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Gijuzzang Dream 2008. 1. 25. 18:59

 

 

 

                        [명화이야기]  비공식 연인들의 은밀한 사랑

 

 

 

 

‘그네’, Jean-Honoré Fragonard, 1767년,

캔버스에 유채, 81×64, 런던 윌레이스 컬렉션 소장

 

 

 

공식적인 연인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사랑을 속삭일 수 있지만

비공식적으로 사랑을 나누어야 하는 연인들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달려가는 사랑을 잡을 수 없는 비공식적인 연인들이 사랑을 속삭이기 전에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남의 눈을 피하는 것이다.

그들은 남에게 자신들의 사랑을 숨기기 위해 지략을 짜낼 수밖에 없다.

쾌락을 향해 질주하는 비공식 연인들의 은밀한 사랑 행위를 표현한 작품이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Jean-Honoré Fragonard, 1732-1806)의 ‘그네(The Swing)’ 이다.

그네는 전통적으로 불륜을 상징한다.

‘그네’는 그네를 타고 있는 여인과 그네를 밀고 있는 늙은 남자

그리고 그네 앞에 있는 젊은 남자의 삼각관계에서

속임수를 써야 하는 젊은 연인들의 심리를 행동을 통해 세밀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이 작품을 처음 구상한 사람은 줄리앙 남작이다.

남작은 가톨릭 주교가 남작의 애첩이 타고 있는 그네를 밀고

자신은 그네 밑에서 애첩을 바라보고 있는 장면을 의뢰했다.

하지만 처음 줄리앙 남작에게 의뢰받았던 화가 가브리엘 프랑수아 도엥은

가톨릭의 반발을 우려해 작품을 거절하고

그 당시 왕립 아카데미에 막 회원이 된 젊은 화가 프라고나르를 추천한다.

프라고나르는 작품을 제작하면서 남작이 놀림감으로 묘사하기를 원했던 주교의 역할을 배제한다.

그는 그네를 밀고 있는 늙은 남자나 정원에서 여인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사회적 신분을

불분명하게 표현하면서 내용도 젊은 연인들이 나이든 남편을 속이는 것으로 바꾸었다.

늙은 남자가 밀고 있는 그네를 타고 있는 여인은

정원 숲속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와 은밀한 시선을 나눈다.

젊은 남자의 시선을 의식해 두 다리가 훤히 보일 정도로 그네를 타고 있는 여인은

슬리퍼 한 짝을 벗어 남자에게 던진다.
이 작품에서 신발은 여인의 잃어버린 순결을 의미하며

젊은 남자의 왼쪽 팔은 남성의 성기를 상징한다.

또한 여인이 입고 있는 장밋빛 드레스와 젊은 남자가 꽂고 있는 장미는

그들이 불륜에 빠진 연인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화면 왼쪽에 있는 큐피드 조각상은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고 있다.

큐피드의 몸짓은 불륜에 빠진 젊은 연인들의 비밀을 지켜주고 있음을 의미한다.

화면 오른쪽 그네를 밀고 있는 늙은 남자 옆에 있는 푸티 조각상 중 하나는 젊은 연인들을 바라보고

다른 푸티는 늙은 남자 앞에 있는 개를 바라보고 있다.

전통적으로 푸티는 사랑의 중계자로 표현되며 개는 정절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이 작품에서 개는 두 사람의 불륜을 알리려고 짖고 있지만 늙은 남자는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
프라고나르는 이 작품에서 연인들의 달아오른 감정을 울창한 정원으로 표현했다.

사물의 의미를 강조한 그는 귀족들의 정숙함과 품위, 인격을 상징하는 신발을 벗김으로써

귀족들의 품위를 풍자했다.

이 작품으로 프라고나르는 궁정화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 2007 10/16   뉴스메이커 745호
- 박희수〈작가 · 아트칼럼니스트〉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았던 로마 카톨릭 교회의 권위와 루이 14세의 절대권력도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점차 퇴조하고,

궁정중심의 장엄했던 바로크 미술은 보다 장식적이며 감각적인 귀족문화로 변모해간다.

 

권력에 대한 알레고리보다는 가볍고 위트는 현실적인 미술이 풍미하였으며, 

엄격함보다는 루벤스의 흐트러진 색채감각이 더 선호되었다.

이러한 귀족중심의 경쾌한 18세기의 미술경향을 일반적으로 로코코 미술이라 하는데,

다른 어떤 시기보다도 여성적인 감수성이 주도하였던 시기이기도 하다.

살롱문화를 주도하였던 이는 바로 여성이었으며,

이들은 초상화를 비롯 의상과 보석, 식기와 같은 제품들을 실제로 구입하였던 당사자이기도 하였다

 

와토(Jean-Antoine Watteau, 1684-1721)와 프랑스와 부셰(Fransois Boucher, 1703-70)나 

프라고나르(Jean-Honore Frangonard, 1732-1806)의 감미로운 그림은

이러한 여성들의 취향을 대변하였고, 18세기 귀족사회의 정서를 누구보다도 잘 보여준다.

