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과 칼럼

박창원 2014. 8. 5. 10:55

현재 우리나라 도로표지판을 보면 대부분 국문 표기와 영문 표기가 병기돼 있다. `구미 Gumi` 하는 식이다. 그런데 상당수 표지판은 `구미 龜尾 Gumi` 하는 식으로 국문과 영문 외에 한자를 병기해 놓고 있다. 미국의 도로표지판은 영문만 적혀 있고, 중국의 도로표지판은 중국어 표기문자인 한자[簡字]와 영문으로 돼 있으며, 일본의 도로표지판은 한자가 혼용된 가나와 영문으로 돼 있다. 영어가 사실상 전 세계의 공용어가 돼 있으니 지구촌 어디를 가도 도로표지판은 공통적으로 현지어 표기 문자와 함께 영문이 병기돼 있다.

 

일본의 도로표지판이 마치 우리나라와 같이 3가지 문자를 병기하고 있는 듯하지만, 가나만으로 표기할 수 없는 문자의 특성상 어쩔 수 없이 한자를 혼용하고 있다. 한자 병기가 아닌 혼용인 셈이다. 그런데 그 어떤 음도 표기할 수 있는 한글을 쓰는 우리나라 도로표지판에 왜 한자를 쓰는가? 아마 우리나라의 지명이 거의 한자어로 돼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서울은 예외지만 부산(釜山), 대구(大邱), 인천(仁川), 대전(大田), 광주(光州) 등에서 보듯 우리나라 지명들은 거의 한자어다. 고유 지명의 한자어화는 신라 경덕왕 때 시작됐고,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 통폐합을 하면서 지금의 지명으로 확정했다. 오랜 역사 속에서 한자를 공식 문자로 사용해 온 민족의 숙명일까?.

 

하지만 한자어이니 한자로 적어야 한다는 논리는 설득력이 없다. 부산을 `釜山`으로 적는다고 해서 사람들이 `솥뫼`로 이해하지는 않는다. 한자가 가진 뜻으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지명으로 인식한다. 외래어인 `라디오`가 영어에서 왔다고 꼭 `Radio`를 병기할 필요는 없고, `담배`가 포르투갈어에서 왔다고 `Tabaco`를 붙일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러니 도로표지판에 영문 외에 한자까지 병기하는 문제는 심사숙고해 볼 문제다. 한글전용정책이 시행된 지 반 세기가 훌쩍 지났고 이미 사회 전반에 뿌리내린 상황인데, 아직도 길을 안내하는 도로표지판에 별 효용성이 없는 한자를 써야 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부산역 같으면 한글과 영문을 병기한 `부산역 Busan Stn`으로만 적어 놓으면 된다. 그런데도 `부산역 釜山驛 Busan Stn`으로 적고 있다. 한글 사용이 보편화되지 못했고, 한자가 폭넓게 사용된 1950년대나 1960년대라면 모를까, 모든 서적이 한글로 출판되고 있고, 신문과 잡지가 한글전용으로 발간되는 문맹률 0%대의 대한민국에서 `부산역`을 못 읽는 사람이 있을까봐 한자를 병기한다? `부산역`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釜山驛`은 해독할 것인가?

 

혹 한자 교육용으로 적어 놓았을까? 교육부도 아닌 국토교통부에서 도로표지판에 한자를 병기해 놓고 운전자더러 한자 익히라는 소리를 할 리도 없다. 사람들은 부산역을 `솥뫼 역참`이라는 뜻글자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부산 중심부에 있는 철도역`으로 이해한다.

 

영문 표기가 영어권 국가에서 온 외국인을 위한 서비스이듯 한자 표기는 한자문화권에서 온 손님을 위한 장치일까? 그렇지도 않다. `釜山驛`이라고 적어 놓으면 중국인들이 잘 이해할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중국에서는 `역`을 `驛`(역참 역)으로 쓰는 게 아니라 `站`(역참 참)으로 쓴다.

 

최근에 G2로 부상하였고, 머지않아 세계 최강국이 될 중국에서 온 손님을 위한 배려라면 마땅히 `釜山站`으로 적어야 한다. 그러니 `釜山驛`은 우리나라 사람에게도, 중국 사람에게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 표기이다.

 

사람은 누구나 타성에 빠지기 쉽다. 행정도 관행에 젖기 쉽다. 도로표지판에 한글, 영문과 함께 한자를 병기해 오고 있는 정책은 수십 년 동안 써 오던 행정의 관행일 뿐 현재의 효용성과는 거리가 멀다. 중국의 급부상으로 20년 이내 영어 못지않게 중국어의 위상이 커진다고 보면 도로표지판에 중문(간자)을 병기해야 할 때가 곧 올 것이다. 이참에 한자 대신 중문을 병기하면 어떨까? (경북매일, 2013.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