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가며(자료)

Gijuzzang Dream 2008. 1. 25. 20:39

 

 

   

 북학과 중상주의 경제학의 리더 박지원(朴趾源)

 

 

 

 
“부국강병 위해 오랑캐라도 섬기고 배워야 ”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은 북학파 즉 중상주의 경제학파의 핵심 사상가였다.
북학파 학자들을 ‘연암그룹’이라고 부르는 이유 역시
이들이 박지원을 중심으로 사상적인 사제(師弟)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북학파는
‘청나라의 선진 문명과 과학기술을 배우고 받아들여
조선을 부국강병의 나라로 개혁하는 것’을 학문의 모토로 삼았다.
 
 
북학(北學)의 큰 뜻 
 
당시 조선의 지배계층인 성리학자들의 시각에서 볼 때
청나라는 오랑캐인 여진족이 세운 야만국에 불과했다.
그들은 “오늘날 중국을 통치하는 자는 오랑캐다.
그들에게 학문을 배운다는 것이 나는 부끄럽다”고 여겼다.
더욱이 멸망한 명나라에 대한 춘추의리와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는다는 북벌론에 사로잡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청나라의 현실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그러나 박지원이 활동한 18세기 중·후반 청나라는 이미 ‘강희제-건륭제의 융성기’를 거치면서
세계 제일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물론 선진 문명과 과학기술까지 보유한 초강대국이었다.
박지원을 중심으로 한 북학파는 이렇듯 세계적인 제국으로 발돋움하는 청나라를 배척하는 풍조가
조선을 더욱 궁색하고 누추하게 만드는 근본 원인이라고 여겼다.

그들은 오히려 “보잘 것 없고 조그마한 이 외진 나라를 한번 크게 개혁하여 중국 수준으로까지”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청나라를 배우는 ‘북학(北學)’에 뜻을 두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즉 조선을 크게 한번 개혁해 부국강병한 나라로 만들 수만 있다면
“비록 오랑캐라고 하더라도 찾아가서 스승으로 섬기고 배워야” 한다는 것이
박지원과 북학파 학자들의 큰 뜻이었다.
오늘날로 치자면, 우리나라를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인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의
사회경제 수준으로 발전시키겠다는 원대한 비전과 포부를 품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북학을 위한 연행길, <열하일기>
 
박지원은 1781년 북학의 동지이자 제자인 박제가가 저술한 <북학의>에 서문을 써 주면서
자신이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쓴 내용과 조금도 어긋나지 않아
마치 같은 사람이 지은 것과 같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박지원은
박제가가 청나라에 들어가 눈여겨보고 또한 열심히 배워온 것이 무엇인가를 자세하게 밝히고 있는데,
그것은 또한 박지원이 청나라 연행(燕行)길에서 배워온 것이기도 했다.
(박제가는 1778년, 박지원은 그보다 늦은 1780년에 청나라에 다녀왔다)
 
내가 연경(북경)에서 돌아왔더니,
초정(楚亭: 박제가)이 직접 지은 <북학의> 내편과 외편 두 권을 보여주었다.
초정은 나보다 앞서 연경에 다녀왔다. 당시 그는 농사, 누에치기와 가축 기르기, 성곽 축조와 집짓기,
배와 수레의 제작에서부터 기와와 삿자리, 붓과 자 등을 제작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눈여겨보고 마음속으로 비교하고 따져보았다.
자신의 눈으로 보아서 알 수 없으면 반드시 저들에게 물어보았다.
또한 마음속으로 비교해 따져보아도 이해가 되지 않으면 반드시 그들에게 배워서 익혔다.”        
- 박지원, <북학의> ‘서문’ 중에서
 
박지원과 박제가가 연행을 통해 보고 배워온 것은
다름 아닌 ‘이용후생(利用厚生; 산업을 잘 다스려서 민생의 일용에 이롭게 하며 생활을 풍족하게 하는 모든 일)의 학문’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박지원의 북학이
청나라의 선진 문명과 과학기술을 숭상하는 곳에 있지 않고 오로지 조선의 경제를 부유하게 하고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곳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박지원이 조선의 사회경제를 개혁할 방책으로 ‘북학’에 뜻을 두기 시작한 시기는 언제였을까? 1780년 청나라에 다녀온 후부터였을까?
그가 북학을 연구하기 시작한 시점은 그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지원은 과거를 통한 정치적 출세의 뜻을 완전히 접은 1771년(35세) 이후
은둔하다시피 한 채 오직 홍대용, 정철조, 이서구,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과 더불어
‘이용후생의 학문’을 연구하고 토론하는 일에만 몰두했다.
이때 박지원이 연구하고 토론한 학문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
바로 북학, 곧 청나라의 선진 문명과 과학기술이었다.
 
