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환의 시베리아여행

GSnJ 2006. 10. 19. 15:37

시베리아횡단열차는 태양을 향해 달린다

(18부)

 

 GSnJ 이사장 이 정 환 

 

 

 

 28.아름다운 세상을 그리는 DNA가 있다.

 

  아무렴 조종사가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기야 하랴마는 믿지 못하다보니 별의 별 걱정을 다하게까지 되었다. 아마도 일단 더 북쪽으로 날아가 남하하는 것이 근거리가 되고 비행시간도 단축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서울에서 뉴욕으로 갈 때도 일단 거의 알라스카까지 간 후 남하하는 것으로 알고 있던 기억이 나며 나의 공연한 근심에 스스로 실소할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겁에 질린 끝에 지쳐선지 잠이 든듯하다.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나야 나의 선택이었으니 그렇다 치지만 아내야 비지니스석에 태워 준다기에 그런 줄만 알고 따라 왔는데 죽음의 공포 앞에 떨어야 하다니 억울하지 않은가. 그래도 나의 실수를 비난하지 않는 것이 아내의 장점이다. 이런 저런 잡념에 휩싸여 얼마나 흘렀을까 비행기가 바다 위를 날기 시작했다. 나도 조금 안심이 되어 잠이 들어 몇 시간이나 됐을지, 안내 방송이 들리고 비행기 창문으로 험준한 연봉이 보였다. 아, 한국이다! 이제 이 비행기가 추락하지 않고 조금만 더 날아가면 서울이다. 조금만 더 날아라! 조금만!


  인천공항에 착륙한 순간, 오랫동안 꿈꾸었던 시베리아 횡단을 무사히 마친 기쁨과 비행가가 무사히 서울에 착륙한 기쁨이 겹쳐 나는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감격에 휩싸였다. 아내는 정말 무서웠다고 몇 번이나 말했고, 나는 무슨 걱정을 그렇게 했느냐고 짐짓 폼을 잡았으나 겁을 먹기는 내가 더 했는지 모른다. 심리학자가 남자는 남자다워야 한다는 이 같은 생각, 남성콤플렉스가 남자를 괴롭히고 단명하게 한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남자다움을 잃지 않으려고 나는 앞장서서 당당히 공항을 빠져 나왔다.

 

  집으로 향하는 길가에는 논과 밭이 펼쳐지고 두렁에는 잡풀이 무성하여 아름답다. 비행기 추락의 공포에서 해방되어 자연이 더 아름다워 보이는 것일까. 초여름의 빛나는 태양 아래 낮은 구릉이 이어지고 나지막한 산등성이가 겹쳐진 그림 같은 풍경은 더욱 아름답다. 어디 시베리아만 아름다우랴. 주말농장인 듯한 밭에는 화사한 태양 아래서 여러 사람들이 어우러져 열심히 무언가 심고 있는 듯 했다. 그 풍경을 바라보며 얼마 전 아파트 옆 공터의 조그만 텃밭에 젊은 아주머니가 저녁나절 서너 살이나 되었을 아이를 데리고 나와 열심히 호미질을 하던 모습도 떠올랐다. 사람은 자연을 접하고 싶어 하고 농사일을 하고 싶어 하는 DNA가 있는 것인지 모른다. 사실 우리는 긴 농경시대를 거쳐 진화해 왔으므로 그런 DNA가 있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지 않는가. 러시아 사람들만 다차에서 자연과 농사일을 즐기려는 욕망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여유가 생길수록 자연을 사랑하게 되고 스스로 무언가 심고 가꾸려는 잠재된 욕망이 살아나고 그것이 문화화 된다. 시간을 보내는 일이 문화로 발전했다는 시베리아에서의 발견이 나에게 새로운 것을 터득하게 하는 것 같다.

 

 29. 맙소사! 시베리아에서 찍은 사진이 날라 가버렸다니.

 

 나는 시베리아에서 그 긴 시간을 무엇을 했나? 책을 수십 권 읽고 큰 깨우침을 얻었나? 긴 명상을 통해 무언가 깨달았나? 아내와 진지한 대화로 새로운 부부관계를 구축했나? 생각해 보니 그저 그 긴 시간을 보내고 왔다. 그러나 그 긴 시간 늘 무언가 하고 있었다. 일상의 삶도 마찬가지다. 1년 365일 무엇을 하며 일년을 보냈을까? 지난 10년 무엇을 하며 그긴 세월을 보냈나? 생각해 보면 그저 긴 시간을 보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적지 않을 것이다. 시간은 그야말로 유수와 같이 흐르니까.    


 그런데 이렇게 한가한 상념에 젖어있을 수 없게 되었다. 디카로 찍어 노트북에 저장한 사진을 보기 위해 컴퓨터를 켰으나 예의 알 수 없는 메시지가 뜨며 먹통이지 않는가? 이 노트북이 끝까지 나를 괴롭히는 것이다. 그런데 괴롭히는 정도를 넘어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 노트북을 샀던 회사에 연락하여 기술자가 왔으나 그의 능력으로 고칠 수 없다며 파일이 전부 훼손되었을지도 모른다지 않는가! 아무튼 그는 노트북을 가지고 갔다. 그리고 다음 날 컴퓨터는 고쳤으나 사진을 찾을 수 없다고 했다. 내가 ‘내문서’에 저장되었다고 하자 그는 ‘내문서’ 파일은 복구할 수 없단다. 맙소사! 시베리아에서 찍은 사진이 다 날라 가버렸단 말인가. 그러나 그렇게 쉽게 물러날 수는 없었다. 나는 마구 고함을 쳤다.


