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성황후

이슬눈 2015. 3. 1. 07:37

서울대병원 김상태 교수 "일기내용 규명위한 논의 필요"

"일제 파리박멸운동으로 콜레라 책임 한국에 전가 지적"

(서울=연합뉴스) 김길원 기자 = 역사적으로 3·1 만세운동은 고종황제 독살설이 도화선이 된 것으로 보는 일부 시각이 있다. 물론 국사학계에서는 이런 독살설을 정설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친일 지식인으로 알려진 윤치호(1865~1945)의 영문일기를 보면 고종황제의 독살설에 대한 의학적 개연성이 상당히 설득력있게 설명돼 있다. 이 일기에는 또 파리박멸운동 등 일본강점기의 잘못된 보건정책을 꼬집는 내용도 들어있어 눈길을 끈다.

↑ 1919년 1월 21일 갑자기 서거한 고종의 장례식은 3월 3일 거행됐다. 집무를 보기위해 겨울옷을 입고 고종황제가 선원정에서 인정전으로 나서고 있다.

윤치호는 1883년(18세)부터 1943년까지 60년 동안 일기를 썼는데, 20대 때인 1889년 12월7일 이후로는 영어로만 일기를 적었다.

서울대병원 의학역사문화원 김상태 교수는 1일 "윤치호의 친일파 여부를 떠나 이 일기 속에는 의학사적 가치가 높은 내용이 상당수 들어있다"면서 "친일파라는 선입견 때문에 사료로서의 가치가 폄하돼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3·1절을 맞아 윤치호 일기 중 의학적 사료가치가 있는 '고종 독살설'과 '파리박멸운동'을 살펴본다. 관련 내용은 김상태 교수가 윤치호의 일기를 편역해 출간한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마라'(산처럼 刊)에서 발췌했다.

◇ 고종황제의 5가지 독살 근거

고종황제는 1919년 1월21일 붕어했다. 윤치호는 이후 1920년 10월 13일자 일기에 고종의 독살 근거 5가지를 언급했다. 그는 이런 독살 근거에 대해 한진창씨의 생각을 옮겨 적은 것처럼 표현했다. 한 씨는 구한말 관찰사를 거쳐 한일합방 후 중추원 참의를 지낸 인물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이상적이라 할 만큼 건강하던 고종황제가 식혜를 마신지 30분도 채 안되어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죽어갔다.

② 고종황제의 팔다리가 1~2일 만에 엄청나게 부어올라서, 사람들이 황제의 통 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만 했다.

③ 민영달(명성황후의 친척)과 몇몇 인사는 약용 솜으로 고종황제의 입 안을 닦아내다가 황제의 이가 모두 구강 안에 빠져 있고 혀는 닳아 없어져 버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④ 30㎝가량 되는 검은 줄이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

⑤ 고종황제가 승하한 직후에 2명의 궁녀가 의문사했다. 민영휘, 나세환, 강석호(이하 고동의 신임이 두터웠던 내관들) 등과 함께 염을 한 민영달 씨가 한진창씨에게 이 상세한 내용을 말해주었다고 한다.

김상태 교수는 "윤치호가 적은 5가지 독살근거에 대해서는 일부 법의학자들도 상당 부분 독살의 개연성이 있는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면서 "개인의 일기가 가지는 역사적 사료가치 여부를 떠나 일제에 의한 고종황제의 독살 가능성이 상당히 자세히 설명된 만큼 지금부터라도 이 부분을 제대로 규명하기 위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서울의대 법의학과 이윤성 교수는 "조선의 왕이 갑자기 사망하면 항상 독살설이 나왔었고, 고종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를 입증할만한 근거는 늘 부족했다"면서 "윤치호의 일기에 몇가지 의혹이 언급돼 있지만, 당시 시신을 검시한 게 아니었고, 이런 관찰의 시점이 언제인지도 모르게 때문에 아쉽게도 이를 후대에서 검증하기는 어려워보인다"고 말했다.

