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가는(문화)

Gijuzzang Dream 2008. 1. 28. 18:59

 

 

 

 

고대의 ‘신분증’ 부절(符節)

 5세기 두 무덤의 유리 관옥 맞춰보니 딱 맞아 …  

‘부부’ 간접증거 - 충남 공주 수촌리고분 4호분(男)과 5호분(女)의 유리관옥

 

 

 

최근 신정아씨 가짜 박사 파문 사건이 미술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인터넷이나 국제 통신 수단이 아무리 발달해도,

역으로 그 기술을 이용해 신분을 속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예다.

 

주민등록증도 없고, 홍채 인식 기술 같은 것도 없던 과거에는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할 방법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지방관으로 누군가 내려왔다.

한데 그가 중앙에서 파견한 진짜 지방관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런 때 쓰던 것이 부절(符節)이다.

돌이나 금속, 거울 같은 것에 글을 쓴 뒤 깨뜨려 양측이 각각 보관하고 있다가

나중에 맞춰 봄으로써 사실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다.

영어로 부절을 뜻하는 ‘tally’가 있는 것으로 보아, 동서를 막론하고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부절은 이미 2000여 년 전 삼국사기 고구려 유리명왕편에 등장한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의 딸을 임신시켰다.

그러나 주몽은 부여의 왕자들에게 쫓겨 남으로 도망가 고구려를 세웠다.

주몽은 도망치기 전, 예씨 부인에게 “아들을 낳거든 내가 유물을 ‘모가 일곱 개 진 돌’ 위

소나무 밑에 숨겨 두었으니 그것을 찾아 오라”고 했다.

예씨가 낳은 아들 유리는 아버지의 말을 따라 방방곡곡을 뒤졌지만 찾지 못했다.

어느 날 마루 밑 주초석의 모가 일곱 개인 것을 발견했다.

주초석 위에 선 나무 기둥 밑을 뒤지니 부러진 칼 한 조각이 나왔다.

유리는 주몽을 찾아가 맞춰 보았다. 딱 맞았다. 유리는 곧 태자가 됐고, 결국 왕이 됐다.

 

부절이 발굴된 예는 많지 않다.

발굴되더라도 ‘반쪽’만 나온다. 한 사람이 부절 ‘두 쪽’을 다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부절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1980년 러시아 연해주 니콜라예프카 성터에서 나온 발해 장군의 청동부절도 그런 예이다.

길이 5.6㎝, 최대 너비 1.8㎝, 두께 0.5㎝짜리다.

청동으로 물고기 모양을 만든 뒤 머리에서 꼬리 방향으로 두 개로 정확히 나누고,

나눈 한쪽 면에 ‘좌효위장군 섭리계(左驍衛將軍 ?利計)’라고 장군의 직책과 이름을 새겼다.

나머지 반쪽은 발굴되지 않았다.

 

그러나 두 개로 나뉜 부절이 각각 발굴돼 기적적으로 합쳐지는 경우도 있다.

2003년 충남역사문화원 문화재센터(센터장 이훈)는

서기 5세기 전반기 무덤인 충남 공주 수촌리고분 4호분과

 5호분을 발굴했다. 두 무덤의 시신 머리맡에는 부러진 유리 관옥 한 점씩이 놓여 있었다.

이훈 센터장은 “왜 부러진 관옥을 한 점씩 넣었는지 당시로서는 이해하지 못했다”고 했다.

 

2년 뒤 발굴조사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유물을 실측하던 직원들은

4호분과 5호분에서 나온 두 관옥의 크기나 모양이 너무나도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부러진 곳을 맞추어 보니, 딱 들어맞았다.

관옥은 전체 길이 5.4㎝, 지름 1.2㎝로, 칼이나 망치 등으로 자르지 않고 손으로 정확히

전체의 절반 크기인 2.7㎝로 뚝 잘라 무덤에 넣은 것이었다.

 

발굴단은 부부가 평생 소중히 지녔던 부절을 무덤에까지 가지고 간 것으로 보고 있다.

