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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대진 단군의 후예인 거란족의 활동무대는 어디인가? (4부)

단군의 후예인 거란족의 활동무대는 어디인가? (4부) 황하변 하남성에서 적봉으로 옮겨진 거란족 성헌식 컬럼니스트 ㅣ 기사입력 2017/08/28 [10:15] 에 호태왕이 “2년(392) 임진 7월에 친히 4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해 석현성 등 12개 성을 빼앗고, 9월 군대를 옮겨 거란을 공격해 남녀 3,500명을 사로잡고 유민과 잡혀갔던 고구리 백성 만여 명도 데리고 돌아왔다. 백성들 모두가 수유(茱萸)나무 가지를 머리에 꽂고 축하했다. 이것이 ‘9월 9일’의 풍속으로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에는 “가을 7월 남으로 백제를 쳐 10성을 빼앗았다. 9월, 북으로 거란을 쳐 남녀 500명을 사로잡고 본국에서 흩어진 1만 명을 타일러 데리고 돌아왔다.”라고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호태왕이 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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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대진 첫 출전에서 백제의 실권자를 참수한 광개토태왕 (3부)

첫 출전에서 백제의 실권자를 참수한 광개토태왕 (3부) 유럽의 정복왕 알렉산더보다 더 넓은 땅을 정복한 광개토태왕 성헌식 컬럼니스트 ㅣ 기사입력 2017/08/10 [15:24]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정복군주 광개토호태왕의 빛나는 업적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는 호태왕 즉위 당시 주변국들의 상황에 대해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백제에서는 385년에 침류왕이 죽었는데 태자 아신이 나이가 어리다보니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침류왕의 첩이었던 가리(佳利)가 정부(情夫)인 시동생 진사(辰斯)를 왕으로 올리고 황후가 되어 정치를 전횡하고 있었다. 호태왕이 즉위한 해 10월에 진사왕이 재위 8년 만에 죽자 침류왕과 가리 사이의 장자 아신(阿莘)이 다음 보위에 오른다. 이에 대해 대부분 학자들은 조카 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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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대진 호태왕 이후 모든 고구리 태왕들은 자체연호를 썼다 (2부)

호태왕 이후 모든 고구리 태왕들은 자체연호를 썼다 (2부) 고국원제의 연수, 장수제의 건흥, 안원제의 연가는 유물로 출토 성헌식 컬럼니스트 ㅣ 기사입력 2017/07/10 [12:54] 광개토호태왕은 391년 신묘년 18세의 나이로 즉위하자마자 군신들에게 “지금 4해(四海)의 모든 나라들이 연호(年號)를 쓰고 있는데, 유독 우리나라만 없는 지가 오래되었소. 3대(추모·유리·대무) 시절에 건원칭제하던 예를 살펴서 응당 새 연호를 세워야 할 것이오.”라고 명했다. 이에 춘 태자가 연호를 영락(永樂)으로, 휘호(徽號)를 평안(平安)으로 하자고 올리니, 호태왕이 그렇게 하자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에는 어떤 왕도 자체연호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없다. 아마 중화사대주의 사상에 마취된 조선왕조에서 를 각색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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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대진 북부여기로 풀린 광개토태왕 비문 17세손의 비밀 (1부)

북부여기로 풀린 광개토태왕 비문 17세손의 비밀 (1부) 광개토태왕의 외가는 가깝고도 막강했던 황족 성헌식 컬럼니스트 ㅣ 기사입력 2017/05/10 [22:13] 고국양제가 즉위 8년 만에 붕어하자 소수림제의 둘째 아들인 담덕(談德)이 보위에 오르니 이분이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정복군주 광개토태왕이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에는 호태왕비문에 새겨져 있는 기록이 생략되어 있는데다가, 광개토태왕을 위대한 정복군주로 볼 수 있는 기록이 사실상 보이지 않는다. 이는 아마 중화사대주의에 물든 조선왕조과 일제에 의해 고의로 지워진 것이 아닌가 싶다. 374년생인 담덕은 부황인 소수림제가 384년에 붕어할 당시 10살로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바로 보위에 오르지 못하고, 숙부인 고국양제의 재위 8년 후에 18세의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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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대진 고구리 고국양제가 묻힌 곳은 산서성 남부 부산현 (5부)

