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Gijuzzang Dream 2008. 1. 25. 11:08

 

 

  

'연행록(燕行錄)'이란

청의 수도인 연경(燕京:지금의 베이징[北京])에 다녀온 기록이라는 뜻이다.

원래 사신이 돌아오면 서장관(書狀官)이 임무수행 기록을 등록하여 보고하게 되어 있었다.

이 보고서 외에도 사행에 참가한 사람이 개인적으로 기록한 글들이 상당히 많다.

현재 알려진 것만 해도 100여 종이 넘는다. 이를 총칭하여 '연행록'이라고 한다.

 

명나라와 교류하던 시기에는 사대관계에 따라

천조(天朝)에 조근(朝勤)한 기록이라는 뜻으로 '조천록(朝天錄)'이라고 불렀다.

명이 망한 후 조선에서는 계속 명에 대한 의리를 강조했으므로

제목을 폄하하여 '연행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연행록은 총칭이고 실제 명칭은 연행록 외에

연행일기 · 연행기(燕行記) · 연행잡기 · 연도기행(燕途紀行) 등 다양하다.

이런 명칭 앞에 자신의 호를 붙이거나 그해의 간지를 붙이기도 한다.

 

잘 알려진 <열하일기>도 연행록의 일종이다.

이런 연행록은 등록(謄錄)의 형태로 남아 있는 것도 있고,

단행본으로 간행되거나 사본으로 전해지는 것도 있다.

개인의 문집에 수록되어 간행되거나 도서관, 문중에 소장되어 있는 것도 상당수이다.

 

'조천록'은 형식과 내용이 엄격하고 규격화되어 있는 데 반해,

'연행록'은 분량과 형식이 상당히 다양하다.

여로, 연경에서의 활동, 견문과 교우한 사람들과의 기록 등을 차례로 기록한 것도 있으며,

왕래하는 동안 사적·풍물 등을 보고 느낀 바를 시로 읊어서 편집한 것도 있다.

이중에서도 각종 연행록의 모델이 되었던 것은

김창업이 쓴 〈노가재연행록 老稼齋燕行錄〉(1712), 홍대용의<담헌연기>,〈연행잡기〉(1765),

박지원의 〈열하일기〉(1780), 김경선(金景善)의 <연원직지> (1832) 등이 있다.

  

 

 

[新연행록] 1. 다시 밟아 본 역사속의 길

 
광활한 요동벌… '울 만한 곳이요 울어야 할 곳'
200여년 전 嚥巖 박지원의 탄성 실감
신문물 넘나들던 '韓中 2천년 실크로드'
급격한 공업화에 옛 영화 찾기어려워

 

연행(燕行)이란 중국 청나라의 수도였던 연경(燕京)으로 가는 길을 뜻한다.

연경은 지금의 베이징(北京)이고, 조선의 연행 사신들이 남긴 기록이 '연행록'이다.

중앙일보는 창간 37주년을 기념해

조선시대 연행 사신들이 갔던 길을 다시 밟으며 '신(新)연행록'을 연재한다.

명지대 국제한국학연구소(소장 유홍준 교수)와 공동 기획한 이 시리즈를 통해

한.중 문화교류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본다.

                        

압록강에서 베이징(北京)까지 2천리,

요동 평야를 에돌아 산하이관(山海關) 너머 오늘날 베이징이라 불리는 연경(燕京)에 이르는 길은

한.중 문화교류의 대동맥이다.
지난 2천년 동안 이 길을 따라 양국의 무수한 사신들이 오가며,

조공(朝貢)을 통한 교역과 함께, 새로운 학문과 사상과 예술이 우리에게 전해졌다.

유교.불교.기독교가 들어온 것도, 문익점(文益漸)이 목화씨를 숨겨 들여온 것도 이 길이며,

수많은 조선의 학자들이 세계를 경험하고 돌아온 것도 이 길이었다.

우리는 그 역사의 길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우리의 답사는

조선시대 3대 연행록(燕行錄)이라 불리는 김창업(金昌業)의 '노가재(老稼齋)연행록',

홍대용(洪大容)의 '을병(乙丙) 연행록',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를 기본 텍스트로 삼고,

김태준 교수가 그들이 밥 먹고 잠잔 곳을 빠짐없이 작성해낸 일정표에 따랐다.

대맥을 잡자면 압록강을 넘으면 봉황성(鳳凰城)을 거쳐 랴오양(遼陽), 선양(瀋陽)까지

계속 북으로 올라간 다음 요동평야를 가로질러 만리장성이 발해만과 맞닿은 산하이관에 다다르고

여기서 곧장 연경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총 2천61리, 32일 여정이다. 그리고 베이징에서 열하까지 또 2백67㎞, 약 7백리 길이 더해진다.

우리는 그 길을 전세 버스로 9박10일간 다녀왔다.

우리의 답사는 압록강변 단둥(丹東)의 호산(虎山)에서 시작했다.

호산의 장성(長城)에 올라 강 건너 남쪽을 바라보니 길게 뻗은 산자락 끄트머리 능선에

오롯이 서있는 의주의 통군정(統軍亭)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옛날 연경으로 가는 이들은 누구든 저 산마루 정자에 올라 이역 땅을 바라보며

감회를 읊었다던 곳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만주땅 호산에서

의주의 통군정을 바라보며 불가불 건너뛴 서울~의주 천리길을 망연히 그려볼 뿐이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은 신의주와 단둥을 잇는 철교가 우리를 세계와 연결하는 철의 실크로드가

될 수도 있다는 희망을 가슴 속에 담으며 봉황성을 향해 떠났다.

압록강을 건너온 연행사신. 학자들은 봉황성에 닿기 전에

구련성(九連城)과 책문(柵門)이라는 국경선에서 하루씩 묵어간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그 거리가 1백 리나 되니 그것이 의아스럽지 않을 수 없는데,

박태근 선생은 당시의 국경은 선(線)의 개념이 아니라 지역개념이었다고 알려주었다.

그러자 박지선 선생은 '노가재연행록'을 이끌어

책문 근처에서는 양국 상인들의 교역이 암암리에 성행했다고 덧붙여 설명해 주었다.

변문을 지나 얼마 되지 않아 차창 밖으로 홀연히 준수하게 생긴 우람한 봉황산이 나타났다.

봉황산은 아무리 보아도 한반도 어느 한쪽을 뚝 떼어온 것만 같다.

그래서 사신 가는 자들은 이 산을 보면서 고향을 다시 생각했고,

여기를 고구려의 안시성(安市城)으로 추정하며

양만춘이 활을 쏘아 당태종의 한쪽 눈알을 빼버린 그 기상을 시로 읊곤 했다.

봉황산에서 랴오양으로 가는 길은 천산(千山)산맥을 타고 넘는 멀고도 험한 길이다.

산길이 끝나고 태자하(太子河)라는 아련한 전설의 강이 나타나자

우리의 눈앞에는 옥수수밭이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광활한 요동평야가 끝간 데 없이 이어진다.

반듯한 지평선을 볼 수 없는 좁은 땅덩이에서 사는 우리들로서는 누구든 감동치 않을 수 없었다.

연암 박지원도 그 장대함에 감격하여 "참으로 울 만한 곳이요, 울어야 할 곳이다(好哭場,可以哭矣)"

라고 했다. 그러나 항시 무엇을 그릴까 긴장하고 있던 임옥상 화백은 비명에 가까운 소리로

"야! 이건 너무 그릴 게 없다"고 외쳤다.

랴오양은 역사상 요동벌판의 중심이었다.

고구려와 피터지게 싸우던 연(燕)나라 모용씨(慕容氏)가 수도로 삼은 이후,

거란족의 요(遼)나라, 여진족의 금(金)나라 모두가 도읍에 준하는 거점으로 삼았고

청(淸)나라가 처음 도읍한 곳도 여기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수도가 선양으로 옮겨진 뒤 랴오양은 요동의 권좌를 내주고

오늘날에는 화학공장이 들어선 인구 1백만명의 공업도시로 바뀌어

고도(古都)의 정취나 품격은 찾을 수 없었다.

오직 하나 시내 한복판에 우뚝 선 높이 70m의 요동 백탑(白塔)만이 그 옛날을 증언해 주고 있다.

11세기 요나라 때 세워진 이 팔각 13층 대리석 전탑(塼塔)은 우리 사신들에게

대륙적 스케일과 이국 정취를 한껏 심어준 요동의 명물로,

안목이 까다로운 안병욱 교수조차 정교한 조각과 가지런한 비례감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랴오양과 가까이 있는 선양은 청나라 옛 도읍답게 고궁(故宮)과 함께 청태조 누르하치의 복릉(福陵),

조선시대 선비들이 '붉은 큰 돼지'라는 뜻으로 홍태시(紅泰豕)라고 부른

청태종 황타이지(皇太極)의 소릉(昭陵)이 건재하고 있다.

그 모두가 만주족의 옛 영광을 말해주는 유적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선양은 동북 3성(랴오닝. 지린. 헤이룽장성)의 중심이 되어

인구 7백만명의 중국 4대 도시로 급성장하면서

마구잡이 개발과 도시 빈민의 처절한 삶으로 뒤엉켜 마치 30년 전의 서울을 보는 것만 같았다.

선양 시내에는 역사의 강, 훈허(渾河)가 유유히 흐르고 있다. 이른 아침 산책 삼아 강변으로 나가보니 강 건너 빈민들이 '목공(木工)' '전공(電工)' '문짝수리'라고 적힌 피켓을 달고 시내 인력시장으로 달려가는 길고 긴 자전거 행렬이 끝없이 이어진다.

그들이 일으키는 흙먼지를 뒤집어쓰고서 훈허의 흐린 물길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자니

소수민족으로 전락한 만주족의 서러운 처지가 마치 내 일인 양 다가온다.
중국을 지배하고 있는 한족(漢族)은 일찍이 변방을 소수민족으로 전락시키는

중화정책(中華政策)을 써왔다. 그 결과 요나라의 거란족, 원나라의 몽고족, 청나라의 만주족들은

모두 오늘날 변방의 소수민족으로 겨우 자치구를 만들어 사는 차별을 받고 있다.

이에 비할 때 동아시아 변방의 한 소수민족인 우리의 처지는 얼마나 당당한가.

중국의 56개 소수민족 중 모국(母國)을 갖고 있는 민족은 몽고족과 조선족밖에 없다.
이 사실은 동아시아 역사상 기적 같은 일이다.

그것은 우리의 조상들이 민족적 자립을 위해 대국과 벌인 완강한 저항과 투쟁,

그리고 현명한 외교적 처신의 선물이었다.

선양의 '붉은 큰 돼지' 무덤 앞에서는
한명기 교수가

삼학사(三學士)와 병자호란 때 끌려온 조선인 포로들의 비극적 삶을 감동적으로 강의하였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렇다면 그런 아픔의 대가로 우리가 얻은 것이 무엇이던가를

나는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나는 단호히 말하련다.

바로 그분들의 그런 희생 속에 우리 민족은 독립국가로 이렇게 살아남았다고.

연암 박지원은 인간은 슬플 때만 우는 것이 아니라

답답한 마음을 씻어내는 통쾌감이 일어날 때도 운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는 "참으로 울 만한 곳이요, 울어야 할 곳이다."
- 유홍준<명지대 교수.국제한국학연구소장>

- 중앙, 2002. 09. 27

 
 

[新연행록] 2. 한중 문화교류의 대동맥


 

山海關 열린 문엔 韓流 흐르는데…

선양 아파트엔 '한국식 공법' 현수막

이젠 뒤바뀐 문명의 물줄기 느껴져

 

                   “나는 미쟁이, 너는 넝마주이. 나는 자전거, 너는 인력거. 나는 호미,너는 대패.” 삶은 천형인가? 16억 인민이 떠돈다. 인민은 황사(黃砂)다. 하루가 왜이리 긴가. 부자는 더욱 부자되게 한다는 중화인민공화국. 가난한 자는 이젠 스러 없어지는 종족인가. [글ㆍ그림 임옥상] 

                          나는 미쟁이, 너는 넝마주이. 나는 자전거, 너는 인력거. 나는 호미, 너는 대패.

