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속 진주

해찬솔 2013. 3. 5. 06:30

진주에서 합천 가는 길은 이제 4차선으로 길이 넓혀졌다. 이 넓은 길로 차들이 바람을 가르며 생생 달린다. 옛 합천 가는 길은 왕복 2차선으로 마을과 마을을 이었지만 지금의 4차선은 빠르게 오고가기 위해 마을과 마을을 그저 점으로 이었다. ‘빠름빠름’에서 벗어나 마을을 구경하기에는 느려도 옛길이 좋다. 진주에서 합천 가는 옛 길을 따라 가다보면 초록빛의 대암초록마을 입간판이 세워진 마을이 보인다. 그곳에서 4.5km정도 더 들어가면 진주(晋州)속의 진주(珍珠), 속살을 볼 수 있다.

 

 

 

 

옛 국도에서 좀더 들어가자 시내버스가 정류자에 서자 내리는 사람은 없고 예닐곱의 사람들이 타기 바쁘다. 종점이라 들어오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나가는 사람들이 많은 때다. 진주 이현동 대아고등학교 밑 버스 종점에서 응석사까지 매일 5회 운행된다

 

요즘은 시골 구석구석까지 포장되어 있어 비포장 흙길을 만나기 어렵다. 다만 응석사가는 길이 확장포장 되는 까닭에 응석저수지에 이르면 길이 2차선에 1차선으로 비좁아 진다. 도로확포장공사는 2005년12월26일부터 올해 12월25일까지다. 아기 예수의 성탄을 축하하기 위해 부처님께서 길 나서기 편하게 길을 닦는 모양새다.

 

 

응석사 일주문 앞에 다리가 있다. 근데 들어가는 오른편에는 <해탈교>라 적혀 있고 왼편으로는 <청심교>라 적혀 있다. 해탈하면 당연히 맑은 마음이 생기겠지. 아님 마음을 맑게 딲으면 해탈하려나.

 

 

 

응석사 일주문을 들어서기 전 주차장 왼쪽이나 오른쪽으로는 집현산을 등산할 수 있는 길이 있다. 응석사주차장에서 임도변 입구로 해서 산불초소가 있는 정상까지 돌아서 동봉과 월명암, 임도를 거쳐 다시 주차장까지 내려오는 7.7km 거리에 2시간40분 정도 걸린다. 물론 100%토종 소나무가 숲을 이룬 광제산까지 가는 4시간여 등산코스도 괜찮고.

 

 

‘집현산응석사’라는 현판을 가슴에 명찰처럼 달고 있는 일주문. 몸과 머리가 크기가 적당하지 않으면 다소 우스꽝스럽듯 일주문도 그런 모양새가 드는 까닭은 뭘까. 기와와 단청이 너무 커서 받치고 있는 일주문 기둥이 작아 보이기 때문은 아닌지.

 

 

 

일주문을 지나면 범종루.

 

 

범종루아래는 천왕문이다. 천왕문에는 마냥 사람 좋은 인상의 호호할아버지 포대화상이 반긴다. 다른 험상 굳은 절의 수호신들을 뒤로 한 채 한참을 포대화상을 바라보면 나도 몰래 실며시 웃음을 띈다. 절이라고 다 엄숙하고 경건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겠지.

 

 

 

천왕문을 지나 범종루를 나와 대웅전으로 들어서는 계단을 하나둘 밟고 올라서면 마치 큰 나무 두 그루가 대웅전을 호위하듯 서 있다. 낙우송이 미끈한 자태를 드러낸다. 그래서 대웅전 뜨락에 바로 들어서기 아쉬워 계단을 다시 내려와 보기를 수차 거듭했다.

 

 

 

대웅전 앞에는 낙우송만 있는 게 아니다. 가운데에는 300여 년의 세월을 이 절과 함께한 높이 25m의 은행나무가 있다. 은행나무 밑에는 또한 귀여운 동자승 조각상들이 여럿 있다.

 

 

 

동자승들의 다양한 몸짓 중에서는 여유롭게 팔베개하고 누운 모습이 제일 정겹다. 선친도 저런 포즈를 즐겨했고 나 역시도 그러하고 이제는 내 아이도 닮은 꼴이다. 소파에 저 포즈로 누워 텔레비전을 보는 저녁은 일상 중에서 가장 평화로운 때이기도 하다.

