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이야기

해찬솔 2017. 9. 24. 06:30


 

여름의 끝자락, 가을의 시작. 아주 특별한 순간, 우리 곁에 잠깐 머물다 갈 가을 속에서 평화를 얻고 싶었다. 야트막한 산에라도 가고 싶었다. 높지 않으면서도 번잡하지 않은 곳을 찾아 지리산의 한줄기인 이명산은 해발 570m로 북천면과 양보면 경계에 우뚝 솟은 하동군 이명산으로 향했다. 산보다는 산속 마애불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먼저 코스모스메밀축제를 앞두고 온통 하얗고 노랗고 붉게 물든 북천면 축제장 들녘을 벗어나 이병주문학관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약수터 등산로이정표가 나온다. 0.5km. 그까짓것. 시멘트 포장 농로가 끝나자 흙길이다. 들국화 한 종류인 참취꽃이 길가에서 하얀 별 같이 꽃들을 한들거리며 먼저 알은체한다. 여기저기 밤톨이 떨어져 있다.

 

0.1km라면 겨우 100m. 이정표에 웃었다. 근데 산악철도처럼 촘촘하게 흙계단이다. 몇 계단 오르지 않았는데 숨이 가쁘다. 등 뒤로 땀이 폭포처럼 쏟아진다. 운동 부족에 저질 체력을 탓하는데 청미래덩굴이 손을 공손히 모은 듯 나를 올려다보며 응원을 한다. 올라가는 길이 있으니 능선이 나온다



능선 끝나고 다시 오르막. 가을 햇살이 곱게 들어오고 그 사이로 진녹색 물감이 뚝뚝 떨어질 듯 푸르다.

 

올라오자 진교면으로 가는 도로와 함께 정자가 나온다. 마애불 1km라는 이정표를 따라 잠시 숨을 고르고 도로를 따라 내려갔다. 약수터에서 목을 축였다. 물은 달지도 짜지도 그저 물맛이다. 그래서 좋다. 갈증을 풀자 다시 기운이 솟구친다.

 

도로 왼편으로 이명산 등산로안내판이 나온다. 정상에 오르면 이무기가 살았던 지름 20m 정도의 못이 있던 자리가 있고 마을 주민들이 이무기를 쫓기 위해 돌을 불에 구워 던졌다는 돌무더기를 볼 수 있다고 안내한다. 1.3km50분이면 정상까지 갈 수 있단다.

 

마애불까지 0.7km. 여기저기 참취꽃들이 반긴다. 약수터까지보다는 덜 하지만 그래도 숨은 차다. 역시나 여기도 산악철도처럼 오르막이 나온다. 비밀의 숲속으로 들어가는 길 같다. 등산로를 가로질러 거미가 한가롭게 거미줄을 쳐놓았다. 괜스레 녀석을 방해할까 싶어 허리를 한껏 낮춰 조심조심 길을 지났다. 양산처럼 햇볕을 막아선 소나무 아래 긴 의자에 앉아 숨을 골랐다.

 

마애불 0.4km. 갈수록 찾아가는 길은 가까워지지만, 오르막은 아직 그대로다. 흙계단이 끝난 자리는 돌과 바위 사이다. 바위들이 올라오는 나를 비추는 거울처럼 보인다. 긴 의자를 대신한 넓적한 바위에 걸터앉았다. 어찌 보면 염주 같고 방울 같은 바위가 땅에 박혀 있다.

 

오르막이 끝나자 능선이다. 돌이 함께한다. 겸손하라는 듯 지나는 길을 나뭇가지는 기다랗게 가로질렀다. 고개를 숙였다. 드문드문 산 아래 마을이 보인다. 혼자 들어가 수도하면 좋을듯한 바위에 앉았다. 땀을 훔쳤다.

 

나를 건드리지 말라는 꽃말을 가진 물봉선 무리가 마애불 앞에서 힐껏 나를 본다. 이곳에서 정상으로 가는 길은 0.7km. 정상이 목표가 아닌 까닭에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커다란 바위 속에 부처님을 새긴 천 년 전 통일신라시대 사람처럼 간절한 마음을 담아 먼저 합장하고 예를 올렸다.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서산 마애삼존불에 이명산 마애석조여래는 꼭 다문 입과 가늘게 뜬 눈으로 근엄하게 보인다. 부처님은 오른손을 들어 올리고 왼손을 팔을 굽혀 무릎 위에 올려놓은 듯하다고 안내판에 적혀 있지만 내 눈에는 다섯 손가락을 다 펴서 중생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는 시무외인(施無畏印)과 여원인(與願印)으로 보였다. 다시 한 번 더 절을 올렸다.

 

자연 암벽을 다듬어 작은 방을 만들고 그 자리에 불상을 조각한 것이라는 이명산 마애석조여래좌상은 머리 부분이 몸체 비해 휠씬 도드라지게 새겨 뚜렷한데 비해 목 이하는 벽면에 윤곽선만 묘사했다.

 

마애불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뒤편에는 입을 꽉 다운 용 같은 바위가 보이고 커다란 나무가 마치 딴 세상인 양 펼쳐진다.

 

마애불 앞에서 산 아랫 마을을 보았다. 바람이 은은하게 흩날린다. 마애불과 나 사이로 바람 한 점 얹힌다. 내 안의 묵은 찌꺼기도 저만치 가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