특히 박지원은 자신보다 여섯 살 연상인 벗, 홍대용을 통해 북학의 큰 뜻을 더욱 다듬을 수 있었다.
홍대용은 이미 숙부인 홍억을 수행해,
1765년(영조 41년) 11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 청나라를 다녀온 경험을 살려
<을병연행록(乙丙燕行錄)>이라는 저서까지 썼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훌륭한 길잡이 역할을 해주었다.
 
실제 홍대용의 적극적인 주선과 추천으로 이들 연암 그룹의 일부 멤버들은
차례차례 청나라를 견학할 기회를 갖게 된다.
1778년 박제가와 이덕무가 그렇고, 1780년 박지원의 연행길도 그랬다.
따라서 이들 연암 그룹 멤버들의 연행길은
단순한 여행이 아닌 일찍이 자신들이 부지런히 공부하고 연구한 북학의 큰 뜻을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험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하튼 박지원은
“비 내리는 지붕 아래 눈 오는 처마 밑에서 연구하고,
술기운이 거나하고 등심지가 가물거릴 때까지 맞장구를 치면서 토론하던 내용을 한번 눈으로 확인할”
목적으로 마침내 1780년 5월 삼종형(三從兄: 팔촌형)인 금성위 박명원의 수행원 자격으로
청나라 연행 길에 오른다.
 
그리고 한양을 출발해 요동 벌판을 거쳐 북경과 열하에 이르러 다시 귀국하는
약 5개월간(5월25일부터 10월27일까지)의 연행 길을 귀국한 후
기록으로 남긴 것이 그 유명한 <열하일기>이다.

 
<열하일기>는
그 유명세만큼이나 화려한 수식어를 많이 갖고 있다.
<양반전> <호질> <허생전> 등과 같은 고전 소설의 걸작들을 숱하게 담고 있는 탓에 ‘우리나라 고전 문학의 백미’라고 일컬어지기도 하고,
 
또 <을병연행록(홍대용)> <노가재연행록(김창업)>과 더불어
‘조선의 3대 연행록’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열하일기>를
여행 견문록 혹은 고전문학의 걸작으로만 읽는다면
박지원이 그곳에 담은 북학의 큰 뜻,
즉 조선의 사회경제체제를 크게 한번 개혁해
당시 초강대국이었던 청나라 수준으로까지 발전시키려고 한 사상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지원 자신도 <열하일기>가 단순한 여행 기록이나 이야기책이 아닌
‘이용후생의 학문’을 담은 사회경제서(社會經濟書)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하물며 그 이치를 논할 때에도, 어찌 황홀히 헛된 이야기만 늘어놓는데 그쳤겠는가.
그리고 풍속이나 관습이 치란(治亂)에 관계되고, 성곽이나 건물, 경작과 목축이나 공업 등
일체 이용후생의 방법이 모두 그 가운데 들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글을 써서 교훈을 남기려는 원리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 박지원, <열하일기> ‘서문’ 중에서
 