                          "삶은 천형인가? 16억 인민이 떠돈다. 인민은 황사(黃砂)다. 하루가 왜이리 긴가.

                       부자는 더욱 부자되게 한다는 중국인민공화국. 가난한 자는 이젠 스러져 없어지는 종족인가.
                        [글, 그림 임옥상]


  

선양(瀋陽)에서 베이징(北京)까지는 7백70㎞의 징선(京瀋)고속도로가 뚫려 8시간이면 닿을 수 있다.

그러나 연행(燕行) 사신들은 나귀로 20일이나 걸린 1천5백리 길을 우리는 버스로 가면서도 대능하(大凌河)의 진저우(錦州)에서 하루, 산하이관(山海關)의 친황다오(秦皇島)에서 하루를 묵고 난 후에야 다다른 긴 여정이었다.

 

그리하여 연행 사신들이 연경(燕京)의 조양문(朝陽門)으로 입성하면

옥하관(玉河館)이라는 조선관에 여장을 풀고 보통 두 달간 사신은 외교 활동을,

학자들은 유리창(琉璃廠)을 드나들며 학예 교섭을 벌였다.

 

그런 중 18세기 건륭제는 곧잘 연경에서 동북쪽 2백56㎞ 떨어진 승덕(承德)시 열하(熱河)에 있는

피서산장(避署山庄)에 가 있는 바람에 몇차례는 거기까지 가야만 했으니

박지원과 서호수의 연행록이 '열하일기'로 나오게 된 것이다.

우리의 여정은 거기를 종점으로 삼고 그들의 뒤를 쫓아갔다.

   

선양을 떠나 헤이산(黑山)을 거쳐 의무려산(醫巫閭山)이 있는 베이닝(北寧)으로 향하는데

랴오허(遼河)를 건너면서 우리는 요서(遼西) 땅으로 넘어선 것이었다.

요서평야 또한 광활하기 그지없었다. 사방이 지평선으로 둘러싸인 채 그 한 가운데를 달리니

차창 밖 풍광이 변하는 것이라곤 어느 순간부터 옥수수밭이 논으로 바뀐 것밖에 없었다.

그래서 추사 김정희는 '요야'(遼野)라는 시를 지으며

"하늘 끝은 어디메로 돌아갔는가/ 여기에 와서 보니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겠네" 라고 읊었다.  

 

그렇게 세시간을 달려 헤이산에 이르니 들판 저 너머로 검푸른 산맥이 낮은 포복의 자세로

모습을 드러냈고 반시간쯤 뒤 북령시에 다다랐을 땐 준수하고 신령스런 의무려산이

환한 웃음으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그 상쾌한 기쁨을 연암 박지원은

"진한 음식에 지쳐 있을 때 문득 밥상 위에 오른 야채 한 접시" 같았다고 했다.

   

의무려산을 등지고 자리잡은 베이닝시 한쪽 언덕받이에는

북진묘(北鎭廟)가 궁궐처럼 권좌를 틀고 있다.

먼 옛날 순(舜)임금이 중국의 명산 12곳에 진묘를 세우면서 의무려산을 동북지방의 진산으로 삼고

산신령에게 제사지내는 묘당으로 세운 것이다.

우리로 치면 계룡산 중악단(中岳壇) 같은 것으로

중원의 입장에서 보면 만주땅을 경영하는 거점 진지였던 것이다.

묘당 안에는 건륭제가 연경과 선양을 오갈 때마다 여기에 들러 지은 시를 새긴 56개의 비석이

정전(正殿) 앞마당에 3열 횡대로 늘어서 있다. 이광호 교수는 그 중에서도 의무려산엔

"조선인들이 새긴 글이 많다네" 라는 구절이 새겨진 비석을 바로 찾아내 우리를 흥분케 했다.

   

베이닝시는 오늘날 중국인조차 별로 찾아오지 않는 만주족 자치구의 작은 도시에 불과하지만

답사처로는 보고(寶庫) 같은 곳이었다.

시내에는 요나라 때 세운 숭흥사(嵩興寺) 쌍탑이 그림처럼 서 있고,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인 이여송(李如松)의 아버지로

영원백(寧遠伯)을 지낸 이성량(李成樑)의 묘도 있다.

   

더욱이 한국인으로서는 남다른 감회가 있는 곳이다.

김창업은 '노가재연행록'에서 고구려 석관묘 얘기를 들은 대로 기록하며

후대 학자가 규명해 달라고 했는데 1974년에 발견된 평양 덕흥리 벽화무덤은

바로 이곳 유주(幽州) 자사의 무덤이고 보면 여기가 고구려의 영역이었음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기는 홍대용의 명저 '의산문답(醫山問答)'의 무대다.

   

꽁생원 같은 허자(虛子)라는 인물이 허세를 떨치다가 결국은 이곳 의산(의무려산)에 와서

실옹(實翁)을 만난 뒤 깨우침을 얻는다는 철학적 소설의 고향인 것이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있기에 열하가 우리 뇌리에 살아있듯이

홍대용의 '의산문답'이 있는 한 베이닝의 의무려산은 우리의 가슴 속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면에서 여기는 연행록 답사의 하이라이트였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아름다운 저녁 노을이 홍채를 짙게 뿌리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온갖 상념을 뒤로 하고 베이닝을 떠났다. 그리고 밤늦게 진저우에 다다랐을 때

어둠 속의 긴 다리를 건너 시내로 들어섰다.

지나고 나서 보니 우리는 역사의 강, 대능하를 건넌 것이었다. 대능하!

역사학자들은 여기가 고조선의 중심지였다, 아니다, 경계선이었다 라며

제각기 학설을 펴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비파형동검으로 상징되는 중국과는 완연히 다른

동북아 청동기문화를 꽃피웠던 지역이다.

   

대능하의 진저우부터 산하이관까지는 줄곧 발해만을 타고 내려가는 길이다.

길은 육지 쪽으로 들어와 있어 바다를 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혹 나타날까 싶어

나는 고개를 한시도 오른쪽으로 돌리지 못했다.  

 

산하이관은 천하제일관이라는 명성에 값하는 위용을 갖추고 있었다.

진시황이 처음 쌓고 명나라 서달(徐撻)이가 새로 축성한 이 산하이관은 만리장성의 출발점으로

우뚝 솟은 각산(角山)을 타고 올라 연산(燕山)산맥을 따라 치달려 베이징 북쪽 팔달령 장성을 거쳐

둔황(敦煌)의 옥문관(玉門關)까지 1만리로 뻗어 있다.

그중 유독 산하이관만이 바다와 맞닿아 장성의 성벽이 발해 바다 속까지 뻗어

노룡두(老龍頭)가 되고 징해루(澄海樓)라는 망해루를 낳았다.

   

만리장성은 마오쩌둥(毛澤東)이 일찍이

"장성에 오르지 않으면 장부가 아니다(不到長城非好漢)"라고 했듯이, 중국의 상징이자 자랑이다.

그러나 각산장성에 올라 발해만을 굽어보는 내 심정은 달랐다.

당신네들은 장성을 쌓으며 중원을 보호해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그렇게 2천년간 누렸지만

당신네들이 잠자는 동안 동아시아의 세계적 위상이 낮아진 것은

결코 중국만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럽은 문화의 주도권이 계속 바뀌었다.

16세기 이탈리아에서 17세기 스페인과 영국으로, 18세기엔 프랑스로, 19세기엔 독일로,

그리고 지금은 아마도 미국으로, 그러나 동아시아는 잘 하나 못 하나 중국이 쥐어왔다.  

20세기 들어와 일본이 그 위치를 차지했으나 그들은 제국주의로 변질했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동아시아 문화를 이끌어갈 자격을 상실했다.

더욱이 그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 한 주변국들이 용납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면 한국은?

   

한중 수교 10주년. 이제 세월이 바뀌어 산하이관 열린 문으로

이미 한류(韓流)가 깊이 들어가 있다. 문명은 강물처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선양의 한 고층 아파트에는 '한국식 공법'이라고 자랑스럽게 쓴 현수막이 나부끼고 있었다.

모두들 말하기를 중국은 우리보다 10년 이상 뒤떨어졌다고 한다.

그것은 연행사신과 우리의 길 사이에 있는 뚜렷한 차이였다.

그 사실의 의미를 지금 중국도 한국도 올바로 간취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은 만리장성 밖의 문명을 존경해본 적이 없어

우리의 월드컵 축구 4강 진출을 그렇게 시기했다.

우리는 우리대로 중국에 영향을 주어본 역사적 경험이 없기에

중원에 부는 한류를 어떻게 살려내 동아시아 문화에 기여할 수 있을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한국은 동아시아 문화권의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전환하기엔 너무도 준비가 모자랐다.

이제 동아시아의 생존과 영광을 위해 우리는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할까.

홍대용의 '의산문답'은 우리에게 이렇게 충고하고 있다.

허자(虛子)의 허상을 버리고 실옹(實翁)이 되라고.

- 유홍준 <명지대 교수.국제한국학연구소장>

- 2002. 10. 4

 

 

 

 

[新연행록] 3. 압록강·선양에서 던지는 질문 
 
압록강에 뿌려진 눈물 언제나 마를건가
조선 포로들이 걸었던 길 걸으니 그들의 절망이 눈에 밟히는 듯
淸나라 역량까지 빨아들인 중국 다시 무서운 波高되어 용틀임
 

◇ 풍경 1 :

 

압록강엔 눈물이 더해지고=압록강 너머 요동 벌은 가고 싶지 않은 '오랑캐의 땅'이었다.

만주족 오랑캐! 1636년의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조선 지식인들의 눈에 비친 그들은

인간이 아닌 금수(禽獸)였고, 그저 '무좀 같은' 하찮은 존재였다.

하지만 이제 오랑캐 땅을 밟기 싫다고 해서 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병자호란 이후 처지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만주족의 청(淸)은 명(明)을 대신하여 조선의 '상국(上國)'이 되었고,

조선은 해마다 상국을 찾아 황제를 알현해야 했다.

더욱이 그 오랑캐의 땅에는 포로로 끌려간 부모와 형제, 아내와 자식들이 붙잡혀 있었다.

1637년 1월, 조선 국왕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三田渡)로 나아갔다.

그리고는 높다랗게 쌓은 수항단(受降壇) 위에 거만하게 앉은 청 태종 홍태시(紅泰豕)에게

세 번 큰절을 올리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다. 홍태시란 '붉고 큰 돼지'란 뜻이다.

만주족을 오랑캐라고 멸시했던 조선이 태종을 부르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인조는 '인간'이 아닌 '돼지'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것도 무조건 항복이었다.

이윽고 홍태시는 사로잡은 조선인 포로들을 이끌고 귀국 길에 오르면서 인조에게서 다짐을 받아낸다.



"내가 데려가는 포로들 가운데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조선으로 도망쳐 가는 자는 불문에 부친다.

하지만 압록강을 건너 한 발짝이라도 청나라 땅을 밟은 뒤에 도망치는 자는

조선이 도로 잡아 보내야 한다."

청은 조선인 포로들을 '보배'로 여겼다.