“이 사진은 다른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것이다. 여행기를 쓰려고 준비한 사진인데 복구할 수 없다면 회사가 책임을 져야한다. 소송도 불사한다. 무조건 복구해내라.”

  그는 그럼 일본 본사(내가 산 노트북은 아주 소형의 도시바 제품이었다)에 보내 복구할 수 있는지 알아보겠다며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라고 했다.

“아무튼 복구해 내야 한다.”

나는 다시 힘주어 말했다. 수일 후 그에서 다시 전화가 왔다.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 복구된 것 같다며 사무실로  오겠단다. 아! 이런 일도 있구나. 너무  반가웠다. 나는 가슴을 조이며 기다렸고 그가 가지고 온 노트북엔 정말 대부분 사진이 순서는 뒤죽박죽이지만 고스란히 살아 있었다.

“정말 수고 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지난번에 그렇게 몰아쳤던 직원의 손을 잡고 반복해서 말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시베리아 여행기는 가능해 졌고 많은 사람들과 이 글을 통해 즐겁게 대화할 수 있었다.

 

  나는 사진을 하나하나 아내와 같이 보며 18일간을 복기했다. 우리를 그렇게 불안하게 했던 러시아에 대한 오해와 과장이 결국 우리 여행을 사실 이상으로 더 스릴 있게 만들었고, 러시아 항공기를 탄 것이 죽음을 걱정하는 시간을 갖는 행운을 우리에게 안겨 주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축복이 아닌가!

 

  이번 성공에 자신감이 붙어 다음엔 다시 모스크바로 날아가, 이번엔 러시아 비행기는 절대 안타겠지만, 다시 기차를 타고 폴란드, 체코, 항가리를 거쳐 불가리아, 옛 유고를 지나 그리스, 그리고 이스탄불까지 가리라고 다짐한다. 그리고 그 다음엔 꿈의 페르시아를 지나, 위험해서 과연 갈 수 있을까 모르겠으나, 실크로드를 횡단하리라. 그리고 서장을 거쳐 서울로 오리라. 이 꿈이 과연 이루어질까?

 

(이제까지 여행기를 읽어주신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건강하시고 시베리아횡단열차에 몸을 싣고 태양을 향해 달려 보시기 바랍니다.)

 
 
 

정환의 시베리아여행

GSnJ 2006. 10. 19. 15:36

시베리아횡단열차는 태양을 향해 달린다

(17부)

 

 GSnJ 이사장 이 정 환

 

 26. 긴 여행의 끝

 

  아침에 조금 늦게 눈을 뜬데다 침대 위에서 게으름을 피우다 보니 9시가 되서야 일어났다. 창밖으로는 소련이 세계 최초로 쏘아 올린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를 기념하는 조형물이 내려다 보였다. 1957년 소련의 인공위성 발사는 초등학생이던 나에게도 기억이 생생한 사건이었다. 아버지가 우주 경쟁에서 미국이 뒤졌다며 소련을 따라 잡으려면 한참 걸릴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도 희미하게 기억난다. 그리고 치열하게 전개된 긴 미국과 소련의 우주 경쟁은 1969년 내가 육군 병장이던 시절 아폴로호를 달나라에 착륙시킴으로써 미국의 승리로 끝났다. 암스트롱이 달 표면을 거니는 모습을 TV를 통해 바라보며 흥분하던 기억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느지막하게 아침을 마친 우리는 모스크바 시내를 감싸고 흐르는 모스크바 강의 유람선을 타러갔다. 유람선은 브르지노 다리에서 러시아 호텔까지 약 30분 정도 운행하는데, 강변의 크렘린궁, 성당, 호텔 등이 숲과 어우러져 매우 아름답게 보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시선을 끈 것은 강가 숲 곳곳에 벤치가 놓여있고 어김없이 남여 연인 한 쌍이 앉아 진한 애정표시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지쳐 시선을 배안으로 돌리자 젊은 여자들이 하나같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길거리를 걸으며 담배를 피우는 여자들도 적지 않았던 터라 이제 놀라지는 않지만 저 여자들은 무슨 사연이 있어 담배를 피워댈까? 라고 잠시 생각해 본다. 물론 패선이겠지. 그러나 정치사회적 격변과 경제적 곤경, 술에 취해 있는 남자들에 대한 실망(민정이의 이야기를 믿는다면), 그런 것들과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본다. 아무튼 중학교 정도부터 여자 아이들이 공공연히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다는 재윤의 이야기에 다시 한 번 놀랐다.

 

  그러는 사이 유람선의 오른편 강기슭에 우뚝 서 있는 거대한 조형물이 우리의 시선을 끌었다. 제정 러시아의 위대함을 대변한다는 표토르 대제의 위풍당당한 동상이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저 조형물은 필경 러시아의 위대함을 외치고 있음이리라. 열심히 카메라에 동상의 모습을 담고 있는데 강 위의 다리에 차량행렬이 길게 늘어선 것이 보였다. 재윤이는 주말이 되어 다차로 향하는 사람들이라며, 주말이면 많은 사람들이 다차로 가느라고 도로는 자동차로 붐비고 기차도 만원이 된다고 덧붙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보았던 다차의 모습과 맵시를 내고 카메라 앞에 서던 할머니가 생각났다. 아마 오늘 그 할머니 다차에도 딸과 손주가 찾아와 온 가족이 같이 활기찬 주말을 보내겠지.

