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이야기

해찬솔 2014. 3. 6. 06:30

 

처가 함양에 가면 꼭 들르는 곳이 천 년 숲, 상림공원이다. 천연기념물 제154호인 함양 상림은 폭 80~200m, 길이 1.6km로 약 21(63000)의 면적을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인공 숲이다. 상림은 함양군 함양읍 서쪽 위천 가에 있다. 신라 말기 진성여왕 때 함양 태수를 지낸 고운 최치운 선생이 위천이 자주 범람하는 것을 막기 위해 조성한 숲으로 알려져 있다. 둑을 쌓아 물길을 돌린 뒤 새로 쌓은 둑에 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했다. 그 이후 대홍수로 둑의 중간이 잘려나가 숲은 상림(上林)과 하림(下林)으로 나뉘었다고 한다. 다시 마을이 점차 커지면서 하림은 없어지고 현재의 상림만 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숲은 천 년 넘는 시간을 지나오면서 각종 풍상을 겪은 셈이다. 상림에는 100~500년 된 느티나무, 신갈나무, 이팝나무, 층층나무 등 1202만여 그루의 활엽수가 빼곡히 들어서 있어 언제나 마음을 평안하게 해준다.

 

천 년 숲,  경남 함양 상림공원

 

이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처가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 상림공원을 찾았다. 상림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벌써 한 무리 사람들이 저만치에서 숲에서 즐겁게 산책하고 돌아오는지 맑은 새소리처럼 노래하듯 이야기하며 주차장으로 왔다. 주차장 앞 작은 잔디밭에는 신 나게 배드민턴을 치는 연인들도 보인다. 머루터널을 지났다. 아직 가지는 앙상하다. 초록으로 몸단장할 즈음이면 상림공원도 녹색 물결을 이루겠지.

볕이 가득한 다볕당을 지났다. 약수터에서 시원한 물 한 사발 들이켰다. 나무 속으로 걸었다. 고려 시대 이은리 석불의 은은한 미소를 지났다. 고운 최치원 선생을 기리는 사운정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나무 사이로 돌들이 서 있다. 나무 식생을 위해 사람들의 출입을 막은 줄 너머로 <함양군 만세기념비>가 보인다. 줄을 넘었다. 기념비 뒤에 새겨진 그 날의 함성으로 읽었다.

 

 

상림공원 내 만세 기념비

 

일천구백십구년 삼월 이십팔일. 함양읍 내 장터에서 대한 독립 만세의 함성은 대관림과 한들을 누비며 맴 돌다 왜경의 총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빼앗긴 주권과 글과 노래의 풍습을 되찾고, 자주독립을 쟁취코자 분연히 일어선 기미독립만세에 뒤따라 이 고장에서도 총검에 맞서 귀중한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만세의 대열에 뛰어들었던 민중이 천명을 넘어섰다는 일은 우리의 자랑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그 날 만세 운동에 앞장 섰던 선인의 높은 뜻을 영원히 기리고 그 함성의 대관림과 한들에서 우렁찬 메아리되어, 번영과 통일로 치닫는 활력소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군민의 정성을 담아 위천변 숲 안에 큰 돌 하나를 세운다.

198512월 함양군수

 

기미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불꽃처럼 일어나자 328, 장날을 맞아 수천 명의 함양사람도 함양읍 옛 시장 싸전거리에서 만세를 불렀다. 함양사람들의 나랑 사랑을 기념하는 비 옆으로 김한익·하승현 의사 사적비가 있다.

 

아쉽게도 <대한의사 김한식 기념비>는 순 한문에 세로로 적혀 집에 돌아와 인터넷 검색으로 그 뜻을 간추려 보면 아래와 같다.

김한익(金漢益) 선생은 함양읍 만세 사건을 보고 다음 장날 혼자서라도 의거하기로 하고 집에서 크고 작은 태극기를 많이 만들서 4·2일 장터로 갔다. 정오쯤 3천여 명의 사람이 모여들자 만들어 온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만세를 선창하니 주민들의 호응은 함양읍 천지를 진동시켰다.

이때 선생은 긴급 출동한 헌병들에게 붙잡혀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다음 출옥하였으나 혹독한 고문과 매질로 정상적인 생활을 못하고 생활하다가 45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하였다.”

 

 

대한의사 하승현 사적비

 

<대한의사 하승현 사적비>라 적힌 비는 순 한글로 적혀 세로 읽기가 불편해도 차근차근 읽었다.