 

동자승 너머의 대웅전은 경남 유형문화재 141호로 554년(신라 진흥왕 15년)에 연기조사가 창건했으며, 662년(문무왕 2년) 의상대사가 이곳에서 불교 경전 연구 기관인 강원을 열었다고 한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절은 대웅전을 비롯 관음전,문수전,극락전,영산전,나한전과 163개의 방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이 임진왜란이라 불렀던 <동북아 국제전쟁> 때 왜군들이 침입, 불상 밑에 숨겨둔 무기를 발견하고 절을 불살랐다고 한다. 1736년(영조 2년)과 1899년(광무 3년) 중건했다. 현재의 대웅전은 1983년 재차 개수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다포계 양식의 건물이라고 한다. 기둥은 가운데가 약간 불룩한 배흘림으로 굵다. 지붕의 처마는 건물의 높이에 비해 짧으며 완만하다.

 

 

 

대웅전 앞의 안내판을 읽으면서도 배흘림을 떠올리며 바라보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다만 역사의 사실을 떠올리며 대웅전으로 들어섰다. 대웅전 안에는 보물 1687호인 목조석가여래 삼불좌상이 뭇 사람들의 많은 바람과 바람을 담은 연등 아래 자리 잡고 계셨다. 삼불좌상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상징하는 삼세불이다. 주존은 석가불이며 왼편에 아미타여래, 오른편에 약사여래다. 1643년 제작되었다고 한다.

 

 

대웅전을 나와 대웅전 벽에 붙은“부처님을 만나며 행복하고 내가 쉬어가면 세상도 십니다. 날마다 좋은 날 되시라”는 말씀에 차 한잔이 그리워 종무소를 찾았다. 툇마루에 하얀 고무신만 있고 사람은 없으니 발길을 돌릴 수밖에. 사람 없다고, 차 한잔 마시지 않았다고 평안을 얻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쉽지만 좀더 넉넉한 때 찾아 차를 한잔 청하고 싶다.

 

경내 뒤에 모감주 나무가 있다는데 9세기 도선국사가 이곳에서 수행할 때 심었다고 한다. 그 나무의 후손은 경남 기념물 96호로 지정되어 열매로 염주를 만들고 있다는데 나무에게 인사를 건네지 못해 아쉽다.

 

대웅전 뒤로는 나한전이며 독성각 등의 전각들이 있다.

 

 

한국불교에만 있는 토착화의 한 사례독성각. 우리나라에 독성각이 만들어진 것은 1693년(숙종19년)이며, 1800년대 들어서 본격적으로 사찰에 세워졌다. 말법시대에 나타나 미륵불이 오기 전까지 중생들에게 복을 주고 재앙을 없애며 소원을 들어준다고 한다. 영험이 큰 성인이나 성격이 매우 엄하고 무서워 공양을 드릴 때는 목욕재계는 물론이고 공양물도 제대로 갖춰야 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살며서 보고 싶었다. 한편으로 어떤 모습일까 하는 설레임을 가졌지만 갑자지 전화기가 울리는 소리에 내가 먼저 놀라 문 열고 들어가지 못했다.

 

 

경내를 거닐다 세속에서 나를 찾은 전화에 바삐 걸음을 돌려 일주문으로 나왔다. 급한 마음에 마음을 추스르려 샘을 찾았다. 무지개샘. 한때 이 근처에서 등목도 하고 물놀이도 했는데 물은 마시기 적합하지 않아 폐쇄한다는 문구가 대신 나를 반겼다.

 

 

무지개샘에서 절 담벼락 사이로 아직 자연 그대로 돌아가지 않은 낙엽길이 폭신폭신한 카펫트 길처럼 나를 불렀다. 졸졸졸 흐르는 작은 하천 사이로 바스락바스락 낙엽을 밟을 때면 지난날 여름에 놀러왔던 추억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길 비켜서 10여 분을 승용차로 더 달려 이렇게 숨은 진주(珍珠)을 보았다. 진주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이 순간만큼 나는 ‘에나로’진주 사람인가 보다.

 

 

이 글은 경상남도 인터넷신문 <경남이야기>와 함께 합니다.

http://news.gsnd.net/news2011/asp/news.asp?code=0300&key=20130304.990011810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