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속 진주

해찬솔 2013. 11. 29. 06:30

 

 

112<형평운동>의 저자이자 34년간이 연구한 김중섭 교수를 길라잡이 삼아 진주문화연구소는 '진주문화의 자취를 찾아서'라는 주제로 형평운동 유적지 시민과 학생 50여 명이 현장답사를 떠났다.

 

형평운동은 이른바 사람이되 사람대접 받지 못했던 백정을 해방하고자 했던 인권운동이다. 백정은 고려시대에는 일반적인 농민을 가리켰지만 조선시대에는 가축을 잡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태어나 호적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고 이름마저도 충이나 효니 예니 하는 글자가 들어가는 이름을 지을 수 없었고 돌 석(), 이름 돌(), 가죽 피()를 사용해야했다. 죽을 때에는 상복과 지팡이도 사용 못하고 삼베와 두건만을 사용해야했다. 상여도 금지되고 자신들만의 격리된 곳에 묘지를 따로 만들어야하는 등 태어나 죽을 때까지 각종 차별을 받았다. 나이가 아무리 많은 백정도 어린 아이에게 존댓말을 사용해야했다. 나치독일 때 유대인들처럼 가슴에 별을 단 옷을 입었듯 남자는 상투를 틀지 못하고 여자는 비녀를 꽂지 못했다. 한눈에 봐도 백정임을 드러내야 하는 억압과 차별을 500년 세월 속에서 받아왔다.

 

이런 억압과 차별 속에 신음하던 천민 백정들이 1923년 직접 저울’(저울대 형(), 평평할 평())처럼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형평사를 조직했다. 1935년에 이름과 성격이 바뀌기까지 13년간의 인권 운동이다. 한때는 전국의 단위조직체가 162, 활동가는 9688명에 이르기도 했다.

 

형평운동은 우리 근대사상 최초의 인권운동이었다. 우리가 지금 곧잘 사용하지만 인권이라는 말조차 낯설던 시절,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사상을 운동으로 실천한 최초의 용트림이다. 오늘날에는 백정은 없다. 직업과 신분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다른 모습의 차별이 존재한다. 남성과 여성은 물론이고 재산이 많고 적음, 피부색과 언어, 장애여부 등에 따라 차별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형평운동은 계속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