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조식선생 발자취

해찬솔 2017. 5. 20. 07:00


 


남명 조식 선생이 31세부터 48세까지 생활하며 학문 증진한 김해 산해정으로 가는 길은 김해분기점에서 대동JC를 중앙고속도로 지선 아래를 지나야 나온다.

 

봄과 여름의 경계가 흐리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장면전환처럼 남명 조식 선생은 나서 자라난 합천과 산청이 아닌 처가가 있는 김해에서 학문의 깊이를 더했다. 일생의 전환점을 맞은 셈이다. 나 역시 계절의 전환을 앞둔 518, 김해 산해정으로 떠났다.

 

김해 시내를 벗어나고도 10여 분 더 들어가면 대동면 대중초등학교가 나온다. 대중초등학교를 지나자 나오는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꺾어들어갔다. 왼편으로 들어갈 때는 몰랐는데 이정표 뒤편에 또 다른 작은 이정표는 ‘SATI ARAMA’라 적혀 있었다. 김해분기점에서 대동JC를 중앙고속도로 지선 아래를 지났다. 2차선 길이 끝나고 차 하나 겨우 다닐 마을 골목길이 나온다.

 


김해 산해정이 있는 마을에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힘을 키우는 집중수행을 뜻하는 인도 불교 수행공동체 싸디아라마(SATI ARAMA)’를 비롯한 여러 불교 수행공간이 있다.

 

하얀 집에 붉은 기와가 이채로운 집들이 여럿 나온다. ‘싸디아라마(SATI ARAMA)’라는 안내판도 나온다. 인도의 불교 수행공동체가 여기에 있어 낯선 풍경이다. 싸디아라마(SATI ARAMA)는 사티는 부처가 생존할 당시 사용했던 고대 인도 언어인 팔리어로 알아차림이라는 뜻이고 아라마는 수행도량이라는 뜻이다. 곧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힘을 키우는 집중수행을 뜻한다고 한다.

 


남명 조식 선생은 김해 신어산 동쪽 가장 깊숙한 곳 탄동(炭洞)에 터를 잡았다. 신어산은 수로왕의 부인 허황옥이 인도 아유타국에서 가져왔다는 돌과 무덤이 있는 곳이다.

 

불교 수행공동체들이 모여 있는 마을 속이지만 산해정은 찾기 어렵지 않다. 길 안내가 잘 되어 있기도 하지만 마을 골목 끝에 자리 잡고 있다. 김해 신어산 동쪽 가장 깊숙한 곳 탄동(炭洞)에 터를 잡았다. 신어산은 수로왕의 부인 허황옥이 인도 아유타국에서 가져왔다는 돌과 무덤이 있는 곳이다. 산해정 입구에는 배롱나무가 여럿 심겨 있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인 산해정을 소개하는 안내판 옆에는 관람을 원하면 아래 연락처로 전화를 주면 개방하겠다는 안내문이 내걸려 있지만 문은 열려있었다.

 


산해정 입구

 

정문인 진덕문(進德門) 왼쪽 옆에는 남명 선생의 시산해정에 대를 심으며가 돌에 새겨져 있다. ‘대는 외로울까 외롭지 않을까?/ 소나무가 이웃이 되어 있는데/ 바람불고 서리치는 때 아니더라도/ 싱싱한 모습에서 참다움 볼 수 있네/’

 


산해정 정문인 진덕문.

 

선생의 푸른 절개를 떠올리게 한다. 정문인 진덕문을 지나 마당에 들어서자 오른편부터 환성재(煥醒齋), 신산서원(新山書院), 유위재(有爲齋)가 보인다.

 

선생은 스물두 살 때 한 살 위인 충순위(忠順衛) 조수(曺琇)의 따님에게 장가를 들었다. 대대로 김해에 살아온 남평 조씨는 재산이 넉넉했다. 의령 자굴산에서 공부하던 선생은 1530(중종 25) 어머니를 모시고 공부에 전념하기 위해 처가인 김해로 내려왔다. 집 근처에 공부할 집을 따로 지어 산해정(山海亭)이라고 했다.

 


산해정 전경

 

겉보리 서 말이면 처가살이 안 한다는 말과 달리 당시까지는 처가살이가 당연했다. 장가간다는 말이 처가로 들어가 산다는 뜻이다. 아들딸 구분 없이 재산을 분배하고 제사도 17세기까지 함께 지냈다. 1500여 년을 이어져 온 처가살이 전통문화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성리학적 질서가 강조되면서 장자 중심으로 바뀌었다. 선생은 경제적인 자유로움으로 더욱 학문에 정진해 중견 선비로 성장했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바다를 바라본다라는 뜻을 가진 산해처럼 선생은 공부는 등산과 같아 경지가 높을수록 멀리 넓고 정확하게 볼 수 있다는 다짐을 산해정(山海亭) 현액에 담은 남명 조식.

