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속 진주

해찬솔 2013. 11. 12. 13:57

 

? 진주에서

동북아 국제전쟁(임진왜란)에서 연전연패하던 조선 육군이 처음으로 크게 싸워 이긴 진주성 대첩과 논개의 투신. 동학농민전쟁에 앞서 일어난 1862년 진주농민항쟁. 일제 강점기에 일어난 인간평등 인권사상 형평운동. 우리 역사 속에 등장하는 주요 사건이 왜 경남 진주에서 일어났을까. 궁금증은 진주에서 나고 자란 진주원주민인 내게 베스트 셀러 ‘Why’만큼 현재진행형이다. 진주 출신도 아니면서 나보다 더 진주를 사랑하고 자랑하며 ? 진주에서 형평운동이 발생했는지 연구하고 책을 쓴 이가 있다. 경상대학교 사회학과 김중섭 교수다.

    

 

 

112<형평운동>의 저자이자 34년간이 연구한 김중섭 교수를 길라잡이 삼아 진주문화연구소는 '진주문화의 자취를 찾아서'라는 주제로 형평운동 유적지 시민과 학생 50여 명이 현장답사를 떠났다. 김 교수의 현장 강의 형식으로 일반인 신자들이 백정들과는 같은 곳에서 예배 볼 수 없다는 사건이 일어난 진주교회에서 형평운동에 관한 김 교수의 강의를 들은 뒤 교회 유물전시관을 시작, 백정들이 소고기를 잡아다 바쳤던 향교 근처와 집단 거주지, 백정은 아니지만 더 백정을 사랑한 형평운동가 강상호 선생 묘소 등을 둘러보았다.

    

 

형평운동은 이른바 사람이되 사람대접 받지 못했던 백정을 해방하고자 했던 인권운동이다. 백정은 고려시대에는 일반적인 농민을 가리켰지만 조선시대에는 가축을 잡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태어나 호적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고 이름마저도 충이나 효니 예니 하는 글자가 들어가는 이름을 지을 수 없었고 돌 석(), 이름 돌(), 가죽 피()를 사용해야했다. 죽을 때에는 상복과 지팡이도 사용 못하고 삼베와 두건만을 사용해야했다. 상여도 금지되고 자신들만의 격리된 곳에 묘지를 따로 만들어야하는 등 태어나 죽을 때까지 각종 차별을 받았다. 나이가 아무리 많은 백정도 어린 아이에게 존댓말을 사용해야했다. 나치독일 때 유대인들처럼 가슴에 별을 단 옷을 입었듯 남자는 상투를 틀지 못하고 여자는 비녀를 꽂지 못했다. 한눈에 봐도 백정임을 드러내야 하는 억압과 차별을 500년 세월 속에서 받아왔다.

이런 억압과 차별 속에 신음하던 천민 백정들이 1923년 직접 저울’(저울대 형(), 평평할 평())처럼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형평사를 조직했다. 1935년에 이름과 성격이 바뀌기까지 13년간의 인권 운동이다. 한때는 전국의 단위조직체가 162, 활동가는 9688명에 이르기도 했다.

 

일반인 신도가 백정들과는 동석 예배를 할 수 없다며 사건을 일으켰던 진주교회에서 시작, 당시 백정들이 소고기와 가죽을 갖다 바쳤던 향교와 집단적으로 거주지, 형평운동기념탑, 형평운동가 강상호 선생 묘소 등 7군데 현장을 다녔다.

 

1905년 호주 장로회 소속 의료 선교사 카를(한국명 거열휴) 목사가 세운 진주 봉래동 진주교회(당시 옥봉리교회) 일반 신도들이 백정들과 함께 예배 보는 것을 반대하여 일반인들과 백정들이 따로 예배를 보았다. 1909년 카를목사 후임으로 온 리알(한국명 나대벽) 목사는 '하나님 앞에서는 귀하고 천안 이가 없다백정들도 일반인들과 함께 예배를 보아야 한다' 고 주장하면서 일반인들과 백정들은 함께 동석 예배를 하도록 했다. 목사의 뜻을 따르던 30여 명의 신도들을 제외한 나머지 200여 신자들이 동석 예배를 거부하고 예배당을 나가버렸다. 결국 7주가 지난 뒤 종전처럼 두 군데에서 일반인과 백정은 각각 예배보는 것으로 돌아가버렸다. 이 사건은 백정들에게 좌절과 희망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일반인들과 함께 예배보지 못했지만 하느님 앞에는 모두가 평등하다는 사상을 확인하고 똑같은 인간으로 대우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하고 14년 후 형평운동으로 발전하는 경험이었다.

    

 

진주성 촉석문(동쪽에 있는 문) 앞에는 진주를 비롯해 전국 각지 1,500여 명의 후원으로 19961210일 세계인권 선언의 날 세워진 기념탑이 서 있다.

 

공평(公平)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愛情)은 인류의 본량(本良)이라.

 

1923424일 이 곳 진주에서 저울()처럼 공평()한 사회를 만들고자 한 선각자들이 모여 형평사(衡平社)를 창립하였다. 형평사는 각지의 성원에 힘입어 전국 조직으로 자라면서 1935년까지 평등 사회를 이루려는 활동을 펼쳤다.

 

멸시와 천대에 시달리던 백정들과 그들의 처지에 공감한 분들이 힘을 모아 펼친 형평운동은 수천 년에 걸친 신분 차별의 고질을 없애려는 우리 나라 인권 운동의 금자탑이다. 누구나 공평하게 인간 존엄을 누리고 서로 사랑하며 사는 사회를 만들자던 형평운동의 높은 이상은 오늘날 아직도 이루지 못한 인류의 꿈으로 남아 있어서 그때의 운동이 더욱 돋보인다.

 

이제, 70여 년 전 어둡고 힘겹던 시절에 거룩한 인간 사랑의 햇불로 타올랐던 형평운동의 정신을 드높혀 기리고 아름답게 꽃피울 수 있기를 바라면서 뜻있는 분들의 열의와 정성을 모아 유서 깊은 진주성 앞에 이 탑을 세운다.‘

    

기념탑을 제작한 조작가 심정수의 해설에 따르면 두 줄기의 나란한 기둥영원한 평등과 자유의 정신을 높이 찬양하며 서 있다. 앞으로 우리 모두는 평등의 문을 넘어 평등과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세계가 될 것이다.

    

 

새벼리 언덕에 아무 표지 없이 오랜 세월 쓸쓸히 누워 있던 형평운동가 강상호 묘지 앞에는 그의 정신과 용기를 기리는 이름 모를 시민에 의해 비석이 세워지기도 했다.

 

   

형평운동은 우리 근대사상 최초의 인권운동이었다. 우리가 지금 곧잘 사용하지만 인권이라는 말조차 낯설던 시절,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사상을 운동으로 실천한 최초의 용트림이다. 오늘날에는 백정은 없다. 직업과 신분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다른 모습의 차별이 존재한다. 남성과 여성은 물론이고 재산이 많고 적음, 피부색과 언어, 장애여부 등에 따라 차별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형평운동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게 오늘 답사에서 배운 가장 큰 교훈이다.

 

진주문화사랑방

진주문화연구소가 진주문화의 현지답사와 더불어 현장 강의라는 방식을 마련해 진행한다. ‘진주문화를 찾아서라는 주제로 지난 61차로 논개 역사기행 다녀왔다. 이번이 두 번째 역사 기행이다.

경남문화예술회관 옆 주원산오리 맞은 편에 위치한 사단법인 진주문화연구소 연락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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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5-743-1923 이다.

 

형평운동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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