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이야기

해찬솔 2018. 5. 5. 06:00

스리슬쩍 봄이 사라져버리기 전에 온몸으로 느껴보라

권하는 하동 취간림

 

봄을 느끼기 완벽한 날, 걸리버가 소인국을 여행하듯 길을 나섰다. 악양면 입구에 펼쳐진 평사리 들판을 지나면 소설 <토지> 속 주인공들이 말을 건네는 최참판댁이 나온다. 오늘은 최참판댁을 비롯한 <토지>가 아닌 은밀한 나만의 정원으로 곧잘 내달렸다.

 

<토지> 드라마 세트장을 지나면 면소재지가 나온다. 농협 하나로 마트에서 악양천 쪽으로 내려가면 나를 반기는 초록 물결이 있다. 취간림이다.

 

취간림은 악양천 물막이로 조성한 숲이다. 고려 무신 정권 때 벼슬을 버리고 악양으로 내려와 산 한유한 선생을 기리는 모한정이 이름을 바꾸자 덩달아 숲 이름도 바뀌었다.

 

햇살에 젖은 숲은 푸르고 싱그럽게 빛난다. 아직 세상에 덜 알려진 까닭에 사람들은 악양에 오면 최참판댁만 찾는다. 덕분에 세상 사람들의 발길이 덜 머문 까닭에 들리는 건 나뭇잎에 한들거리는 소리와 새들의 지저귐뿐. 작지만 큰 숲은 온전히 나만의 세상이다.

 

초록 물이 뚝뚝 떨어지는 풍광이 시원하다. 작은 길을 따라 걸어도 마음은 부자다.

공중전화 부스 크기만 한 작은 도서관이 반긴다. 동화를 비롯해 소설과 시집으로 꾸며진 도서관이 3개나 있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작은 도서관이다. 도서관에 들어가 시 한 권을 꺼내 읽는다.

 

숲 어디에서 읽어도 푸르게 읽을 수 있다. 듬성듬성 의자처럼 노인 돌에 걸터앉아도 좋고 긴 의자에 앉아도 그만이다.

숲 한가운데에 있는 팔경루에 올라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재미나게 읽었다.

책 읽기가 지루할 무렵 숲 근처를 지나는 하천으로 향했다. 시원한 바람을 쐬자 온몸이 개운하다.

 

숲으로 다시 들어가자 하얗게 부서지는 햇살 아래 우뚝 솟은 탑이 보인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지리산 일대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순국한 3,000여 명의 의병과 항일 독립투사의 넋을 기리고 활약상을 기념하는 악양 항일 투사 기념탑이다.

 

왼쪽에는 일본군 종군위안부 피해자로 자신의 피해 사실을 당당하게 공개 증언한 고 정서운 할머니의 뜻을 기리는 평화의 탑이 세워져 있다. ‘여성 폭력 반대 친일 세력 청산이라는 팻말 앞에 꽉 다문 채 행진하는 할머니들의 당당한 모습이 새겨져 있다.

 

숲을 한 바퀴 돌았다. 고개를 들자 연둣빛 잎들이 내려다본다. 이 계절이 지나면 그리워도 다시 볼 수 없다고 일러준다.

슬며시 다가온 봄이 스리슬쩍 사라져버리기 전에 온몸으로 느껴보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