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조식선생 발자취

해찬솔 2018. 5. 9. 07:00

남명 조식 선생 자취를 찾아서 떠난 길- 합천 홍류동 계곡 소리길


약속. 살면서 무수히 많이 해왔다. “밥이나 한 번 같이 먹자라고 너무도 쉽게 내밷기도 했다. 약속의 의미를 되뇌어보게 하는 이들이 있다. 폭풍우 속으로 1년 전 약속을 지키기 위해 길을 나선 사람이 있었다.

 


대장경 테마파크 앞에서 본 가야산 홍류동 계곡 소리길

 

1557(57) 명종 12, 보은 속리산으로 대곡 성운을 방문한 남명 조식은 거기서 보은 현감으로 있던 동주 성제원을 만나 명년 팔월 한가위 때 합천 해인사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내년 8월 보름날 가야산 해인사에서 만나도록 하지.” 남명 조식 선생이 헤어지며 한 말에 그때 내가 벼슬을 버리고 해인사로 가겠네.”로 동주 성제원 선생은 화답했다.(<절망의 시대 선비는 무엇을 하는가> 허권수 지음/한길사)’

 

약속의 의미를 되뇌이며 남명 선생이 걸었던 합천 홍류동 계곡을 4월의 마지막 일요일 걸었다.

 


가야산 홍류동 계곡 소리길로 가는 입구에 있는 표지석과 솟대 문

 

가야산이 두 눈 가득 들어오는 찻길은 대장경테마파크 앞 주차장에서 멈췄다. 이곳에서 100m 거리에 홍류동 계곡 입구가 나온다. 홍류동 계곡은 2011923일 대장경 천년 세계문화 축전 개막과 함께 '소리길'이란 이름으로 새로운 탄생했다. 주차장에서 각사교를 지나자 계곡의 맑은 물소리가 먼저 반긴다. ‘우주만물과 소통하고 자연과 교감하는 생명의 소리, 우리가 추구하는 완성된 세계를 향하여 깨달음의 길이며, 귀를 기울이면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 세월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하여 소리길이라고 한다는 큼지막한 표지석 안내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표지석 옆으로 솟대를 닮은 입구가 어서 오라고 부른다.

 


가야산 홍류동 계곡 소리길 입구에 세워진 비상, 그리고 염원이라는 이병준의 조각품

 

솟대 문을 지나자 비상, 그리고 염원이라는 이병준의 조각품이 푸른 하늘을 맘껏 헤엄칠 요량으로 한껏 발돋움해 서 있다. 그 앞에는 물이 지나는 작은 배수로에서 졸졸졸 물소리가 응원한다. 소리길 출발점에서 300m, 해인사까지 6.7km. 곳곳에 세워진 이정표가 내 지나온 길을 일러 준다. 가기 힘든 길은 나무테크로 잘 정비되어 걷는 길은 힘들지 않다.

 


가야산 홍류동 계곡 소리길 가야 19명소 중 하나인 갱멱원

 

햇살이 곱게 드는 자리에 이르자 가야 19명소 갱멱원이 나온다. 앞에는 호젓이 더딘 걸음으로 숲언덕을 찾아드니/ 돌무더기 어지러운 구비마다 물결이 부딪히네,/ 꽃은 지고 새는 우는데 인적은 드물고/ 구름까지 깊어 예놀던 곳 알 수 없어라//’라는 시가 가야산을 등지고 서 반긴다.

 


가야산 홍류동 계곡

 

무릉도원을 상상하며 나지막하게 따라 읊조리며 가야산을 바라본다. 푸른 하늘에 싱그럽게 서 있는 산에서 바람 한 점, 살포시 뺨을 어루만지며 지난다. 갱멱원을 지나 얼마 되지 않아 19명소 중 하나인 축화천이 나오자 좀 전처럼 시가 적힌 표지판이 나온다. 안내판에 적힌 시를 따라 읽으며 주위 경치를 구경한다.

 


가야산 홍류동 계곡 소리길

 

출발점에서 900m 가량 가자 시멘트 농로가 사라지자 다져진 흙길이 나온다. 흙길이 주는 부드러움에 발걸음이 가볍다. 두 눈에 들어오는 하늘의 푸른빛이 싱그럽다. 소리마실이라는 쉼터가 나온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에 올라 물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가야산 홍류동 계곡 소리길에서 만난 마치 다정한 연인처럼 서 있는 전봇대 한 쌍.

 

좀 더 올라가자 오토캠핑장에서 늦은 아침을 준비하는 소리가 분주하다. 옆으로 전봇대 한 쌍이 마치 다정한 연인처럼 서 있다. 청량사로 가는 갈림길에 서자 팔만대장경 이운순례길 안내판이 지나는 사람에 장경판전 보존의 비밀을 알려준다.

