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이야기

해찬솔 2019. 4. 26. 08:51


남명 조식 선생이 처가살이하며 학문의 깊이를 더한 김해 산해정

 

겉보리 서 말만 있으면 처가살이 하랴는 말이 있습니다. 처가살이 할 것이 못 된다는 말이지만 처가살이하는 동안 학문의 깊이를 더해 더욱더 크게 성장한 선비가 있습니다. 바로 남명 조식 선생입니다. 선생이 처가살이(?)하며 학문의 깊이를 더한 김해 산해정을 찾았습니다.

 


돗대산과 까치산 사이로 김해 산해정이 있다.

 

어디로 가도 좋은, 눈에 밟히는 풍경이 유혹하는 요즘입니다. 산해정으로 가는 길 역시 서 낙동강 변으로 연둣빛이 하늘하늘 거립니다. 불암동에서 대중면으로 가는 길에 대중초등학교 지나 삼거리에서 돗대산과 까치산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 산해정이 나옵니다.

 


김해 산해정으로 가는 길목, 야트막한 동산에 남명 조식 선생의 부인 남평 조씨 묘소가 있다.

 

들어가는 길목에서 돗대산쪽을 바라보면 야트막한 동산이 나옵니다. 남명 조식 선생 부인 남평 조씨 묘소가 있습니다. 기와 뒤편에 있습니다. 조씨 부인과 사이에 아들과 딸 하나씩을 두었습니다. 딸은 상산 김행에게 시집가 두 딸을 낳았는데 첫째 딸이 동강 김우옹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홍의장군 곽재우와 결혼했습니다. 남명에게 김우옹과 곽재우는 외손녀 사위입니다.

 


김해 산해정에서 바라본 돗대산

 

9살이던 아들 차산(次山)은 병으로 죽자 돗대산에 묻으며 선생은 선비이기 이전에 아비로서 애통함을 시로 남겼습니다. ‘아들을 잃고서(喪子)’를 보면 집도 없고 아들도 없는 게 중과 비슷하고/ 뿌리도 꼭지도 없는 이내 몸 구름 같도다./ 한평생 보내면서 어쩔 수 없었는데,/ 여생을 돌아보니 머리 흰 눈처럼 어지럽도다/(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에 옮긴 <남명집> 중에서)’



김해 산해정 앞

 

차 하나가 다닐 정도로 마을 골목길을 지나야 합니다. 산해정 앞으로 햇살이 곱게 드리웁니다.

 


김해 산해정 정문인 진덕문(進德門)

 

정문인 진덕문(進德門) 앞에는 안내문이 있는데 관람을 원하면 전화주면 개방한다는 내용입니다. 대체로 오전 9시에 열어 오후 6시쯤 닫습니다. 간혹 문이 닫혀 있으면 전화하면 근처에서 달려와 문을 열어주십니다.

 


김해 산해정 진덕문 앞에는 남명 선생의 시 한 수가 새겨져 있다.

 

진덕문 왼쪽에는 남명 선생의 시 한수 산해정에 대를 심으며(竹山海亭)’이 돌에 새겨져 있다. ‘대는 외로울까 외롭지 않을까?/ 소나무가 이웃이 되어 있는데/ 바람 불고 서리치는 때 아니더라도/ 싱싱한 모습에서 참다움 볼 수 있네/’

 


김해 산해정에 들어서면 오른쪽부터 환성재(煥醒齋), 신산서원(新山書院), 유위재(有爲齋)라 편액 걸린 건물들이 차례로 눈에 들어온다.

 

나지막이 읊조리며 들어갔습니다. 마당에 들어서자 오른쪽부터 환성재(煥醒齋), 신산서원(新山書院), 유위재(有爲齋)라 편액 걸린 건물들이 차례로 눈에 들어옵니다.

 


김해 산해정 사당인 숭도사 앞 지숙문(祗肅門)



김해 산해정 지숙문 앞에는 붉은 모란이 피어 반긴다.

 

신산서원이라 적힌 강당을 옆으로 곧장 사당인 숭도사(崇道祠)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사당으로 들어가는 지숙문(祗肅門) 옆으로 붉은 모란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반깁니다.

 


김해 산해정 숭도사는 남명 조식 선생과 송계 신계성의 위패를 모셨다.

 

남명 조식 선생과 송계(松溪) 신계성(1499~1562)의 위패를 모신 사당 앞에서 예를 올리고 물러났습니다.

 


김해 산해정

 

선생은 스물두 살 때 대대로 김해에 살아온 조수(曺琇)의 따님에게 장가를 들었습니다. 의령 자굴산에서 공부하던 선생은 1530(중종 25) 어머니를 모시고 공부에 전념하기 위해 처가인 김해로 내려와 집 근처에 공부할 집을 따로 지어 산해정(山海亭)이라고 했습니다.

 


김해 산해정 편액. ‘높은 산에 올라가서 바다를 바라본다라는 뜻을 가진 산해처럼 남명 선생은 공부는 등산과 같아 경지가 높을수록 멀리 넓고 정확하게 볼 수 있다는 다짐을 산해정(山海亭) 편액에 담아 걸었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바다를 바라본다라는 뜻을 가진 산해처럼 선생은 공부는 등산과 같아 경지가 높을수록 멀리 넓고 정확하게 볼 수 있다는 다짐을 산해정(山海亭) 편액에 담아 걸었습니다. 선생은 산해정에서 학문에 더욱더 증진해 주위에 선생과 교류하려고 많은 선비들이 찾았다고 합니다.

 


김해 산해정

 

성호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중세 이후에는 퇴계가 소백산 밑에서 태어났고, 남명이 두류산 동쪽에서 태어났다. 모두 경상도의 땅인데, 북도에서는 인()을 숭상하였고 남도에서는 의()를 앞세워, 유교의 감화와 기개를 숭상한 것이 넓은 바다와 높은 산과 같게 되었다. 우리의 문화는 여기에서 절정에 달하였다.”며 선생의 기질을 언급했습니다.

 


김해 산해정. 남명 선생은 ()’를 실천한 학자요, 언론인, 교육자였다.

 

남명 선생은 배운 바를 실천하기 위해 몸에 방울을 달고 칼을 품었습니다. 곧잘 칼 찬 선비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를 실천한 학자요, 언론인, 교육자 이었던 선생의 후학들이 동북아국제전쟁 때 곽재우, 김면 등과 같은 의병장으로 떨쳐 일어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김해 신산서원은 남명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6년 뒤 지역 사림들이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살았던 산해정 동편에 건립했다가 전쟁 중에 불타 없어져 1999년 복원, 현재에 이른다.

 

신산서원은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6년 뒤 지역 사림들이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살았던 산해정 동편에 건립했습니다. 동북아국제전쟁(임진왜란) 때 산해정과 같이 불타 없어져 1608년 중건했다가 흥선대원군 때 서원 철폐령으로 없어졌습니다. 1890년 산해정만 중건해 오다가 1999년 서원을 복원, 현재에 이릅니다.

 


김해 산해정에서 바라본 풍경. ‘자기 마음을 바르게 가지고, 의롭게 행동하자라는 남명 조식 선생의 정신을 되뇌는 시간이었다.

 

산해정에서 자기 마음을 바르게 가지고, 의롭게 행동하자라는 남명 선생의 정신을 되뇌는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