4호분에서는 금동관과 금동신발, 큰 칼이 나오는 등 남성의 무덤이 확실한 반면,

5호분에서는 17점의 장식용 구슬이나 최고급 자기 등이 나온다는 점에서

여성의 무덤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토기나 무덤 축조 양식 등을 통해서 볼 때 4호분에 묻힌 남자가

5호분 주인공보다 10~20년 정도 빨리 묻혔다는 점도 두 사람을 부부로 보는 ‘간접 증거’ 중 하나다.

- 2007-7-30, 조선, 문화재야화, 신형준 기자

[송기호 서울대교수(발해사)= 도움말]  [이훈 충남역사문화원 문화재센터장= 도움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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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 수촌리 고분군 출토 부절 추정 대롱옥

  - 4, 5호분 머리맡에서 각각 확인, 부부인 듯

 

 

삼국사기에 수록된 고구려 건국신화를 구성하는 이야기 중 하나로

건국시조 고주몽(高朱蒙)의 큰아들인 유리(琉璃)가 아버지를 찾아가서 아들임을 확인하는

기이한 사연이 소개돼 있다.

이에 의하면 유리는 7모서리 주춧돌 아래서 발견한 '단검 1단'(斷劒一段),

즉, 부러진 칼 한쪽을 들고서 고구려를 세운 고주몽을 찾아가니,

주몽이 지니고 있던 나머지 칼 한쪽과 맞추어 보고서 들어맞음을 알고는

마침내 아들로 인정받게 된다.

 

이와 아주 유사한 사례가 같은 삼국사기 설씨녀(薛氏女) 열전에서도 발견된다.

이에 의하면 율리(栗里)라는 곳에 사는 그녀는

사량부(沙梁部)라는 곳에 사는 소년 정혼자 가실(嘉實)을 6년만에 다시 만난다.

수자리 간 지 6년만에 다시 나타난 가실.

그의 몰골이 형편이 없어 설씨녀는 처음에는 가실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런 그들이 서로를 확인하기 위해 '파경'(破鏡)을 꺼내 들었다.

헤어질 때 두 조각으로 쪼개 각각 나눠 가진 거울은 결합됐다.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은 제후들을 분봉(分封)하면서

'단서철권'(丹書鐵券)을 제후왕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약칭 철권(鐵券)이라 하는 이 물건은 요즘으로 치면 훈장이나 임명장 정도가 되는데

항상 세트였다. 하나는 황실에 보관하고 나머지 하나는 제후가 갖는다.

명칭으로 보아 재료가 철(鐵)이었을 같지만 실제는 옥(玉)이 가장 애용됐다.

 

쪼갠 칼이나 거울, 세트로 제작된 철권이 모두 부절(符節)이다.

여기서 '절(節)'은 마디라는 뜻이니 끼워 맞춘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부(符)'란 부합(符合)한다는 뜻이다.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제1장은

"해동(海東)에 여섯 용이 나시어[飛] 일마다 천복(天福)이시니 고성(古聖)과 동부(同符)하시니"

인데 여기서 말하는 동부(同符)가 바로 부절이다.

즉, 두 조각으로 깨서 나눠 가진 칼이나 거울,

혹은 세트로 제작한 철권처럼 아귀가 딱 들어맞는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부절로 생각되는 유물이

최근 충남역사문화원(원장 정덕기)이 조사를 완료한 공주 수촌리 고분군에서 확인됐다.

같은 공주 지역 무령왕릉 보다 빠른 5세기 중후반 무렵 축조됐다고 생각되는 수촌리 고분군 중

같은 횡혈식 석실분인 제4호와 5호분에서

각각 조각 형태로 출토된 유리 제(制) 대롱옥(관옥<管玉>)이 그것.

 

발굴 당시 책임조사연구원이었으며

현재 수촌리 유적 발굴보고서를 준비 중인 문화원 이훈 연구부장은

"이 대롱옥 두 점은 원래 하나였으나 두 개로 부르뜨린 다음에

각각 4-5호분 시신 머리쪽에 부장한 것으로 밝혀졌다"고 말했다.