◇ 조선총독부의 어이없는 '파리와의 전쟁'

윤치호의 일기를 보자면 1921년 조선총독부가 시행했던 '파리박멸운동'이 웃지 못할 일화로 소개돼 있다. 이 파리박멸운동을 통해 총독부는 파리를 잡아오는 이들에게 현상금이나 파리채, 파리약, 파리 잡는 끈끈이종이 등을 나눠줬다. 또 박멸주간이나 박멸의 달을 정해 집중적으로 잡게도 했으며, 일부 관제 언론은 어느 지역에서 파리를 몇 섬이나 잡았는지 보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총독부가 이같은 파리박멸운동에 나선 실제 이유는 1920년에 유행했던 콜레라 창궐의 책임을 한국인들에게 전가하기 위함이었다. 한국인들의 위생관념이 미개하기 때문에 전염병에 잘 걸린다는 선전인 셈이다.

윤치호는 이에 대해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얼마 전 당국이 경성부청(京城府廳)으로 파리를 잡아 가져오면 한 마리 당 3리(厘)를 주겠다면서 파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그런데 주민들이 파리를 엄청나게 많이 가져오자, 당국은 돈을 주겠다던 당초 약속의 이행을 취소한다고 발표했다.

파리 한 마리에 그토록 많이 보상해주겠다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었지만, 아무런 예고도 없이 대중과의 약속을 어긴 것은 더 어리석은 짓이다. 파리박멸운동은 그 자체 만으로만 본다면 아주 잘한 일이다. 그러나 당국은 조선인들이 밀집해 사는 동네에서 오물과 쓰레기가 몇 주 동안 쌓여 넘쳐나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치우지 않고 있다. 파리 박멸에 대해서는 보상을 하겠다면서 파리의 온상은 손대지 않고 방치하는 정책을 가지고, 이 세상을 우롱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보다.』

김상태 교수는 "'한국인들의 건강을 위해서'라는 총독부의 파리박멸운동은 진정성이 없는 전시행정에 불과했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이어 "당시 총독부는 한국인들의 보건위생에 무관심했던 점을 반성하기는 커녕 콜레라 유행의 원인을 한국인들의 미개한 위생관념 탓으로 돌려버렸다"면서 "그러나 일제는 강점기 내내 공공변소, 공공 하수시설, 전염병환자 전문 치료기관 등을 거의 늘리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bio@yna.co.kr

 
 
 

★ 명성황후

이슬눈 2013. 8. 29. 03:37

[한겨레]'동학농민 학살' 미야모토 소위

1894년 동학 농민혁명 때 일본군 대본영이 조선에 파병한 '동학당 토벌대'로 농민 학살에 앞장섰던 하급 장교가 1895년 10월의 '명성황후 시해' 때도 핵심 구실을 한 주범 가운데 한 사람으로 드러났다.

박맹수(58) 원광대 교수는 28일 일본군 후비보병 18대대 소속 미야모토 다케타로 소위가 1894년 18대대 1중대와 함께 충청도 금산, 전라도 용담·진안·고산 등에서 토벌작전을 벌인 사실을 당시 일본군 대본영 참모본부 운수통신장관 겸 육군 소장이던 데라우치 마사타케(초대 조선총독)에게 보고한 1894년 12월2일치 편지를 <한겨레>에 처음 공개했다.

박 교수는 미야모토가 이듬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핵심 주범임을 보여주는 당시 일본군 헌병사령관의 전보도 함께 공개했다. 이 전보는 미야모토가 당시 현장에서 총을 쏘고 칼을 휘둘렀다는 목격담과 자백 내용을 담고 있다. 미야모토는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그 사건 직후 기소됐다가 무죄 방면됐다고 박 교수는 밝혔다.

박 교수는 당시 '토벌대' 소속 병사가 일본군의 동학 농민군 학살 실상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메이지 27년(1894년) 일청교전 종군일지' 전문 사본 및 번역본도 공개했다. 종군일지는 지난 6월 일본에서 발간된 책 <동학농민전쟁과 일본>(나카쓰카 아키라·이노우에 가쓰오·박맹수 공저)에 그 존재 사실과 일부 구절이 수록(<한겨레> 7월23일치 1·2면)됐지만, 작성자나 일지의 구성, 내용 전체가 밝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익산/한승동 기자sdhan@hani.co.kr


동학농민 학살한 일 하급장교 '명성황후 시해'에도 가담했다

1894년 동학 농민혁명 때 일본군 대본영이 조선에 파병한 '동학당 토벌대'로 농민 학살에 앞장섰던 하급 장교가 1895년 10월의 '명성황후 시해' 때도 핵심 구실을 한 주범 가운데 한 사람으로 드러났다.