고구리 고국양제가 묻힌 곳은 산서성 남부 부산현 (5부) 고국양은 양각산(羊角山)의 동쪽 성헌식 컬럼니스트 ㅣ 기사입력 2017/04/10 [02:43] 에는 385년 2월 백제 침류왕이 한산에 절을 세우고 도승 10명을 두고는 11월에 죽자 태자 아신(阿莘)이 어려 숙부 진사(辰斯)왕이 즉위했는데, 진사왕은 근구수왕의 둘째 아들로 사람됨이 굳세고 날래며 총명하고 인자하고 지략이 많았다고 간단히 기록되어 있다. 에는 신공왕후 65년(385)에 백제 왕자 아화(阿花=아신)가 나이가 어려 숙부 진사가 왕위를 빼앗아 즉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과연 그럴까? 반면에 에는 “고국양제 2년(385) 을유 2월, 백제 침류왕이 한산에 절을 짓기 시작해 10월에 완성하고, 10명으로 하여금 승려가 될 수 있게 허락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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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대진 고구리 고국양제와 후연과의 치열했던 요동공방전 (4부)

고구리 고국양제와 후연과의 치열했던 요동공방전 (4부) 소수림제와 공방을 벌린 후연의 활동무대는 산서성 남부 성헌식 컬럼니스트 ㅣ 기사입력 2017/03/08 [12:45] 소수림제가 14년(384) 11월에 46세의 나이에 갑자기 붕어할 당시 장자 강(岡)과 10살의 차자 담덕(談德)이 있었으나, 유언을 남겨 동북아우인 43세의 태제 이련(伊連)이 즉위하니 이가 바로 고국양제(故國壤帝)로 또 다른 이름은 어지지(於只支)이다. 에는 소수림왕 슬하에 자식이 없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의 기록과는 완전히 다르다. (담덕의 출생에 대해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37465참조) 고국원제의 소후(후궁)였던 해(觧)후가 꿈에 용산에 올라 추모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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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대진 고구리와 친했던 5호16국시대의 강자 전진 (3부)

고구리와 친했던 5호16국시대의 강자 전진 (3부) 불법·형법 등 교류…전진 3대왕 부견, 고구리에 청혼·적토마 선물까지 성헌식 컬럼니스트 ㅣ 기사입력 2017/02/11 [13:54] 14년(384) 갑신 11월, 소수림제가 사냥하다가 갑자기 몸이 심하게 아파 온탕에 들어갔다가 춘추 46세로 붕어해 유언에 따라 소수림(小獸林)에 장사지냈다. 사인은 잘못된 음식 때문인 것으로 보이는데 요리사들 서로가 남에게 잘못을 미루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자 조의들이 대신 죄를 받아 멀리 유배된 자가 30여명이나 되었다. 당시 낙(酪)・주(酒)・전(饘)・병(餠)・육(肉)・채(菜)・과(果)・명(茗)의 여덟 집안이 서로 앞 다투어 전진(前晉)에 자식을 보내 조리법을 배워와 도장에서 가르쳤다. 큰 집안의 요리사들은 심히 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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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대진 광개토태왕은 고국양제가 아닌 소수림제의 아들 (2부)

광개토태왕은 고국양제가 아닌 소수림제의 아들 (2부) 담덕이 고국양왕의 태자라는 기록은 오류 성헌식 컬럼니스트 ㅣ 기사입력 2016/12/28 [00:01] 371년 고국원제의 전사 이후 같은 핏줄이었던 고구리와 백제는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 된다. 소수림제 2년(372) 전진의 왕 부견이 고구리에 승려를 보내 불법을 전하는 등 두 나라가 서로 가깝게 지내자, 백제는 이에 반발해 근초고왕 27년(372)에 전진과는 적대관계였던 동진과 교류를 트고, 이듬해 청목령(靑木嶺)에 성을 쌓아 고구리에 공격에 대비했다. 이즈음 백제의 독산(禿山)성주가 300명의 무리를 이끌고 신라로 투항하는 일이 발생했다. 백제는 “서로 간에 잘 지내자는 도리가 이런 것이냐!”고 강하게 항의했고, 신라는 “스스로 반성은 아니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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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대진 불교를 받아들이고 태학을 세우고 법령을 반포한 소수림제 (1부)