명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날이 갈수록 영토는 넓어졌지만 인구가 부족했던 그들에게

농경 기술이 뛰어난 조선인 포로들은 귀중한 노동력이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기막힌 일이었다.

선양(瀋陽)으로 끌려갔던 포로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도망쳐왔다.
하지만 조선 조정은 그들을 붙잡아 선양으로 도로 보내야만 했다.

목숨을 걸고 수천 리 길을 탈출해온 혈육과 다시 헤어져야 하는 처참한 풍경이 빚어졌다.

그렇게 도로 선양으로 보내진 사람들은 청나라 군인들에게 끌려가 발뒤꿈치를 잘리는 형벌을 받았다.

조선은 눈물에 젖었다.

선양을 탈출하여 압록강을 건너 천리 길을 도망쳐온 혈육들을 도로 보내야 하다니….

이윽고 청은 '사람 장사'를 벌인다.

혈육을 데려가고픈 조선인들에게 은(銀)을 싸들고 선양으로 오게 만들었다.

선양에서는 정기적으로 '인간 시장'이 열렸다.

하지만 '몸값'으로 은을 구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나마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몸값을 치르고 귀환했던 포로들의 것이든, 몸값이 없어 그저 만주 쪽을 바라보고 통곡했던

이산 가족의 것이든 압록강에는 슬픈 눈물이 더해지고 있었다.

오늘도 압록강은 유장하게 흐른다.

단둥(丹東)을 찾은 여느 한국인들처럼 중국인들에게 돈을 쥐어주고 압록강 물 위로 보트를 띄운다.

강 건너 북한 땅을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서다.
실제 보트 위에 서면 강 언덕 저편 북한 동포들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이 가깝다.

문득 베이징(北京)의 '외교 거리'에서 중국 공안원들에게 끌려가는 탈북자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들도 분명 눈물을 뿌리고 압록강을 건넜을 것이다.

압록강에 뿌려지는 민족의 눈물은 언제나 마를 것인가.


◇ 풍경 2:

 

선양에서 던지는 질문

= 청군에게 끌려가거나 목숨을 걸고 도망쳐오면서 조선인 포로들이 걸어야 했던 길,

몸값을 마련하여 혈육을 데리러 가던 길,

내키지 않지만 청 황제에게 문안을 드리러 조선 사신들이 걸어야 했던 길. 그 길을 따라 나도 걷는다.

변문(邊門), 봉황성(鳳凰城), 초하구(草河口), 연산관(連山關)….

조선 사신들의 연행록(燕行錄)에 나오는 지명들을 다시 보니 반갑다.

봉황성을 지나면서 주변 풍경과 산세가 낯설지 않다.

초하구의 도로 양쪽엔 버드나무와 밤나무가 심어져 있고 벽돌집 지붕엔 호박 넝쿨이 흐드러져 있다.

전형적인 우리네 시골의 옛 풍경이로되 가끔 눈에 띄는 '차이나 텔레콤'의 이동통신 중계탑이

달라진 오늘의 모습을 보여준다.

라오양(遼陽)을 지나 이윽고 선양이다.

중국 전체에서 다섯번째로 큰 도시이자 동북지방 최대의 공업도시인 선양.

한때 '동북의 텍사스'로 불릴 만큼 일본, 러시아 등 제국주의 침략의 흔적이 남아 있는 선양에도

예외 없이 개혁과 개방의 바람은 찾아들고 있다.

짐을 풀자마자 북릉(北陵)과 고궁(故宮)을 찾는다.

북릉에는 병자호란을 일으킨 청 태종이 묻혀 있고, 고궁에는 당시 잡혀온 소현세자를 비롯한

수많은 조선인 포로들의 발자취가 서려 있다.
굴비 두름 엮이듯이 끌려와 '오랑캐'의 처분만 기다려야 했던 포로들의 절망이 눈에 밟힌다.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사대부의 기개를 지켰던 삼학사(三學士)의 모습도 어른거린다.

"한국 사람이라면 청 태종의 무덤에 침이라도 뱉어야 한다."

북릉을 다녀간 어느 한국인 문사가 했던 말이라던가.

3백60여 년 전 포로로 끌려와야 했던 선조들의 쓰라림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으리라.


 

청태종의 무덤. 봉분의 나무는 땅과 하늘의 기(氣)를

이어주기 위해 심은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조선 사람들은 청 태종을 '홍태시'라 불렀고,

한족들은 "오랑캐의 운수는 백년을 가지 못한다"고 만주족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하지만 그 오랑캐가 세운 청은 중원을 차지하고, 2백60여 년 동안이나 한족들의 머리 위에 군림했다.

오늘날 중국이 자랑하는 광대한 영토도 사실은 만주족의 지배 아래서 획득된 것이었다.

'한줌밖에 안되는 오랑캐들'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그들의 능력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사람들은 청의 융성을 이끈 원동력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먼저 꼽는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내정은 건전했고, 대외정책은 탁월했다.

누르하치의 여덟 째 아들인 홍태시가 그의 형들을 제치고 황제가 된 것만 봐도 그렇다.

누르하치가 죽은 뒤 아들들은 토의를 거쳐 가장 '능력 있는' 홍태시를 옹립했고,

이후 두말 없이 그를 중심으로 뭉쳤다.

그리고 그들은 명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열심이었다.

당시 어지럽고 혼란했던 명을 탈출해 많은 사람들이 만주족에게 투항했다.

가렴주구를 못 이겼던 농민과 기술자들, 열악한 대우에 시달리던 병사들,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인들에게 환멸을 느낀 지휘관 등등….

만주족은 그들을 우대하고 적재적소에 배치해 농사짓는 기술, 대포 만드는 기술 등 선진 기술을

모두 습득했다. 그것은 부메랑이 되어 명을 쓰러뜨리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만주족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심초사했다.

중원을 차지한 뒤에도 고유의 문자를 철저히 지키고,

만주족 본래의 근거지에는 한족들이 출입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무지막지한 한족들의 동화(同化) 능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개방을 하면서도 자기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것.

그것이 바로 만주족이 중원을 차지하고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이러구러 시간은 흘렀다.

오늘 중국에서 만주족은 소수 민족이 되었고,

한족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홍태시도 그저 역사 속의 인물일 뿐이다.

하지만 만주족의 민족적 역량까지 흡수해버린 중국은 이제 세계를 향해 용틀임을 하고 있다.

무시무시하게 밀려오는 중국의 파고(波高)를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어떻게 넘을 것인가?

선양 북릉의 홍태시 무덤 앞에서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질문이다.

한명기 교수 <명지대 사학과>

사진=최정동 기자 <
cjd11@joongang.co.kr>

- 2002.10.11 중앙

 

 

 

[新연행록] 4. 연행사들의 혼이 담긴 의무여산(醫巫閭山)

 

파이의무려산 원경



신연행록 답사길

 

 

 

바람에 실려오는 홍대용의 탄식

 

조선 연행사들의 발자취를 찾아서 길을 떠난 '신연행록' 답사5일째,

우리는 선양을 떠나 랴오시 지방을 가로질러 베이전현에 있는 의무려산으로 향했다.

선양에서 3백20리가 넘는 이 길은 무성한 옥수수 밭이 무작정 펼쳐지는 광활한 대지로

조선의 학자들이 그 아득한 지평선을 바라보면서 무한한 감동을 받으며 걷고 또 걸은 길이다.

조선의 학자들은 의무려산까지 풍광 하나 변하지 않는 길을

나귀를 타고 닷새 동안 길을 재촉하자니 지루함조차 느끼기도 했단다.

그래서 마침내 벌판 위에 우뚝 솟은 의무려산의 장중한 산세를 만나면

저마다의 감동을 말하곤 했다.

의무려산 부근 북진묘에는 청의 건륭제가 조선 사신들에 대해 언급한 비석이 있다.  

 

의무려산 부근 북진묘 
     의무려산 부근 북진묘에는 청의 건륭제가 조선 사신들에 대해 언급한 비석이 있다.

 

노가재 김창업(1658~1721)은

"닷새를 가도 벗어날 줄 몰랐더니 이제야 그 끝에 이르게 되었구나"라고 감탄하면서

"자연이 인간을 만든다더니 이 광활한 대자연이 중국인의 그 여유로움을 낳았는지 모르겠다"

고 말했다.

 

의무려산은 그 이름 자체가 이채롭다.

의(醫), 무(巫)는 모두 '무당' 또는 '치료한다'는 의미를 지니는데,

만주어로는 '크다'(大)는 뜻이 된다.

굳이 새기자면 세상에서 상처받은 영혼을 크게 치료하는 산이라고 할 수 있다.

 

의무려산은 3천년 전 주(周)나라 시대부터 시작해 청(淸)나라에 이르기까지

국가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렸던 열두 곳의 진산(鎭山) 가운데 하나였다.

아울러 장백산(長白山), 천산(千山)과 더불어 중국 동북지역의 3대 명산 중에서도 첫째로 꼽힌다.

또 의무려산은 기자(箕子)의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며,

한편 고구려의 옛 영토였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연행사들은 이래저래 옛 고향을 찾는 심정으로

이 산을 탐방하였던 것이다.

 

조선 연행사로서 처음 이 산을 올라 기행문을 남긴 사람은 월사 이정구(1564~1653)였고,

그로부터 1백여 년의 세월이 지나 노가재 김창업이 1712년에

이정구의 유람기를 손에 들고 의무려산에 올랐다.

 

김창업은 의무려산에 오른 감상을 그림을 그리듯 상세히 묘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관음각(觀音閣)을 지나 산 정상의 절벽에 잇대어 있는 조그만 절 관음사(觀音寺)에서

숙박을 하였고, 샘물이 달고 이슬 같다는 감로암(甘露庵)을 찾았으며,

바위틈으로 난 나무뿌리를 휘어잡고 있는 관제묘(關帝廟) 옛터로 올랐다.

특히 '도화동(桃花洞)'이라는 세 글자를 발견하고, 여기가 바로 조선에는 없는 선경이라고 감격했다.

 

도화촌은 의무려산의 남쪽에 있으며,

예전에 1천 그루의 복숭아꽃이 있어 그런 이름이 생겼다고 하는데,

우리는 실제로 1만 그루도 넘을 복숭아가 농원에 즐비한 것을 보았고

막 따온 싱싱한 복숭아를 한바구니 사서 함께 먹으며 그 옛날 김창업의 기행문을 상기해 보았다.

김창업은 시. 서 .화(詩. 書. 畵) 모두에 능했고,

특히 화가로 일가를 이뤄 겸재 정선(鄭)의 그림 스승이기도 했다.

그는 의무려산 마루에 걸터앉아 이 아름다운 절경을 함께 할 사람이 없음을 한탄하며,

일기장에 여섯 겹의 의무려산을 그리기 시작했다.

 

감로암의 스님은

그의 그림을 보면서 어떻게 산 깊은 곳까지 이렇게 그릴 수 있냐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러자 김창업은 그 스님에게

"아름다운 여인은 미운 아이를 낳지 않고, 한 종지 국으로 온 솥의 맛을 알 수 있는 법이니,

어찌 산을 두루 다 편력하고 나서야만 이 산의 본 모습을 알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면서 여유롭게 그림을 그렸단다.

 

김창업 이후 50년이 흐른 뒤

담헌 홍대용(1731~1783)이 이 산을 또 유람하고 돌아와 '의산문답(醫山問答)'이라는

철학소설을 남김으로써 의무려산은 연행길의 명소가 됐다.