 

“1919. 4. 2일 함양 장날 병곡면 사람 김한익(金漢益)이 주도한 함양읍 만세 사건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긴급 출동한 헌병들에게 김한익이 붙잡혀 가게 되자 하승현이 군중들을 데리고 노도와 같이 뒤를 따라 헌병분견소를 포위하고 석방을 요구하였다 분함을 찾지 못한 하승현이 군중 대열에서 뛰어 나와 석방을 요구하며 달려들자 일본 헌병은 총격을 가하여 현장에서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하승현의 아버지 하재연과 숙부 하재익이 헌병에게 달려들자 총격을 가하여 역시 순국하였다. 병곡면민은 하승현 선생의 순절을 기리는 뜻에서 1953년 면장의 발의와 군수의 동의로 기념비를 상림 위쪽 뇌계천 도로변에 세웠고 군내의 뜻있는 분들이 기념사업 추진위원회를 구성 솔숲에 사적지를 만들었으며 1967년에는 상림에 의거 기념비를 군에서 건립하였고 대통령 표창을 추서 받았다고 적혀 있다.

 

 

비단 함양에만 이렇게 많은 의사와 열사를 비롯한 애국지사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눈을 들어 찾지 않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상림공원 내 숲 한가운데에 세워진 돌덩이로만 보고 그동안 지나쳤다. 차가운 돌덩이에 새겨진 그 날의 함성과 의사들의 열정을 알자 뜨거운 심장처럼 느껴졌다.

 

멀찍이 사람의 출입을 막아서서는 이 기념비 세운 뜻을 이어갈 수 없다. 나무 식생을 위해 사람의 출입을 막아야겠지만 기념비 근처까지는 사람이 와서 읽을 수 있도록 해주었으면 한다.

뜨거운 기념비를 뒤로하고 다시 숲 속을 걸었다. 약수터를 지나 넓은 숲 한가운데로 난 길.역사인물공원이 나타났다. 고운 최치원 선생을 비롯해 함양을 빛낸 위인 흉상이 상림공원 내 공원인 역사인물공원에 있다. 이중 의재 문태서 선생 흉상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새겨진 글을 읽었다.

 

함양 상림공원 내 역사공원에 있는 문태서 선생 흉상

 

선생은 구한말 호남의병대장으로 건국공로훈장 복장을 추서한 애국투사이다. 함양 서상에서 태어나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1906년 창의하여 덕유산을 중심으로 경남 전북 충북 경북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왜군과 투쟁했다. 특히 장수수비대 습격 고창곡전투 남덕유산유인작전 7읍연합수비대교전 이원역폭파 등이 유명하며 수십 차례의 격전에서 왜군 수백 명을 사살하고 400 여점의 무기를 노획하여 왜군들도 덕유산 호랑이라 불렀다. 굽힐 줄 모르는 의기와 희생정신은 애국애족과 조국근대화의 싹을 틔웠고 해외 독립투쟁에도 영향을 주어 조국광복의 밑거름이 되었다. 6년간의 항일투쟁 끝에 체포되어 옥중순국하였고, 국립묘지에 안장되었으며 서상에 의재사가 있다고 적혀 있다.

 

의병장 권석도 장군동상

 

역사공원 옆으로 의병장 권석도 장군 동상이 서 있다. 장군은 1887년 합천군 대병면 쌍암에서 출생하여 함양에서 성장하면서 수학하였다. 을사늑약 후 지리산 일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왜병과 항거하면서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왜병에게 수차례 검거되어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조국광복 5개월을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1986년 그에게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되었고, 장군의 애국충정을 후세의 귀감으로 삼고자 1991년 이곳 상림공원에 동상을 세웠다고 적혀 있는데 대부분의 한자투성이를 인터넷 검색으로 뜻을 헤아려 이 또한 김한익 선생 기념비처럼 아쉬움이 남는다.

 

그날의 함성은 비록 지금은 개울 따라 흐르는 물소리와 새들의 지저귐 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인공 숲인 천 년 숲 상림공원에서 뜨거운 애국지사들의 열정을 느꼈다.

 

 

찾아가는 길

 

서울 : 서울 - 대전통영고속도로 - 함양 나들목

부산 : 부산 - 남해고속도로 - 대전통영고속도로 - 진주 - 함양나들목

대구 : 대구 - 88고속도로 - 함양나들목

광주 : 광주 - 88고속도로 - 함양나들목

함양 나들목을 빠져 나오면 본백 삼거리(우회전)해서 계속가면 읍내 입구가 나오는 네거리가 나오는데 직진하면 상림이다.

 

함양의 맛집

 

상림부근에는 나무 채밭에 찰밥, 조밥, 수수밥, 메밥 등의 오곡밥과 각종 산나물이 나오는 늘봄가든(055-963-7722)이 맛깔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