 

한편 18세기는 전제왕권 사회가 시민 중심의 근대사회로 이행되어 가는 변환기였다. 

미신과 종교의 권위대신, ‘자연’과 ‘이성’을 중시하는 합리주의가 싹트는 계몽의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모순과 새로운 시대로의 이행은 18세기 시각미술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나 보인다.

 

 

 

 

<그네>에서는 여인을 둘러싼 숲의 풍경에서 화가는 타오르는 불길처럼 나무를 표현했다.

배경의 희미한 숲도 불이 난 숲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같은 느낌을 준다.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1732~1806>는 연인들의 감정을 과감하게 표현한 화가다.

 

그는 이 작품에서 연인들의 달아오른 감정을 울창한 숲으로 표현했으며

또한 당시 신발은 귀족들의 정숙함과 품위, 인격을 상징하는 물건이었지만

프라고나르는 날아가는 신발을 통해 귀족들의 허울뿐인 품위를 풍자했다.

멀리 날아간 것은 귀족들의 체면과 전통의 무게이다.

이 작품으로 프라고나르는 명성을 얻었다.

- 박희숙, 명화속의 삶과 욕망, 마로니에북스, 2007

 

 

 

 


 

 

 

  

프라고나르의 물감 속에는 이처럼 폭로의 순간들이 진하게 녹아 있다.
재미있는 점은 이 그림을 주문한 화상 드 생 줄리앙의 요구이다.
가톨릭 주교가 여인이 타는 그네를 밀도록 하고,
공중으로 올라간 여인의 두 다리가 드러나 보이도록 그려달라고 주문했던 것이다.
 
왼쪽에서 두 다리를 올려다보고 있는 사람은 바로 그림을 주문했던 드 생 줄리앙의 모습이다.
그와 주교 사이에서 그네를 타는 여인. 의미심장한 그림이 아닐 수 없다.
 
분명 사연이 있는 그림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 사연이란 다음과 같다.
여인은 고상한 귀부인으로 매일 주교와 함께 속내를 이야기하며 산책을 즐겼다.
어느 날 그녀는 주교와 함께 대화를 나누며 평소처럼 정원을 거닐다가 문득 그네를 발견한다.
아무도 보지 않으리라 안심한 여인은 마음이 동해 주교에서 그네를 밀어달라고 부탁한다.
주교는 어린아이를 태우는 기분으로 그네를 힘껏 밀었다.
그러나 속마음으로는 아름다운 귀부인과의 달콤한 밀회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공중으로 날아올라간 여인은 뜻밖에 건너편 덤불 숲 아래 숨어서
자신을 훔쳐보고 있던 한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남자는 숲속에서 몰래 여인을 따라다니다 갑자기 그네를 타고 올라온 여인에게 발각된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네가 올라갈 때마다 훤히 드러나는 여인의 두 다리와 속옷이다.
남자는 그 행운에 당황하지만 그네는 계속 밀려 올라가고 그 장면은 되풀이되었다.
이제 두 사람은 주교 모르게 사랑의 게임을 즐기기 시작한다.
여인은 그네가 밀려 올라갈 때마다 좀더 과감하게 다리를 들어 자신의 속살을 드러내며
성적인 흥분에 상기되고, 남자는 점점 농도를 더해가는 여인의 은근한 노출을 올려다 보며
격한 흥분에 사로잡힌다. 두 사람의 볼이 발갛게 달아오를 즈음
여인은 일부러 신발 한 짝을 벗어 공중으로 휙 내던진다.
그 남자에게 그날 밤 신발을 들고 침실로 찾아오라는 징표인 것이다.
바야흐로 불같은 연정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이 작품을 주문했던 화상 드 생 줄리앙은 수줍음에 신발을 들고 여인을 찾아가지 않고

그 대신 프라고나르를 찾아와 이와 같은 그림을 먼저 주문했다.

이 작품을 들고 여인을 찾아갈 의도였던 것이다.

 
사랑을 그리는 화가 프라고나르는 이런 연정의 사연을 한순간의 장면 속에 모두 담아내고 있다.
이그림으로 인해 프라고나르는 금세 명성을 얻었고 비슷한 그림을 그려달라는 주문이 쇄도했다.
 
프라고나르는 풍속화가로서 18세기 프랑스 회화의 가장 대표적인 미술가였던
그의 선배 화가인 와토(Jean-Antoine Watteau, 1684-1721)와
프랑스와 부셰(Fransois Boucher, 1703-70)보다 더 큰 명성을 얻고 화려한 생활을 하였으나,
프랑스혁명 이후에는 화려하고 에로틱한 작품으로 인해
그 미술이 근본적으로 배격되는 수난을 겪고 파리에서 외롭게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