 

  마지막 행선지 크렘린성에 이르자 우선 입구에 있는 바실리 성당의 붉은색, 청색 등 화려한 색깔의 양파 모양 지붕이 시선을 붙잡는다. 이 건축물에 대한 재윤이의 설명을 흘려들으며 관광객들과 어울려 넓은 크렘린 광장을 둘러보다 거대한 레닌의 무덤 앞에 이르렀다. 무덤 앞의 초병이 편안한 자세로 서 있는 모습에서 레닌이 더 이상 ‘위대한 소비에트의 영웅’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재윤이는 레닌에 대한 러시아 사람들의 존경심은 아직도 매우 강하다며 나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세계에서 가장 큰 대포지만 한 번도 발사된 적은 없다는 ‘황제의 대포’와 세계에서 가장 큰 종이지만 한 번도 울려 본적이 없다는 ‘황제의 종 ’은 심심치 않은 구경거리였다. 이 종은 주조 중에 불이나 물을 뿌리자 종의 한 쪽이 깨져 떨어져 나갔단다. 그 후 깨진 모습 그대로 울리지 못하는 종이 되어 도리어 사람들을 더 즐겁게 해주는 명물이 되었단다.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것을 기다리던 재윤이는 보석박물관이 제일 볼만하다고 서둘러 앞장섰다. 그러나 오후 개관 시간까지 두 시간 가까이 기다려야 했으므로 우리는 간단히 포기하고 크렘린성과 연결되어 있는 알렉산드로프 공원으로 나왔다. 공원 벤치마다 사람들이 한가로이 앉아 화창한 6월의 오후를 즐기고 있었다. 멀리 기마경찰이 머리를 박박 깎고 가죽잠바를 입은 청년들을 검문하는 모습이 보였다. 재윤이는 스킨헤드일 것이라고 했다. 스킨헤드족은 유색인종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결사체로 길거리에서 유색인종을 만나면 느닷없이 공격을 하기도 하므로 미리 잘 살펴 피해야 한다고 겁을 준다. 재윤이 말로는 스킨헤드족은 5월에 기승을 부리는데 올해는 종전 60주년을 맞아 세계 정상들이 모이기 때문에 단속이 아주 엄격하여 큰 사고가 없었다고 한다.

 

  드디어 러시아에서의 마지막 밤, 우리는 볼쇼이 극장으로 향했다. 모스크바에 가면 꼭 발레를 보되 볼쇼이 극장에서 보라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어 서울에서 미리 예약을 하고 왔던 것이다. 우리는 서울을 떠난 후 줄곧 청바지 하나로 견디어 왔지만, 오늘을 위해 아내는 그럴듯한 옷 한 벌을 따로 가지고 왔고 나도 노타이셔츠 위에 걸칠 자켓을 한 벌 준비해 왔으므로, 16일간의 여행으로 꾀죄죄할 터이지만 나름대로 멋을 내고 당당히 극장에 들어섰다. 극장 안은 원형이었고 불빛이 화려하면서도 부드러웠다. 아내는 사진을 찍자고 소근댔으나 사진을 찍어도 되는지 몰라 망설이는데 몇 사람이 용기 있게 카메라를 쳐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에라, 모르겠다! 다소 촌스럽게 보일지 모르지만 나도 카메라를 지켜들고 얼른 셔터를 눌렀다(물론 공연시작 전!). 이 극장이 곧 대 수리에 들어가 3년간은 아무도 여기서의 공연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우리를 더 즐겁게 했다. 오늘 밤의 공연은 ‘돈키호테’였다. 발레리나의 춤은 환상적이라고 하기에 충분했고 오케스트라의 음악도 너무 아름다웠다. 우리는 정말 만족했고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쳤다.

 

  호텔에 돌아와서도 공연의 잔영이 남아 즐거운데다, 또 마지막 밤을 그냥 보낼 수 없지 않느냐고 의기투합하여 우리는 호텔 바로 갔다. 나도 술을 즐겨 마시지만 아내도 지지 않고  잘 마신다. 다툴 때면 아내는 ‘나니까 당신 같은 사람과 산다.’고 하고 나는 ‘그럼 그만두자.’라고 험한 말을 주고받지만 같이 술을 마실 수 있어 그나마 같이 사는 즐거움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같이 동의한다.

 

  아침에 체크아웃 하러 내려가자 재윤이가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첫날 기차역에 늦게 나와 나에게 혼이 났지만 재윤이는 아주 착하고 순수한 청년이었다. 안내를 해 본 경험이 적어 능숙하지는 못했지만 자기가 알고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안내하는 모습이 귀여워 가끔 큰아들아이 생각이 나곤했다. ‘운호(큰아들아이)가 이런 일을 한다면 어떻게 했을까?’라고 생각하니 부족한 것도 이해가 되어 탓할 수가 없었다. 재윤이는 자기 어머니에게 우리 이야기를 했더니 집에 모시고 오면 좋을 텐데 라고 하시며 이곳에서 생산된 꿀을 한 병 주셨다고 내 밀었다. 뜻밖의 상황에 놀랐지만 재윤이와 어머니의 마음씀이 너무 고마워 몇 번이나 어머니께 고맙다고 전하라며 받았다. 학교 공부도 열심히 하고 러시아어도 능통하게 구사하도록 하라고 당부하며 손을 잡자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이렇게 해서 또 한번 아쉬운 작별을 했다.