 
박지원의 청나라 연행길은 이처럼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조선의 경제를 어떻게 개혁해야 하고,
조선 사람들의 경제활동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에 관한 큰 방향과 더불어 구체적인 방법을
몸소 보고 배우는 현장이었다.
이 현장 체험을 귀국 후 박지원은 <열하일기>에 고스란히 담아 조선이 나아가야 할 길을 밝혔다.
예를 들어 박지원이 <열하일기>을 통해 청나라에서 가장 볼만한 장관이
광활한 영토나 아름다운 산수 혹은 화려한 누각이나 거대한 성곽이 아니라
‘깨어진 기와조각과 똥 부스러기’라고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었던 까닭 역시,
아무 짝에도 쓸모없을 것 같은 깨어진 기와조각과 똥 부스러기조차 함부로 다루지 않고 이용할 줄 아는
청나라의 기술과 풍속을 배우는 일이야말로 조선의 경제와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박지원은 일찍이 연암 그룹의 제자들과 함께 품어 온 북학의 큰 뜻을
몸소 체험하기 위해 청나라 연행 길에 올랐고,
그곳에서 자신이 직접 보고 느낀 온갖 ‘이용후생의 방법’과 ‘사회경제 개혁의 구상’들을
귀국 후 <열하일기>에 담았다.
따라서 <열하일기>에는 박지원의 사회경제사상,
즉 그가 품은 조선의 사회경제 개혁의 길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열하일기>를 여행 견문록이나 고전 문학의 걸작으로서 뿐만 아니라
사회경제 사상서로 읽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그것은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밝히고자 한 북학의 큰 뜻,
즉 조선을 초강대국 청나라와 어깨를 견줄만한 부국(富國)으로 만들겠다는 원대한 비전과 포부를
오늘날 우리들이 받아 안아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경제사상 (1)    
 
이용후생론 :  ‘산업과 경제를 잘 다스려 나라와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박지원 경제사상의 근본 줄기는 ‘이용후생(利用厚生)’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산업과 경제를 잘 다스려서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백성을 풍요롭게 만든다는 사상인데,
이를 위해 박지원은 사회경제체제의 개혁과 더불어
과학기술의 도입과 생산 도구 및 시설의 개량이 매우 중요하다고 여겼다.
특히 박지원은 당시 조선의 산업과 경제가 청나라와 비교해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는 까닭은
오로지 조정 관료와 지식인들이 ‘학문할 줄 모르는 잘못’에 있다고 주장했다.
실학(實學), 곧 ‘이용후생의 학문’을 천시하는 폐단 때문에
나라 경제는 궁색해지고 백성의 삶은 누추하다는 것이다.

박지원이 압록강을 건너 청나라 땅에 들어섬과 동시에,
조선 사람 중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청나라의 벽돌과 수레, 깨진 기와조각이나 똥 부스러기
심지어 소 외양간이나 돼지우리를 눈여겨보고 예찬한 까닭은
모두 청나라 연행을 ‘이용후생의 학문과 방법’을 갈고 닦는 기회로 삼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열하일기>의 첫 머리에 해당하는 ‘도강록’에 나오는 이용후생에 관한 견해는
곧 청나라 연행의 목적임과 동시에 박지원 경제사상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주변을 둘러보니, 모든 사물이 고르고 단정하다.
한 가지 일이라도 구차스럽게 대충 꾸며 놓은 법이 없고,
하나의 물건이라도 허투루 어지럽혀 놓지 않았다.
심지어 소 외양간이나 돼지우리까지 모두 법도 있게 제 자리에 놓여 있고
나무 더미나 거름 무더기까지 유달리 깨끗하고 맵시가 있어서, 그 모양새가 마치 그린 듯하다.
아아, 이러한 다음에야 비로소 이용(利用)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용이 있은 다음에야 후생(厚生)이 될 것이요, 후생이 된 다음에야 올바른 다스림이 있을 것이다.
대체로 이용이 되지 않으면서 후생 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무니,
생활이 이미 제각기 넉넉하지 못하다면 어찌 그 마음을 바로 지닐 수 있겠는가.”
- 박지원, <열하일기> ‘도강록’ 중에서
 
 
그러나 이용후생을 위해서는 청나라의 선진 문명과 과학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박지원의 열망과는 다르게 당시 청나라를 드나든 조선의 관료와 지식인들은 대부분
오랑캐인 여진족의 미개한 풍속을 업신여기고,
병자호란의 국치(國恥)를 씻는다는 북벌론의 명분에 사로잡혀 있었을 뿐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박지원과 북학파 학자들이 보고 온 청나라와는 전혀 다른 청나라를 보았을 뿐이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청나라에 다녀온 조선 지식인을 크게 세 가지 부류로 구분해 놓았다.

먼저 조선의 선비들 중 가장 학식이 높다는 사람들은 대개
‘황제조차 머리를 깎은 오랑캐일 뿐이고, 오랑캐는 곧 짐승과 다름없는데
더 이상 무엇을 보고 논한단 말인가?’라고 하면서,
청나라를 볼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미개한 야만족의 나라로 업신여기고 배척한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10만의 군사만 얻을 수 있다면 산해관으로 쳐들어가 오랑캐인 청나라를
중원에서 몰아낸 다음에야 비로소 중국을 논할 수 있다’고 하면서
청나라에서 북벌의 의지만을 다지고 돌아온다.
 
