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야기/명화감상

금동이 2015. 1. 30.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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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토 [(Jean-)Antoine Watteau]

(바토 1684. 10. 10 프랑스 발랑시엔~ 1721. 7. 18

노장쉬르마른. 프랑스의 화가)

 

 

 

서정적인 매력과 우아함을 풍기는 로코코 양식으로 유명하다. 작품의 상당수는 코메디아

델라르테와 오페라 발레의 영향을 보여준다(예를 들면

〈프랑스 희극 The French Comedy〉,1716).
초기생애와 교육-그의 아버지는 지붕기와공이었으며 전기작가들에 따르면

그의 어린시절은 불행했다. 소년시절 그는 분위기의 변화에 매우 민감했으며

소설을 탐독하고 음악을 매우 좋아했다. 그는 광장에서 엉터리 약을 파는 약장수들을

모델로 스케치를 하는 데 남다른 취미를 보여서 그의 부모는

그를 근처 화가의 작업실에 보냈다. 18세쯤 되어 파리에 갈 결심을 하고 무일푼으로

그곳에 가서 메타예라는 나이많은 화가의 도제가 되었다.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봉헌

그림들을 전문으로 그리는 작업실로 자리를 옮겼다. 한편 실물을

모델로 무수한 스케치를 했는데, 이것들은 그뒤 그에게 주제를 제공한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미술상인 장 마리에트와 피에르 장 마리에트를 알게 된 것은 바로

이무렵이다. 그는 이들의 가게에서 판화가인 자크 칼로의 작품들을 비롯하여

귀중한 소묘와 인그레이빙들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또한 1703년경

그곳에서 새로운 선생인 클로드 질로를 만났다. 질로는 그로테스크한 장면과 목신이나

사티로스의 그림 및 오페라 장면 등 무대배경을 그리는 뛰어난 장식가였다.

그는 당대의 웅장한 공식 미술을 몹시 싫어했으며 유려하고 여성적인

우아함을 갖춘 16세기 퐁텐블로파의 양식을 선호했다.

그는 또한 불과 몇 년 전 그곳에 소속된 배우들이 프랑스에서 쫓겨났던

이탈리아의 코메디아 델라르테를 주제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질로의 소묘 방식뿐만 아니라 이러한 주제들에 대한 기호는 와토의 작품에 나타나 있다.

와토는 극장의 2층 발코니에 앉아 무대를 관찰하면서 실재와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모든 분장과 도구 및 무대장치를 연구했다. 그는 분장한 얼굴, 화려한 의상,

그려진 배경막과 짙은 그림자에 비치는 다양한 인공 조명의 반사광을

통해 빛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얻게 되었다. 이렇게 무대미술은

여러 가지 요소들이 합쳐져 전체적인 평형을 이루는 것이 중요했고

또한 그것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젊은 와토는 거기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1708년 와토는 당시

파리의 뤽상부르 궁전에 있는 메디치 미술관의 관장인 클로드 오드랑 3세의

작업실에 들어갔다. 그는 연극계와 뤽상부르 대정원, 미술품 연구 등 파리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은 거의 다했다. 와토에게 파리는 정원에 둘러싸인 분수들이

경이롭게 물을 뿜어내는 문명의 기적으로 보였다. 뤽상부르에서

그는 루벤스가 30여 년 전 마리 드 메디시스에게 바친 일련의 승리를 축하하는

림들을 연구했다. 생기와 기쁨이 넘치는 이 대작들은 그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와토는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장식가인 오드랑을 도우면서도 여러 가지

다른 세계에도 관심을 쏟았다. 1709년 그는 왕립 아카데미의 회화 전공생이 되어

열심히 배웠지만 로마에 갈 수 있는 장학금을 받지 못하자 발랑시엔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한 친구가 와토의 그림 1점을 팔아 귀향길에 쓸 여비를 마련해주었다. 그는 발랑시엔에서

그를 숭배하는, 부상을 입고 요양중인 한 장교를 위하여

〈전쟁의 피로 Les Fatigues de la guerre〉·

〈전쟁의 낙오자들 Les Délassements de la guerre〉

등과 같이 새로운 주제로 그림을 그렸고 이것으로 인기를 얻었다.

1710년 미술상인 피에르 시루아의 초청으로 다시 파리에 간 와토는

시루아와 그의 사위인 제르생과 평생 가까이 지냈다. 그는 시루아의

가족을 그리기도 했지만 초상화가는 아니었다. 그가 그린 사람들은 저명인사들이 아니며,

때때로 이탈리아 배우들로 분장하여 그럴 듯한 자세를 꾸미곤 하던 친구들이었다.

와토의 키테라1712년 와토는 이탈리아에 가려고 다시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카데미는 그가 정원의 배우들을 묘사한 장면을 제출하자 조신(朝臣)들이

때때로 촌스러운 옷을 입고 나오는 야유회인 '페트 갈랑트' 화가로서 그를 받아들였다.