 

 27. 비행기 추락의 공포

 

 서울로 돌아가는 것은 시베리아의 중심도시 노보시비리스크를 경유하는 러시아 비행기를 이용하게 되어 있다. 서울에서 일정을 짤 때 우리나라 비행기의 이코노미석 요금이면 러시아 비행기의 비즈니스 좌석을 타고도 남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조금 망설여지긴 했으나 러시아 비행기를 이용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 시베리아 항공으로 정한 후 아내에게는 ‘올 때는 비지니스석으로 했으니까 널찍한 의자에 기대 늘씬한 러시아 아가씨의 서비스를 받으며 돌아 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색을 냈었다. 역시 비즈니스 승객을 위한 대기실은 고급스러웠고 음료와 간식거리도 준비되어 있었으므로 아내는 만족해했고 나의 선택은 옳았다고 믿었다. 그리고 노보시리비스크에 도착하자 금발의 미인이 트랩 아래서 ‘서울 503’이라는 피켓을 들고 있다가 우리를 보고 아주 반갑게 ‘세울?’이라고 묻을 때까지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 미인이 서툴지만 또박또박한 영어로 자기를 따라 오라며 우리만을 별도로 안내할 때까지도 그랬다. 그러나 우리가 안내된 비즈니스 대기실은 실망스러웠다. 덜렁하니 크기만 하고 아무런 시설도 없고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여기서 두 시간 반을 기다려야한다. 조금 불안해지기 시작했으나 우리는 아들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쉽게 연결되었고 아들아이는 시험공부로 이번 주말 집에 못 온다며 양해를 구했다. ‘시험이라면 할 수 없지’라고 생각하며 딸 아이에게 전화를 했으나 받지를 않는다. 금방 ‘무슨 일일까?’ 조금 걱정이 되면서 '나는 정환이 등만 보고 산다'고 하셨다던 어머니 생각이 났다.창에는 석양이 아름답게 가득 찼다. ‘시베리아의 마지막 석양이구나!’라고 생각하며 하염없이 바라보다 노트를 폈다.

  

  연구소에 대한 ‘시베리아 구상’은 어설프지만 마무리되어 갔다. 연구소 이름은 여러가지 뜻을 함축하여 GS&J로 하고, 여행 떠나기 전 면담했던 여자 직원을 웹마스터로 채용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컴퓨터를 전공하지 않았지만 「주켄사람들」을 읽으며 '열정이 사람을 바꾸고 성과를 결정한다'는데 공감하였기 때문이었다. ‘철저한 탐구와 최고의 신뢰’를 기치로 내걸고 농업문제에서 시작하여 서서히 연구 범위를 넓혀 가리라. 순수한 연구소를 지향하여 토론회, 세미나, 교육보다는 연구 보고서를 내는 데 중점을 두자. 중견 학자와 현장 전문가를 연결하는 연구네트워크의 허브가 되어 최소의 인력으로 최고의 연구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자. 시작은 조용히 하고 실적을 쌓으면서 서서히 나가자. 연구의 객관성을 지키고 중요한 쟁점에 대해서는 분명한 입장을 발표하여 관계자들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연구소로서의 존재가치를 인정받자. 처음 상당 기간 사재를 털어 넣자. 신뢰가 쌓이면 엔젤도 나타나고 고객도 나타나리라.

 

  예의 항공사 직원의 친절한 안내를 받아 서울행 비행기로 향했다. 어찌된 영문인지 국제선까지 가는 길은 꾀나 멀고 어두웠다. 그리고 몇 번의 시큐리티 체크 끝에 겨우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은 불안감이 몰려왔다. 비행기의 입구 문턱이 너덜너덜하고 페인트칠이 다 벗겨져 있을 만큼 낡은 비행기였다. 비행기 내부도 그 엉성함이란! 옛날 시골 버스에 올라탄 기분이 이랬을까? 10여개의 비즈니스석에는 우리와 또 한 사람이 있을 뿐인데 비즈니스고 뭐고 할 계제가 아니었다. ‘이것 참 큰일이네’라고 생각하면서도 아내에게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잡았다. 불안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비행기 문이 닫히고 엔진소리가 높아지며 출발하려하는 순간, 엔진 소리가 급격히 낮아진다. 다시 비행기 문이 열리자 작업복을 입은 엔지니어들이 올라와 조종실로 가는 것이 보였고, 안내 방송은 10분 정도 지연되어 출발할 것이라고 한다. 무슨 일이지? 아내가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본다. 20여분 쯤 지났을까, 엔지니어들이 내려가고 비행기의 엔진 소리가 요란해졌다. 이제 출발하는구나, 하는 순간 다시 엔진 소리가 잦아드는 것이 아닌가. 엔지니어들이 올라오고 뭐라고 떠드는데, 이건 정말 옛날 시골 버스가 고장 나서 본네트를 열었다 닫았다 하는 풍경 그대로였다. 아내는 눈을 감고 아무 말도 없다가 가끔 눈을 뜨고 어두운 창밖을 내다본다. 불안한 마음을 달래며 기다리고 있겠지. 그러나 사실 이제 비행기가 뜬다고 해도 더 걱정이었다. 이런 비행기가 서울까지 제대로 갈 수 있을까? 차라리 비행기에서 내리고 싶었다. 그러나 이 밤늦은 시간, 말 한마디 안 통하는 이 시베리아의 한가운데서 내린들 어떻게 한다는 것인가! 에라 모르겠다. 그런데 도대체 내가 왜 이런 비행기를 선택한 것일까? 이런 바보 같은 짓을 하다니! 후회가 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2시간 가까이 흐르고 우리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버렸을 즈음 비행기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드디어 이륙했다. 그러나 그 순간 우당탕 소리가 나며 무엇인가가 떨어졌다. 어이쿠, 비행기가 부서지는 건가! 정말 간이 콩알 만해지는 것 같았다. 아내와 나는 겁에 질려 마주 보았다. 겨우 비행기가 고도를 잡자 승무원이 와서 통로에 떨어진 조명등 겉 뚜껑을 들어 보였다. 무어라고 해야 하는지. 탱큐? 스빠씨버? 우리는 시선을 피했다.