 

하얀 탱자나무 꽃들이 별처럼 아름다운 길을 지나자 마지막 주막이라며 동동주와 도토리묵으로 목을 축이고 가라는 안내 문구가 걸음을 잠시 세운다. 마지막 주막을 지나자 무인카페 마중이 나온다. 소리길을 찾아 나선 아주머니들이 카페에서 새소리처럼 이야기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눈다.

 


가야산 홍류동 계곡 소리길 곳곳에 있는 쉼터

 

길은 좀 더 좁다랗고 흙 사이로 돌들이 툭툭 튀어나온다. 다듬어지지 않은 길, 국립공원으로 본격적으로 들어서는 셈이다. 닮은 꽃 생강나무와 산수유를 구별하는 법 등의 안내판이 오가는 이들에게 이곳에 사는 나무와 곤충, 동물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를 귀를 기울이며 지나는데 무릉교에 이르렀다. 공사 중이라 계곡을 가로질러 무릉도원으로 건너갈 수 없어 아쉽지만 비로소 무릉도원이 가까워지는 것을 느낀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푸릇푸릇 한 풍경은 나를 개운하게 만든다.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새소리는 즐거운 노래다.

 


가야산 홍류동 계곡 소리길 칠성대

 

칠성대에 이르러 근처에서 잠시 쉬었다. 햇살이 곱게 들어 초록물을 뚝뚝 떨구려는 풍경이 그냥 지나지 못하게 한다. 다리를 건너자 해인아트 프로젝트의 작품들이 하나둘 얼굴을 내밀어 인사를 한다. 박상희의 바위에 갇힌 부처를 보다는 바위에 누운 부처님이 마냥 평안하게 느껴진다. 보는 자체가 쉼이다.

 


가야산 홍류동 계곡 소리길 해인아트 프로젝트 작품 중 하나인 박상희의 바위에 갇힌 부처를 보다

 

평안하게 팔베개로 누운 부처님을 지나자 한 뿌리에서 나와 두 가지로 하늘로 우뚝 솟은 나무가 다정하게 내게 말은 건넨다. 다음에는 꼭 아내와 함께 오리라 다짐하며 작별했다.

 


가야산 홍류동 계곡 소리길에서 만난 한 뿌리에서 나와 두 가지로 하늘로 우뚝 솟은 나무가 다정하게 내게 말은 건넨다.

 

습지가 나온다. 김성복과 성신조각연구회에서 설치한 꽃길이 습지 한가운데에 있다. 징검다리로 건너가면 만날 수 있는 연꽃 조각 위로 우리 모두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일러주는 듯 나무가 일러주는 양 바람에 속삭인다. 습지를 지나 다시 숲속으로 들어갔다. 걸어온 지 3km 가량 지났다. 계곡의 물소리는 더 정겹게 흐르고 덩달아 눈은 더욱 맑아진다.

 


가야산 홍류동 계곡 소리길에서 만난 습지에 만들어진 김성복과 성신조각연구회에서 설치한 꽃길

 

나무를 양산 삼은 의자에 걸터앉아 가져간 캔커피를 마셨다. 고개 들자 하늘에는 초록빛이 알알이 맺혀 내려다본다. 붉게 익어갈 별을 닮은 단풍잎들이 올가을에도 놀러 오라 손짓한다.

 


가야산 해인사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문. 문화재 관람료를 받는 곳이다.

 

통나무들이 탑을 이룬 곳을 지나자 길은 더욱 가팔라지고 물은 더욱 맑다. 해인사 경내로 들어가는 문이 나온다. 문화재 관람료를 내고 다시 다리를 건너 숲으로 향했다. 다리 몇 개를 지나며 나는 정갈해진다.

 


가야산 홍류동 계곡 소리길에서 있는 고운 최치원 선생의 후손과 유림이 1936년에 중건한 농산정

 

고운 최치원 선생의 후손과 유림에 의해 1936년에 중건한 농산정에서 걸음을 세우고 잠시 쉬었다.

 

첩첩 바위 사이를 미친 듯 달려 겹겹 봉우리 울리니/ 지척에서 하는 말소리도 분간키 어려워라/ 늘 시비(是非)하는 소리 귀에 들릴세라/ 짐짓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둘러버렸다네//(제 가야산 독서당 - 최치원)”

 

여기를 찾았던 남명 선생도 고운 선생을 떠올리며 시를 읊조렸다. 선생은 홍류동 계곡을 흐르는 물은 생동감 있게 잘 묘사하였지만, 지식인으로서 어지러운 세상을 구제해보겠다는 의지는 없고 애써 속세를 피해 살려는 최치원의 나약한 태도는 올바른 선비의 자세가 아니(<절망의 시대 선비는 무엇을 하는가> 허권수 지음/한길사)’ 라고 여겼다.