 

'의산문답'은

18세기 실학파 지식인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실옹(實翁)이라는 선비와

명분, 공론만을 일삼는 허자(虛子)라는 두 상반된 캐릭터 사이의 문답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허자는 숨어서 독서한 지 30년 만에 우주의 원리와 유불선(儒佛仙) 삼교(三敎)의 진리를 깨우치고

세상에 나온다. 허자는 자신의 학문의 깊이가 세상을 놀라게 할 것이라 자부하고

곳곳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학설을 폈다. 그러나 허자는 가는 곳마다 오히려 비웃음만을 사게 된다.

그러자 허자는 '작은 지혜와 더불어 큰 것을 이야기할 수 없고, 비열한 세속사람과 더불어

도(道)를 말할 수 없다'고 탄식하고는 자신의 학문을 알아 줄 선비를 찾아 중국의 연경으로 갔다.

그러나 여기서도 알아주는 선비를 만날 수 없었다.

 

이에 허자는 '철인이 말랐는가, 나의 도가 잘못되었는가'라고 탄식하고는 세상을 도피하리라 생각한다.

바로 그때 허자가 찾은 곳이 이 의무려산이었다.

의무려산에서 허자는 실옹이라는 선비를 만나 그와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마침내 자신이 30년간 해온 공부가 허학(虛學)이었음을 비로소 깨닫고

실학(實學)에 이르게 된다는 내용이다.

 

실옹과 허자의 대비는 곧 실학사상의 본체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홍대용은 왜 이 소설의 무대를 굳이 의무려산으로 했을까.

아마도 홍대용의 눈에 비친 당시 조선의 현실은 허자들이 온통 들끓는 상황이었고

그들은 세계의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는 답답함이 있었기 때문에

그 무대를 중국과 조선의 경계라 할 의무려산으로 택한 것이 아닐까.

아울러 의무려산은 바로 의사처럼 병을 치료하는 의미를 갖고 있으니

'의산(醫山)'이라는 제목이 더없이 적절했을 것이다.

 

실옹과 허자의 경계, 중국과 조선의 경계, 어제와 오늘의 경계에서 의무려산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현실적 이해득실은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21세기에도 명분과 공론만을 일삼는 허자는 여기 저기 존재하고 있다.

신연행길을 가는 우리 답사 여정도 허자가 아닌 실옹을 찾는 과정이리라.

 

홍대용 이후 2백여 년이 흘러 이곳을 다시 찾은 우리는 산의 입구에서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친필로 '醫巫閭山'이라 새겨진 웅장한 돌기둥을 만날 수 있었다.

우리는 의무려산 중턱까지 올라 성수분(聖水盆)에서 케이블카(閭山索道)를 탔다.

사전 지식이 없어 그냥 산 정상으로 오르는 줄만 알았다.

그러나 불안하기 짝이 없는 이 케이블카는 왼쪽 능선을 타고 옥천사(玉泉寺)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그 바람에 조선 연행사들이 즐겨 탐방했다는

망해사(望海寺). 도화동(桃花洞). 관음각(觀音閣)은 보지 못했고,

김창업이 직접 남겼다는 이름 석자와 홍대용이 옛 선배를 따라 새겨 놓았다는 글귀도 찾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옥천사에서 남쪽으로 아스라하게 바라보이는 발해(渤海)를 볼 수 있던 것은 큰 기쁨이었다.

나는 의무려산의 소나무 숲길을 따라 난 등산길을 거닐며

어쩌면 한국 여성으로는 처음 의무려산에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남다른 감회에 젖기도 했다.

 

이번 신연행록 답사에서 무엇보다도 또 다른 '대지(大地)'를 볼 수 있었던 것이 내 나름의 성과다.

1931년 펄벅 여사가 그려낸 왕룽의 아내 아람의 고단한 삶의 현장,

바로 끝도 없이 펼쳐진 고난의 대지와는 다른 모습이다.

 

오늘날 중국은 어찌됐던 남녀가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보수를 받는 '동공동수(同工同酬)'의

남녀평등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내고 있다.

그야말로 하늘과 대지의 절반을 여성이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중국 곳곳에는 '인인유책(人人有責)'이라는 표어가 붙어 있었다. '사람마다 책임이 있다'는 뜻이다.

이 표어대로 중국이 남녀의 구분을 넘어 사람마다 국가의 번영과 운명에 책임을 지는 사회로 간다면

지난날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런 감회를 속으로 새기고

의무려산 산자락을 타고 넘어가는 빛 고운 저녁노을을 보며 산하이관(山海關)으로 향했다.

- 박지선 박사 (경희대 강사. 국문학)

- 중앙일보/ 2002년 10월 24일

 

 

 

 

 

[新연행록] 5. 산하이관(山海關) 길, 북학(北學)의 길 
 
長城 끝자락에 올라 '中華'를 뛰어넘다 국경 관문도시 산하이관, 선양과 베이징의 중간

 


‘천하제일관’이라 쓴 현판이 눈길을 끄는 산하이관.

선양과 베이징의 중간에 위치한 이곳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 관문인 동시에

조선에서 보면 서해인 발해와 맞물려

연행길의 절정이라 할만했다. [산하이관=최정동 기자]


'신연행록' 답사 여섯째 날,

일행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 산하이관(山海關)으로 갔다.

선양(瀋陽)에서 4백㎞를 달려왔고, 베이징(北京)까지는 3백50㎞를 가야 한다.

선양과 베이징의 중간에 위치한 산하이관은 중국 제일의 국경 관문(關門)도시였다.

명(明)나라 장수 조대수(祖大壽)의 패루가 있는 흥성(興城)을 지나 랴오닝(遼寧)성과 허베이(河北)성의 경계에 이르자 '갈석산(碣石山)8백m' 란 표지판이 나타났다.

일찍이 순(舜)임금이 갈석산을 경계로 동쪽은 삼한(三韓)땅이라 해서 동북의 국경으로 삼았다고 한 곳이 이곳이던가.

 

'삼국사기'에도 '패수'(浿水)에서 출병한 고구려의 대군이 갈석산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으니 갈석산이란 표지는 '삼한'의 여행자를 무한한 감회에 젖게 했다.

갈석산을 돌아들면 산하이관이고 만리장성이어서 연행(燕行)의 절정이라 할만한 길이었다.

 

연암 박지원이 "만리장성을 보지 않고는 중국이 큰 나라임을 모를 것이며, 산해관을 보지 않고는 중국의 제도를 알지 못할 것"이라며 산하이관과 만리장성에 대한 체험을 토로한 바 있다.

'천하제일관'(天下第一關)이라 현판을 써붙인 산하이관의 위용은 대륙과 발해(渤海)가 만나는 목줄에 위치한 노룡두(老龍頭)의 장관과 어울려 길손을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일찍이 노가재 김창업(金昌嶪)이 "산세는 1만마리 말이 달리는 듯하고, 장성은 산세를 따라 굽고 휘어서 보였다 숨었다 하며 사람의 정신을 잃게 한다"는 표현이 실감났다.

성(城)에 대한 한. 중. 일 3국의 양식은 흥미롭다.

우리나라가 읍성(邑城)을 쌓았고 일본이 성주(城主)의 집을 성으로 쌓았던 데 비해서,

중국은 나라를 성으로 쌓은 것이다.

큰 나라이면서도 주위의 이민족을 두려워하여

이 산하이관에서부터 저 둔황(敦煌)이 있는 간쑤성(甘肅省)의 자위관(嘉關)까지

만리를 장성으로 쌓았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것은

조선의 연행사들이 남긴 일기에 '조대수와 오삼계(吳三桂)의 이야기'가 양념처럼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조대수는 임진왜란 때 원군으로 조선에 출병한 일이 있는 명나라의 장수 조승훈(祖承勳)의 아들이다.
산하이관 1백㎞ 앞 흥성에서 이 장성을 지켰어야 할 조대수가 오히려 장성을 허물고 도망쳤다.

또 성을 지키는 총병(摠兵)이었던 오삼계는 스스로 문을 열어 주며 청나라를 끌어들였다.

조선의 연행사들은

"산해관의 남쪽에는 만리장성이 무너진 곳이 있고 지금도 보수하지 않고 있다"고 기록하면서

거대한 장성을 쌓아 놓았지만 결국 내치(內治)에 구멍이 뚫려버린

역사의 아이러니를 경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바다로 뻗은 노룡두에서 두꺼운 유리로 막아 놓은 헐려진 옛 성을 볼 수 있다.

중국의 역사는 한족(漢族)과 다른 민족이 대개 2백50여년을 주기로 번갈아가며 중원을 차지해왔다.

청나라보다 2백50여 년 전에는 북으로 여진과 몽골족이 장성을 넘어 중원을 침략했다.

이렇게 보면 중국의 기나긴 역사의 만리장성은 주기적으로 헐렸다고 볼 수 있겠다.

만리장성이 용의 뿔처럼 치솟았다는 각산(角山)을 거쳐

우리 일행은 동쪽에 있는 강녀묘(姜女廟)를 찾았다.
강녀는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을 때 동원된 시골 인부 범랑(範郞)의 아내다.

그녀는 남편을 찾아 헤매다 이곳 장성의 끝자락에 와서 울다 지쳐 망부석(望夫石)이 되었다고 했다.

담헌 홍대용은 강녀의 소상 앞에 나아가 두 번 절하여 그 넋을 위로하고,

송나라 시인 문천상(文天祥)의 시를 자세히 해설하며 강녀를 기리고 진시황을 비판하는

긴 글을 일기에 남겼다. 이처럼 조선의 연행사들은 만리장성 한 편에 자리한 강녀묘를 통해

중국 문명을 보는 나름의 객관적 안목을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 일행도 옛 사신들처럼 사당에 나아가 두 번 절하고 제사를 지냈다.

나는 달리는 차안에서 급히 쓴 간략한 제문에서

"고국의 어포와 소주로 조촐한 제사상을 차리는 뜻은

역대 조선 사신들이 제사해 온 옛 자취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했고

"길이 만대에 역사를 되돌아보도록 가르치는 역사의 증거로 남으시라"고 했다.

함께 음복을 하고 망부석이 자리한 언덕에 서니, 사방 풍경이 한눈에 잡혔다.

이러구러 석양의 노을이 지기 시작할 무렵에야 일행은 서둘러 노룡두로 향했다.

각산에서 시오리나 뻗친 이 해변의 장성은 발해를 막고 있다.
노룡두의 징해루(澄海樓)란 누각에서 바라보는 발해는

한국의 서해와 맞닿아 역사를 머금고 출렁이고 있었다.

이 자리에 섰을 조선 연행사들의 심회를 헤아려 보노라니

담헌 홍대용이 압록강을 건너 구련성(九連城)에 들어가면서 읊었다는 시심을 알 만했다.

 

홍대용은 자신이 남긴 '을병연행록'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간밤에 꿈을 꾸니 요동 들판을 날아 건너
산해관 잠긴 문을 한 손으로 밀치도다.
망해정(望海亭) 제 일층에 취후(醉後)에 높이 앉아
갈석(碣石)을 발로 박차 발해(渤海)를 마신 후에
진시황(秦始皇) 미친 뜻을 칼 짚고 웃었더니
오늘날 초라한 행색이 뉘 탓이라 하리오.


홍대용은 중화주의(中華主義)를 훌쩍 뛰어 넘는 역사인식을 보여주었다.

중국도 세계의 중심은 아니며 나라마다 모두 각각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상대주의적 역사관을 뚜렷이 했다.

중국 이외의 나라도 야만이 아니라 문화와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이른바 '역외춘추론(域外春秋論)'이다.

근대 이전 조선의 연행 사절은 매년 두 번 이상, 한해에도 1천명 이상이

대개 이 길을 따라 여섯달씩 걸려 베이징을 오갔다.
이 연행길을 통해 천주교를 비롯한 서학(西學)이 들어왔고 또 북학(北學)이 꽃피기도 했다.