 

  이 비행기가 제대로 갈 수 있을까?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나는 아내의 손을 잡고, 문제를 미리 발견해서 잘 정비했기 때문에 도리어 더 안전할 것이라며 나도 믿지 않는 이야기로 안심시키려 했다. 그러나 나도 안 믿는 것을 남이 믿게 할 수 있으랴. 나중에 아내는 비행기가 추락하면 아이들이 어떻게 될까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그려 보았다고 이야기 했다. 나도 서울을 떠날 때 아이들에게 몇 자 적어 놓고 온 것을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비행기는 안전 고도를 잡고 유유히 시베리아 벌판 위를 날았다. 우리가 기차로 달려온 길을 거슬러 가고 있는 것이겠지. 나는 위스키 한잔을 시켜 마시고 아내는 담요를 두장 겹쳐서 덮고 잠을 청한다. 창 밖 멀리 지평선에는 붉은 빛이 보이고 시베리아 대륙은 시커먼 모습으로 깔려 있었다. 가끔 불빛이 보이는 것은 마을이고 회색으로 구불거리는 선은 조그만 강인 것 같았다. 넓게 희미하게 보이는 것은 호수나 늪이리라. 나는 위스키를 연거푸 서너 잔 마셨고 아내는 꼼짝 않고 의자에 기대 있다.

 

  이런 긴 여행은 인생 같다. 뜻하지 않은 일이 생기고, 즐거운 일이 있는가하면 걱정거리도 생긴다. 후회스런 일도 많고. 무엇을 했는지 모르게 시간이 가고 지나고 보면 아쉬움도 많고. 좀 더 준비를 잘 할걸 하는 생각이 나지만 막상 열심히 준비한 것은 쓸모없어지고. 그런 가운데 아내가 있어 위안이 되고.

 

  그런데 아래를 내려다보니 땅이 온통 눈과 얼음으로 덮인 것처럼 보였다. 이상하다. 지금 눈이 덮였다면 시베리아의 북쪽인데, 서울행 비행기가 왜 시베리아 북쪽으로 왔지?

도대체 이 비행기가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가?

 

 
 
 

정환의 시베리아여행

GSnJ 2006. 8. 30. 12:59

 

시베리아횡단열차는 태양을 향해 달린다

(16부)

 

 

GSnJ 이사장 이 정 환

 

 

24. 호랑이는 가죽을 남긴다.

 

  호텔에 도착하였으나 체크인 절차가 번거롭다. 예의 거류증명서를 발부 받아야 하므로 프런트 직원에게 여권과 여기까지 온 기차표를 건네주고 한참이나 로비에서 서성거리며 기다려야 했다. 프런트의 여직원은 약간 검은색을 띤 미인이었으나 재윤이와 지극히 사무적인 표정으로 한참이나 무슨 말인지 나누고 있었다. 나는 무슨 일이 있나 불안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고객이 호텔에 온 것이 아니라 아쉬운 민원을 들고 관공서에 찾아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알고 보니 숙박료가 지불되어 있지 않다고 하여 예약한 사람과 연락을 취해 확인하는 등 혼선이 있었던 것이었다. 아무튼 겨우 체크인한 후 우리는 먼저 참새언덕으로 향했다. 참새언덕은 모스크바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왼쪽에서 언덕 아래로 숲에 쌓인 모스크바 강이 흐르고 강 위엔 유람선이 떠다닌다. 바로 아래 올림픽 스타디움의 아름다운 모습이 보이고 언덕 경사면에는 시베리아에서 보았던 노랑, 하얀 야생화가 여기저기 만발하였다.

 

  언덕 위에는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이 늘어서서 관광객을 열심히 유혹하고 있었다. 우리는 탁구공만한 러시아 목각인형 ‘마트로쉬카’를 하나 샀다. 이 인형은 인형 속에 똑 같이 생긴 작은 인형이 겹겹이 들어 있어 마치 양파껍질 벗기는 느낌이다. 드디어 맨 끝에는 딱 콩알만한 목각인형이 나와 우리를 즐겁게 해 주었다.

