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화인 2020. 10. 7. 11:09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있는 세계에 대한 탐색

 

이기성은 쇳가루로 작업을 하는 작가다. 작가가 주목하는 세계는 사유의 세계가 아니라 몸으로 감각 하는 세계다. 그것은 관념으로 추상화된 세계가 아니다. 그러기에 작가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세계를 말하기보다 우연성과 상호작용으로 열려 있는 세계이며, 무질서로 향해 있는 세계를 이야기한다.

산화된 쇳가루가 뿜는 붉은 기운으로 깊어가는 최근의 평면작업 또한 사용할 수 없는 것으로 향한, 에너지의 소멸을 향한 세계의 탐색이다. 작업환경과 재료의 작용이 만들어내는 관계망에서 드러나는 색은 산화되어가는 정도를 달리하며 화면에 자리한다. 그것은 바람에 묻어온 건조함으로 밝아지기도 하고, 대기의 축축함으로 어둡게 가라앉기도 한다. 그 울림은 다양함이 내재 된 울림이다. 재료와 재료, 물질과 물질, 그리고 주변 세계의 들어섬이 색으로 깊어간다. 무게와 깊이를 더해 화면을 울리는 색은 산화하는 쇳가루의 존재를 드러내는 빛깔이며, 쇠의 단단함으로 돌이킬 수 없는 유한함의 빛깔이다. 그것은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를 사용할 수 없는 에너지로 바꾸어 놓는 사건의 표면이다. 이기성의 최근 작품에서 색은 작품의 표면에 더해져 구성하는 요소로 있는 것이 아니라 색으로 이름할 수 없는 세계를 담고 있다. 그것은 색으로 나타나는 것이지만 그 속에는 주변 세계의 들어섬과 다양한 작용으로 인한 색의 변화가 축적된 공간이다. 산화하는 쇳가루는 소멸하는 것에 대한 환기이다. 그것은 유한함을 확인하는 몸짓이다. 영원하리라 생각으로 치닫는 인간의 오만함에 대한 경종인 모멘토모리, 어디에도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없음을 표현하는 즉물적인 그의 어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기성의 작업은 “있는 그대로의 것”에 대한 탐색이다.

그의 손길은 날 것의 세계를 더듬어 간다. 작가의 손길을 따라 쇳가루가 놓이고, 그것에 더해지는 물질과 환경적 조건으로 인해 없는 것으로 있던 잠재된 것이 드러나 공간을 형성한다. 그의 화면은 무엇을 재현하여 그리는 공간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으로 있는 지점을 열어 작품으로 일어나게 한다. 들뢰즈가 사건이란 ‘표면’에서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조건들 자체가 사건과 단면, 절개부, 연접부를 내포하는 것으로 보았던 것처럼 작가는 부식으로 드러나는 쇳가루에 담긴 그것의 해체, 그것의 사그라짐에 눈길을 준다.

이기성의 작품은 정적인 관조의 세계가 아니라 변화의 과정으로 번지는 일어남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작업은 우연성 속에 포착되는 물리적 세계뿐만 아니라 사회적 관계에서 쓸모없음으로 내모는 관계를 담아내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었다. 몸으로 만나는 세계는 삶이 자리한 세계이기도 한 때문이다. 악기와 카메라, 책등의 오브제 표면에 쇳가루를 입혀 녹슬게 한 그의 설치 작업은 소멸로 향한 것에 관한 설치는 질서를 만들고 그것을 영속화하려는 시도로서의 문화조차 쓸모없는 것으로 폐기 될 수 있음에 관한 서술이다. 그는 이러한 서술을 위해 버려진 자연물이나 기성품을 소재로 가져오기도 한다. 설치작품 <불편한 진실>에서 그는 자본의 논리에 의해 폐기된 자연과 인간의 위기를 표현하기도 했다. 밑둥치가 잘린 채 뿌리를 드러낸 나무는 쓸모를 다하고 폐기된 자연의 모습인 동시에 자본주의 논리가 작동하는 삶의 모습이기도 하고 한낱 대상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한 타자의 모습이기도 하다.

쇳가루를 이용한 일련의 작품은 정형과 비정형의 형태의 날 선 도드라짐으로, 오브제를 뒤덮은 녹으로 그리고 색으로 번지는 평면으로 변화해 왔다. 최근의 평면작업은 그동안 자석과의 작용에서 만들어진 긴장과 그 긴장이 만드는 일시적인 질서를 화면에 고정하는 작업의 반대 항에 놓여있다. 이제 이완 속에서 평면 공간에 번진 흔적은 시간으로 쌓여 스러져가는 무수한 것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기성의 작품은 만드는 것과 만들어지는 것 사이의 일어남에 있다. 스며들기도 하고 두께를 지니고 화면 위로 도드라지기도 하며 작가의 손에 잡힌 쇳가루는 견고한 물성을 내려놓는다. 화면은 무수한 작용이 일어나는 현장이다. 평면 공간에 남은 흔적은 쇳가루가 산화되면서 번져 나간 공간으로서의 시간이 아니라 작용이 일어나는 공간으로서 시간이다.

모든 존재의 발현은 찬란하다. 그것이 소멸로 방향 지어진 것이라 할지라도 주위세계가 들어와 앉을 곁을 내어주어 스스로 빛깔이 되는 세계는 찬란하다. 흐름은 되돌릴 수 없다. 그 유한한 세계의 일어남은 규정 할 수 없는 것으로 스며들어 세계를 작품으로 불러들인다. 화면의 색은 어둠에 자신을 내어주고 모든 색을 품어 내는 석양으로 잠긴다.

(2020.9.10. 배태주.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