박지원은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나라와 백성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단정 짓는다.
오히려 그는
“천하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진실로 백성에게 이롭고 나라에 도움이
된다면 그 법과 제도가 비록 오랑캐에게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이를 거두어서 본받아 배우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이렇듯 박지원은
산업과 경제를 잘 다스려 나라와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이용후생의 원칙을 자신의 경제사상의 뿌리로 삼아 북학의 길을 걸었다.   
 
 
 
 경제사상 (2)   
 
상공업론 : ‘상업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유통경제를 활성화해야 한다.’

 
박지원을 중심으로 한 ‘북학파 그룹’을 조선 후기 중상주의 경제학파의 산실로 여기는 까닭은
그들이 누구보다 ‘상업의 자유와 상공업의 진흥’을 앞장서서 부르짖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회경제 개혁의 전략을 토지개혁에 둔 앞선 시대의 경제학자들,
곧 반계 유형원이나 성호 이익과 이들 ‘북학파 그룹’이 갈라서는 분기점이기도 하다.

박지원은 중상주의 경제학파의 리더답게 ‘상업의 자유’를 철저하게 옹호하고,
선박과 수레의 적극적인 이용을 통한 유통경제의 활성화를 주장했다.
 
 
“옛 사람이 시장의 흐름을 어지럽혀서는 안 된다고 경계한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상인은 싸게 물건을 취해 비싸게 팔게 마련이며,
나라와 백성의 살림살이는 상인에게 의지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장사해 이익이 남지 않는다면 상인은 장차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그들이 어찌 물건값을 내려서 팔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럼에도 지금 이 명령(곡물가격의 억제와 매점매석의 금지)을 시행하려고 한다면
서울의 상인들은 장차 곡물을 다른 곳으로 옮겨갈 것입니다.
또한 매점매석을 막는다면 서울로 오는 전국 각지의 곡물 상인들이 그 사실을 전해 듣고는
반드시 다시는 경강(京江)으로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한양의 식량 형편은 더욱더 어려워질 뿐입니다.” - 박지원, <과정록> 중에서
 
박지원의 이 말은 시중의 곡물 가격을 억제하려는 조정의 정책에 대한 의견으로 제출한 것인데,
여기에서 그는 조정의 지나친 시장 개입은
자칫 ‘상업 활동의 자유’를 해쳐 시장의 정상적인 기능조차 마비시킬 수 있음을 우려하고 있다.
 
“상인은 관청에서 조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을 조정하면 물건값이 묶이고, 물건값이 묶이면 이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익을 얻지 못하게 되면 상업 거래가 마비되는 폐단이 발생합니다.
그러면 농민과 수공업자가 모두 곤란을 겪고 궁색해지며, 백성들은 생계수단을 잃게 됩니다.
따라서 상인들이 값이 싼 곳에서 물건을 사다가 비싼 곳에다 파는 상업 활동은
진실로 풍족한 것을 덜어내어 부족한 곳에다 더해주는 이치와 같습니다.
비유하자면 물밑의 가벼운 모래가 출렁거리는 물결에 따라 고르게 퍼져서,
솟아 나오지도 않고 움푹 패지도 않게 되는 것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이치와 같습니다.”
- 박지원, <과정록>중에서
 