1778년 초정 박제가가 자신의 저서 제목을 '북학의(北學議)'라 이름한 이후

'북학'이란 말은 청나라를 오랑캐로 볼 것이 아니라

선진 문물이 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대표적 실학자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은 모두 연행 경험을 바탕으로

북학을 주장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한ㆍ중 수교 이후 중국을 찾은 한국 여행자는

1993년 11만여 명에서 지난해 1백67만 명으로 15배나 늘었다.

하지만 베이징이나 백두산 부근에 집중되고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길은 사람이 다녀서 넓어진 발자국의 비석이다. 다니지 않으면 금세 황폐화하고 묻혀 버린다.

조선 연행사들 발자국의 비석을 찾는 연행의 추체험, 이런 역사의 정신이 이어졌기에

오늘의 당당한 한ㆍ중 관계가 있고, 한류(韓流)가 있는 것이겠다.

우리 일행이 한ㆍ중 수교 10주년을 맞는 해에
'신연행록' 답사에 나서

북학의 길이었던 이 산하이관을 다시 찾는 뜻도 여기에 있었다.

진시황의 불사약(不死藥) 전설로 유명한 친황다오(秦皇島)는 이날의 마지막 행선지였다.

공교롭게도 이날 친황다오 부근 베이다이허(北戴河) 해변에 있는 별장에는

장쩌민(江澤民) 주석을 비롯한 중국 현정부의 수뇌들이 모였기에 다소 긴장이 감돌기도 했다.

하지만 옛 연행사들도 보았을 발해는 여전히 우리 앞에서 옛날과 마찬가지로 철썩이고 있을 뿐이었다.

- 김태준 교수
- 사진=최정동 기자 <
cjd11@joongang.co.kr>
- 2002.11.01

 

 

[新연행록] 6. 백이 · 숙제 묘에 가다
조그만 비석 옆 교도소 들어서 처량한 그림자만
사회주의 집권 후 봉건 잔재라며 홀대하며 방치
 


쓰레기 더미의 백이숙제.
충정이란 이데올로기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했나.

그러나 서러워 마라. 고결함도 결국은 썩는 법.
봉건주의, 사회주의, 자본주의 모두 다 끌어 모아 함께 썩어라.

그래서 다시 태어나라.[글ㆍ그림 임옥상]

 

'신연행록' 답사단 가운데 나의 역할은 색다른 것이었다.

도시와 유적지 곳곳에서 만나는 간판. 현판. 비문의 판독과 해석을 통해 다른 교수들의 이해를 도왔다.

단둥(丹東)에서 러허(熱河)까지 가는 동안 중국의 현대어로 된 수많은 간판. 표어. 현수막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可口可樂'(코카콜라).

'百事可樂'(펩시콜라).

'肯德基'(켄터키치킨) 같이

한국인들에게 익숙해진 말들과 함께

'熱狗'(핫도그).

'愛思'(에이즈) 등의 외래어를 중국식으로 표기한 것을 보고 잠시 생각하다가 그 뜻을 알아차리고는 함께 웃고 즐겼다.

유적지에서 본 글귀들은 인문의 향기와 운치가 넘치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식 간판, 표어와 차이가 났다.

전통 건물의 처마, 기둥 등에 걸린 주련, 돌에 새긴 시. 비문을 가는 곳마다 수없이 접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어디 중국뿐이겠는가. 일본이나 우리나라의 유적지도 마찬가지다.

답사 이후 처음 만난 감동적인 글씨는

단둥과 선양(瀋陽)의 중간에 있는 봉황산 정문 양쪽 기둥에서 볼 수 있었다.
휘갈긴 글씨체로

"신주람승무쌍지(神洲攬勝無雙地), 화하역험제일산(華夏歷險第一山)"이라고 씌어 있었다.

"중국의 빼어난 경치를 다 가져와도 이와 짝이 될 곳이 없으며,

중국의 험난한 곳을 두루 다녀보아도 이곳이 제일이다"라는 내용이다.

일찍이 연암 박지원도 연행(燕行) 과정에서 들른 술집의 깃발에 씌어 있는 문구를 소개한 바 있다.

"이름을 알고 싶으면 말을 멈추시고(問名應駐馬), 향기를 맡고 싶으면 마차를 세우시오(尋香且停車)"

라는 멋드러진 글귀가 휘날리는 술집을 아무리 바쁜 연행길이라 해도

차마 그냥 지나치지는 못했으리라.

의무려산의 산신을 모신 북진묘에 왔을 때 나의 눈과 마음은 누구보다 바빴다.

박지원이 "정전 앞뒤에는 역대의 큰 비석이 나란히 서서 마치 파 이랑과 같다"고 소개한 것처럼

커다란 비석들의 숲을 이루고 있었다.


청나라 건륭제가

"조선 사람들이 새겨둔 글귀가 많으니, 기자의 홍범구주 문화가 지금도 전해오네

(多有朝鮮人勒句, 箕疇文化至今漸)"라고 쓴 시비를 먼저 찾아보았다.

그런데 이때 북진묘를 안내하고 해설하는 중국인 아가씨가

'여산시선(閭山詩選)'(遼寧人民出版社)을 들고 나와 이곳의 비문이 모두 이 책에 실려 있다고 자랑했다.
책이 다 팔리고 없어 애걸해 안내양의 교본을 사서 급히 찾아보니,

뜻밖에도 건륭제의 이 시가 실려있지 않았다.

단순 착오일까 아니면 조선이라는 문구 때문에 빼버렸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의심하는 사이에 조선의 연행사신들에 대해 언급한 또 다른 한편의 시가 눈길을 끌었다.


돌벽에는 물줄기가 연이어 흘러내리는데                       (石崖幡落垂紳)
글을 새긴 사람 가운데는 동해 사람이 많이 보이는구나   (勒句多看東海人).
언어는 다르지만 시의 글자가 같으니                            (詩字不殊言語異)
문자가 같아서 바르고 바르지 않은 사람을 알 수 있구나  (同文可識正罔倫).

조선인들이 의무려산의 성수분(聖水盆)에 새긴 많은 시의 내용을 '문자가 같다'는 사실 때문에

건륭제 자신도 이해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사실 나 역시 중국과 한국의 '문자가 같았다'는 것 때문에 이번 여행단의 일원이 되었고,

연행 사신들의 풍성한 기록도 '문자가 같다'는 사실 때문에 가능했다.
중국과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지역이 동일한 문자를 수천년 동안 사용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거역할 수 없는 역사적 현실이다.

동양철학을 전공하는 나에게 이번 답사 중에 가장 충격적인 경험은

산하이관(山海關)을 지나 루룽(盧龍)현의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묘에 갔던 일이었다.
고급 호텔의 안내자조차 백이와 숙제 묘의 위치를 모르는 것은 물론,

그런 묘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것은 당혹스러운 경험의 시작에 불과했다.

서울에서 미리 준비해간 이 지역의 옛 지도에 의지해 백이숙제 묘소에 도착했을 때

"해도 해도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고

당혹스러움을 넘어 가슴이 아파오기까지 했다.
꼬불꼬불 골목을 지나니 백이와 숙제가 사용했다던 우물 앞에

'이제정(夷齊井)'이라 쓴 녹슨 안내표시판이 서 있었다. 조금 돌아 들어가니 언덕이 나왔다.

우리에게 고죽국(孤竹國) 수양산(首陽山)으로 알려진 이 언덕에

'이제고리(夷齊故里)'라고 쓴 조그마한 비석과 '청절묘(淸節廟)'라고 쓴 글씨조차 없었다면

이곳이 쓰레기장임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동아시아 지성사에서 지조와 청렴의 대명사로 꼽혔던 백이숙제의 묘는 쓰레기 더미에 둘러싸여 있었다.

권좌의 유혹을 팽개치고, 한점 티끌없이 착하게 살며 맑은 정신의 자유를 누리다가,

타락한 폭군을 몰아낼 혁명의 의지를 키우던 문왕을 찾아 수만리 길을 찾아간 현자가

바로 백이와 숙제가 아니었던가.

공자는 그들의 마음을 읽어

"인을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하다가 인을 실현하게 되어 원망할 것이 없던 분들"이라고 칭송하였으며,

맹자 역시 "맑은 성인(聖之淸者)"이라 부르며 그들의 덕을 높게 평가한 바 있다.

공자와 맹자가 이들의 삶을 재평가한 것을 계기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 백이숙제는

이후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에 의해 더욱 잘 알려지게 되었다.
평생을 바르게 살고서도 거세의 형벌을 받아 인간적인 삶을 살지 못한 자신의 원한을 토로하고,

한편 자기와 비슷한 처지를 당한 역사적 인물들의 이름이나마 후세에 전하고자

'사기 열전(列傳)'을 저술한 사마천은 '백이 열전'을 열전의 제1권으로 삼아

그의 원한을 대변하며 자신의 원한을 쏟아놓았다.

권위주의적 봉건왕조가 이어지며 백이와 숙제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不事二君)'는 충절의 화신으로 추앙되어

봉건군주와 지배귀족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중국뿐 아니라 조선의 경우에도

이전의 왕조에 대해 충성을 다하거나 이전에 섬기던 왕에게 충성을 다하는 신하가 있으면

백이와 숙제를 예로 들어 포상했다.
세종 12년에 길재를 포상할 때와 중종 1년에 정몽주와 길재의 사당을 세우게 할 때에도

그들의 충성은 백이의 충절에 비길 만하다는 것이 포상의 이유였다.

조선의 사신들은 이곳에 와서 참배하고 기념으로 고사리를 준비해 와서 먹었다고도 한다.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은 "굶어죽을지언정 고사리는 왜 먹었느냐"고 꾸짖으며

자신의 충절을 자랑하기도 했다.

 자신의 충절은 백이와 숙제의 충절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덕무(李德懋.1741~1793)가 1778년 5월 이곳을 지나갈 때

이제묘(夷齊廟)는 중수되었고 건너편에는 행궁(行宮)이 완성되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강물이 아래를 휘돌아 못을 이루고 있다는 청풍대(淸風臺)의 흔적이라도 볼 수 있을까,

황제가 머물던 행궁터라도 보기를 기대하며 언덕 위로 올라가니

높다란 건물 위에는 총을 든 초병이 서 있었다.
조심스런 마음으로 건물의 간판을 들여다보니 루룽현의 감옥이었다. 만감이 교차했다.

동아시아의 철학과 사상과 문화, 그리고 역사와 정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봉건주의의 화신이 되었던 백이와 숙제를 미워하는

현대 사회주의의 정신을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지만,

맑고 깨끗한 삶의 표상이었던 이들의 혼을 쓰레기더미와 감옥에 머물게 해서야 되겠는가.

- 이광호 연세대 철학 교수
- 2002.11.13  중앙

 

 

[新연행록] 7. 유리창(琉璃廠) 비화(秘話)
北京의 인사동… 北學派 정신적 고향
자금성 유리 기와 만들던 공장 터… '이빨 나란히 하듯' 서점들 즐비

 


 

 

 

 

굳이 '신연행록'을 위해서가 아니라 해도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 베이징(北京)에 갔다면

모름지기 제일 먼저 달려갈 곳은 유리창(琉璃廠)이다.

우리 답사단 역시 베이징에 도착하자마자 호텔에 여장을 풀기도 전에 유리창으로 향했다.

베이징 시내 서쪽 편에 있는 유리창은 서울로 치면 인사동 같은 곳으로

고미술상, 고서점, 지필묵을 파는 화방(畵房)들이 즐비하다.