이렇게 하나로 결합된 관옥은 전체 길이 5.4㎝에 지름 1.2㎝ 가량이었다.

이 한 점은 중간쯤인 2.7㎝ 가량 되는 지점에서 절단이 나 있었다.

 

하나의 관옥 조각을 나눠 기진 두 무덤 피장자는 부부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 근거로 이훈 부장은

"4호분에서는 금동관과 금동신발 외에 남성 무덤에서만 대체로 출토되는 환두대도(環頭大刀)가

확인된 반면 5호분에서는 이런 유물들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장식용 구슬이 집중 출토됐다"

는 점을 중시한다.

 

 

즉, 4호분이 남편이며 5호분이 그 부인일 가능성이 아주 큰 셈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궁금증은 남는다.

부부가 동시에 사망했다면 그 시점에 관옥을 쪼개 각기 다른 봉분을 만들면서

하나씩 넣어줬다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현재까지 연구성과로는 두 무덤은 축조시기가 다르다.

즉, 5호분이 나중에 만들어졌다.

 

이런 추정이 타당하다면 이들 '부부'는

이미 생전에 변치 않는 사람을 약속하는 의미로 관옥을 쪼개 가지고 있었거나,

아니면, 남편이 먼저 죽는 그 시점에 부인이 장례를 치르면서 관옥을 쪼개

하나는 자기가 갖고 다른 하나는 남편의 시신과 함께 부장했을 것이다.

 

이런 부절의 전통은 말할 것도 없이 그 원류는 고대 중국에 있다.

중국적인 문화전통이 이미 수촌리 무덤에 짙게 투영됐다는 증거는

다름 아닌 이곳에서 중국제 도자기가 여러 점 출토된 점에서도 간접 확인된다.

 

이번에 드러난 관옥이 부절임이 확실하다면,

이 수촌리 고분군이 축조되던 그 시점에 한성(漢城, 서울)에 중심을 둔 백제는

일종의 봉건제적 지방통치를 실시하고 있었음을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있다.

백제가 공주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제후를 임명했건,

아니면 별도의 관리를 중앙에서 파견했건 상관없이,

이곳을 위임통치하는 관리는

왕에게서 그 위임을 상징하는 부절(符節)을 틀림없이 지니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 2005.6.16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죽어서도 변치않는 사랑

 백제 연인의 '부러진 관옥' 

 

 

  

10년차이 남녀 무덤에 반토막씩

 

두 사람은 죽은 뒤까지도 영원한 사랑을 나누고자 했던 부부였을까?

충남 공주 수촌리고분군(사적 460호). 서기 4~5세기에 축조된 백제 지배층 무덤 5기 중

4, 5호 무덤 두 곳에서 각각 출토된 유리로 만든 관옥(管玉)장식 두 점이

사실은 한 점의 관옥을 부러뜨린 뒤 묻은 것임이 밝혀졌다.

봉분을 따로 쓴 무덤에서 둘의 관계 등을 나타내는

부절(符節: 돌이나 대나무 · 옥 따위를 나눠 각각 보관하며 신표로 삼던 물건)이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충남역사문화원(원장 정덕기)은 2003년 발굴 당시,

4호분과 5호분에서 피장자(被葬者)의 머리맡에 각각 놓인 유리 관옥을 한 점씩 찾았다.

이훈 연구부장은 ‘왜 부러진 관옥을, 그것도 딱 한 점씩만 놓았을까’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단서는 없었다. 최근 문화원의 한 연구원이 발굴 유물을 실측하던 중

두 관옥의 크기나 모양이 너무나도 비슷해서 부러진 곳을 맞추어 보았다. 딱 들어 맞았다.

관옥은 전체 길이 5.4㎝, 지름 1.2㎝로, 칼이나 망치 등으로 자르지 않고

손으로 정확히 전체의 절반 크기인 2.7㎝로 뚝 잘라 무덤에 넣은 것이었다.

 

무덤에 묻힌 두 사람은 어떤 관계였을까?

이훈 연구부장은 “부부였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본다”고 했다.

