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nanum 2008. 3. 22. 10:59

 

 

 

      점찍기 경쟁 "빨리 빨리" 하는 여행을 접고

 

                                                                                                         기사제공: www.nanum.eu

 

 

아직까지 여행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패키지 여행이다. 여행의 패턴이 다양화되고 변화가 시작된 지는 오래된 듯 하지만, 패키지 여행의 매력이 아직 소멸된 것 같진 않다. 저렴한 가격으로 짧은 시간에 많이 본다는 경제적 이익 때문이다.

 

여행자유화 이후 일정금액을 내고 많은 나라를 방문할 수 있다는 것에 매력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패키지 여행은 눈도장 찍고 가는 여행이다. ‘증명사진’을 찍기 위해 가는 듯한 인상이다. 여행이 아니라 ‘사진’을 위해, 나를 위해 사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진을 위해 내가 돌아다니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때도 있다. 집으로 돌아가선 어디를 다녀왔는지 구별이 안 된다. 방문한 나라의 숫자가 자랑일 뿐이다. 어쩌면 한국식 여행법일지도 모른다. 사실은 멀리 가고 많이 보기 위한 노동이 된다. 비행기나 버스를 타고 여기저기로 이동한 것이 여행인 셈이다.

 

그런 방식으로 보면 패키지 여행은 ‘여행’이 아니다. 점찍기 경쟁이자 그 대회다. 물론 나는 한번쯤 그런 패키지 여행을 통해 유럽을 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한번쯤은 ‘많이’ 보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빨리 빨리”다. 이런 여행방식의 배후엔 무의식적이지만 스스로에게조차 압력을 가하는 철학이 있다. 느린 것은 게으른 것이라는 일방적이고 부당한 생각이다. 느린 것은 심한 경우 ‘악’이 되기도 한다. ‘천천히 하는 것’은 그래서 ‘무능한 것’도 되고 참을 수 없이 뒤떨어지는 것으로 취급된다. ‘빠름’이 정당성을 가진다면 ‘느림’도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 ‘일’과 ‘휴식’이 동가의 것으로 대접받아야 하듯이 말이다. ‘휴식’은 ‘일’을 위한 힘의 회복이나 부수적인 일의 전단계(前段階)가 아니기 때문이며 삶의 질을 위해서라도 ‘휴식의 권리’는 보장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접해본 외국, 특히 이곳 독일 사람이라면 누구나 ‘빨리 빨리’를 안다. 그 단어부터 배운다. 한국 사람들의 입에 붙어있는 말이고 독일 사람들이 그들로부터 늘상 듣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빨리’가 생활양식인 우리에게 유럽은 좀 지루하리만큼 느리다. 누군가 ‘독일은 지루한 천국이고 한국은 재미있는 지옥이라’(Deutschland ist ein langweiliger Himmel und Korea ist eine interessante Hölle)고 했던가?

 

그래서 나는 혹여 유럽으로 여행하려는 사람은 이 빠름의 세계에서 익숙한 생각과 습관부터 버리길 권고한다. 유럽여행을 한국식으로서 해치우는 것이 아니라, 그곳으로부터의 벗어남으로 이해하길 바라는 것이다. 휴가조차도 밤새 스트레스를 푼다며 피로를 쌓는 방식으로 광란의 밤을 보내야 하는 사람에게 유럽은 참으로 재미없는 곳이다. 그런 사람은 차라리 동남아로 가서 ‘황제처럼’ 보내다 오는 편이 나을 것이다. 유럽, 특히 독일에서는 차라리 한꺼번에 많은 곳을 방문하려는 생각을 던져버리고 대신에 ‘천천히’ 한군데를 둘러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물론 시간만 된다면야 여러 군데를 보는 것에 반대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여행은 지도대로 찾아가는지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지도가 여행을 위해 있을 뿐 여행이 지도를 위해 있는 것일 수 있는가? 그러므로 ‘빨리’ 지도를 따라 이곳을 보려는 생각은 접는 편이 낫다. 이곳의 템포와 생활양식에 맞추어 여행을 계획해보라! 즉 이곳 도시 어디에나 있는 길 카페에서 커피도 마시고 비어가르텐에서 맥주도 즐겨가며 이곳 삶의 양식을 맛보고 가는 편이 여행의 맛일 것이다.

 

의미 없이 한군데 더 보아 무엇 하며 그 방문지의 숫자를 굳이 자랑하고 싶은가? 여유를 배워가라! 사람들이 다르게 사는 것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 하러 직접 현장을 방문하려는 것인가? 여행책자가 맞는지 확인하려고 비싼 돈을 내고 이곳으로 오는 것인가? 이곳은 ‘빨리’인 100m 달리기를 멈추고 ‘천천히’인 산책을 즐기는 곳이어야 한다. 사실 ‘산책’이 더 건강에도 좋고 오래 많이 가는 법임을 배웠으면 한다.

 

물론 여기도 ‘빨리 빨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는 ‘슈넬’(schnell)이라고 하지만, ‘서두르라’는 말은 ‘eilen’이다. 서둘러라! (Beeil(e) dich!) 우리말 ‘빨리’에 어울리는 독일어는 발음으로도 비슷한 ‘달리’가 더 적당해 보인다. 그래서 ‘빨리 빨리’는 ‘달리 달리’(dalli dalli)다. “빨리 밥 먹어!”는 집에서 늘상 듣는 말이고, “빨리 안 나와요?”는 음식점에서 재촉하는 소리다. 그러나 우리가 밥을 먹을 때 이곳에선 빨리 먹기를 경쟁하듯이 먹을 필요가 없다. 이곳 음식점에서는 주문을 한 뒤에도 천천히 기다려야 하고 여유가 없으면 음식을 즐길 수도 없다. 무슨 일인가를 빨리 하려고 하면 이 사람들은 ‘천천히’ 하라고 한다. 빨리 하면 실수가 많고 정확히 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langsam, gemach 이라는 등의 단어를 쓴다.

 

그런 의미에서 햇빛이 비취는 봄 혹은 여름날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곳 한 군데를 소개할까 한다. 하이델베르크에서 북쪽으로 약 10여Km 떨어진 슈리스하임(Schriesheim)이라는 곳엔 슈트랄렌부르크(Strahlenburg)라고 불리는 무너진 요새가 있다. 무슨 빛이 비취는 광선의 요새 같은 뜻일 터인데, 이름에 어울리는 곳이다. 대부분의 옛 고성들처럼 이곳도 카페와 레스토랑으로 개조되어 사용되고 있다. 빌헬름스펠트(Wilhelmsfeld) 방향으로 마을을 빠져나가다가 산길로 들어 돌아가야 한다. 이곳은 도시가 바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해있는데, 다른 고성들이 조금은 도시와 거리가 떨어져 있는 느낌을 주는 것과는 다르다. 특히 이곳 슈리스하임은 포도주 생산지로 뿐만 아니라 가공하는 곳으로도 이름이 있는 곳이다. 여기 오픈 테라스와 같은 담장 옆 테이블에 앉아 마을을 내다보며 포도주를 한잔 즐기노라면 두세 시간이 짧은 것을 느끼게 된다.

 

날씨가 좋아지기 시작하는 부활절 이후부터, 나는 매우 친한 친구들의 방문을 받게 되면 기꺼이 이곳을 찾는다. 소위 ‘좋은 곳’을 찾는 이들에게도 이곳을 기꺼이 소개하곤 했다. 그 유명한 도시 하이델베르크를 구태여 빨리 찾아가고 싶은 생각도 여기서 벗게 된다. 그렇다. 여기에선 나는 ‘천천히’ 머물고 시간은 매우 ‘빨리’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