박맹수(58) 원광대 교수는 28일 일본군 후비보병 18대대 소속 미야모토 다케타로 소위가 1894년 18대대 1중대와 함께 충청도 금산, 전라도 용담·진안·고산 등에서 토벌작전을 벌인 사실을 당시 일본군 대본영 참모본부 운수통신장관 겸 육군 소장이던 데라우치 마사타케(초대 조선총독)에게 보고한 1894년 12월2일치 편지를 <한겨레>에 처음 공개했다.

미야모토 소위 자백 편지 최초 공개
토벌 가담한 일 병사의 일지도 발견
일본 '동학 토벌대'의 만행 드러나
1894년 11월14일 경기도 하남
"달아나는 자 모두를 총살하고
부녀자 13명을 구금했다"
12월19일 경상도 김천, 23일 거창
"농민 10명 죽이고, 잔당 8명 총살"
1895년 1월7~14일 전라도 장흥
"통행하는 남자를 모두 잡아 고문
저항하면 옷에 불붙이고 시신 태워"


이와 함께 박 교수는 당시 '토벌대' 소속 병사가 일본군의 동학 농민군 학살 실상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메이지 27년(1894년) 일청교전 종군일지' 전문 사본 및 번역본도 공개했다. 종군일지는 지난 6월 일본에서 발간된 책 <동학농민전쟁과 일본>(나카쓰카 아키라·이노우에 가쓰오·박맹수 공저)에 그 존재 사실과 일부 구절이 수록(<한겨레> 7월23일치 1·2면)됐지만, 작성자나 일지의 구성, 내용 전체가 밝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구스노키 상등병의 종군일지

박 교수가 공개한 일본 병사의 종군일지 전문은 지난해 봄 박 교수의 공동 연구자인 이노우에 가쓰오 홋카이도대학 명예교수가 작성자의 고향인 시코쿠 도쿠시마현에서 입수한 것이다.

도쿠시마현 요시노가와 출신인 구스노키 비요키치는 1894년 7월23일 후비역(현역과 예비역을 마친 다음의 병역) 보병 제19대대 제1중대 제2소대 제2분대 병사로 소집된다. 그해 10월28일 일본군 대본영은 그의 부대를 '동학당 토벌대'로 명했고, 부대는 11월6일 인천에 상륙한다. 이틀 뒤 서울 용산 만리창에 집결한 토벌대는 11일 동로·중로·서로 '3로'로 나뉘어 진압에 나선다.

구스노키는 소집 당일부터 1895년 12월9일 귀국 뒤 부대 해체 때까지 일지를 계속 썼다. 길이 923㎝, 폭 34㎝의 두루마리에 기록된 문서는, 구스노키의 일지 메모를 그의 친척 구스노키 마사하루가 동학 학살이 끝난 지 3~4년 뒤 정서한 것이다.

일지 속 일본군 토벌 경로를 보면,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과 군대 해산에 분노한 동학봉기(제2차 봉기)가 전라도만이 아닌 전국적 봉기였음을 알 수 있다. 학살은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에서도 자행됐다.

먼저 광주와 장호원 등 경기도 일대를 훑어가던 구스노키 등이 처음 학살을 자행한 곳은 곤지암. 11월14일 동학 접주 김기룡을 체포한 토벌대는 그를 이천 병참부로 압송한 뒤 그날 저녁에 총살하고 "집집마다 수색해 달아나는 자들을 모두 총살"했으며, 부녀자 13명을 구금했다. 17일에는 가흥 북쪽 동막읍에서 민가를 불태우고 농민 18명을 죽이고, 접주 이경원을 체포해 총살했다.

