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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돌 2011. 11. 24.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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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러던데...,"

다른 사람의 언어를 써서 위장한 것일 뿐, 결국 자기 말을 옮기고 퍼뜨리려는 속셈이다.

 

 

철학자 쇼펜하우워는 "인간은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을 보면 본능적으로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쓰라리게 떠 올린다"고 했고,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우리말도 있다. 가까운 사람이 잘되는 것을 보는 일은 결코 유쾌하거나 축하할 일이 못 되며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이것이 시기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시기에 대해 정의하기를 '다른 사람의 불행에 기뻐하고, 행운에 애통하는 것'이라 했다. 시기를 "가장 더러운 죄" 혹은 "가장 악한 죄"라고 일컫는 것은 그것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다른 사람의 행복을 넘어뜨리고 불행하게 하기 때문이다. 시기는 이웃의 추락을 도모하고 이웃의 행복을 무너뜨리려는 것으로 결국 나아간다. 그래서 도르디 세이어는 "시기란 자기 사랑이 왜곡된 형태로 나아가는 악"이라 했다. 자기를 만족시키고 사랑하는 길이라면 그것이 다른 사람의 불행이 되더라도 개의치 않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은밀하게 이웃의 추락을 도모하기까지 한다. 이런 성격을 지닌 시기는 교만 다음에 위치하지만 그 악함에 있어서는 교만에 뒤지지 않는다. 남의 불행에 기뻐하고 그래서 그것을 은밀하게 도모하는 시기는, 그래서 죄질이 가장 추하고 악하다. 이 시기가 작동하게 되면 어떤 집단도 살아 남기 힘든다. 사회든 단체든, 그곳에 미움과 불화의 싸움이 생기고, 종국에는 분열로 귀착하게 된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궁정작곡가 겸 지휘자인 살리에리가 궁정 홀에 들어서던 순간 하프시코드로 천재적인 음률을 연주하던 모짜르트를 보던 그의 표정과 그 눈을 기억하는가? 놀라움과 쓰라린 감정과 부러움이 한데 버무려진 우울한 눈이었다. 그 눈에서는 요리를 앞둔 식탐가의 눈에서 볼 수 있는 광체나, 교만한 자의 눈에서 볼 수 있는 자신감이 넘친 기운은 발견할 수 없다. 오로지 우울함과 쓰라림이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이 시기(Envy)의 어원은 라틴어 "인비디아(invidia)로서 "자세히 본다"는 의미이다. 시기는 보는 것, 즉 눈에서 시작한다. 시민들의 환호를 받는 동료, 상사의 칭찬을 듣고 활짝 웃는 동료, 예쁜 부인과 함께 고급 레스토랑에서 나오는 친구를 "보는 것"으로부터 시기는 시작된다. 시기는 종종 녹색 눈으로 묘사된다. 세익스피어가 시기를 이렇게 묘사한 후 이 표현은 시기의 대명사처럼 쓰이고 있다. 녹색 눈으로 시기를 나타내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설명된다. 첫째, 초록은 덜 익은 것, 즉 먹으면 속을 쓰리게 하는 과일의 색이다. 덜 익은 과일처럼 시기는 속을 쓰리게 하기에 녹색으로 등치된다. 둘째, 고양이가 쥐를 앞에 두고 골려가면서 잡아먹으려 할 때, 그 눈빛이 녹색으로 변한다고 한다. 시기는 대상을 결국 파멸시키는 것이기에 고양이의 눈 색깔인 초록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시기는 "녹색 눈을 가진 괴물(green eyed monster)로 불리기도 했다. 중세 교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단테도 시기를 "눈으로 짓는 죄"로 묘사했다. 