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가는(문화)

Gijuzzang Dream 2008. 1. 29. 01:40

 

 

 

 

 

 선조 피란 때 ‘명에 원병 요청’ 아이디어 낸 환관 이봉정

 

 


임란 후 공훈 배분 때 신하 반대로 대접 못 받아… 선조 총애받아 내시 최고위직 올라

광해군이 “왜 뚱뚱하냐” 면박주자 “왕이 게을러 일 안 시키기 때문” 질타성 대답

 

조선조에서 직계가 아닌 방계 손자로서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16세 선조가

왕으로서 가장 먼저 취한 조처는 환관의 수를 절반으로 줄이는 것이었다.

명종 때 박한종을 비롯한 환관의 횡포에 진절머리가 나 있던 조정 신하는

선조의 이 같은 조치를 보며 “성군이 될 자질이 있다”며 환영했다.

그러나 노회(老獪)한 대신과 날이 곤두선 신진사림에 포위되다시피 한 선조로서는

임금이라는 자리가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경우 대개 국왕은 환관의 달콤한 입놀림이나 후궁의 요염한 몸놀림에 현혹되기 십상이다.

선조라고 예외는 아니었을 것이다.

으로 학문을 익혀 밖으로 왕도정치를 펴는 성군이 되겠다는 꿈은

일상의 피곤 앞에서 쉽게 허물어지곤 했다.

선조는 어느 정도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해가던 선조17년 3월 11일

이조에 명을 내려 “현재 당상관의 환관은 모두 늙고 용렬하여 쓸 데가 없으니

새로 젊은 환관을 승진시켜 내시부의 체계를 갖추고자 한다”고 말한다.

이어 상약(尙藥ㆍ내시부 종3품직) 이봉정(李奉貞)을 정3품 당상관으로 승진시키라고 명했다.

사헌부에서는 특별한 공도 없이 환관을 승진시키는 것은 잘못이라고 상소를 올렸지만

선조는 “나는 환관이나 총애하는 그런 군주가 아니다”라며 재론을 금했다.

 

훗날 밝혀진 일이지만 선조가 의주로 파천할 때 도중에 왜적을 막는 방법을 고민하자

곁에서 명나라 황제에게 원병을 청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처음 낸 것이 바로 이봉정이었다.

결과적으로는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발상을 내놓은 것이지만

사실 환관의 국사 참여를 엄격하게 금하고 있던 조선에서는 큰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전쟁 중이기는 하지만 선조는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선조 27년 10월 17일

이봉정을 수원 근처 군부대인 독성진으로 파견하여

병사의 무재(武才)를 시험하고 상벌을 내릴 것을 명하기도 했다.

하고 많은 조정 인재 중에서 환관을, 그것도 무장을 시험하는 데 보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무신을 깔보는 행위일 수도 있었다.

물론 그만큼 당시 이봉정이 선조로부터 받은 총애가 컸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같은 지나친 총애는 폐단을 낳기 마련이다.

 

선조 29년 9월 9일 선조는 이봉정을 조사할 것을 의금부에 명한다.

죄목은 선조를 모시던 내관 이봉정을 세자궁을 책임지는 장번(長番)내관으로 임명하자

병을 핑계로 사표를 제출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선조가 직접 여러 차례에 걸쳐 사표 철회를 명했으나 듣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선조는 “그의 오만하고 방자한 짓이 매우 놀랍다”며 조사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이런 경우 십중팔구 정말 고문을 하기보다는 겁만 주려는 의도가 강했다.

이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틀 후 사간원에서 이봉정을 하옥해 본격적으로 고문을 해야 한다고 말하자

오히려 선조는 감옥에까지 넣어 고문을 해 조사할 필요는 없다고 말린다. 해프닝으로 끝난 것이다.

 

당시 이봉정의 직위는 행 상선(尙膳)으로 내시 중에서는 최고위직이었다.

앞에 ‘행’이 붙은 이유는

원래 상선은 종2품직인데 정3품인 이봉정이 그 직위를 맡게 되면서 ‘행(行)’자를 붙였다.

요즘식으로 하자면 ‘부장 대우’에 해당하는 것이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선조 36년 2월이 되면
전란 중에 공이 있는 사람에게 공신을 녹훈하는 문제가 본격화된다.
크게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선조가 의주까지 파천할 때 가까이에서 모신 사람에게 내리는 호종공신이었고
또 하나는 무공을 세운 선무공신이었다. 참고로 선무공신 1등은 권율, 이순신, 원균 3인이었다.