명나라 초 자금성을 지을 때 유약을 바른 기와, 즉 유리(琉璃) 기와를 제조하는 공장이 생기면서

유리창이라는 이름이 생겼고, 자금성이 완공된 다음 공장이 문을 닫게되자

그 큰 빈 집에 서적상들이 들어서면서 홀연히 문화의 거리로 바뀐 것이었다.

마치 뉴욕 맨해튼 남쪽 공장 창고들이 떠난 자리에 화랑들이 들어와

소호(SoHo) 거리를 만들어낸 것과 같은 문화변동이었다.

18세기 청나라 건륭제 시절은 유리창의 전성시대였다.

건륭제가 '사고전서(四庫全書)' 편찬을 위해 각종 서적을 닥치는대로 모을 때

유리창에는 강남에서 오는 '산더미 같은' 책을 사고 파는 서점들이

'이빨을 나란히 하듯' 붙어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유리창 주위에는 학자. 예술인들의 집들이 속속 들어서면서 명실공히 학예의 거리로 됐다.

청나라의 대표적인 유학자인 손성연(孫星衍)의 집도 여기 있었고,

양주팔괴(揚州八怪)의 한 분인 나양봉(羅兩峯)도 유리창 가까이 있는 관음사에 기거하고 있었다.

박제가(朴濟家)가 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연유였다.

바로 이때 우리의 북학파 학자들의 연행(燕行)과 유리창 출입이 이어졌던 것이다.

유리창을 통한 한중문화 교류의 본격적인 출발은

홍대용(洪大容)과 엄성(嚴誠), 반정균(潘庭均)의 드라마틱한 만남에서 시작되었다.

1766년 2월 어느날 홍대용은 이기성(李基成)과 함께 유리창에 갔다가

한 만물상(萬物商: 잡화점)에서 멋진 안경을 끼고 있는 신사 두 명을 만났다.

이들은 부드러운 눈으로 보다가 불쑥 "그런 안경은 어디 가면 살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신사는 "하필이면 산다고 하십니까" 하고는 선뜻 자기 안경을 벗어주었다.

이들은 사례라도 하고자 했으나 신사는 한사코 뿌리치고 유유히 떠났다.

그 두 사람이 바로 강남의 학자 엄성과 반정균이었다.

이리하여 홍대용과 이기성은 그들의 여관으로 찾아가 감사의 뜻을 전하고,

이를 계기로 사흘이 멀다하고 만나 시를 짓고 학문을 논하였다.

홍대용은 그 때의 만남을

"한두 번 만나자 곧 옛 친구 같아 마음이 기울고 창자를 쏟아 형님, 아우 같았다"고 했다.

그후 엄성은 갑자기 학질에 걸려 세상을 떠났는데 마지막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홍대용이 써준 이별의 시를 가슴에 안고 있었다고 해서

중국 지식인 사회에서 두 사람의 깊은 우정은 아름다운 일화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반정균은 훗날 큰 학자가 돼

우리나라 규장각 4검서의 시집인 '사가시집(四家詩集)'이 연경에서 출간될 때 그 서문을 쓰게 된다.

우리는 유리창에서 그 만물상이 어디였을까 추측해 보았는데

김태준 교수는 목판수인(木板水印) 복제품과 문방구 판매로 유명한 영보재(榮寶齋) 부근으로 추정했다.

홍대용이 귀국후 쓴 '연행록'은 신진학자들에게 큰 감동과 충격을 주었다.

박제가는 "밥먹던 숟가락질을 잊기도 했고, 읽고 웃다가 밥알이 튀어나오도록" 재미있었다고 했다.

홍대용 연행 후 13년이 지난 1778년엔 이덕무와 박제가가 연경에 가서 유리창을 뒤지며 다녔고,

그로부터 2년 뒤 박지원은 열하까지 다녀와 '열하일기(熱河日記)'를 펴냈으며,

그후 10년 뒤에는 박제가와 유득공이 또 연경에 갔다.

조선의 연행학자들이 유리창을 무시로 드나들게된 데에는

정조대왕의 열정적인 학예진흥정책에 힘입은 바가 컸다.

1776년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규장각을 세워 학술자료를 모으게 하며

사은부사로 떠나는 서호수(徐浩修)에게 '흠정고금도서집성(欽定古今圖書集成)'을 구해오라고 명했다.
이 책은 강희제 때 시작해 옹정연간까지 근 50년간에 걸쳐 완성한 미증유의 총서(叢書)로

분량이 1만 권이나 된다. 서호수는 이 희귀본을 구하려고 유리창을 뒤지다

결국은 한림원에 뇌물을 진탕 주고 동활자 초인본을 구해 몇 수레에 나누어 싣고 왔다.

이런 것을 범법행위라고 해야할까 학문적 열정이라고 해야할까.

아무튼 정조는 이 책의 장정을 잘 고쳐 창덕궁 규장각의 개유와(皆有窩)에 소장케 했다.

'개유와'란 '모든 게 다 있는 집'이라는 뜻이니 당시 학예진흥의 분위기를 알 만한 일이며,

우리시대엔 언제나 이런 진짜 '문화 대통령'이 나올 수 있을지 안타까움을 더하게 한다.

유리창 비화 중 우리의 민족적 자존심을 드날린 것은

유득공의 민족대서사시 '21도 회고시(二十一都懷顧詩)' 이야기다.

단군의 왕검성부터 마한의 금마, 가야의 김해 등 한국 역사상 왕도(王都) 21곳을 읊은

유득공의 이 영사시(詠史詩)는 중국학자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고 서로 갖고 싶어했다.
유득공은 이 시집을 당시 '사고전서' 편집 총책임자인 기윤(紀□)에게 선물했고,

나양봉은 그것을 정성스레 베껴 간직했다고 한다.

그후 유득공의 자필본 '21도회고시'는

계속 옹방강(翁方綱), 섭지선(葉志詵), 조지겸(趙之謙)의 손에 넘어가

결국 중국에서 먼저 책으로 간행됐고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것은 1934년의 일이었다.

세상만사가 일한 만큼 거두어들인다고 할 때 18세기 연행학자들의 열정적인 신지식 수용은

결국 정조시대의 빛나는 문예부흥을 이룩케 하고

다음 시대엔 추사 김정희 같은 영민한 인물의 등장으로

국제적 지평에서 한 치 꿀림없는 학예의 교류와 창달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유리창은 이처럼 연행학자들의 눈부신 학예 교류가 서려 있는 한국문화사의 한 현장인 것이다.

나는 유리창에 갈 때마다 우리 선학들의 학문적 열정을 기림과 동시에

두 분의 이국인(異國人)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한 분은 유리창 오류서점(梧柳書店) 주인인 도정상(陶正祥)으로

그는 조선의 연행학자들에게 친절하게 정보를 제공해준 것으로 유명하다.

또 한 분은 일본인 후지쓰카 린(藤塚)으로

유리창을 통한 한중 학예교류의 실상은 그의 치밀하고도 집요한 연구결과로 밝혀진 것으로

그가 도쿄(東京)대 철학 박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한 것이

바로 '조선조에서 청조문화의 이입(移入)과 김완당(金阮堂)'이었다.

이에 비할 때 나라는 존재는 무엇이던가.

유리창의 영보재와 고금도서당(古今圖書堂)의 진열장이나 기웃거리다

몇 권의 책과 목판수인 두어 장을 사들고 유리창을 떠나는 내 모습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너무도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 유홍준 교수 <명지대, 미술사, 국제한국학연구소장>

- 2002.11. 22 중앙

 
[新연행록] 8. 열하에서 만난 박지원과의 대화 
 
多민족 통치 고민 담긴 황제의 피서지  

 열하의 외팔묘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보타종승묘(普陀宗乘廟).

이 절은 건륭제의 60수를 맞아 티베트의 라싸에 있는 달라이 라마가 주지하는 포탈라 궁을 모방해

만든 것이다. 절이 완공될 때 티베트, 몽고, 신장(新疆) 등지의 왕공들이 모두 열하에 모였고,

이는 청나라가 여러 소수민족을 귀속시키는 확고한 계기가 되었다.

 

  


연행의 길은 청(淸)의 수도인 북경에서 대체로 끝난다.

더러 열하(熱河)까지 가는 경우도 있으나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 열하의 존재를 조선에 본격적으로 소개한 책은

연행록(燕行錄)의 백미인 '열하일기(熱河日記)'다.

그 저자인 연암(燕巖)박지원(朴趾源.1737~1805)과 필자가

세기를 넘어 마주앉아 대화하는 형식으로 꾸며보았다.



연암: 만나서 반갑네. 연행시 내 나이가 현재의 김교수보다 다섯 살이 적은 44세지만

        나는 1780년에 왔고, 또 인생의 대선배이므로 김교수에게 자네라고 해도 되겠지?

        무엇보다 내가 남긴 '연암집'과 '열하일기'로 김혈조 교수가 밥을 먹고 있으니

        자네라고 부를 수밖에 없네.

김혈조: 그게 편하다면 도리없지요. 그럼 저는 선생이라 부르겠습니다.

연암: 우리가 서로 2세기를 격해 있고 상황 역시 많이 다를 터이니

        서로의 시점에서 대화를 하며 역지사지(易地思之)해보기로 하세.

혈조: 선생은 청나라 건륭제의 70수를 축하하는 정사 박명원의 8촌 동생으로서,

        자제군관의 자격으로 북경에 따라온 줄은 알겠는데,

        어찌 이전의 사신이 와본 적이 없는 열하를 다 오게 되었나요.

연암: 약소국가의 설움이네. 북경에서 망배례(望拜禮)나 할 줄 알았는데,

        황제가 열하의 행궁에서 피서하면서 여기 와서 자기 생일을 축하하라고 하니 안 올 재간이 있나.

혈조: 일행 중 절반은 북경에 머물렀다면서요?

연암: 우리 형님이야 정사이니 꼭 와야 되지만, 나는 자유의 몸이니 북경에 눌러있어도 무방했지.

         그러나 전인미답의 열하도 구경하고 싶었고, 인간의 슬픔 중 이국땅에서 하나는 남고

         하나는 떠나는 생이별만큼 슬픈 일도 없을 게야. 그러니 사백여리의 길을 4일 밤낮으로 달려왔지.

         하룻밤에도 물을 아홉 번 건너고, 한밤중에 만리장성을 빠져나오는 고생을 했다네.

혈조: 당시 체험을 쓴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와'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는

        정말 명문장이더군요. 교과서에 번역문이 실려 있어 모두가 읽는답니다.

        선생이 당시 건넜던 험한 물은 이제 천이백만 북경 시민의 상수원인 밀운(密雲) 저수지가 되었고,

        고북구의 장성 밑으론 자동차 터널이 뚫렸답니다.

        선생이 나흘 밤낮을 고생하던 길을 우리는 버스에서 낄낄대고 복숭아를 먹으며

        쉬엄쉬엄 네시간 만에 왔답니다.

연암: 그래 자넨 이 승덕(承德: 열하의 서쪽에 있는 도시)의 열하행궁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혈조: 북경까지 2백50㎞고 강희, 건륭 연간 90여년에 걸쳐 만든 피서지로,

         황제는 매년 이곳에서 몇 달씩 머물지 않나요.

         피서산장은 넓이 5백64만㎡에다 크게 궁궐, 호수, 산간, 초원의 네 영역으로 나뉘는데,

         마치 거대한 중국을 축소해 놓은 모습이지요.

         그 밖으로 외팔묘(外八廟)가 마치 중국의 변방민족이 중국을 에워싸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지요.

