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속 진주

해찬솔 2014. 3. 19. 06:30

 

 

버스 창 너머로 붉은 듯 파란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이 관광버스에 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산과 들로 나들이가기 좋은 일요일 아침이었다. 316, 나도 나들이를 가기 위해 시내버스를 타고 옛 진주 배영초등학교 자리였던 진주교육청으로 갔다. 교육청 앞 불과 200m의 카페 거리에는 3월의 싱그러움이 묻어있다. 아직 문 열기 전이라 닫힌 창에 가만히 몸을 기대어 눈을 크게 뜨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앙증스러운 소품들과 함께 포도주잔이며 커피잔들이 손님을 맞기 위해 쉬고 있었다. 구경하는 나 자신도 이렇게 싱그러움에 묻어났다. 목적지로 갈 시내버스가 왔다. 시내버스에 올랐다. 자주 다니는 길이다. 정해진 노선을 벗어난 시내버스가 지나갈 때면 몇몇 시민들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이 시내버스는 오늘 내가 참여하는 행사를 지원하기 위해 제공되어 정해진 노선이 아닌 과거로 떠나는 시민들을 태운 차다.

 

 

 

진주 3·1 운동 발상지 진주시 하촌동 드무실 마을 회관 앞에서 참가자들이 만세를 부르고 있다.

 

차는 10여 분을 달려 우리를 한적한 시골로 내려놓았다. 진주시 하촌동 드무실. 마을회관 앞에는 진주 3·1 운동 발상지 기념비라는 표지석이 서 있다. 진주 기미년 만세운동 최초 결의를 다진 곳이다. 진주의 3·1운동은 1919318일 시작해서 5월까지 연인원 3만 명이 참가했다고 한다. 진주 의거를 직접 준비한 사람들은 김재화, 박진환, 심두섭, 권채근, 강달영, 조웅래, 박대업, 정용길 등과 여기 드무실에서 비밀 회합을 하고 의거를 결의했다. 1919318일 동시다발로 만세를 불렀다. 당시 진주군의 인구가 10만이었는데 일제 경찰은 추산 4천 명, 참가자 증언 2만여 명이 참가했단다. 평화 시위에 대한 폭력진압에도 가장 천대받았던 기생들과 거지들도 걸인독립단, 기생독립단 등을 결성 만세시위를 이어갔다.

김재화·권채근 선생은 옥고로 19204월과 1월 각각 돌아가셨다. 이날 행사를 주관한 민족문제연구소 이기동 진주지회장은 행사에 처음 참여한 나를 뜨끔하게 했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진주 만세운동으로 체포돼 돌아가신 김재화 선생을 비롯한 지역 출신 애국지사의 영령 앞에 모든 국민이 뒤늦었음을 고백하고 그분들의 뜻을 받드는 일을 바로 지금 시작해야 한다.”

 

독립선언서를 읽으며 그날을 되새기며 목청껏 만세 삼창도 불렀다. 그리고 김재화 선생의 생가도 둘렀다. 스물여덟! 나는 그 나이에 무엇을 하고 있었지, 마흔을 넘긴 지금은 뭐 하고 있나.

 

 

진주시 하촌동 드무실에서 진주 시내로 넘어가는 옛길을 따라 참가자들이 걷고 있다.

 

선생의 생가를 뒤로하고 진주 시내로 넘어가는 옛길을 따라 본격적으로 만세운동 길을 걸었다. 행사 시작 전부터 입이 뾰로통하게 나온 딸아이가 맨 뒤다. 딸아이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아빠를 따라왔다. 따사로운 휴일, 친구들과 놀고 싶은데 아빠의 손에 이끌려와 기분이 많이 상했을 터. 어제 토요일도 학원 간다고 쉬지도 못했는데 일요일이라도 쉬어야죠라며 우리 집 큰 아이를 비롯해 아이 모두가 아빠의 권유에 응하지 않았다. 아이에게 정작 필요하고 소중한 것이 영어와 수학이 전부가 아닌데···. 토요일도 없이 바쁜 아이들에게 가자고 강하게 권하지 못했다.

 

진주 비봉산자락이라는 데 나는 왜 이런 길을 몰랐을까. 가장 빨리 정상에 올라 그저 내려왔기에 이런 곳이 있는지, 이런 길이 있는지 몰랐다. 매화 가득한 봄 풍경을 사진에 담기에 여념 없는 사진가를 지나 비봉산과 선학산으로 이어지는 갈림길에 이르렀다. 좀 더 걸으면 300 여 년의 당산나무가 있다. <진주 봉래동 느티나무>.

 

 

 

300여 년의 당산나무 <진주 봉래동 느티나무>에서 점심을 먹은 뒤 기념사진을 찍었다.