 


가야산 홍류동 계곡 소리길

 

남명 선생이 찾은 동주 성제원과 약속을 위해 찾은 1558(명종 13)은 선생 나이 58세이다. 오늘과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길이 다듬어지지 않은 길을 걸었다. 선생이 길을 나선 그날은 3일 전부터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지고 거센 바람이 불었다. 이른바 태풍이 올라온 것이다. 동생과 제자들이 말렸지만 친구와의 1년 전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세차게 오는 비를 무릅쓰고 길을 떠난 것이다.

 


가야산 홍류동 계곡 소리길에는 초록 물이 뚝뚝 떨어질 듯 연둣잎 나무들이 싱그럽다.

 

비록 음력 8월의 가을 분위기가 아니라 만물이 생동하는 봄이다. 선생의 자취를 떠올리며 한걸음 한걸음 걷는 즐거움은 소리길이 안겨주는 생동감에 더욱 기쁘다. 쌀밥을 닮은 이팝나무 아래에서 잠시 쉬었다. 물은 너무도 맑아서 속까지 온전히 내어 보여준다.

 


가야산 홍류동 계곡 소리길에서 농산정 근처에 있는 이팝나무

 

이팝나무를 지나자 연분홍치마를 펄럭이듯 철쭉이 머리 위에서 아는 척한다. 상처 입은 소나무들이 드문드문 나오더니 아예 한쪽에서는 무리 지은 소나무 모두가 내 허리쯤에서 빗살 무늬로 껍질을 드러낸다. 송진 채취 과정인데 일본 제국주의 강제 점령기에는 군수용 기름으로 채취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가야산 홍류동 계곡 소리길에서 만난 송진 채취를 위해 상처 입은 소나무.

 

상처 입은 소나무 옆 하늘은 언제 그랬냐 싶게 말간 표정의 나뭇잎들이 바람에 맞춰 장단 맞춘다. 명소인 취적봉,음풍뢰,광풍뢰는 나무들에 가려 풍경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시원하게 하늘 뚫린 사이로 가야산의 기암괴석이 빛난다.

 


가야산 홍류동 계곡 소리길에서 만난 길상암

 

제월담을 지나자 길상암이 나온다. 명진교를 지나 계곡 옆으로 가는 길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솟구쳐 하늘 향했다. ‘자연과 함께 마음을 내려놓은 곳이라는 문구와 함께 적힌 하심(下心)’이라 적힌 표지판에 길을 가로지른 나뭇가지에서 붙어 있다. 겸손한 마음으로 좀 전과 달리 잠시 머리를 숙이고 걸었다.

 


가야산 홍류동 계곡 소리길에서 만난 자연과 함께 마음을 내려놓은 곳이라는 문구와 함께 적힌 하심(下心)’이라 적힌 표지판에 길을 가로지른 나뭇가지에서 붙어 있다. 겸손한 마음으로 좀 전과 달리 잠시 머리를 숙이고 걸었다.

 

어젯 밤 풍우에 골짜기가 요란하더니/ 못 가득히 흐르는 물에 낙화가 많아라./ 도인도 오히려 정의 뿌리가 남아있어/ 두 눈에 흐르는 눈물이 푸른 물결에 더해지네라는 꽃이 떨어지는 낙화담에 담긴 초록빛 물이 싱싱하다. 가을이면 붉디붉은 꽃잎으로 채워질 풍경을 떠올리며 지났다.

 


가야산 홍류동 계곡 소리길에 있는 낙화담

 

첩석대를 지나고 물레방아를 이용한 간이발전 시설을 지나 쉼터에서 캔커피 한 잔을 마셨다. 회선대를 지나 다리를 건너자 해인사 경내로 가는 도로가 나온다.

 


가야산 해인사 일주문

 

461년전 남명 선생은 해질녘에야 해인사 일주문 앞에 닿았다.

‘“자경(子敬)!”

자경은 동주의 자(). 부르는 소리를 듣고 동주가 굽어보니 남명이 일주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마주보며 잠시 말없이 웃었다.(<절망의 시대 선비는 무엇을 하는가> 허권수 지음/한길사)’

 


가야산 해인사 경내

 

서로의 신의를 확인한 두 분은 오던 비가 밤이 되자 개고 바람도 잠잠하자 둥실 떠오른 한가위 달빛 아래 밤새도록 학문과 선비의 자세, 국가를 걱정하며 이야기를 나눴다고 전한다.

 


가야산 홍류동 계곡 소리길

 

1년 전 자기가 한 한마디 말을 끝까지 지키며 빗속에 600리 길을 달려온 동주 선생과 남명 선생의 자세에서 다시금 약속신의에 관해 떠올리게 한다. 넉넉하고 아늑한 홍류동 계곡에 깃든 역사 속 인물을 수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거닌 기분이다. 초록이 내려앉은 소리길을 거닌 동안 내 안에 평화가 물들었다.

 


가야산 홍류동 계곡 소리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