박지원은 나라 경제가 발전하고 백성의 생활이 풍요로워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상업 활동의 자유’와 ‘유통경제의 활성화’가 시급한 과제라고 보았다.
그가 조정의 지나친 시장 개입을 깊이 우려한 까닭 역시
상업 활동을 통제하는 조치가 유통경제를 심각하게 위축시켜
산업 전반을 마비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박지원이 상업 활동의 자유와 유통경제의 활성화를 얼마다 중요하게 여겼는지에 관해서는
'선박과 수레의 이용’에 관한 그의 견해를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박지원이 청나라 연행 길에서 가장 인상 깊게 보았던 풍경 중 하나는
바로 ‘선박과 수레의 활발한 이용’이었다.
심지어 그는 중국의 부유함과 조선의 가난함의 차이가
‘선박과 수레를 이용한 유통 경제’에 있다고까지 주장했다.
박지원은 선박과 수레는 어떠한 멀고 험준한 곳이라고 이를 수 있다고 하면서
선박과 수레가 다니다 보면 교통로와 상업 활동이 자연스럽게 발전해
나라의 물자는 풍부해지고 백성의 생활은 윤택해진다고 했다.
일상의 경제생활에서는 서로 필요한 물자를 바꾸어 사용해야 하는데
이 지방에서 흔한 물건이 저 지방에서는 귀한 까닭은
선박과 수레를 이용한 교통 및 유통경제가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그래서 나라 경제나 백성의 생활은 궁색함을 벗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서로 바꿔서 사용해야 하는데,
지금 이곳에서 흔한 물건이 저곳에서는 희귀해 그 이름을 들어도 실제 보지 못한 까닭은 무엇인가.
이것은 오로지 물건을 멀리 운반할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사방이 겨우 몇 천 리 밖에 안 되는 나라에서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이처럼 가난한 까닭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수레가 국내에 다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그럼 ‘수레는 어째서 다니지 못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이것은 오로지 사대부의 잘못일 뿐이다.”
- 박지원, <열하일기> ‘수레에 관한 제도(車制)’ 중에서
 
 
“우리 조선은 배가 외국과 통하지 못하고 수레가 국내에 두루 다니지 못하는 까닭으로,
온갖 재물이 이 안에서 생겨서 이 안에서 사라져 버리곤 한다.” - 박지원, <열하일기> ‘허생전’ 중에서
 
 
이렇듯 박지원은 ‘선박과 수레를 이용한 유통경제의 활성화’가
나라 경제와 백성의 생활을 풍요롭게 만드는 가장 바람직한 경제 정책이라고 보았다.
특히 박지원은 <허생전>에서 일본과의 해외통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재물의 이로움을 보여주었는데,
이 경우 가장 중요한 문제 역시 선박을 이용한 자유로운 해외무역이었다.
그는 상업 활동이 자유롭게 허용되고 또한 선박과 수레를 이용한 재화의 유통이 활성화하면
자연스럽게 국내의 농업과 공업의 발달은 물론 해외통상의 길도 뚫릴 수 있다고 본 듯하다.
물자의 생산과 유통이 활발해지고 나라와 백성들의 물품 수요 욕구가 넘쳐나다 보면
해외무역은 불가피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박지원은 상업 활동과 유통경제의 발달이
국내 산업은 물론 해외통상의 발전을 가져와 나라 경제를 풍요롭게 한다고 확신한 만큼
‘상업과 상인’을 대단히 중시했다. 박지원의 ‘중상주의(重商主義)는 이렇듯
“조선의 백성 가운데 비록 상인이 가장 천한 직업이기는 하지만,
그들이 없으면 온갖 재화가 유통될 수 없다. 이것이 상업을 폐지할 수 없는 이유다.
또한 재물이 백성들에게 축적된 다음에야 비로소 국가 재정이 풍족해진다”는
생각에 깊게 뿌리박고 있었다.  
 
 
 
 경제사상 (3)  
 
농업 및 토지개혁론 : ‘농서대전(農書大全)은 박지원으로 하여금 편찬하게 해야 한다.’
 