         이 외팔묘는 모두 라마불교의 사원으로 크고 웅장하며,

         특히 보타종승묘는 티베트 라싸의 포탈라 궁을 재현한 것이라지요.

         모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답니다.

연암: 열하에 온 사람으로 그걸 모르는 이가 있나. 명색이 교수라면서 관광 목적으로만 왔구먼.

        내가 진정 묻고 싶은 것은 왜 황제가 해마다 열하에 와서 수개월간 머물고,

        주변의 몽고족, 티베트, 위구르 등 여러 민족의 대표를 초빙해

        건물도 지어주고 융숭히 대접하는가 하는 문제야.

혈조: 여기 승덕이 한여름에도 28도를 올라가지 않는 피서의 최적지요,

        겨울에 뜨거운 물이 나오는 열하는

        세계에서 제일 짧은 강이라는 지리적 특징을 아는 것도 중요한 것 아닌가요.

연암: 이 사람이. 아예 가이드로 나서지 그래.

혈조: 되놈의 나라에 갈 필요도 없고 배울 것도 없다던 선생 시대의 고루한 선비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연암: 그래. 우리 때는 양반이라며 청 지배하의 한족을 멸시하는 태도,

         한 줌의 상투로 변발을 멸시하는 태도, 명(明)과 대조적으로 청나라에 오만무례한 태도,

         청에 좋은 문장이 없다고 호언장담하는 태도, 한족은 춘추의리를 모른다고 탄식하는 태도 등

         다섯 가지 망령된 인물이 있었지.

혈조: 지금도 그 같은 5망(妄)이 있긴 하지요.

        이에 비한다면 겸손하게 배우려는 저의 자세는 그래도 괜찮은 것 아닙니까?

연암: 절차탁마야. 지식인의 문제의식은 관광객과는 달라야 하고 거시적이어야 하네.

        과시(科試)를 포기하고 울울하게 지내던 나의 답답한 처지로 중국여행은 오랜 소원이었네.

        그러나 선후배들의 연행기나 이야기 혹은 토론을 통해 중국에 관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단순 관광이 목적이라면 굳이 중국에 와서 눈으로 볼 필요는 없었어.

        또 북학(北學)만을 위해서 온 것은 더욱 아니야.

혈조: 거창한 목적이 있었습니다그려.

연암: 빈정댈 일이 아닐세. 우리시대의 세계 중심은 바로 이 중국이 아닌가.

        명색 선비라면 세계의 중심에 서서 세계사의 흐름을 전망하고 거기에 대처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나의 연행은 바로 천하대세의 전망에 그 목적이 있었네.

        내가 중국의 앞선 문화와 물질적 풍요를 보고 이를 적극 배우고 받아들이자 했다고

        청조 통치의 동아시아 현실을 그대로 긍정하는 것은 아니네.

        오히려 나는 우리 민족을 위해서도 진정 청의 통치체제는 해체돼야 한다고 생각했지.

혈조: 그래 구체적으로 무엇을 보았나요.

연암: 청이 주변국가를 어떻게 통치하고 그 정치적 고뇌가 어디에 있으며, 인민들의 삶은 어떻고,

        혁명은 어느 지방에서 일어날 것인가를 살폈네.

        그리하여 내가 세계사의 변혁처로 주목한 곳이 바로 여기 열하와 중국의 동남부 지방이네.

혈조: 피서에 목적이 있기보다는 열하에서 주변의 강대한 민족을 무마하고 통치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황제가 이곳까지 왔다는 말이군요. 청의 현실적 고민처이겠네요.

연암: 이제 말귀를 짐작하는구먼. 소수민족에 관한 중국의 고민은 지금도 마찬가지겠지.

혈조: 잘은 몰라도 소수민족을 우대하는 현재의 정책을 보면 그럴 것도 같습니다.

        실패한 소련을 거울로 삼는 것 같아요.

연암: 내가 밤새 중국학자들과 필담으로 토론한 내용은

        지전설(地轉說)과 월세계(月世界)에 대한 것이었어.

        종전의 우주론이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형성하고 중세적 사회질서를 합리화함으로써

        각 민족은 물론 개개 인민의 숨통까지 조였으니, 이를 한번 뒤집어보자는 것이었어.

        자네 시대에도 민족의 숨통을 죄는 국가가 있을 것이고,

        그 이론에 매몰돼 자신이 식민지적 학자임을 깨닫지 못하는 청맹과니가 많겠지. 어 서글픈 일이야.

혈조: 저도 이번 여행에서 중국의 실정을 꿰뚫어 보기 위해 노력을 안한 것은 아닙니다.

        선생이 그랬던 것처럼 밤에 일행들 모르게 몇이 작당해 숙소를 빠져나와 밤새 술도 마시며

        중국의 현실을 나름대로는 살폈습니다. 개혁개방은 어디까지 갈 것인가.

        8억 농민의 빈곤. 부익부 빈익빈의 현실을 생각해봤지요.

        선생처럼 인민의 고뇌 속에서 중국을 읽으려 했지만 잘 모르겠습디다.

연암: 김교수. 중국, 아니 자네가 사는 세계를 진정 읽고 그 대세를 전망하려는 쪽으로

        문제의식을 확대해 보게. 우리 시대에 중국이 세계 중심이었듯

        자네 시대에도 세계 중심이 있을 것이니 그곳을 주목하란 말일세.

        그러면 중국의 문제도 풀리지 않겠나. 그것이 진정 자네 시대의 신연행록이 될 걸세.

혈조: 저도 선생처럼 빼어난 기행문을 지어 인구에 회자시킬 수 있을까요.

연암: 글쎄. 나의 경우처럼 금서가 되지 않는다면 내 읽어봄세. 기대하겠네.
- 김혈조 교수
- 사진=최정동 기자

- 2002.11. 28  중앙

 

 
[新연행록] 9. 200년 전에도 문명 교류 
 
조선 선비- 러 正敎 신부 '北京의 조우'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만나면 무엇이 될까. 지금 중국에서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있다.
공공조형물이다. 거대한 아파트촌, 초대형 공원, 광장 등 그 중심에는 하나같이 큰 조형물이
자리잡고 있다. 모두 너무 크고 이유없이 화려하고 무조건 낙관적인 추상적 형태들 뿐이다.
미술이 시대의 거울임을 인정한다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만남은 전혀
만날수 없는 것의 만남임을 중국은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글·그림=임옥상]

   

 

조선왕조 5백여 년 동안 해마다 몇 차례씩 중국 베이징(北京)에 가는 조선 사절단은

본래의 사명인 외교임무 외에 다양한 경제. 문화활동을 펴왔다.
더욱이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전통적인 중국문명이 아닌 서양문명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정신적 가치인 종교와 물질적 가치인 자연과학으로 구성된 서양의 가톨릭 문명이다.

중국으로 예수회 선교사의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조선은 정보의 접촉에서 인적(人的)접촉으로 나아간다.

가톨릭이 대표하는 서양문명의 '분자식(分子式)'은

기존의 동아시아 문명과는 판이한 것으로 조선 지식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가톨릭과의 만남은 한국 정신사상 획기적인 대사건이었으며,

이 때문에 엄청난 이문화(異文化)의 수용과 충돌 현상이 빚어졌다.

조선조 후기의 개혁적 지식인은

가톨릭의 사상과 과학을 자신의 삶과 사회개혁의 구원의 메시지로 받아들인 것이다.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중국 청(淸)나라의 신문화(새로운 고증학 학풍, 시장경제, 사회의 개방성 등)발달을

촉매로 우리의 실학이 싹트고, 한편 동아시아의 상대적 안정 때문에

전통문화의 '등질 확인 작업'인 문화교류 사업도 활발히 전개된 것이다.

이즈음 조선은 베이징을 장(場)으로 서양문명의 또 하나의 갈래인

러시아의 '정교(Orthodox Church)'를 만나게 된다.

러시아 정교 문명은 서구 가톨릭 문명의 역사적 맞수이지만

보편성과 강력한 전도력이 뒤져 우리 역사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문명의 조우(遭遇)'라는 점에서 간과할 수 없는 역사적 사안이다.

 

18세기 전반부터 19세기 중엽까지 약 1세기반 동안 두 나라의 평화적이고 지속적인 만남의 흔적이

우리의 사행기록인 '연행록(燕行錄)'과 러시아측 기록이 적지 않게 남아 있어

이를 일궈내고 엮는 작업이 필요하다.

처음 중국과 러시아는 국가와 문명의 대립으로 갈등을 빚었지만

네르친스크조약(1689년), 카흐타조약(1727년)을 맺고 평화적인 공존체제로 들어갔다.

수평적 문명의 존재를 부인하는 중화문명과 슬라브 문명은 힘의 균형에 의해 할 수 없이 타협한 것이었다.

조선사절과 러시아인과의 만남의 장(場)은 베이징의 이른바 아라사관(俄羅斯館)이었다.

 

1827년 카흐타조약 제5조에 따라

러시아정교회 베이징전도단이 제14차 전도단(1858~1864)때까지 체류한 곳이다.

1860년 베이징조약이 체결된 뒤 전도단은 이전하고 러시아공사관으로 바뀌었다.

이곳은 예전에 조선 사절이 1408년께부터 약 3백20년 동안 사용하던 조선공관이며

규모는 3백87칸으로 매우 컸다. 정식 호칭은 회동사역관(會同四譯館)이다.

오랜 세월 써오던 이 조선공관이 청나라의 대국주의적 횡포로 러시아에 주어지고

조선은 남쪽 성벽가의 72칸짜리 새로운 공관으로 물러나 앉게 됐다.

전자를 '옥하관(玉河館, 중옥하교 서쪽)', 후자를 '남소관(南小館, 하옥하교 서쪽)'이라 일컫는다.

조선과 러시아의 만남의 백미(白眉)는

1816년(순조16) 조인영(趙寅永)과 제9차 러시아정교회 북경전도단장 비추린과의 만남이다.

비추린은 러시아 동양학과 중국학의 대가이며

아울러 처음으로 조선을 학술적으로 접근한 러시아 한국학의 개척자이기도 하다.

조선에 관한 그의 두 편의 저작 -'중화제국의 통계적 개론'(1842년), '고대중앙아시아 민족자료집'(1851년)에 각각 수록-은 기념비적인 업적이다.

 

젊은 날의 조인영은 아라사관을 방문하고 비추린에게 전별의 시로 오언절구 한 수를 지어보냈다.

"수만 리나 떨어져 있어도 / 같은 하늘 아래 있다네. / 먼 훗날 그리울 때면 / 천마를 타고 가야지."

 


노랫말은 쉽지만 마음은 가없이 진솔하다.

이문화(異文化)와 공간의 장벽을 뛰어넘은 젊은이의 정열이 넘쳐 흐른다.
이 시는 조인영의 문집 '운석유고(雲石遺稿)'에 들어 있지 않아 지금까지 알 수가 없었다.

뒷날 고관대작으로 체제유지자가 되어 천주교를 탄압한 그는 젊은 날의 이 위험한 시를 말살한 것이다.
무릇 정신의 결정(結晶)인 글엔 지은이, 보는이가 멋대로 지워버릴 수 없는 생명의 섭리가 있는 것 같다.

신부이며 대학자인 비추린이 베이징에서 러시아로 귀국할 때

책 12상자, 지도 6통 등 총무게 1만4천 파운드의 문헌자료를 싣고 갔다고 한다.

이 방대한 자료더미는 뒷날 러시아 동양학의 귀중한 밑거름이 됐다.
이 속에 조선 젊은이 조인영의 한 장의 시편이 버려지지 않고 고이 간직된 것이다.