충청도로 이동한 부대는 21일 청풍 인근 동학 접주 집과 40리 떨어진 성내동의 모든 민가를 불태웠다. 22일 제천 접주 한 명을 체포해 총살했고, 그다음 날 청풍현 민가 수십 채를 불태웠다. 12월13일 충주 인근에서 동학 접주를 체포해 총살했고 16일엔 경상도 상주목사의 서기관 박용래를 체포해서 고문한 끝에 관직을 박탈한 뒤 추방했다. 18일 개령의 관리들 수십명을 동학교도라는 이유로 모두 총살했다. 19일 김천에서 농민 10명을 죽이고, 23일엔 거창 촌락을 수색해 8명을 체포해서 총살했다.

26일 전라도 남원에서 농가들을 불태웠다. 30일엔 남원 일대 절과 민가들을 불태웠다. 31일 곡성에서 농가 수십호를 불태웠고 그날 밤 농민군 10명을 체포해 조선 사람들에게 그들을 소살(불태워 죽임)하도록 했다.

1895년 1월2일 옥과에서 농민군 5명을 고문한 뒤 총살하고 시신은 불태웠다. 4일엔 능주에서 농민군 70~80명을 체포, 고문하고 20명 정도를 총살했다. 5일, 능주에서 또 농민군 수백명을 체포해 수십명을 총살했다. 7일엔 장흥에 들어가 40~50호의 농가를 불태우고 농민군 10명을 죽였다. 8일에도 장흥에서 착검 돌진(돌살)과 일제사격, 방화를 자행한 뒤 "대일본 만세!"를 삼창했다. 9일 역시 장흥에서 8명의 농민을 생포해 3명을 타살(때려죽임)했고, 이어서 도망치던 농민을 추격해서 48명을 타살하고 다친 사람 10명을 생포해 고문한 다음 소살했다.

1월11일 장흥 일대 통행자를 모조리 붙잡아 고문했고, 저항자는 옷에 불을 붙여 달아나면 총을 쏘아 죽였다. "그 광경을 보고 모두 웃었다." 죽청동 인근에선 12살 아이를 꾀어 동학군을 지목하게 한 다음 16명을 고문하고 8명을 총살해 시신은 불태웠다. 죽천 장터에서도 18명을 죽였다. 대흥면 쪽으로 가다 11명의 농민을 붙잡아 죽였고, 3명은 옷에 불을 붙여 바다 쪽에 빠져죽게 만들었다. 13일 대흥면 산에서 농민군 수십명을 잡아 죽였다. 길옆과 도랑에 버린 시신이 수십명이었다. "순창읍의 한 주막에서 동학당 대괴수 전봉준을 포획"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14일 장흥에서 농민군 17명을 체포해 죽였다. 그날 다리에 관통상을 입은 최동이라는 17살 동학 지휘관을 체포했다. 1월 이래 죽인 농민들이 300명에 달했다. 22일 해남에서 붙잡혀 온 농민군 16명을 총살했다. 31일엔 "동학농민군 7명을 밭 가운데 일렬로 세워놓고 총에 착검을 하고 돌격하여 찔러 죽였다."

2월4일, "(나주부) 남문에서 4정 정도 떨어진 곳에 작은 산이 있었고, 그곳에는 사람의 시신이 실로 산을 이루고 있었다. 지난번 장흥부 전투(1895년 1월8~10일) 이후 수색을 강화하자 숨을 곳 찾기가 어려워진 농민군이 민보군 또는 일본군에 포획당해, 책문(고문) 뒤 죽은 중죄인이 매일 12명 이상으로 103명을 넘었다. 그리하여 그곳에 버려진 시신이 680구에 달하여 땅은 죽은 사람들의 기름이 하얀 은(백은)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 미야모토 다케타로 소위의 편지

미야모토가 후비보병 제18대대에 배속돼 농학 토벌에 나섰다가 1894년 12월26일 전주에서 데라우치에게 보낸 편지다. 박 교수는 이 편지를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 '데라우치 관계문서 목록'에서 찾아냈다. 데라우치는 동학 농민혁명 당시 일본 대본영 참모본부 운수통신장관직을 수행하면서 동학농민 학살을 주도했다.