일찍이 부정부패로 얼룩진 과거시험을 통한 정치적 출세의 길을 버렸지만,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할 가장의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 수 없었던 탓에
박지원은 나이 50세에 정조의 선처로 음관(蔭官)의 특전을 입어 관직에 나가게 된다.
그리고 55세 때에는 안의 현감직을 맡아 비록 미약하나마 자신이 평생 익히고 연구한
‘이용후생의 학문과 방법’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이곳에서 그는 백성들의 실제 생활에 편리한 기구뿐만 아니라 농업 기술 개선과 생산력 향상에
도움이 될 만한 각종 제도와 도구들을 보급하거나 제작했다.
그것은 평소 그가 품어온 청나라의 ‘선진 제도와 과학기술’을 생산 현장에 적용하는 경제 사업이었고,
또한 그가 평생 원칙으로 삼은 ‘이용후생’의 경제사상을 실천하는 일이기도 했다.
당시 안의현에서 박지원이 행한 사업에 관한 내용은
그의 둘째 아들 박종채가 저술한 <과정록>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께서는 연경(북경)에 들어가셨을 때,
농기구와 베틀 등 백성들의 실생활에 이로움을 기구들을 자세하게 관찰하셨다.
그리고 조선에 돌아와서는 이 기구들을 모방해 제작하여, 널리 나라 안에서 쓰일 수 있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생활이 어려운 탓에 정작 엄두를 내지 못하고 계셨다.
마침내 안의읍에 부임하셔서 재주와 기술이 있는 공장(工匠)들을 가려 뽑아 손수 가르치며
양선(풍력을 이용해 겨 따위를 없애는 농기구), 베틀,
용골차(논에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 사용하는 수차), 용미차(관개용 수차), 물레방아 등
여러 기구들을 제조하여 시험하셨다.
모두 힘을 많이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민첩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추어
한 사람이 수십 명이 하는 일을 능히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후 그것들을 모방해 제작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나라 안에서 쓰임을 얻지 못했으니, 어찌 한스럽지 않겠는가.” - 박종채, <과정록> 중에서
 
 
경남 안의현에서의 작은 실험 이후
충청도 면천군수로 자리를 옮긴 박지원은
농정(農政)에 필요한 농서(農書)를 구하는 정조대왕의 어명을 좇아
상업적 농업과 과학적 영농기술 및 토지 소유의 개혁 문제를 다룬
<과농소초(課農小抄)>와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을 저술해
‘농업 및 토지개혁’에 관한 자신의 경제사상을 세상에 내놓는다.
그 해가 1799년(정조 23년)으로 박지원의 나이 62세 때였다.
 
박지원이 사망하기 7년 전에 저술한 이 농서로 인해
그는 중상주의 경제학파의 리더이면서
또한 중농주의 경제학파를 대표하는 유형원, 이익, 정약용과 더불어
‘농업 및 토지개혁론’을 주창한 독보적인 경제사상가로 자리 잡게 되었다.

<과농소초>와 <한민명전의>는
박지원의 농업 및 토지개혁 사상의 양대 축을 이루고 있는데,
전자가 상업적 농업 경영과 구체적인 영농 기술 및
농기구 개선의 문제를 주로 다룬 실용 농서에 가깝다면
후자는 토지제도 및 대토지 소유의 폐단을 본격적으로 다룬 정책 및 토지개혁론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박종채의 <과정록>에 따르면
박지원은 개성 연암협에 기거하던 시절부터 우리나라의 농서와 중국의 농서들을 연구하고 발췌해
기록해놓았다고 한다. 그리고 거기에
‘청나라 연행 길에서 견문한 사실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시행할 만한 것’들을 덧붙여
<과농소초> 14권으로 엮었다고 한다.
 
<과농소초>는 ‘농기구, 경작과 개간, 거름과 비료, 수리(水利), 곡물 선택과 파종(播種), 수확, 목축’ 등
실제 농업 경영에 필요한 모든 항목들을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특히 여기에서 박지원은 농기구를 개량하고, 농사 기술을 개선하며, 과학적이고 효율적인 영농법을
도입해 농업 생산력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는 각종 대책을 제안했다.
예를 들면 ‘농기(農器)’에서 박지원은 조선의 농서 중 최초로 농기구 56종을 소개하는 한편
우리나라와 중국의 농기구 100여 종의 장점과 단점을 논한 다음
당장 사용해야 할 28종의 성능을 소개하면서 적극적인 채용을 촉구했다.

<한민명전의>는 박지원이 전제(田制)와 토지 소유의 개혁 문제를 다루기 위해
따로 의견을 적어서 <과농소초>에 부록으로 덧붙여놓은 글이다.
<과농소초>에 붙어 있는 부록에 불과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이 글이 <과농초소> 못지않게 중요한 이유는
박지원의 토지개혁사상을 자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글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그는 토지겸병(대토지 소유)에 의한 전제의 문란이
나라 재정이 궁핍하고 백성이 가난한 근본 원인이라고 진단한 다음
반드시 토지 소유를 일정 수준에서 제한하는 ‘한전론(限田論)’을 시행할 것을 적극 주장했다.
 