불교를 받아들이고 태학을 세우고 법령을 반포한 소수림제 (1부) 석가를 모신 대웅전은 원래 환웅을 모시던 환웅전 성헌식 컬럼니스트 ㅣ 기사입력 2016/11/26 [13:02] 백제 대왕이 하사한 칠지도와 관련 있는 신공왕후는 389년 100세에 죽고 이어 왜왕이 된 응신(應神)에 관한 이야기는 광개토호태왕 편에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371년 고국원제가 붕어하자 태자 구부(丘夫)가 천룡궁(天龍宮)에서 즉위하니 이가 바로 소수림(小獸林)제이다. 또 다른 이름은 소해(小解)이며 초기에는 주유대왕(朱留大王)으로 불렸는데, 이는 339년에 모친 해태후가 꿈에 대무신제를 보고서 제를 낳았기 때문이다. 장대한 체격에 웅대한 계략이 있었으며, 정사의 개요를 능히 꿰뚫고 있었다. 아울러 궁마와 병법에도 능했으며, 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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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대진 고국원제의 무덤이 있는 탕하는 황하북부 하남성 (9부)

고국원제의 무덤이 있는 탕하는 황하북부 하남성 (9부) 국강상대소열무황제, 신종(新宗), 연수(延壽)라는 연호사용 성헌식 컬럼니스트 ㅣ 기사입력 2016/08/31 [17:09] 에 기록된 고국원제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대행은 어질고 효성과 우애가 있었으며, 아랫사람들에게도 공손하고 검약했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자리에 들었으며, 무예를 닦으면서도 농사를 장려했다. 나라의 수치를 씻고자 전쟁터에 나서면 반드시 친히 선두에 섰으니 사졸들의 마음을 흠뻑 얻었다. 안으로는 후와 태자 등을 아낌에 정성이 극진하니 화목함이 항상 충만했다. 음주가 잦지 않았고, 손으로는 노름이나 쓸모없는 것에 손대지 않았다. 사냥과 유희는 사슴제사나 동굴제사 등의 일이 있을 때에만 했고, 하늘을 우러러 모심에 부지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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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대진 초기에 백제 근초고왕에게 승승장구한 고국원제 (7부)

초기에 백제 근초고왕에게 승승장구한 고국원제 (7부) 고구리 고국원제와 백제군의 전투지는 하남성 동북부 성헌식 컬럼니스트 ㅣ 기사입력 2016/08/07 [19:54] 고국원제는 41년간 재위하며 선정을 베풀며 많은 제도를 정비한 성군이었다. 18년(348) 모용황이 갑자기 사냥터에서 죽기 전까지 내내 그의 침공에 시달렸으며, 이후 연나라에 인질로 잡혀간 어머니 주태후 때문에 잠시 모용준의 제후 아닌 제후가 될 수밖에 없었으며, 연나라가 망하자 고구리는 잠시 평화시대를 누릴 수 있었다. 에는 고국원제 26년(356) 이후 38년(368)까지 12년간 아무런 기록이 없는 이유이다. 그러나 그의 하반기에는 백제의 대영웅 근초고왕과의 격돌이 기다리고 있었다. 22년(352) 임자 2월, 고국원제는 해발을 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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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대진 평화시대 내치에 힘쓴 성군 고국원제 (6부)

평화시대 내치에 힘쓴 성군 고국원제 (6부) 모용황의 죽음으로 모처럼 평화가 찾아온 고구리 성헌식 컬럼니스트 ㅣ 기사입력 2016/07/26 [00:45] 고국원제의 전반기를 무척이나 괴롭혔던 모용황이 348년에 죽은 이후 고구리에는 잠시 평화가 찾아왔다. 그동안 고구리는 고국원제의 모후인 주태후가 인질로 잡혀있어 연나라의 속국 아닌 속국으로 지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고국원제처럼 성군의 자질을 타고난 임금은 원래 이런 평화기에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법이다. 17년(347) 정미 2월, 고국원제는 신성태수 우성이 죽자 면강으로 하여금 대신하게 했다가, 그해 면강의 패거리인 패자 12명을 모조리 쓸어냈다. 면강은 20년간이나 수군을 주관하면서 조세를 많이 거두어들여 재산을 축적했고 청하의 큰 상인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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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대진 태후가 인질로 잡혀 잠시 연나라의 제후가 된 고국원제 (5부)

