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야기/명화감상

금동이 2014. 3. 12.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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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헤켈

[ ERICH HECKEL ]1883년 7월 31일 ~ 1970년 1월 27일독일 되벨른 - 독일 라돌프첼화가 겸 판화가, 청기사파의 창립 회원, 실내 장면과 풍경 속에 그려진 인물,
강렬한 색채
사용, 물감을 두껍게 칠하는 기법
작센주 데베른 출생. 처음에는 드레스덴공과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했으나 후에 회화로 전환, 1905년 E.L.키르히너와 함께 표현주의운동의 미술단체 ‘브뤼케[橋]’를 조직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위생병으로 벨기에전선에서 종군하였다. 1937년 나치스로부터 퇴폐예술가로 낙인이 찍혔고, 1944년 공습으로 베를린의 집과 아틀리에가 파괴되어 많은 작품을 잃었다.유채(油彩) 외에 판화, 석판(石版)을 표현수단으로 삼았다. 그러나 1920년 이후부터 점차 온화한 장식적 경향의 화조(畵調)를 보였으며, 풍경화도 즐겨 그렸다. 1949∼1956년 카를스루에미술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대표작에는 《호숫가의 여인들》《잠자는 흑인여자들》 등이 있다.[네이버] 헤켈 [Erich Heckel]독일의 표현주의 화가이자 판화가로 작센의 데베른에서 출생, 운타제 호반의 헤벤호펜에서 사망했다. 1904년 드레스덴에서 건축과 학생이었을 때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와 알게 되어, 이듬해 ‘브뤼케(다리)’ 창설에 참가했다. 모난 윤곡선과 강렬한 색채로 인물이나 풍경을 그렸고, 목판화와 석판화로 엄격한 심리적 긴장을 표출했다. 1911년에는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제1차 대전 후에는 차차 표출의 격함이 부드러워진다. 1949~56년에는 칼스루에의 미술학교 교수를 지냈다. 대표작은 『소파에 누운 나부』(1909, 뮌헨, 바이에른 주립회화수집관) 등이 있다.건축을 공부한 후, 에리히 헤켈은 진로를 바꿔 화가와 판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헤켈은 건축학을 공부한 세 명의 학생들, 즉 프리츠 블레일, 카를 슈미트 로틀루프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와 함께 1905년 드레스덴에서 영향력 있는 독일의 표현주의 미술가 그룹인 브뤼케파를 결성했다. 브뤼케파의 회원들은 급진적인 정치관을 공유했으며, 전통을 뛰어넘어 동시대의 현대적인 삶을 반영하는 새로운 미술 양식을 정립하고자 했다. 즉 브뤼케파의 미술가들은 현대 생활의 빠른 속도와 격변하는 시대상, 그리고 자유로운 성 관념들을 미술의 주제로 삼았다. 또한 이들은 풍경과 누드, 정물, 초상 등 다양한 장르의 그림들을 제작했고, 빠른 붓질과 선명한 색채의 사용, 그리고 단순한 형태가 특징이다. 1911년 헤켈은 브뤼케파의 미술가들과 함께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브뤼케파는 1913년에 해체되었다.헤켈의 개인적인 양식은 폴 고갱과 앙리 마티스빈센트 반 고흐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는 종종 밝게 강화된 색으로 실내에 있는 인물이나 풍경을 그리곤 했는데, 표면의 풍부한 질감을 표현하기 위해 물감을 두껍게 바르는 방법을 이용했다. 그는 또한 많은 양의 판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천 점이 넘는 판화 작품을 만들었는데, 그 대부분이 1905년에서 1923년 사이에 제작된 것이다. 에칭과 석판화가 가장 유명하긴 하지만, 단순화된 형태와 혁신적인 평면적 양식의 목판화가 가장 많은 찬사를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위생병으로 복무한 후, 헤켈의 작품은 점점 더 멜랑콜리해졌다.여윈 모습의 자화상 <남자의 초상>(1919)은 헤켈 자신의 슬픔과 그의 조국의 슬픔을 동시에 보여주는 듯하다. 그는 이 작품에서 기존의 방식인 잉크 롤러를 사용하지 않고 붓을 사용하는 새로운 기법을 채택함으로써, 표면의 회화적 표현성을 높였다. 1937년 나치는 그의 작품들을 '퇴폐미술'로 규정하고, 대부분의 작품들을 파괴하고 국립 미술관에서 없애버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헤켈은 교직에서 일했으며 죽는 날까지 그림 그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나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색채들 간의 비밀이다. 이에 관한 흥미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