“토지 소유를 제한한 다음에야 토지겸병이 사라질 것이고,
대토지 소유가 사라진 다음에야 산업이 균등하게 될 것이고,
산업이 균등하게 된 다음에야 백성들이 모두 각자 자신의 토지를 경작해
부지런한 사람과 게으른 사람의 구별이 드러날 것입니다.
부지런한 사람과 게으른 사람의 구별이 드러난 다음에야 백성들에게 농업을 권장할 수 있고
또한 백성들을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 박지원, <한민명전의> 중에서
 
 
박지원의 한전론은 경자유전을 원칙으로 하여 대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한편
토지를 농민들에게 재분배함으로써 자영농민을 적극 육성하는 경제 대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한전론의 시행으로 자영농이 증가하면 나라의 세원(稅源)을 튼튼하게 해
국가 재정을 풍요롭게 하고 또한 백성들에게는 생활 기반을 제공해
경제적 안정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박지원은 이렇듯 일찍부터 우리나라에서 반드시 한번 시행할 만 하다고 여긴
‘농업 및 토지 개혁론’을 <과농소초>와 <한민명전의>를 통해 밝혔는데,
이 글들은 당시 정조대왕의 마음을 크게 움직였다.
 
“임금님(정조대왕)께서 어느 날 신하들과 마주한 자리에서
‘최근에 세상을 다스리는 경륜을 펼친 좋은 책(<과농소초>)을 하나 얻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또한 ‘농서대전(農書大全)은 박지원으로 하여금 편찬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고 하셨다.
그 후 임금님은 규장각의 여러 신하들에게도 아버지의 책에 대해 여러 번에 걸쳐 칭찬하셨다.”
- 박종채, <과정록> 중에서  
 
그러나 불행하게도 다음해(1800년) 정조대왕이 급작스럽게 세상을 뜨고 정치적 혼란이 찾아오자
박지원은 건강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나 재동 자택에서 은둔하다시피 생활하다가
1805년 10월20일 6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박지원 경제사상의 계승자들
 
박지원은 ‘북학과 중상주의 경제학파 그룹’의 학자들을 이끈 리더이자 사상적 스승이었기 때문에
그의 경제사상을 계승한 직전(直前) 제자들은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사제(師弟) 관계이면서 동시에 학문과 사상을 공유한 동지 관계로 얽혀 있었기 때문에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북학의 큰 뜻과 중상주의 경제학을 함께 갈고 다듬었다고 평가해야 한다.
 
또한 이들은 대부분 박지원보다 앞서 혹은 비슷한 시기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의 경제사상을 이어서 세상에 뜻을 펼쳤다고 보기에는 힘들 듯 하다.
따라서 박지원 경제사상을 계승한 제자들은 보다 후대로 내려가 찾는 것이 마땅하다고 할 수 있다.
 

이때 등장하는 인물이 다름 아닌 ‘19세기 근대 개화사상의 아버지’라고 일컫는 박규수(朴珪壽)다.
박규수는 앞서 소개한 <과정록>을 저술한 박종채의 아들이다.
따라서 그는 박지원의 친손자이기도 하다.
박규수는 가풍을 이어받아 일찍부터 통상개화(通商開化)를 통한 조선의 부국강병에 큰 뜻을 두었다.
 
특히 조선이 스스로의 힘으로 개국할 것을 거듭 주장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관직에서 물러난 후 김옥균 · 홍영식 · 서광범 등 젊은 개화사상가들을 모아 친히 가르쳤는데,
당시 박규수는 ‘박지원의 <연암집>’을 강의하면서
서양의 과학기술과 통상개화 및 부국강병의 뜻을 가르쳤다고 한다.
 
훗날 박영효가 갑신정변을 회고하는 자리에서
“그 신사상(新思想: 개화사상)은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나왔소.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그리고 나의 형(박영교)이 박규수의 사랑방에 모였지요”
라고 말한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의 자주적인 근대화를 꿈꾼 개화파의 사상은
<연암집>을 연구하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던 것이다.

박지원의 사회경제사상은 이렇듯 자신의 친손자인 박규수의 손을 거쳐서
김옥균, 홍영식 등 개화파 사상가들에 이르러
조선의 자주적인 근대화와 국운(國運)을 좌지우지한 거대 사상으로 재탄생했다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