 

  뒤편으로는 저 멀리 모스크바 대학 건물의 위용이 시선을 끌고 대학 정문으로 향하는 길가에는 새빨간 양귀비꽃이 눈부셨다. 1755년에 설립되어 시내 한가운데에 있던 이 대학을  스탈린이 1955년에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소비에트의 영광을 상징하기 위해 무려 높이 240미터 가로 450미터의 32층 본관 건물을 지었단다. 그리고 이 언덕의 이름도 레닌의 언덕으로 개명하였으나 지금은 다시 참새언덕으로 되돌아가고 저 거대한 건물은 소비에트의 실패를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우리가 지나온 예카테린부르크는 동진정책을 추진한 표토르 대제가 부인 ‘예카테리나’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었으나, 레닌은 우랄전투에서 적군에게 승리를 안겨 준 친구를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서 ‘스베르들로프’로 개명하였단다. 그러나 지금은 다시 예카테린부르크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왠지 기차역의 이름은 그대로여서 횡단열차 여정표에서 예카를 찾지 못해 당황했었다.) 저 유명한 레닌그라드도 본래의 이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바뀌었고, 니콜라이 황제가 처형된 곳에 세워졌던 예카의 혁명기념관은 황제를 성인으로 모시는 성당으로 변하지 않았던가. 러시아에 이런 예는 방방곳곳에 허다하다고 한다. 소비에트의 시대는 역사 속에 박제되고 이제 신기한 꿈 속 이야기가 된 것 같다.

 

  한 건물의 지하가 온통 한국 음식점인 곳에서 순두부찌개로 점심을 하고 ‘트레치야코프’ 박물관을 찾았다. 이 박물관에는 11세기 이후의 그림들이 연대순으로 5만여 점이나 전시되어 있다고 하여 1시간 정도를 예정하고 온 나를 주눅들게 했다. 그야말로 주마간산으로 훑어볼 수밖에 없었으나 1900년대 전후에 그려진 몇 개의 그림은 햇빛의 비추임에 대한 묘사가 경탄스러웠다. 막 개이기 시작한 하늘과 초원의 빛이 그림 속에서 정말 빛나고 있는 듯하다. 아마도 이런 빛의 아름다움에 대한 화가의 인식이 인상파 그림으로 이어진 것 아닐까라고 멋대로 생각하며 박물관을 나섰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들른 ‘아르바트’거리에는 기념품가게들이 늘어섰고 사람들이 명동이나 인사동 거리처럼 붐비었다. 우리는 유리 보석을 박아 만든 조그만 왕관 모양의 기념품을 14,000루블을 주고 몇 개 샀다, 18,000루블 달라는 것을 용기를 내서 후려쳐서 14,000으로 깎자 점원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망설이다가 싸 주었다. 우리는 의기양양하여 가슴을 펴고 기분 좋은 김에 한잔하자며 바로 앞에 있는 맥도널드로 갔다. 그러나 햄버거 가게는 발 디딜 틈도 없어 거리에 늘어놓은 식탁에 앉아 맥주 한잔을 어렵게 시켜 마셨다.

 

  그 번화한 거리의 한 쪽 건물 벽에 낙서(?)가 빈틈없이 가득 차 있고 그 앞에 몇 명인가 젊은이가 앉아 있었다. 이것이 바로 ‘빅토르 최’를 기리는 추모의 벽이고 그를 추앙하는 젊은이들이란다. 빅토르 최는 소비에트시절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던 고려인 가수로서 젊은이들에 대한 영향력이 대단했다고 한다. 그는 1990년 8월 자동차 사고로 29살 나이에 사망했고 비밀경찰의 소행이란 소문이 당시부터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한 고려인 가수에 대한 추모가 지금까지 이렇게 이어지다니!   

 

  나는 음악 특히 록 음악에 대해서는 일자무식이므로 빅토르 최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빅토르 최 이야기에 귀가 번쩍 띈 것은 뮤지컬 ‘명성황후’를 연출한 윤호진씨 때문이었다. 그를 연구원에 초청하여 강연을 듣는 자리에서 그는 빅토르 최의 이야기를 뮤지컬로 만들어 볼 계획이라며 환상적 무대가 될 것이라고 다소 상기된 목소리로 이야기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완성되면 러시아에서 아마 폭발적 인기를 끌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나는 그 때 ‘도대체 빅토르 최가 누구기에---’라고 호기심이 갔지만 그렇게 흘려버렸다. 그런데 예카에서 우리를 안내했던 성훈이가 빅토르 최의 놀랄만한 인기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서둘러 음반 가게에서 그의 판을 한 장 샀다. 그리고 오늘 여기에 와서 그의 추모의 벽 앞에 서니 흥분되지 않을 수 없었다.

         

   추운 거리는 우리들의 발자국을 기다리고

   군화 위엔 흙먼지들

   젊음을 삼킨 두려운 싸움에 미쳐버리는 눈빛

   잠에서 깨라

   총에 맞기 전에

   나의 팔에 새겨있는 나의 혈액형 나의 군번아

   싸움에서 나의 영혼을 지켜다오

   여기 싸늘한 이 땅에서

   나의 피를 묻으리

   행운을 빌어다오

   나의 행운을 빌어다오

                  

* 빅토르 최 - Группа крови (혈액형) 들어보기 (재생버튼을 눌러주세요)

 