명필로 소문났던 선조의 어필(御筆).

이백의 시 구절을 적었다.

처음에는 이봉정의 경우 평양까지는 호종했지만 중간에 떨어졌다가 용천에서 다시 호종했으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호종한 사람에 비하면 공이 별로 크지 않으니 강등할 것을 명했다. 즉 4등 공신에도 들지 못하고 일종의 공신후보에 해당하는 원종공신에만 이름이 들어갔다.

그러나 그 사이에 이봉정의 강력한 ‘로비’가 있었던 것 같다.
그 해 6월 26일 원래는 선무공신 2등으로 돼 있던 원균을 1등 공신으로 조정하면서 선조는 이봉정의 문제도 직접 언급한다. 그가 평양에서 잠시 자리를 비웠던 것은 부친상을 당하여 고향인 용천에 갔다가 다시 용천에서 재합류한 것이니 사사로이 자리를 비운 것이라고 할 수 없다며 4등 공신에 넣을 것을 명했다. 후보공신에서 다시 정공신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신하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사실 당시 공신 등급 분류는 지나치게 선조 개인의 호불호에 따라 정해지고 있었다.
원균이 이순신과 같은 1등으로 분류됐다는 것 자체가 전형적인 사례다.

이봉정의 호종공신 4등 책록에 대한 신하의 거센 반발에
선조도 신경질적으로 반응한다.
“사실 이봉정은 환관이기 때문에 내가 드러내놓고 말하려 하지 않으려 했는데 당신들의 반대가 이처럼 심하니 실상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 털어놓은 선조의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명나라에 청병을 하는 안은 원래 비변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이봉정이 곁에서 적극적으로 자신을 설득하는 바람에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공을 어찌 환시(宦寺)라고 해서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이 경우는 비록 2∼3 등에 녹훈하더라도 지나친 것이 되지 않을 것이다.”

신하의 입장에서는 억장이 무너지는 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국가 대사를 비변사라는 공식기구가 아니라 대전의 내시와 함께 결정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사실 선조로서는 끝까지 숨기고 싶었을 것이다.
선조는 “당초에 ‘주선하고 수고했다’고 이봉정의 공을 얼버무린 것도 실은 그가 내시여서 드러내놓고 싶지 않아 그랬던 것”이라고 말한다. 신하들로서도 물러설 수 없는 문제였다.
결국 이봉정은 다시 4등 공신에서 원종공신으로 강등되고 만다.

그러나 이봉정은 바른말을 할 줄도 아는 내시였다.
광해군 초에 광해군은 경연이나 결재업무를 소홀히 했다.
광해군 즉위 초 한번은 광해군이 이봉정에게 “너는 왜 그리 뚱뚱하냐”고 면박을 줬다.
그에 대한 이봉정의 대답이 걸작이다.
“소신이 선왕을 모실 때 선왕께서는 공사청(公事廳)에 납시어 온갖 일을 열심히 재결하시었기 때문에
항상 옆에서 모시느라 낮에는 밥 먹을 겨를이 없었고 밤에도 편히 잠을 못 잤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전하께서 공사청에 납시는 때가 없으므로
소신은 종일 태평하게 쉬고 밤에도 편안하게 잠을 자기 때문에 고달픈 일이 없으니
어찌 살이 찌지 않겠습니까?”

이봉정은 선조를 가까이에서 모셨기 때문에 명필로 소문났던 선조의 어필(御筆)을 많이 갖고 있었다.
먼 훗날 인조 때 선조의 어필을 가져오면 6품의 관직을 주기도 했다.
인조 26년 윤3월 17일 이봉정의 양아들 이물이 선조가 부채에 직접 짓고 쓴 7언 율시 한 편을 들고 온다.
이미 그 전에 정광후란 인물이 선조의 어필을 바치고 6품직을 받은 바 있었다.
이물이 들고 온 부채 어필은
임진왜란 중 해주에 머물며 왕자들을 모시고 있던 이봉정이 한양에 왔을 때 선조가 써준 시였다.
이물은 이 어필 부채 하나 덕에 하루 아침에 정6품직을 받을 수 있었다.
조선시대 그 어렵다는 문과에 급제하고서 처음으로 받은 직위는 9품이었다.
- 이한우의 朝鮮이야기 / 조선일보
- 이한우/ 조선일보 경영기획실 차장대우
hwlee@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