우선 4호분에서는 금동관과 금동신발 외에도 둥근 고리 장식이 달린 큰 칼이 출토됐다.

무덤임이 확실하다는 것.

그러나 5호분에서는 금동신발이나 금동관은 물론, 칼 등이 출토되지 않은 대신,

17점의 장식용 구슬이 출토됐다. 여성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출토 유물로 미뤄볼 때 4호분이 5호분보다 10~20년 앞서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 무덤에 관옥을 부러뜨려 절반을 넣고

훗날 아내도 자기 무덤에 관옥의 나머지 부분을 부장품으로 넣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2005-6-16  조선일보 신형준 기자

 

  

 

 

===========================   <참 고>  ===================================================

 

 

 1600년 前 제의 용, 봉황  날아오르다

 공주 수촌리 4호분 금동관 공개


 

 

공주 수촌리 4호분 금동관.
용과 꽃봉오리 모양 등이 장식된 백제 금동관은 일본 에다후나야마고분에서도 출토됐다. 충남역사문화원 문화재센터 제공
1600년 전 백제의 용과 봉황은 지금이라도 날아오를 듯 힘차다.
세월이 지나도 변치 않는 백제 장인의 혼이 가쁜 숨을 토한다. 
백제에서 가장 오래된 용과 봉황 장식이 21세기 후손들에게 첫 모습을 드러냈다.
 
2003년 말 충남 공주 수촌리 4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5세기 전반)의 투조(透彫) 장식과
수촌리 1호분 출토 둥근고리 큰 칼(4세기 후반)이다.
이날 충남역사문화원 문화재센터(센터장 이훈)는
“금동관과 둥근고리 큰 칼의 보존 처리를 완료했다”고 밝혔다.

 

용과 봉황 장식은 전북 익산 입점리 백제금동관(5세기 후반),

충남 공주 무령왕릉 둥근고리 큰 칼(6세기 초반),

충남 부여 출토 백제금동대향로(6세기 후반~7세기 전반, 국보 287호)는 물론, 일본 후쿠오카 에다후나야마(江田船山)고분 금동관(6세기 전반·백제가 하사) 등 백제 최고 지배층 유물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

 

“일본에까지 건너간 백제 용봉(龍鳳)문양의 시원(始原)을

찾은 셈”(이한상 동양대 교수)이다.

금동관은 높이 19㎝다.

발굴 당시 흙과 녹으로 엉겨 붙어 전체 모습을 알 수 없었다.

 

이훈 센터장은 “관(冠)의 꽃봉오리 모양 장식(=수발)과 테두리 일부가 보였을 때 유물 훼손을 막기 위해 관 주변 흙을 통째로 떠 왔다”며 “현미경으로 유물을 보면서 붓과 외과용 칼(메스)을 이용해 흙과 녹을 조금씩 벗겨냈다”고 했다.

 

금동관은 8개의 판을 붙여 만들었는데, 용과 봉황 무늬는

금동관 앞 육각형판에 장식됐다.

용은 여의주를 물었으며, 봉황은 날개를 활짝 펴고 있다.

이한상 교수(고고학)는

“4세기 중국 동진(東晋)에서 왕의 관에는 청렴을 상징하는 매미를, 허리띠에는 용과 봉황을 장식했는데,

백제는 중국의 허리띠 장식 무늬를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둥근고리 큰 칼에는 고리 양측에 불을 뿜는 용 두 마리를 은으로 상감(象嵌, 표면에 무늬를 새긴 뒤

금 · 은 등으로 박아 넣는 기법)했다.

 

 
용과 봉황이 꿈틀대며, 1600년 세월을 이겨낸 백제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다.
공주 수촌리 4호분 금동관 용과 봉황 장식 세부 사진. 충남역사문화원 문화재센터 제공
- 2006. 5.09 조선일보


 

      

          형(原形)에 맞게 복제한 충남 공주 수촌리고분 백제 금동관. /  조선일보 DB

 

모두 5기의 무덤으로 이뤄진 공주 수촌리 고분군(群· 4세기 말~5세기 중엽)에서는

금동관 2점, 금동제 신발 3점, 중국제 최고급 자기 등

무덤에 묻힌 이의 권위를 상징하는 위세품(威勢品)이 다수 출토됐다.