  빅토르 최의 노래 중 최대의 히트를 했던 ‘혈액형’의 노랫말이다. 전쟁과 억압에 반항하는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소비에트의 붕괴를 촉진시켰다고 평가될만하게 그의 노랫말은 강렬하고 그의 노래 소리는 우울하고 비장하게 들린다. 서울에 돌아와 알았지만 우리나라에도 그의 팬클럽이 있었다. 29살에 죽었다지만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의 노래에 열광하는 젊은이들이 이렇게 많다니, 그리고 뮤지컬로 그의 일생이 다시 살아나게 된다니 그는 지금도 살아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이 생각났다. 어머니는 별 공부가 없으셨지만 내가 어릴 때부터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하실 때면 사람이 밥 먹는 일에만 몰두해서는 안 된다고 이 속담으로 우리 형제들을 훈계하시곤 했다. 나의 이번 여행길은 오랜 호기심이 발동되어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러나 25년간 몰두했던 연구원 생활을 끝내고 이제부터 할 일을, 모든 것에서 멀리 떨어져서 생각해보고 싶었던 것도 큰 이유였다. 안전하고 편안한 곳에서보다 생소한 154시간의 기차여행을 하며 생각하는 것이 새로운 삶에 도전해야하는 나에게 더 적절할 것 같았다. 그래서 가까운 친구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멋진 ‘시베리아 구상’을 가지고 돌아올 테니 기다리라고도 이야기 했다. 연구원을 그만두면 연구소를 차리리란 생각은 오래 전부터 했다. 그러나 어떤 연구소를 만들어 어떻게 운영해야 할까 잘 잡히지 않았다. 이번 여행 내내 그 생각이 머리를 맴돌았지만 ‘멋진 시베리아 구상’은 끝내 완성되지 못한 채 여행은 끝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빅토르 최 추모의 벽 앞에서 어머니의 훈계를 다시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나는 많은 것을 얻었다고 생각하며 자리를 떴다.

 

  재윤이는 ‘신라’라는 한식당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내가 점심을 먹고 나오며 한식당은 일식당에 비해 어디를 가나 품위가 떨어진다고 이야기 했더니 반드시 그렇지 않음을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실내 장식이 아주 세련되고 분위기가 좋았다. 김치찌개에 불고기 그리고 돌솥 비빕밥과 반찬-무생채, 취나물, 콩나물 등등-모두 차림새가 깔끔하고 맛도 좋았다. 70년대쯤의 노래가 조용히 흐르고 러시아인 여자 종업원들이 미소를 지으며 서툰 한국말로 대답하는 모습이 귀엽다. 이정도의 식당이라면 어떤 일식당에 뒤지지 않을 것 같다며 우리는 가슴을 폈다.

 

  호텔에 돌아와 로비를 둘러보다가 우리는 깜짝 놀랐다. 조금 전 아르바트 거리에서 산 것과 똑같은 것을 단돈 1,300 루블에 팔고 있는 것이 아닌가! 13,000이 아니고 1,300 맞아? 다시 점원에게 확인했으나 그렇단다. 세상에 이런 바가지가! 그러나 아내는 곧 이 사태를 현명하게 수습했다. 이것은 짝퉁일거란다. 기가 막힌 해법이다. ‘그래, 짝퉁이겠지.’ 나도 흔쾌히 동의하였으나 맥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곳에서는 건장한 체격의 정장 차림 남자들이 일일이 방 열쇠를 확인한다. 손님의 안전을 위해서리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 바로 옆 소파에 앉자있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왠지 느끼한 분위기라고 생각하는데 그 여자가 살짝 미소 지으며 ‘섹스?’ 라고 하지 않는가! 나는 순간적으로 ‘무슨 소리지?’ 하다가 화들짝 놀라 반사적으로 뒤를 바라보았다. 아내는 저 만치서 무엇을 보는지 두리번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방에 돌아와 아내에게 이 이야기를 하자 ‘내가 있어서 아쉽겠네.’ 란다. ‘사람 마음 잘 아네.’ 라고 응수하고 샤워실로 향했다. 아무튼 방 열쇠를 확인하는 엄격함과 당당히 호객하는 ‘여인’ 의 대담함이 무언가 모를 스릴을 느끼게 했다.  

 

25. 나의 참회록

 

  우리는 빅토르 최의 음반을 틀었다. 빠르지만 굵고 음울한 노래 소리가 방안에 깔린다. 우리는 낮에 본 추모 벽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수화기를 들자

 

“너는 도대체 무얼 하는 위인이냐! 이따위 보일러나 설치하고”

 

  어머니의 노기 찬 음성이 찌렁찌렁 수화기를 울리더니 전화가 끊겼다. 나는 ‘보일러가 고장이면 거기에 붙어있는 서비스 센터로 전화해야지, 사무실에 있는 나에게 전화를 해서 퍼부어대면 어쩌란 말씀인가! 참 답답한 노인네 같으니라구’ 라고 마음속으로 외치는 순간 눈이 떠졌다. 오랜만에 꾸는 돌아가신 어머니 꿈이었다.

 

최인호는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라는 사모곡 수필집에 이렇게 참회문을 적어 놓았다.

 

---나는 많이도 울었다. 새삼스런 그리움 때문이 아니라 살아생전 어머니가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하는 슬픔이 솟구쳐 올라왔기 때문이다.

---나는 어머니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 죽음이라는 검정 칠을 들고 비겁하게 자식들을 끊임없이 위협하던 할망구 거지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어머니를 있는 그대로의 어머니로 보지도 못하였고, 어머니의 고통과 비명소리를 듣지 못하였던 비정한 자식이었다. 어머니는 쓰레기처럼 내 마음 속에서 하치장에 함부로 버려졌었다.

----나는 비겁하게도 어머니를 볼 수 없고, 들리지 않고, 말할 수 없는 감옥에 가둬두고, 좋은 옷 입히고 매끼마다 고기반찬에 맛있는 식사를 드리고 있는데 무슨 불평이 많은가, 하고 산채로 고려장 시키는 고문으로 어머니를 서서히 죽이고 있었던 형리였다.

