했다는 뜻이다.

명나라에 조선 조정의 의지를 간접적으로 과시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아마도 이때 금·은을 면제하는 문제는 성공적으로 해결되었던 것 같다.

 

12월에 돌아온 이인과 원민생을 위해 세종이 경회루에서 대연회를 베풀고 큰 상을 내렸기 때문이다.

또 세종이 내린 제문 중에 그의 공적을 열거하면서

“금·은의 조공을 면제받으매”라는 대목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확실하다.

 

이후 세종 15년 인순부 윤에 임명되어 조용하게 관직생활을 보내고 2년 후 세상을 떠났다.

실록은 원민생이 “통사로 14차례, 사신으로 7차례 명나라를 찾았다”고 적고 있다.

원민생은 세종 때의 대표적 외교관 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 2007년 1월1일 / 이한우의 朝鮮이야기

- 이한우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차장대우 hw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