이 편지에는, 그해 10월30일 경성(서울) 수비대로 파병된 제18대대가 파병 목적과는 달리 농민군 학살에 나선 사실이 적시돼 있다. 미야모토 소위는 1895년 1월 전라도 장흥과 해남, 진도 등에서도 학살을 자행했다.

제18대대는 그해 10월8일 '명성황후 시해'에도 깊숙이 개입했으며, 미야모토는 시해의 주범 중 한 사람이었다. 일본 방위성이 소장한, 1895년 11월22일 하루타 헌병사령관이 고다마 육군차관에게 보낸 전보(나카쓰카 교수 발굴)에 이런 구절이 들어 있다. "(조선) 궁내대신(이경직)을 처음 쏜 것은 (미야모토 다케타로) 소위이며, … 그 외 다른 관련자들 진술을 보더라도 미야모토 소위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주도한 인물이라는 혐의가 가장 짙다." 이 전보는 미야모토가 당시 현장에서 총을 쏘고 칼을 휘둘렀다는 목격담과 자백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그 사건 직후 기소됐다가 무죄 방면됐다고 박 교수는 밝혔다.

익산/한승동 기자sdhan@hani.co.kr

일본 학자들과 18년간 자료 탐구

"동학, 단순 지역농민 봉기 아닌

동아시아 3국을 뒤흔든 대사건"

"동학 농민혁명을 1894년 1월의 고부 농민봉기에서 시작돼 1895년 3월 전봉준의 처형으로 종결된 단조로운 사건으로 봐선 안 됩니다. 19세기 전 시기에 걸쳐 준비·전개된 일대 사건으로, 조선왕조 500년의 종결을 예고하는 동시에 동아시아 3국을 뒤흔든 대사건이었어요. 그런데도 일본은 이를 고부나 전라도 일원의 지역사건으로 축소하려 했고 해방 뒤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 학자들도 제대로 연구·평가하지 못하고 있어요."

박맹수(58) 원광대 교수는 일본이 동학 농민혁명에 개입하지 않았다면 "조선 근대화의 도정이 달라졌을 것"이라며 "그랬다면 일본도 조선 식민지 수탈을 토대로 한 제국주의적 팽창이 불가능했을 것이고 중국 근대사도 달라졌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동학 주도세력들이 나름의 독자적인 근대화 비전이나 이상을 머리에 그릴 만큼 준비가 돼 있었고 국제 정세에도 밝았다는 증거들이 최근 연구에서 밝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일본 보수 주류세력은 근대 일본이 잘못된 길로 나아가 결국 패망한 게 1904년 러일전쟁 이후, 또는 1931년 만주침략 이후 우익 군부의 파시즘적 일탈 때문이라 합니다. 그 전까지 일본, 특히 메이지 시절 일본은 국제법을 준수하며 근대화를 이룩한 정상적인 국가라는 거죠. 거짓말입니다. 이미 메이지 시절부터 일본은 무도하게 이웃을 침략하고 수탈해 제국주의적 팽창의 토대를 쌓았어요. 동학 농민혁명 압살이 그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축소·은폐하려 했고 공식 기록에서도 관련 사실들을 삭제해버렸어요. 구스노키 진중일지는 이를 뒤집는 결정적 자료입니다."

나카쓰카 아키라(84) 나라여자대학 명예교수, 이노우에 가쓰오(68) 홋카이도대학 명예교수와 그의 동학 농민혁명 공동연구는 18년 전 시작됐다. 1995년 홋카이도대에 방치돼 있던 동학 농민혁명 당시 진도지역 희생자들 유골이 발견되자 이노우에 교수 등은 한국 동학 관계자들에게 유골봉환과 공동연구를 제안했다. 전국동학농민혁명기념회 학술간사이던 박맹수 당시 영산원불교대 교수가 파트너가 됐다. 그 인연으로 박 교수는 1997년부터 4년간 홋카이도대에서 동학농민혁명과 청일전쟁을 중심으로 근대 한-일 관계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었고 교토대에서도 1년간 동학사상을 연구했다.