그의 책 신곡에서 시기를 범한 자들은 연옥에서 눈꺼풀이 굵은 철사로 챙챙 꿰매진 채 살고 있다.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상태에 처해져 있는 것이 그들의 형벌이었다. 그들은 눈으로 죄를 지은 자들이었기 때문에 그에 합당한 눈의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시기는 질투와 비슷한 뜻으로 이해되고, 종종 혼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의미가 다르다. 시기(Envy)의 어원은 라틴어 인비디아(inbidia)에서 왔고, 질투(jealousy)는 헬라어 젤로스(zelos)에서 왔다. 고대 헬라 사회는 시기를 프토누스(phthonos)라는 용어로 질투와 구분한다. 질투란 내가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소유하고 싶어 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갖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느끼는 비애이다. 질투의 무게 중심은 본인에게 있다. 질투는 라이벌의 잘됨, 성공, 탁월한 업적 때문에 촉발되기는 하지만, 그 사람이 내가 갖고 있지 않는 것을 갖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발생되는 비애의 정서다. 질투와 같은 어원에서 열정을 의미하는 단어가 파생된다. 어원이 함유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열정적인 사랑이다. 그래서 질투는 자기도 그것을 갖고자 하는 마음으로 발전되면서, 그것을 획득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방향으로 작용하곤 한다. 다시 말해서 이 감정은 일종의 경쟁심(emulation)과 같은 것이다. "왜 저 사람은 지니고 있는데 나는 갖지 못했을까?" 이런 생각이 "나도 가져야지! 어떻게 하면 그것을 손에 쥘 수 있을까?"라는 방향으로 발전한다면 이런 경우의 질투는 악이 아니라 미덕(virtue)이 될 수 있다. 사실 경쟁(emulatiom)은 모방(immitation)과 동전의 양면과 같다. 경쟁은 탁월한 사람을 닮아가려고 하는 단계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시기인 프토노스(phthonos)는 무게 중심이 다른 사람에게 있다. 단순히 다른 사람과 집단이 무슨 큰일을 성취하거나 뭔가 소유한 것을 보는 것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왜 저 사람이 저렇게 잘 되었지?" "그렇게 탁월한 사람도 아닌데..." 이로 말미암아 속이 쓰리고 아픈 것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 악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좋은 것을 갖고 있음을 두고 볼 수 없는, 용납할 수 없는 감정이다. 이 점에서 질투와는 분명히 다르다. 질투는 자기에 관련한 것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나 시기는 늘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것에 중심이 옮겨져 있다. 상대의 탁월한 것 때문에 비애를 느끼고, 상대가 몰락하는 것 때문에 행복해 하는 것이다. 단테의 신곡에서는 시기의 죄값을 치르고 있는 사람이 순례자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나는 지상에 있을 때 늘 지닌 행운을 즐기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비통해하는 것을 더 즐겼지요." 헬라 사상가들의 글에서도 시기인 프토노스는 항상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점에서 심리학자 슈크(Helmut Schoeck)의 설명은 매우 정확하다고 할 것이다. "시기하는 사람은 탐나는 물건을 갖고 싶어 하지도, 그것을 즐겨하지도 않고, 다만 다른 누군가 그것을 갖는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한다."