태후가 인질로 잡혀 잠시 연나라의 제후가 된 고국원제 (5부) 연나라에게 온갖 굴욕적인 수모를 당해도 참아야만 했던 고국원제 성헌식 컬럼니스트 ㅣ 기사입력 2016/07/15 [14:42] 348년 모용황이 죽은 이후 연나라는 고구리를 침공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고국원제의 모후인 주태후가 인질로 잡혀있어 고구리가 연나라의 속국으로 지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352년에 황제임을 자칭한 모용준은 이듬해 업(鄴)으로 천도했다. 업은 하남성의 동북단 안양시 임장(臨漳)현 서남쪽 40리로, 지금의 하남성과 하북성의 경계지역으로 산서·산동성에서도 멀지 않은 곳이다. 23년(353) 계축 정월, 고국원제는 축하사절을 연나라에 보내 모용준의 즉위를 축하하고 토산물을 바치고 대방을 정벌했던 일에 대해 설명했다.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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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대진 강력한 라이벌 모용황의 죽음과 백제 근초고왕의 등장 (4부)

강력한 라이벌 모용황의 죽음과 백제 근초고왕의 등장 (4부) 태후와 미천제의 시신까지 모용황에게 인질로 잡힌는 고국원제 성헌식 컬럼니스트 ㅣ 기사입력 2016/06/29 [22:20] 연나라 왕 모용황이 직접 지휘하는 강병 4만이 남쪽 길로 진군해 고구리로 들어와 기습하니, 늙고 약한 군졸들로 도성을 지키고 있던 고국원제가 대패해 도주하던 중 적장 한수가 추격해 와서 상이 잡히기 일보직전으로까지 몰리게 되었다. 이 때 고구리 장수 해발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막아내 고국원제는 단웅곡으로 간신히 피신했고 적들은 추격을 계속해 그곳을 포위했다. 인질로 잡힌 주태후와 미천제의 시신 연나라 장수 모여니가 도읍인 환도성에 입성해 미처 도망가지 못한 주태후를 사로잡는다. 이때 고구리 군사들이 연장 왕우와 북쪽 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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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대진 모용황의 위장술에 속아 패주하는 고국원제 (3부)

모용황의 위장술에 속아 패주하는 고국원제 (3부) 서진하려는 고구리와 동진하려는 전연의 예견된 충돌 성헌식 컬럼니스트 ㅣ 기사입력 2016/06/15 [16:12] 8년(338) 가을 8월, 고국원제는 동황성(東黃城)에 명을 내려 역졸 5천인을 환도로 보내 오룡궁을 수리하라고 명했으며, 낙랑인 2천과 대방인 1천 및 부여인 2천에게는 동황성을 수리하게 했다. 동황성은 평양의 남쪽에 있으며 본시 백제 땅으로 신라와도 가까이 있던 까닭에, 신라와 백제가 서로 화친하면서도 이곳을 차지하려 했다. 상은 이곳을 밀도(密都)로 삼고 그 성의 해자를 견고하게 해 진의 남쪽을 요충지로 만들었다고 한다. (동황성의 추정 위치는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2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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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대진 세력이 커져 고구리의 맞상대가 된 모용황 (2부)

세력이 커져 고구리의 맞상대가 된 모용황 (2부) 모용외와 모용황의 발호와 백제의 영웅 근초고왕과 맞상대 성헌식 컬럼니스트 ㅣ 기사입력 2016/05/31 [15:33] 미천대제의 뒤를 이어 등극한 고국원제는 문무를 겸비하고 성품이 자애로워 나라 안을 순시하며 백성들의 안위를 묻고 늙고 병든 자에게는 먹을 것을 주었던 인자한 임금이었다. 게다가 태후의 항문에 종기가 나자 직접 입으로 빨아낼 정도로 효심이 깊었다고 한다. 또한 교서를 내려 “농사는 천하의 대본이다. 복희씨 시절 경작해야만 먹고 입었던 시절과는 같지 않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관리 및 백성들과 무위도식하는 자들 모두는 땅을 일구고 열심히 누에치기를 하시오.”라고 지시할 정도였다. 만약 대외적인 상황만 순탄했더라면 그는 마치 세종대왕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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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대진 (동북공정은 허구) 고구리는 자체연호를 쓴 황제국 (1부)