그렇다. 어머니는 그토록 고생하여 지문조차 남아있지 않은 손으로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웠지만 머리는 좋은 대신 몰인정한 자식들에 의해 독방에 감금되었던 종신형의 죄수였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최인호와 같이 정말 많이 울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85세가 되시도록 시흥 본가에서 혼자 사셨다. 우리 집에 어쩌다 오시면 하루 밤 주무시고 새벽 같이 시흥 당신의 고소로 돌아가셨다. 평소 아들에게나 며느리에게나 잔소리 같은 것은 흉내도 내지 않으셨지만 무엇 때문인가 역정이 나시면 불호령이 떨어져 우리 형제와 며느리들은 어머니를 두려워했다. 괴팍한 노인네라고 생각하며 어머니의 외로움과 고통을 이해하지 못했다. 특히 나를 다른 어느 형제보다 더 혹독하게 몰아붙이시곤 했고 지금 꿈처럼 느닷없이 전화를 해서 역정을 내시는 통에 그런 어머니를 정말 이해할 수 없다고 분개하곤 했다.

 

  혹시, 정말 아주 혹시 토요일 밤에 어머니와 같이 잔다고 가면 펄쩍 뛰시며 '내일 새벽에 절에 가야하는데 공연히 와서 귀찮게 한다.' 며 좀 앉았다 가라고 내 모셨다. 그러나 우겨서 자던 어느 겨울 밤 방이 너무 더워 잠을 깨자 '온도 조절기 눈금이 잘 안보여서...' 라고 하셨는데 나는 그것을 정말인줄 알았을 정도로 무심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집에 잠깐 살아보고서 외풍이 그리 센지 처음 알았고, 외출했다 밤에 돌아와 보일러 기름이 떨어졌음을 알았을 때의 당황스럽고 막막함도 처음 알았다. 부처님이 계셔서 하나도 무섭지 않다고 하셨지만 장롱 밑에 칼을 하나 감춰 두고 계셨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외로움과 고통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쌓였을 때 어머니는 절규하셨던 것이었음을 나는 몰랐던 것이다.

 

 어머니는 굉장한 치맛바람 엄마셨다. 초등학교시절 여름이면 꼭 오이, 양배추, 호박 등을 한 광주리 싸서 담임선생님 댁으로 보내셨다. 나는 그것이 정말 싫었다. 일하는 아저씨가 지게에 지고 나서면 나는 멀리 떨어져 가다가 선생님 집 근처에서 손가락으로 가리키고는 달음질쳐 도망오곤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그 바쁜 와중에 새벽같이 어디엔가 가셔서 서울 유명 초등학교의 시험지를 구해 오시고,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나를 꾸벅꾸벅 졸며 지켜보시다가 군것질 거리를 책상머리에 두고 가시곤 했다.

 

  어머니는 굉장한 일꾼이셨다. 봄철에 채소 육묘 상에 모종을 이식하실 때는 손이 안보일 정도로 일을 해 내셔서 모종 이식 일은 어머니 독차지였다. 여름에는 일하는 사람들이 십여 명을 넘었고 모두에게 밥을 해 대야했다. 간장, 된장은 몇 독씩 담고 김장김치는 내키 만한 독으로 열개는 더했다가 줄지어 찾아오는 보따리 장사에게 파셨다. 아버지가 양조장 술은 카바이트 냄새가 난다고 불평하셔서 밤늦게 몰래 막걸리를 큰 독에 가득 담그곤 하셨는데 술 조사가 나오면 번개같이 어디엔가에 감추셨다.     

 

 어머니는 자존심이 강했고, 명예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겼다. 우리들에게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무언가 세상에 남겨야지, 그냥 살다 죽으면 그 인생이 너무 허무하지 않느냐. 나야 이렇게 살다가가지만 너는 뜻있는 일을 해야지.’ 이렇게 도란도란 말씀하시곤 했다. 어렸을 적에 어머니는 그렇게 내게 자상하셨고 역정 내시는 일이 거의 없었을 뿐만 아니라 큰 아들이라고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고 하셨다. 그런데 어머니는 나이가 드실수록 나에게서 멀어져 갔고 나도 어머니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러나 어머니가 암이 재발하여 병원에 입원하신 후 나날이 쇠약해지던 즈음부터 어머니는 내가 오기만을 기다리셨다. 내가 병실 안으로 들어서면 힘없이 손을 들어 반가움을 표하시며 입을 오무려 어머니 특유의 미소를 지으셨다. 휠체어에 태워 산책을 나가면 그렇게 즐거워 하셨고 간호원들은 하루 종일 짜증내시다가 큰 아들만 오면 다 풀린다고 놀렸다. 그렇게 해서 오랜 동안의 소원함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러나 어머니는 입원한지 꼭 100일 만에 운명하셨고 어머니와 나와의 허니문은 짧게 끝났다. 내가 시흥 어머니 댁에 왔다가 돌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언제나 정환이 등만을 보고 산다.’고 하셨다는 이모님의 전언을 들으며 쏟아지는 눈물을 어찌할 수 없었고, 좀 더 자주 어머니와 같이 자며 외로움을 덜어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이 나를 괴롭히곤 했다. 나의 회한의 회상이 여기까지 이어졌을 때

 

“당신 왜 그래? 우는 거야? 이번엔 어머니 생각인가?”

 

아내가 잠이 깨어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