그는 3점의 〈키테라 섬으로의 항해 L'Embarquement pour l'île de Cythère〉

첫번째 작품을 1710~12년에 그렸다. 일반적으로 키테라 섬의 신화,

혹은 사랑에 관한 신화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문화에서 오랜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으로,

이 섬으로 가는 여정은 매우 힘든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와 비교해서 와토가

그리고 있는 키테라는 덧없는 것들과 계략이 뿌리를 내릴 수 없는 낙원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에 둘러싸인 기쁨을 나타내고 있다. 순례자들은 그 섬을 향하여

떠나지만 결코 거기에 도착하지는 못하며 수평선 멀리 그 섬의 빛을 어렴풋이

볼 수 있을 뿐이다. 키테라 섬을 주제로 한 와토의 첫 작품은 일화적인 것으로,

어렴풋한 베네치아풍의 분위기로 희극적인 모티프를 다루고 있다.

같은 주제의 2번째 작품은 비현실적이고 광활하며 놀랄 만큼 황량한 풍경에

세속적인 의식의 일면이 엿보인다. 천사가 황금 곤돌라 주위를 날아다니고 있는

3번째 작품에서는 이 주제가 통속화되었다. 세 작품 모두에 공통적인 것은

연극 무대 같은 구성과 연극에 나오는 모든 것이 색채로 치환된 점이다.

그가 그린 키테라는 모두 오페라와 연애 서사시로 가득 찬 이상한 나라로 나타나며,

실현불가능한 꿈과 이성에 대한 미친 듯한 복수, 규범과 도덕으로부터의

자유가 실현되는 나라를 나타내고 있다. 일설에 따르면 와토는 플로랑 당쿠르의 산문 희곡

〈3명의 사촌 Les Trois Cousines〉(1700)에서 이 주제를 따왔다고 한다.

그 희곡의 대단원에서는 사랑의 순례자로 분장한 한무리의 시골 청년들이

키테라 섬으로 가는 항해를 준비한다. 시골의 제분업자들에 관한 이 이야기는

의도가 희화적이고 와토가 가상의 베네치아에서 설정한 세련된 장면과는

아주 다르기 때문에 그가 우다르 드 라 모트의 오페라 발레

베네치아 여인 La Vénitienne〉(1705)에서 작품의 주제를 끌어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키테라 섬의 순례자들만이

아니라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등장인물들도 사랑의 섬으로 초대받아 떠나는데,

이 2가지가 바로 그가 평생 동안 추구한 중요한 주제이다.
주요작품의 제작시기-와토의 명성은 점점 높아졌지만 그는 여전히 수줍어하고

사람을 싫어하고 자기자신을 불만스럽게 여겼으며, '정신은 자유분방했지만 행실은 신중했다'.

1712년 이후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부유한 재상인 피에르 크로자와 만난

1715년까지 그에 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이탈리아에서 크로자는 섭정을

대신하여 크리스티나 여왕의 미술수집품을 구입하기 위하여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와토의 열렬한 지지자인 크로자는 부유한 미술애호가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그 화가에게 자신의 거처에서 묵을 것을 간청했다. 그는 코레조와 베네치아의

대가들, 반 데이크 등이 그린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의 그림과 소묘들을 많이

수집하고 있었으므로 와토는 크로자의 손님으로 지내면서 접한 이탈리아의

대가들이 남긴 작품들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또한 몽모랑시 저택 주변의

정원과 시골 풍경들을 그렸다. 와토는 계속 크로자와 친구로 지냈지만 후원자의

곁을 떠났다. 그때부터 세상과 떨어져 혼자서 살았다. 이 시기에 〈대화 Conversations〉·

전원오락 Divertissements champêtres〉·〈페트 갈랑트 Fêtes galantes〉

등 걸작들을 제작했다. 1717년 그는 이미 회원으로 가입해 있는 아카데미에

〈키테라 섬으로의 항해〉의 2번째 작품을 제출했다. 2년 뒤에는 런던에 있었는데,

그곳에서 그의 작품들은 큰 인기를 얻었으며 그는 이미 오래 전부터 나빠지고 있던

자신의 건강에 대하여 유명한 의사의 진찰을 받고 싶어했다. 런던에서는 몇 작품만을

그렸는데 그중 하나인 〈이탈리아의 희극배우들 Italian Comedians〉은

그가 매우 애착을 가지고 있는 주제로 자신의 의사를 위해 그린 것이다.

다음해인 1720년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의 친구이자 미술상인인 제르생의 가게를 위하여

8일 만에 지금의 유명한 간판을 그렸다. 그의 말기 작품으로는 푸아르 극장의 간판으로

그린 흰 옷을 입고 있는 어릿광대의 초상화 〈지유 Gilles〉가 있다. 흰 피부에 홍조를 띠고

서서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막간 배우인데, 여기에서는 렘브란트의

〈에케 호모 Ecce Homo〉를 연상시킬 정도로 웅장하게 묘사되어 있다.

와토가 제르생을 위해 그린 간판은 이와는 전혀 달라서 마치 루이 14세의 통치가

끝났음을 알리려는 듯이 시무룩한 표정의 그림을 상징적으로 내걸고 있는

한 미술상 가게를 그리고 있다. 이 그림에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마치 와토가 삶을 마무리하면서 자신의 미술을 신성화하려는 듯이

그림의 주인공은 그림 자체였다. 이무렵 와토는 결핵에 걸려 몸이 쇠약해졌고

결국 37세의 나이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