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성황후

이슬눈 2015. 3. 1. 07:37

서울대병원 김상태 교수 "일기내용 규명위한 논의 필요"

"일제 파리박멸운동으로 콜레라 책임 한국에 전가 지적"

(서울=연합뉴스) 김길원 기자 = 역사적으로 3·1 만세운동은 고종황제 독살설이 도화선이 된 것으로 보는 일부 시각이 있다. 물론 국사학계에서는 이런 독살설을 정설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친일 지식인으로 알려진 윤치호(1865~1945)의 영문일기를 보면 고종황제의 독살설에 대한 의학적 개연성이 상당히 설득력있게 설명돼 있다. 이 일기에는 또 파리박멸운동 등 일본강점기의 잘못된 보건정책을 꼬집는 내용도 들어있어 눈길을 끈다.

↑ 1919년 1월 21일 갑자기 서거한 고종의 장례식은 3월 3일 거행됐다. 집무를 보기위해 겨울옷을 입고 고종황제가 선원정에서 인정전으로 나서고 있다.

윤치호는 1883년(18세)부터 1943년까지 60년 동안 일기를 썼는데, 20대 때인 1889년 12월7일 이후로는 영어로만 일기를 적었다.

서울대병원 의학역사문화원 김상태 교수는 1일 "윤치호의 친일파 여부를 떠나 이 일기 속에는 의학사적 가치가 높은 내용이 상당수 들어있다"면서 "친일파라는 선입견 때문에 사료로서의 가치가 폄하돼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3·1절을 맞아 윤치호 일기 중 의학적 사료가치가 있는 '고종 독살설'과 '파리박멸운동'을 살펴본다. 관련 내용은 김상태 교수가 윤치호의 일기를 편역해 출간한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마라'(산처럼 刊)에서 발췌했다.

◇ 고종황제의 5가지 독살 근거

고종황제는 1919년 1월21일 붕어했다. 윤치호는 이후 1920년 10월 13일자 일기에 고종의 독살 근거 5가지를 언급했다. 그는 이런 독살 근거에 대해 한진창씨의 생각을 옮겨 적은 것처럼 표현했다. 한 씨는 구한말 관찰사를 거쳐 한일합방 후 중추원 참의를 지낸 인물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이상적이라 할 만큼 건강하던 고종황제가 식혜를 마신지 30분도 채 안되어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죽어갔다.

② 고종황제의 팔다리가 1~2일 만에 엄청나게 부어올라서, 사람들이 황제의 통 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만 했다.

③ 민영달(명성황후의 친척)과 몇몇 인사는 약용 솜으로 고종황제의 입 안을 닦아내다가 황제의 이가 모두 구강 안에 빠져 있고 혀는 닳아 없어져 버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④ 30㎝가량 되는 검은 줄이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

⑤ 고종황제가 승하한 직후에 2명의 궁녀가 의문사했다. 민영휘, 나세환, 강석호(이하 고동의 신임이 두터웠던 내관들) 등과 함께 염을 한 민영달 씨가 한진창씨에게 이 상세한 내용을 말해주었다고 한다.

김상태 교수는 "윤치호가 적은 5가지 독살근거에 대해서는 일부 법의학자들도 상당 부분 독살의 개연성이 있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면서 "개인의 일기가 가지는 역사적 사료가치 여부를 떠나 일제에 의한 고종황제의 독살 가능성이 상당히 자세히 설명된 만큼 지금부터라도 이 부분을 제대로 규명하기 위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서울의대 법의학과 이윤성 교수는 "조선의 왕이 갑자기 사망하면 항상 독살설이 나왔었고, 고종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를 입증할만한 근거는 늘 부족했다"면서 "윤치호의 일기에 몇가지 의혹이 언급돼 있지만, 당시 시신을 검시한 게 아니었고, 이런 관찰의 시점이 언제인지도 모르게 때문에 아쉽게도 이를 후대에서 검증하기는 어려워보인다"고 말했다.

◇ 조선총독부의 어이없는 '파리와의 전쟁'

윤치호의 일기를 보자면 1921년 조선총독부가 시행했던 '파리박멸운동'이 웃지 못할 일화로 소개돼 있다. 이 파리박멸운동을 통해 총독부는 파리를 잡아오는 이들에게 현상금이나 파리채, 파리약, 파리 잡는 끈끈이종이 등을 나눠줬다. 또 박멸주간이나 박멸의 달을 정해 집중적으로 잡게도 했으며, 일부 관제 언론은 어느 지역에서 파리를 몇 섬이나 잡았는지 보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총독부가 이같은 파리박멸운동에 나선 실제 이유는 1920년에 유행했던 콜레라 창궐의 책임을 한국인들에게 전가하기 위함이었다. 한국인들의 위생관념이 미개하기 때문에 전염병에 잘 걸린다는 선전인 셈이다.

윤치호는 이에 대해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얼마 전 당국이 경성부청(京城府廳)으로 파리를 잡아 가져오면 한 마리 당 3리(厘)를 주겠다면서 파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그런데 주민들이 파리를 엄청나게 많이 가져오자, 당국은 돈을 주겠다던 당초 약속의 이행을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파리 한 마리에 그토록 많이 보상해주겠다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었지만, 아무런 예고도 없이 대중과의 약속을 어긴 것은 더 어리석은 짓이다. 파리박멸운동은 그 자체 만으로만 본다면 아주 잘한 일이다. 그러나 당국은 조선인들이 밀집해 사는 동네에서 오물과 쓰레기가 몇 주 동안 쌓여 넘쳐나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치우지 않고 있다. 파리 박멸에 대해서는 보상을 하겠다면서 파리의 온상은 손대지 않고 방치하는 정책을 가지고, 이 세상을 우롱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보다.』

김상태 교수는 "'한국인들의 건강을 위해서'라는 총독부의 파리박멸운동은 진정성이 없는 전시행정에 불과했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이어 "당시 총독부는 한국인들의 보건위생에 무관심했던 점을 반성하기는 커녕 콜레라 유행의 원인을 한국인들의 미개한 위생관념 탓으로 돌려버렸다"면서 "그러나 일제는 강점기 내내 공공변소, 공공 하수시설, 전염병환자 전문 치료기관 등을 거의 늘리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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