 

시기의 독특성은 주로 그 대상이 자기와 관계가 없는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라 아주 친숙하거나 같은 공간에서 익숙하게 알면서 지내는 사람들이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윌리엄 메이(William May)라는 학자는 시기를 "형제에 대해 짓는 죄악"이라 했다. 동료의 불행을 은근히 즐기는 것은 심리학의 개념인 '샤던프로이데(Shadenfreude)'와 아주 유사한 성격이다. 이것은 악의적 기쁨(malicious joy)을 의미하는 것인데, 용어 그대로 이웃의 어려움과 역경(Shaden)에 기쁨(Freud)을 느끼는 것이다.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인간의 이런 정서를 간파하고 다룬 바 있다. 그는 "사람은 이웃에 대한 감정에서 이웃이 부당하게 행운을 얻게 된 것에 대해 편치 않는 감정을 갖게 마련"이고 이 감정을 "네메시스(nemesis), 즉 "의분"이라고 하면서, 이것에 있어서 중용을 지키는 것을 미덕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이것이 지나치거나 모자랄 때 미덕이 되는데, 전자는 이웃의 잘됨을 시샘하는 프오노스 즉 시기이고, 후자는 이웃의 불행에 대해 아파하지 않거나 혹은 즐기는 "에피카이레카키아(epichaireckakia)", 즉 고소해하는 것이다. 에피카이레카키아는 불행(kakon)과 즐기는 것(chaira)로 구성된 복합어로, 이를 독일어로 직역해서 옮기면 샤텐프로이데(shadenfreude) 그대로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처럼 인간이 갖는 이웃에 대한 감정 중에서 고소해 함이 있음을 간파했고 악으로 경계한 것이다. 시기와 고소해 함의 특징은 이웃이 웃는 것만큼 자신은 우울해지고 이웃이 우는 것만큼 자신은 웃는 것이다. 이처럼 시기의 죄에서는 이웃의 행복과 나의 불행, 이웃의 불행과 나의 행복이 철저히 제로섬(zero-sum)게임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시기는 뛰어난 재능, 출중한 성품, 그리고 그로 말미암는 결과적 선(善) 등을 용인하지 않으려는 태도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잘못된 평등주의 의식'이 일조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다는 의식을 내세운 나머지 특출한 사람들이 지위나 재화를 누리고 사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신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또 생명권과 기본권에 있어서 차이가 없다는 의미이지, 지적 능력과 예술적 재능 등 각 사람이 지닌 능력과 질이 다 동등하다는 뜻이 아니다. 사람들은 능력, 성품, 정서, 지혜 등 다양한 측면에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고, 그로 말미암는 결과의 생산성에서 차등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시기하는 자는 정작 자신이 뭔가 부족하거나 궁핍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웃이 번성하고 풍요롭게 지내는 것 때문에 심사가 불편해진다. 자신의 '없음'이 아니라 상대의 '있음'이 그를 더 힘들게 하는 요소인 셈이다. 내가 박수 받지 못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 상대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는 것을 싫어하는 이런 감정에는, 상대가 받는 박수만큼 내게로 올 수 있는 박수가 줄어들거나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정서가 깔려있다. 특정 사회와 분야에서 존재하는 명예, 칭찬, 존경에는 그 총량이 이미 정해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 때문에 시기하는 자는 어떻게든 이웃이 누리는 것을 빼앗아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그들은 마치 '선(善) 총량불변의 법칙'을 굳게 믿고 암기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것은 그들을 그만큼 다급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만들기 일쑤다. 이런 근시안적인 견해, 즉 선은 결코 나누어 가질 수 없다는 생각에서부터 시기가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어거스틴은 이와 대조되는 사실을 주장한다. 물질적인 것은 나누면 감소하지만 정신적인 것은 나누면 증가한다. 특별히 정신적인 선은 더 그러하다. 시기는 극단에 달하게 되면 피학적(마조키스틱한)형태로까지 나아갈 수 있다.

 

시기는 교만과 헛된 영광(vainglory)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교만한 자는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좋은 차를 타고 삶을 즐기며 호사하는 것을 볼 때, 허영(vainglory)에 차 있는 사람은 평소 다른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박수를 받는 것을 볼 때 속이 더 쓰리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시기는 곧장 미움으로 발전한다.'고 말한 바 있다. 분노도 대상을 미워하는 마음을 낳지만 그것은 시간을 두고 발전한다. 그러나 시기는 즉각 미움으로 발전한다. 시기에 사로잡히면 금방 불편해지고, 얼굴이 일그러지고, 마음이 쓰리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진전된다. 이 점에서 시기는 분노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따라서 시기는 공동체의 하나됨과 화평을 깨뜨리는 주적(主敵)이다.