 

석류가 심어진 화단 오른편 연분홍빛 작약을 비롯해 송엽국이 진분홍빛으로 활짝 피었고 사이사이 노란 괭이밥꽃이 예쁘게 보인다. 신산서원이라는 현액 뒤편에 산해정(山海亭) 현액이 걸려 있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바다를 바라본다라는 뜻을 가진 산해처럼 선생은 공부는 등산과 같아 경지가 높을수록 멀리 넓고 정확하게 볼 수 있다는 다짐을 현액에 담았으리라.

 


원래 신산서원은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6년 뒤 지역 사림에서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살았던 산해정 동편에 건립했었다. 훼손된 서원을 1999년 서원을 복원, 현재에 이른다.

 

원래 신산서원은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6년 뒤 지역 사림에서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살았던 산해정 동편에 건립했었다.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 때 산해정과 같이 불타 없어져 1608년 중건했다 흥선대원군 때 서원 철폐령으로 없어졌다. 1890년 산해정만 중건해 오다가 1999년 서원을 복원, 현재에 이른다.

 


남명 조식 선생과 송계(松溪) 신계성(1499~1562)의 위패를 모신 숭도사(崇道祠)

 

산해정 뒤편 감나무 옆으로 돌아 모란이 담장 사이로 심어진 지숙문(祗肅門)을 지나면 선생과 송계(松溪) 신계성(1499~1562)의 위패를 모신 숭도사(崇道祠)가 나온다.

 


산해정에서 바라본 신산서원 전경

 

잠시 예를 갖춘 뒤 서원 관리인에게 물어 선생의 부인 남평 조씨 묘소를 찾으러 걸음을 옮겼다. 묘소는 서원 앞 동산 기와집 뒤편에 있었다. 조씨 부인은 아들과 딸 하나씩을 두었다. 딸은 상산 김행에게 시집가 두 딸을 낳았다. 첫째 딸이 동강 김우옹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홍의장군 곽재우와 결혼했다. 남명에게 곽재우는 외손녀 사위이다.

 


남명 조식 선생 부인 남평 조씨 묘소

 

선생 36세에 첫째 아들 차산(次山)이 태어났다. 아들은 매우 똑똑하고 생각이 깊어 남명이 크게 기대하고 사랑했다고 한다. 어느날 마을에 종2품 이상 관헌이 타는 가마(軺軒)가 지나자 같이 공부하던 아이들이 몰려가 구경하면서 부러워하기 바빴는데 차산은 그대로 앉아 사내대장부 뜻이 어찌 거기 있을까라고 하며 책을 읽었다고 한다.

 


산해정 오른편에 있는 돗대산은 예전에 차산(次山), 조차산(曺次山)으로 불렸다. 선생 44살 되던 61 1, 9살이던 아들 차산(次山),이 죽자 돗대산에 묻었는데 이후 조차산(曺次山)이라 불렸다고 한다.

 

선생도 아홉 살에 죽을병에 걸렸다 살아난 적이 있지만, 아들 차산은 살아나지 못했다.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에서 옮긴 <남명집>에 있는 칠언절구 시 아들을 잃고서(喪子)’를 보면 집도 없고 아들도 없는 게 중과 비슷하고/ 뿌리도 꼭지도 없는 이내 몸 구름 같도다./ 한평생 보내면서 어쩔 수 없었는데,/ 여생을 돌아보니 머리 흰 눈처럼 어지럽도다/’며 애통해 한다.

 


남평 조씨 묘소에서 김해를 내려다보며 이곳에서 학문의 깊이를 더한 남명 조식 선생에 대한 그리운 조각을 주웠다.

 

묘소 오른편에 있는 돗대산은 예전에 차산(次山), 조차산(曺次山)으로 불렸다. 선생 44살 되던 61 1, 9살이던 아들 차산(次山),이 죽자 돗대산에 묻었는데 이후 조차산(曺次山)이라 불렸다고 한다.

 

함께 살 비비며 서로 마음을 물들이는 가족에 관한 정을 일깨웠다. 늘 곁에 있어 무심히 지나쳐온 가족. 숨 쉬듯 서로 기대고 받쳐주며 산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잠시 잊고 있었다. 언덕에서 김해를 내려다보며 이곳에서 학문의 깊이를 더한 남명 조식 선생에 대한 그리운 조각을 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