 

이훈 충남 역사문화원 문화재연구부장은

“2003년 공주 수촌리 4호 고분(사적 460호)에서 발굴된 백제 금동관을 보존 처리를 거쳐 복제했다”

고 밝혔다. 보존 처리 결과 출토된 금동관은 높이 19㎝로,

고깔모양에 재료의 면을 도려내 도안을 나타내는 방식인 투조(透彫)로

용(龍)과 덩굴무늬 등을 새겼으며

관 앞뒤로 화초(花草)나 꽃봉오리 모양 장식 가장자리에 눈금을 새겨 세웠다.

 

 

 

   

 

 

 

이한상 동양대 교수(고고학)는

“수촌리 금동관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한성백제기(서기전 18년~서기 475년) 유일의 금동관”이라며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 백제 관(冠)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평했다.

서기 5세기 중반, 한강에 도읍 했던 한성백제가 충남 공주의 최고위 수장(首長)에게 하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금동관이 1500여 년 만에 제 모습을 찾았다.

백제가 동일한 양식의 금동관을 여러 점 만든 뒤

충청권 세력을 정치적으로 편입시킬 때 하사한 것으로 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고고학계는 제작 방식이나 무늬 등을 볼 때, 이 금동관은

일본 후쿠오카에서 발굴된 에다후나야마(江田船山) 금동관(서기 6세기 초) 제작에도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드러나, 일본에 대한 백제의 영향력을 다시금 확인시켜 주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공주 수촌리 금동관(왼쪽)과 일본 에다후나야마 금동관.
고고학계는 제작 방식이나 무늬 등이 일치한다고 지적한다.
충남역사문화원 제공

 

 

 

  

 

 

  

백제의 하이테크 금속공예 기술

- 공주 수촌리유적 환두대도(環頭大刀) 복원 -




얼마 전 종영된 “서동요”는 백제 30대 임금 무왕의 이야기로

어린 시절 서동[薯童, 본명 장(璋)]과 선화공주(신라 진평왕 셋째 딸)의 국경을 넘은 러브스토리와 백제 신라 양국의 궁중 이면사를 흥미있게 재현하였다.

 

특히 ‘서동’은 딱따구리가 나무를 두드려 구멍을 내는 모습에 착안하여 그 이전까지 단단하거나 무르기만 하던 칼날을 담금질을 통하여, 칼날은 강하고 칼등은 부드럽게 하는 백제의 최첨단

금속공예기술을 생각해 내는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과연 가능한 이야기 일까?

그 의문을 풀기 위해 이제부터 1500 여년 전 백제의 과학기술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인류문명은 철(鐵)의 이용과 더불어 발전해 왔으며, 오늘날에도 철은 여러 분야에서 중요한

소재로 사용되고 있다. 철은 도구제작기술에 큰 발전을 가져와 철기문화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구리나 청동은 쇠가 발견되기 전까지 큰 역할을 하였지만, 쓰임새에 있어 철에 자리를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철의 사용방법을 먼저 알고 있었던 히타이트나 앗시리아인이 위대한 이집트와 희랍문명을 붕괴시킨 것도 철로 만든 무기가 청동제 무기보다 단단했기 때문이다.


고대 철기의 제작공정은 단조와 주조의 두 가지 방법이 사용되었다.

단조는 철을 반용융 상태로 달구어 두드리는 과정에서 불순물을 제거하고 쇠를 강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주조는 선철(銑鐵, 무쇠)을 주형틀에 부어 쇠도끼, 쇠솥 등을 생산하는 방법이다.


철은 동을 녹일 때 보다 더 많은 열량을 필요로 하였다.