 

시기가 많은 사람이 보이는 또 다른 특징은 기쁨이 없다는 것인데, 실제로 늘 만족하지 못하니 감사가 없고 쉽게 슬퍼한다. 시기는 늘 "왜 나는 저 사람보다 주목을 받지 못하는가?" 등의 불만에 빠져서 기쁨이 사라진다. 그래서 우울해지기 십상이다. 이 우울함은 때로는 낙심으로, 그리고 의욕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 시기가 낳는 낙담과 실의, 그리고 이것으로 말미암는 나태는 불타는 질투와 복수심보다 더 파괴적일 수 있다. 심리학자 켑스(Donald Capps)는 시기로 말미암는 또 하나의 부산물은 자포자기, 의욕상실 그리고 나태한 생활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면 이렇게 생활을 무너뜨리는 무서운 악인 시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일까? 시기하는 사람은 늘 다른 사람을 쳐다본다. 그래서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된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에게만 있는 덕목과 재능을 갖고 있다. 눈을 자신에게로 돌려야 한다. 그리고 자기 안에 파묻혀 있는 보석과 같은 신이 주신 복과 재능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찾아내고 갈고 닦아야 한다. 물질과 지식과 명예가 모두 같을 수가 없다. 그러나 비록 그것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다른 것에서 오는 잔잔한 보람과 행복과 만족을 누리고 사는 자들이 있다. 누구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은 그저 크게 보일 뿐이지 실상은 행복을 주는 보물이 아닐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1970년대 흑인 민권운동가였던 말콤 엑스는, 흑인의 진정한 해방과 인권신장을 원한다면 흑인 스스로가 '흰 것은 원수이고 추악하다'라는 의식에서 벗어나 '검은 것이 아름답다'라고 말할 수 있도록 시각과 의식이 전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백인이 누리는 것을 보고 불공평하다고 불평하거나, 백인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것에만 머무르는 한, 결코 흑인은 진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자기들이 가진 것의 고유한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에 자부심을 갖고 발전시키는 것이 시기를 극복하고 관계를 발전 시키는 첫 단계이다. 이보다도 더 높은 수준은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보면서도 감사하는 태도이다.

 

시기는 눈에서 시작되지만 입으로 행동으로 연결되어 전인격을 넘어뜨린다. 중세에는 시기를 종종 'Backbiting' 즉 뒤에서 물어뜯는 것으로 표현했다. 그레고리 데종은 '시기는 수군거리는 말에 있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의 명성과 업적을 심심풀이로 들고 나와서 화제를 잡고 한담(gossip)하는 것이다. 가볍게 여흥삼아 시작하는 한담이지만 미끄러지듯이 험담으로 빠지기 일쑤다. 그것이 한담이 지향하는 것이다. 다른 이에 대해 가볍게 시작하는 순간부터 험담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어쩌면 험담을 하기 위하여 한담을 시작한다는 말이 더 맞는 표현인지도 모른다. 남의 이야기는 칭찬거리가 아니면 삼가야 한다. "누가 그러던데...,"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의 언어를 써서 위장한 것일 뿐, 결국 자기 말을 옮기고 퍼뜨리려는 속셈이다. 한담 대신 진실된 언어, 긍정의 언어, 격려의 언어 그리고 화평의 언어를 친구 삼아야 한다.

 

사람은 눈으로 보며 살아가는 한, 시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박수 받고 누리는 이웃이 눈 앞에 있는 한, 언제나 우리는 시기와 씨름하며 살게 된다. 이웃이 넘어질 때 기뻐하고 그것을 은근히 즐기기를 좋아하는 것이 사람이다. 시기를 떨쳐버리겠다고 해서 눈을 감고 살 수는 없다. 한 눈으로는 대상을 보더라도 한 눈으로는 신을 보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웃의 가진 것만 보는데서 돌이켜야 한다. 자기에게 있는 것, 신이 자기에게 주신 것을 감사하며 살아가야 한다.그러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사랑이다.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더 깊이 경험하면 그리고 그것을 나눌 수 있게 되면 시기는 그만큼 감소해갈 수 있다. 수군거림이 사라지고 칭찬과 격려와 사랑의 언어가 많아지는 관계와 공동체를 꿈꾸어야 한다. 그렇게 노력할 때 비로소 그 단체나 사회는 밝아져간다. 시기가 힘을 잃어가게 되면 싸움과 분열이 잦아들게 된다. 모든 이들이 바라는 사람사는 세상이 될 것이다.  

출처 : 우물지기 너른마당
글쓴이 : 우물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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