지금 원본은 러시아동방학연구소 페테르부르크 지부에 보관 중이며

연전에 페트로샨 연구소장이 서울방문 때 사본을 명지학원 유영구 이사장에게 기증한 것이다.

1821년 비추린은 조선정사(正使) 이조원(李肇源)을 만났는데

이 자리에 때마침 베이징에 온 러시아 외교부 관리인 팀코프스키도 함께했다.
이조원은 과거에 장원급제한 후 육조판서(六曹判書)를 두루 지낸 당대의 명사이며 문한가(文翰家)이다.

이 역사적 만남의 장면을 팀코프스키는 저서 '몽골, 베이징 기행 1824'에서 감격 어린 필치로 서술했다.

그는 처음 만난 조선 고관인 이조원의 고매하고 지성적인 풍모에 심취해

자신의 패도(佩刀)를 풀어 선사하기까지 했다. 나라와 나이를 뛰어넘은 참된 우정이다.

은둔의 나라 조선 선비의 멋진 이미지는

유럽 각국에서 펴낸 팀코프스키의 베스트 셀러를 통해 유럽 전역에 펼쳐졌다.

조선은 작은 나라로 비록 가진 것은 많지 않았지만 지성의 자산(資産)은 우뚝했던 것이다.

팀코프스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러시아와 조선간의 외교통상을 정부에 건의하기도 했다.
이것은 비록 시기상조 미완에 그쳤지만

러시아 외교사상 첫 번째 조선개항의 역사적 플랜으로 평가된다.

다음 1827년(순조27)에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의 저자 홍석모(洪錫謨)가

제10차 전도단장 카멘스키 등을 만난 것도 눈길을 끈다.

이 만남을 묘사한 그의 시 한편이 남아 있다.

조선에서 그 유명한 아라사 거울을 보고 / 만리 밖 그들을 북경에서 만났네. /

옥문관(玉門關) 밖이라도 못 올 리 없다지만 / 장건(張騫)도 못 가본 사막 저편 먼 곳이라오. /

그곳은 하늘의 천주를 섬기는 나라 / 중국말을 배우려고 수재를 보냈다네. /

서로가 타향살이 필담을 나누면서 / 오가는 보라 술, 쪽빛 술잔 한없이 정겨워라.

 


아라사관 자리에는 지금 중국의 국가안전부 후면과 최고인민법원(대법원)이 들어서고

(국가안전부는 동교민항 25번지, 최고인민법원은 27번지)

남소관 자리는 베이징시 우체국 속달센터가 되어 옛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어

그야말로 상전벽해의 감이 있다.

옥하는 복개되어 지금은 정의로(正義路)로 불리고 천안문 동쪽 베이징호텔 앞에서 남쪽으로 뚫려 있다.
서쪽에 국가안전부, 동쪽에 베이징시인민정부, 베이징 인민해방군 사령부, 베이징 위수사령부가 있다.

연전에 아라사관 맞은편에 대우의 오피스가 있어 금석지감을 느끼게 했지만

올해 8월 다시 가보니 대우는 사라지고,

아라사관 자리가 모두 부서져 건축공사가 한창인 어수선한 풍경이다.
최고인민법원도 그 자리에 없다. 요 몇해 사이에 또다시 모습이 달라지고 있다.

역사의 유적이 이 땅에서 마음 속으로 퇴행(退行)하는 것이 문명의 섭리인가!
- 박태근 명지대 LG연암문고 상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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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2.05  중앙

 

 

 

[新연행록] 10. 연행사들의 비판적 역사의식
 
事大의 길에서 `脫中華` 깨우친 역설…성리학으로 사회를 통제한 조선

중화사상 절대적 가치로 신봉…연행이 다른 세계관 접할 길 터

 


                             

 조선의 사신들이 연경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랴오양(遼陽)에는

금나라 때 세워진 백탑(白塔)이 우뚝 서있어 예나 지금이나 나그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높은 기단 위에 8각으로 쌓아올린 13층의 벽돌탑인데 높이가 71m에 이른다.

 

 

베이징(北京)에서 우리 답사단 일행을 안내하던 동포 안내원은

현재 중국이 한국에 비해 한 15년 뒤떨어졌다고 주장했다.

산업기술력이나 일반인들의 생활 수준을 서로 비교해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 말에 무슨 적절한 근거를 끌어댈 수는 없겠지만

그가 접촉한 많은 사람의 의견이 대체로 비슷하다고 했다.

그러니까 중국은 앞으로 15년 정도 지나면 현재의 한국사회 수준에 이를 것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지난달 개최된 중국공산당 16차 전국대표대회(16大)에서 장쩌민(江澤民)주석은

2020년까지 경제규모를 지금의 4배로 확대시키겠다고 했다.

그가 제시한 중국의 목표는 미국을 추월하는 것이다.
그는 또 개막연설을 통해 전면적인 '샤오캉(小康)사회 건설'을 선언했다.

중국을 모든 인민의 생활수준이 넉넉해지는 샤오캉의 단계로 진입시키겠다는 것이다.

장차 그렇게 되면 다시 세상의 중심축이 뒤바뀌게 된다.


 



지난날 우리는 중국을 세상의 중심으로 여기고 문명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 중국을 열심히 배우고 모방했다. 이런 현상은 특히 조선시대에 심했고 그 결과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중국에 뒤지지 않는 소중화 국가를 자처하기에 이르렀다.

그 조선시대에 한양에서 지금의 베이징인 연경(燕京)까지는 50여일 여정이었다.

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넌 후 베이징까지는 2천리 길이었으며 한달쯤 걸렸다.

그 길이 우리 조상들이 밖으로 나다니던 거의 유일한 통로였고 이는 19세기까지 변함이 없었다.

수백 명의 연행(燕行)사신 일행이 그 길을 매년 두어 차례 왕복했다.

그들이 바깥 세상으로는 유일하게 중국과 접촉했고 거기서 필요한 외부 문물들을 도입했다.

조선시대는 이 2천리 거리에 50일 시차가 중국과 조선의 간격이었다.

조선과 중국은 지리적으로는 일의대수(一衣帶水)의 사이지만 역사적으로는 조공과 사대관계였다.

조선은 중국 천자의 재위에 맞추어 제정된 연호를 사용해야 했다.

이 연호는 조선이 독자적으로 설정할 수 없었다.

그 외에도 조선이 손댈 수 없는 것은 하늘에 제사 지내는 일이었다.

중국은 연호와 제천의식을 통해 천자라는 권위를 과시하고 천하를 통솔했던 것이다.

조선은 그 틀을 아주 충실히 따랐다.

중국 밖의 다른 세상에 대해 별 관심을 갖지 않았으며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전근대 사회에서 중국은 한국을 유지시켜주는 큰 울타리이기도 했다.

중국의 영향권 안에서 국제사회의 복잡한 함수관계 없이 지탱해 나갈 수 있었다.

장구한 세월을 세계사의 파동과는 대체로 무관하게 안주해 왔던 것도 그 영향이었다.

별도의 치열한 역사의식이나 진취적 사고는 필요하지 않았다.

중화문명 이외의 다른 세계를 생각하지 않았다.
따라서 조선은 그 중국이 흔들리면 곧 위기 상황을 맞이했다.

명이 망하고 청나라가 등장할 때 세상의 변화를 외면했던 조선은 병자호란을 거의 자초해 겪어야 했다.

19세기 청나라가 서세동점(西勢東漸)에 밀리면서 또 조선은 방향을 잃고 쓰러졌다.

20세기 중반에는 미국이 한반도를 발판으로 대륙으로 진출하려다 이땅에서 중국과 맞부딪치게 되었고

그 결과 우리의 허리를 두동강내는 것으로 평형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날 중국이 세상의 전부라고 여기고 그 문물을 배우고 모방하기에 정성을 다했지만

실제로는 중국의 모든 것에 무조건적으로 휩쓸린 것은 아니었다.

중국의 문화 가운데 우리에게 필요한 사항들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였다.

우리의 잣대로 평가하고 간추렸다.
중국문물 수입의 주역이었던 연행 사신들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었다.

조선은 이들의 높은 안목을 통해 중국의 선진 문물을 관찰하고 취사선택해 수용했다.

조선의 뛰어난 문치(文治)는 그렇게 가능했다.

그러나 이는 달리 보면 이념적으로 사회를 통제하는 방편이기도 했다.

지배층 위주의 독단적이고 획일적인 사고를 모두에게 강제할 수 있었다.
실제 조선은 성리학(性理學)적 가치관으로 재단하고 통제함으로써

사고의 다양성을 봉쇄하고 의식의 진취적인 성장을 차단했다.

중국에 왕래한 지식인들은 고위 지배층이고 그들의 사고 또한 성리학이란 점에서 거의 일률적이며

수구적이라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그들이 설령 중국에 전래된 서학(西學)에 관심을 표명한 경우라도 유교의 틀을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체제 내에서 가능한 관심들이었다.
성리학의 가치가 지금에 와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 역설을 답사 7일째 우연찮게 마주치게 되었다.

조선선비들의 사표(師表)였던 백이숙제(伯夷叔齊)의 유적지인 고리(故里)는

모두의 의중을 떠보려는 듯이 쓰레기 하치장으로 변해 있었다.

답사단 일원인 이광호(동양철학) 연세대 교수는

오늘날의 참 선비답게 쓰레기 더미 속의 청절묘(淸節廟)라 새겨진 비석을 보고

'세상에 이럴 수 있는가'하는 탄식을 금하지 못했다.

나는 새삼 그렇게 엄정한 것이 바로 역사라고 생각했다.

조선의 지배층은 그렇듯 덧없이 버려지는 것들을 목숨 걸어 수호하고 숭상하도록 강제해 왔던 것이다.

그때의 중국은 오늘의 미국이고, 조선 성리학의 도그마는 오늘의 반공체제와 국가보안법이고,

제천(祭天)의식은 혹 지금의 핵개발에 해당되지나 않을는지.

지금 핵문제를 두고 북한의 자주와 미국의 패권 간에 대립이 심각하다.

남한은 미군 장갑차에 의한 두 소녀의 죽음으로 분노에 가득 차있다.

한미 간의 불평등한 관계로 사망사고를 유발한 미군들을 처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미국 군대가 한국에 진주한 이래 계속돼 왔다.

이는 다분히 패권국으로서의 미국과 그 영향을 받아야 하는 한국이라는 일방적 관계에서 기인했다.

18세기 말 학자인 홍양호(洪良浩)는

"연경에 사신으로 다녀온 내 동생이 말하길 '서양인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천하 가운데 중국의 존재는 마치 손바닥에 있는 한 개 지문 같은 것이다'고 했는데,

지금 우리 동국(東國-조선)도 중국에 견주어 보면 또한 그와 마찬가지일 뿐이다"고 했다.

그는 중국 중심의 천하관에서 탈피할 것과

아울러 조선지식인들의 소중화주의(小中華主義)적 역사인식도 잘못된 것임을 지적한 것이다.

홍양호.김창업.홍대용.박지원 등이 연행을 통해 확인하고자 했던 역사인식을

우리 일행들은 오늘의 한국현실에서 어떤 의미로 체득해야 하는가.

우리는 2, 3백년 전 선조들의 높은 식견과 경륜을 좀 더 가까이서 확인하고자

그 옛날의 여정을 뒤밟아 간 것이다.

10일간의 답사기간 달리는 버스 안을 세미나실 삼아 문답하고 토론하면서.

그러나 그분들의 뒤를 좇아가기에 우리들의 보폭은 너무 짧았다.
- 안병욱 가톨릭대 한국사 교수
- 사진=최정동 기자 <
cjd11@joongang.co.kr>
- 중앙일보, 2002. 12.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