일반적으로 불순물이 섞인 철은 자연에서 얻어지는 데,

이 철은 700-800℃가 되면 산소가 빠져나가는 환원현상이 시작되고,

1,000℃ 이상 온도가 올라가면 환원이 빨리 일어나게 되어 괴련철(槐鍊鐵, sponge iron)이 되고,

1,200℃에 도달하면 물엿처럼 된 쇠를 거푸집에 부어 주철(鑄鐵)을 생산할 수 있게 된다.

그렇지만 주철은 강한 반면 쉽게 부서지는 단점이 있어 무기나 도구를 만들 수 없었다.

 

반면에 강철을 만들기 위해서는 1,500℃의 높은 온도를 필요로 하였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강철을 직접 만들 수 없었다.

따라서 저온환원법(低溫還元法)으로 만들어진 괴련철에 탄소를 집어넣어 침탄강(浸炭鋼)을

만들거나, 고온용융상태에서 만들어진 주철을 脫炭處理(탈탄처리)하여 鋼(강)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게 되었다.


특히 철과 강은 탄소함유량 및 성형가공 방법이나 열처리 조건 등에 따라 기계적 성질이 크게

변화된다. 탄소함유량이 낮은 순철은 연성은 높으나 강도 및 경도가 낮은 단점이 있으며,

탄소함량이 높은 주철은 취성이 심해 충격에 의해 파손될 수 있는 단점이 있다.

따라서 순철을 침탄 시킴으로서 탄소함량을 높이거나, 주철의 탄소함량을 낮추는 방법으로

강을 생산할 수 있었다. 강은 가공이나 열처리 조건에 의해 그 기계적 성질의 조절이 가능한

매우 유용한 소재로서 고대에도 이를 보다 효율적으로 생산하기 위한 수많은 노력이 있었다.


고대에 강의 제작기법은

주철 용탕을 이용한 주철유화처리기술(鑄鐵柔化處理技術), 가단주철(可鍛鑄鐵), 주철탈탄강(鑄鐵脫炭鋼), 초강법(炒鋼法), 백련강기술(百鍊鋼技術)과 관강야련법(灌鋼冶煉法), 그리고 고체상태의 純鐵(괴련철) 및 주철을 열처리하여 탄소를 가감하는 침탄법(浸炭法)과 탈탄법(脫炭法), 단접법(鍛接法)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철기 제작과정에서 특별한 가공방법이나 열처리 방법을 적용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처리를 통하여 철소재의 미세조직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작기법과 미세조직 사이에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게 마련이며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철기유물의 미세조직을 관찰하게 되면

이에 남겨진 흔적을 통하여 제련과정에서부터 완제품 제작에 이르기까지

소재에 가해진 각종 처리의 특성을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다.


‘서동’이 ‘목라수’(木羅須)[백제 태학사의 기술박사(技術博士)]와 함께 만들고자 하였던

쉽게 부러지지 않고 강한 날을 가진 환두대도는 백제의 여러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다.

환두대도는 둥근고리 모양의 손잡이를 가진 큰 칼을 말하는 것으로,

주로 삼국시대 무덤에서 출토되고 있다.

이 환두대도는 최고의 신분을 상징하는 위세품(威勢品)으로 보인다.

 

환두대도는 금속공예, 목공예, 가죽공예 등 총체적 종합기술을 이용한 최고의 장인만이

만들 수 있는 금속공예기술이다.

환두대도는 피장자의 머리방향이나 성별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형태나 재질에 따른 신분이나 지위의 차이를 반영하고, 문양에 따라 사상적 의미를 달리한다.

또한 기법에 따른 제작기술의 발전 및 계통성 등을 함축하고 있어

당시의 정치, 기술,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1,500여 년 ‘서동’이 백제 기술박사와 함께 만들고자 하였던 강하면서 충격흡수가 좋은 칼을

과학적으로 추적하기 위하여, 천안 용원리유적에서 출토된 대도(大刀)를 대상으로

금속학적 분석을 실시하였다. 또한 그 당시의 방법을 재현하여 실제 환두대도를 복원하기 위해

공주 수촌리유적 출토 은입사환두대도를 모델로 시제품을 복원하였다.