익산/글·사진 한승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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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눈 2010. 10. 26. 00:36

 일본 관리들이 안중근 의사를 사형 집행한 후 당시 뤼순(旅順)고등법원장 관사에 기생을 불러 축하 파티를 열고 재판 관계자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한 사실이 처음으로 공개됐다.

 국가보훈처 우무석 차장은 25일 안 의사의 하얼빈 의거 101주년(10.26)을 하루 앞두고 그간 발굴한 안 의사 재판 및 사형집행 후 일본관리들의 만행이 기록된 사료를 공개했다.

 보훈처가 발굴한 사료는 안 의사 순국 3일 후 발행된 1910년 3월29일자 ‘만주일일신문’과 ‘만주신보’ 등이다.

 두 신문은 당시 기사에서 “3월26일 안중근의 매장이 끝났다는 보고가 있은지 얼마후 5시에 안중근 재판의 최고책임자인 뤼순고등법원장 히라이시 요시토(平石義人) 관사에서 안중근사건 관계자 위로만찬회라는 이름으로 축하연을 개최했다”면서 참석자들의 이름을 나열했다.

 

 신문은 참석자들을 내빈과 주최측으로 구분했는데 내빈으로는 관동도독부의 사토(佐藤) 경시총장과 요시다(吉田) 경시(경찰고등관.총경급 직위),뤼순 감옥의 구리하라(栗原貞吉) 전옥(형무소장급 직위),변호사 미즈노(水野),가마다(鎌田)를 비롯한 언론인 6명 등이다.

 주최측에서는 히라이시 고등법원장,검찰관 미조부치(溝淵),판관 다이와다(大和田),통역 소노키(園木),서기 와다나베(渡邊),다케우치(竹內),오카다(岡田),기시다(岸田) 등이 참석했다.

 이들은 “오후 5시에 모여 기념사진을 촬영한 후 응접실에서 바둑을 두었으며,히라이시 법원장의 인사말과 사토 경시총장의 답사가 있고 나서 파성(巴城)과 미광(未廣)의 두 고급 요정에서 불러온 홍군(紅裙.기생)들이 술 잔치를 벌이고 끝에는 각자 득의(得意)의 숨은 재주(隱藝)를 뽐내는 등 매우 성황에 이르렀고,10시가 넘어 산회했다”고 두 신문은 기록했다.

 또 일본 정부는 재판을 시작하기도 전에 사형을 미리 결정하고 재판을 통해 교수형을 선고했는데 이에 관여한 재판 관계자에게 250원에서 10원까지의 보상금을 준 사실도 드러났다.

 마나베 재판장 150원,미조부지 검찰관 250원,구리하라 전옥 150원,나카무라 간수부장 80원,히라바야시 판사 20원,다나카 간수 등 6명 10원~45원 등 법원과 감옥 관리 등 25명이 보상금을 받았다.

 보훈처는 “사형수에 대해 사형을 집행하고 나서 재판관과 검찰관 모두 보상금을 받고 축하연까지 한 것은 천하의 웃음거리”라며 “이는 일제가 안 의사에 대한 재판을 의도한대로 조작 진행하기 위해 얼마나 긴장했는지를 암시한다”고 설명했다.

 한편 일본측은 우리측의 안 의사 유해발굴 협조 요청에 대해 “관련 자료를 찾았으나 이미 공개된 자료 외에 추가적인 것을 찾지 못했고 계속 조사를 해 나가겠다”고 답변했다.

 보훈처는 지난 4월28일 ‘안중근의사 유해발굴 추진단’을 발족해 미국과 일본,중국,러시아에서 안 의사 관련 사료를 발굴해 유해매장 지역을 찾고 아직 명확한 단서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우무석 보훈처 차장은 “앞으로 안의사 재판에 참관했던 일본 관리들의 자료 및 기록,그의 후손들을 찾아 증언을 청취하는 방식으로 안의사 유해매장지에 대한 단서를 확보할 계획”이라며 “단서가 확보되면 뤼순 감옥 일대 등에서 발굴을 시도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변화무쌍하고 불안정한 세상에서 튼튼한 발판은 자기자신에 대한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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