(동북공정은 허구) 고구리는 자체연호를 쓴 황제국 (1부) 중국의 지방정권이 어떻게 자체연호를 사용할 수 있는가? 성헌식 컬럼니스트 ㅣ 기사입력 2016/05/22 [10:07] 331년 어질고 현명한 군주였던 미천대제의 32년 치세가 끝나고, 314년에 3살에 태자가 된 사유(斯由)가 20세의 나이에 다음 보위에 오르니 이가 바로 비운의 황제인 고국원제(故國原帝)이다. 에는 고국원왕의 휘(諱:이름)는 사유(斯由), 또는 유(劉), 또는 쇠(釗)라고 하면서도 몇째 아들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이에 반해 에는 고국원제는 미천대제의 셋째 아들로 주유극(朱留克)이라는 이름이 하나 더 있고, 키가 크고 몸도 우람했으며 풍채는 수려했고 학문하기를 좋아했다. 성품이 관대하고 후해 백성을 아끼고 효와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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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대진 백성들을 우선 배려하라고 유언한 미천대제 (3부)

백성들을 우선 배려하라고 유언한 미천대제 (3부) 강희제와 요태종으로부터 고종 영성태문호양황제로 추존된 미천대제 성헌식 컬럼니스트 ㅣ 기사입력 2016/05/04 [16:47] 서천태왕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봉상왕이 동생인 돌고(咄固)를 죽이자 그의 아들 을불이 해를 입을까 두려워 달아나버린다. 봉상왕이 창조리가 주도한 정변으로 폐위되자, 세상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던 을불이 추대되어 보위에 오르니 이가 바로 미천대제였다. 32년의 재위기간 중 반란을 일삼던 현토·서안평·낙랑 등을 평정해 나라의 근심거리를 없앴으며, 백성들의 애환을 잘 보살핀 훌륭한 군주였다. 32년(331) 신묘 2월, 미천대제는 자신이 위중해졌음을 알고는 태자 사유(斯由)를 불러 앞으로 오게 하더니 임금의 상징인 신검(神劍)을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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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대진 고구리가 주도했던 3국 연합군의 모용씨 공격 (2부)

고구리가 주도했던 3국 연합군의 모용씨 공격 (2부) 고구리・단씨・우문씨의 연합을 서진의 최비가 주도했다고 기록 성헌식 컬럼니스트 ㅣ 기사입력 2016/04/21 [22:39]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는 나(我)와 나 아닌(非我) 자와의 투쟁의 기록”이라고 역설했다. 즉 자국의 역사는 철저히 나(我)의 관점에서 기록해야 한다는 주체적 역사기록의 원칙을 강조한 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정사서라 하는 는 주로 중국의 사서를 인용해 편찬되어 있어 우리가 아닌 중국의 관점에 입각한 역사적 기술들이 상당히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지난주에 연재한 의 모용외와 최비에 대한 기록이다. (지난주 연재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333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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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대진 선비족 모용외의 어미는 고주몽의 후손 (1부)

선비족 모용외의 어미는 고주몽의 후손 (1부) 고구리의 남쪽 요택에 살던 모용선비를 일으켜세우는 모용외 성헌식 컬럼니스트 ㅣ 기사입력 2016/04/13 [17:48] 미천대제가 반란을 일삼던 낙랑·현토·대방을 정벌할 무렵, 서진에서는 8명의 왕족이 내란을 일으키고 이들은 서로 이기기 위해 흉노와 선비 등 외부세력을 중국 땅으로 끌어들이게 된다. 서진이 약화되자 무력으로 개입한 이민족들은 그 땅에 아예 그들의 정권을 세우게 된다. 304년 흉노족 유연이 한(漢)을 세우고, 저족 이웅이 성한(成漢)을 세우고, 307년 선비족 모용외가 선비대선우를 자칭하면서 5호16국시대의 서막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5호란 한족이 아닌 주변의 흉노(匈奴), 선비(鮮卑), 저(氐), 갈(羯), 강(羌)족을 말하는 것이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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