아래 [그림 1]은 천안 용원리유적의 대도(大刀)의 사진이며,

[그림 2]와 [그림 3]은 천안 용원리유적 대도의 분석사진이다.

 

 [그림 2]는 칼날 부위 미세(微細)조직으로 밝고 어두운 부분이 층을 이루어 존재하고 있는데,

이는 탄소함량이 적은 괴련철을 여러 번 접고 두들겨 단접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림 3]는 칼 날 부위의 미세조직으로 마르텐사이트(martensite) 조직이다.

이 조직은 탄소함유량 0.85%인 강을 높은 온도에서 물에 급랭시켜 얻어지는 조직으로,

이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최고의 강도를 지니고 있다 

[그림 1] 천안 용원리유적 대도(大刀)

 


         
[그림 2] 大刀 등, 여러 겹의 단접선이 보이는 미세조직

 


[그림 3] 大刀 칼날, 마르텐사이트 미세조직

백제의 기술자들은 탄소 함유량에 따른 철 소재의 성질변화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으며,

탄소량을 조절하여 강 소재를 생산하는 방법과 열처리(熱處理)방법을 응용하여

강도와 인성이 매우 우수한 철기를 생산할 수 있었다.


수촌리유적에서 출토된 은입사환두대도는 탄소함량이 적은 괴련철을 여러 번 접어 성형가공한 다음, 탄소함량을 조절하여 강도와 인성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담금질처리 하였다.

특히 고리부분에는 은(銀)으로 물결무늬 모양인 파상문(波狀紋)을 입사(入絲)하였다.

 

‘입사’란 철이나 청동과 같은 금속에 빛깔이 다른 금속을 끼워 넣어 색조의 대비를 이루고,

문자나 문양을 내어 꾸미는 기법을 말한다.

현존하는 삼국시대 최초의 입사기술은 백제 칠지도(七支刀)에 나타난다.

백제에서 만들어 일본에 하사(下賜)한 칠지도는

현재 일본 나라현(奈良縣) 텐리시(天理市) 이소가노미신궁(石上神宮)에 보관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입사유물은

백제의 유물인 천안 화성리 유적의 은입사당초문환두대도(銀入絲唐草文環頭大刀)로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의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천안 용원리, 공주 수촌리, 청주 신봉동, 서산 부장리유적 등에서 확인되고 있다.

 

입사기술은 중국의 입사기법을 영향을 받아 처음 도입된 시점은 낙랑으로 보이며,

가장 먼저 백제에서는 4-세기에서 나타나고, 가야에서는 5-세기, 신라는 6세기에 나타난다.

즉, 금속에 금, 은, 동을 상감하는 기술이 상당히 발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백제시대 최고의 하이테크 기술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림 4] 공주 수촌리유적 은입사환두대도


[그림 5] 공주 수촌리유적 은입사환두대도 복원모습
 

환두대도는 사회 서열을 나타내는 위의구로서

왕, 귀족, 수장 또는 군사지휘자 등을 상징하는 유물이다.

특히 당대 최고의 장인만이 할 수 있는 금속공예기술(주조, 단조, 열처리, 입사, 목공 등)을

집대성한 종합예술작품 이다.


백제시대 수촌리유적 환두대도([그림 4])를 모델로

최고의 장인만이 할 수 있다는 은입사환두대도를 복원([그림 5])하였다. 

그 당시의 소재와 전통적인 제작방법을 그대로 복원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 하였지만,

충분한 사전조사와 과학적인 연구를 통하여 가능한 전통적인 방법과 가깝게 복원하였다.


“서동”이 만들고자 하였던 칼을 복원하면서 축적된 기술은,

현재의 전통문화산업 발전을 도모하게 될 것이며,

문화재의 복원기술과 과학기술을 적용한 문화재의 보존·복원연구 개발을 통해

우리나라의 민족 정체성 확립 및 우리민족의 과학기술의 우수성을 재조명하게 될 것이다.
- 문화재청 한국전통문화학교 보존과학과 정광용 교수

- [전통문화의 창] 게시일 2007-0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