 

느티나무에서 주최 측이 준비한 김밥과 막걸리를 마셨다. 오가는 등산객들이 넉넉하게 준비한 김밥을 나눠주고 막걸리를 권하는 모습은 여유롭다. 오솔길을 내려 달동네 좁은 골목길을 내려가면 의곡사다. 산에 내려와 골목길을 벗어나 의곡사로 가는 길목에 마을 주민들이 양념 다진 고기에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다. 걸터앉아 못이기는 척 권하는 소주잔을 받아 그들과 하나가 되고 싶었다. 다행히 소주를 좋아하지 않는 탓에 감사하다는 말을 뒤로하고 일행을 쫓았다.

 

 

 

 

진주시 하촌동 드무실에서 출발한 기미년 만세운동 길 따라 걷는 일행은 비봉산을 넘자 진주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조선은 임진왜란이라 불렀던 <동북아 국제전쟁> 때 승병을 양성하고 왜적과 맞서 싸웠던 까닭에 이름도 근정사에서 의로운 골짜기에 있는 사찰이라는 뜻에서 의곡사(義谷寺)로 바뀌었단다. 해방 직후 진주 3·1 운동 지도부들의 모임이 여기에서 있었다. 의곡사를 지나 최초의 울림이 있었던 진주교회에 이르렀다. 주일 예배를 마친 신자들 사이로 종탑 앞에 섰다. 진주교회는 1905년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 소속 의료선교사 커럴 가족이 처음으로 세운 곳이다. 1909년 라이올(한국명 나대벽) 선교사는 한때는 천대받던 백정 신자들을 차별하여 따로 예배드리는 것이 평등인권사상에 어긋난다 하여 함께 예배를 드리도록 했다. 그러나 다수의 신자가 예배에 불참했고 이 때문에 국내 최초의 인권운동인 형평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이런 유서 깊은 곳에서 진주 만세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여기에서 울렸다. 진주교회를 나와 조선 시대 객사 터가 있던 옛 진주MBC 자리로 갔다. 조선 시대 객사였던 곳은 일제강점기 진주재판소였기에 3·1 운동 때 주요한 집결 중 하나였다. 지금은 초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있고 객사터를 알려주는 주춧돌을 받쳐주는 적심석(積心石)과 배수로 등이 남아 있다.

 

 

 

아빠와 딸의 뒷모습에서 세대를 넘는 기억 너머에 그날의 함성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느꼈다.

 

시내로 한걸음 한걸음 더 다가갔다. 사람들은 노란 바탕에 검은 글씨로 큼직 막하게 적힌 가슴띠에 적힌 <진주 기미년 만세운동 길 걷기>라는 글자를 힐긋힐긋 바라보았다. 진주지역 최초의 극장이 있었던 진주극장 자리. 1922년 준공하여 각종 문화예술 공연이 열렸고 각종 사회단체의 집회가 열렸던 곳이다. 19235월 형평사 창립 축하식도 진주극장에서 열려 형평운동의 발상지로도 유명하다. 다만 현재는 쇼핑몰로 운영되어 1장에 2,000원 하는 분홍색 팬티 더미에 가려 기념 표지석이 보이지 않았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처음 출발지였던 진주교육청 자리로 왔다. <진주는 우리나라 소년운동의 발상지이다>라는 기념 표지석 근처에서 오늘 걷기운동을 마무리했다.

1920년대 진주지역에서 발생한 대표적인 사회운동이었던 형평운동과 노동공제회, 어린이운동은 3·1 운동과 밀접해 이어져 있다. 진주지역 사회운동 지도자였던 강상호, 강달영 등은 모두 3·1 운동을 함께 준비하고 실행에 옮긴 경험이 지역사회운동의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옛 진주극장 자리에 있는 형평운동 기념 표지석. 아쉽게도 지금은 2,000원 하는 팬티 더미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팬티더미를 치워야 겨우 표지석이 보인다.(오른쪽)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하신 단재 신채호 선생님의 말씀처럼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걸었던 길. 그럼에도 아쉬움은 남는다. 올해로 두 번째를 맞은 <진주 기미년 만세운동 길 걷기>에서 만난 진주시 하촌동 드무실, 진주교회, 옛 진주극장터 등에 세워진 기념 표지석이 대한민국 정부가 아니라 뜻있는 지역 시민들의 손에 세워져 아쉽다.

일요일 저녁 텔레비전에 본 <개그콘서트> 나온 유행어 한마디가 여운 남는다.

앙돼요~ 역사를 잊으면!!!”

그래요. 역사를 잊으면 안되지요^^
진주 김재화 선생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도 이제야 알았네요. 저도 시간되면 만세운동길을 따라 한번 거닐어 보아야겠습니다.
예, 한번 걸어보세요~ 진주에서 나고 자랐지만 이런 길이 있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알면 알수록 새로운 곳, 진주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