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속 진주

해찬솔 2015. 7. 7. 06:30

 

배워서 남을 준 날, 함께 길을 묻고 길을 걸으며 물었다

 

천 년이 넘는 경남 진주 도심을 송구스럽게도 74일 단숨에 둘러보았다. 진주 생활정치 시민네트워크 <진주같이> 내 소모임 마실에서 칠월 모임에서 나를 길라잡이로 세웠다. ‘고지도 속에서 숨겨진 진주 속의 진주를 찾아 나선 길이었다. 길라잡이로 나선 이날은 배워서 남을 준 날이다. 덕분에 비우고 채웠다. 따로 책을 구매하고 공부했다. 또한, 함께 길을 묻고 길을 걸으면서 배웠다.

 

 

 서울대 규장각 소장 19세기 진주성도(진주박물관에서 펴낸 진주성도 )

 

그냥

큰아들은 오후에 약속 시각 1시간 전에 집을 나서는 게 이상한지 현관문을 나서는 나에게 왜 벌써 가려는지 의아스러운 듯 물었다.

 

시내버스를 기다려 약속장소보다 몇 정거장 앞에서 내렸다. 그냥 걷고 싶었다. 아니 흔적이라도 있을까 둘러보고 싶었다. 진주 시외버스 터미널 근처에 있는 장대어린이공원은 내게 장대동 놀이터로 친숙하다. 놀이터 옆에는 경운기를 비롯해 각종 차가 빙 둘러 에워싸고 있다. 놀이터 한구석에는 노숙인으로 보이는 2명이 뜨거운 햇살에 개의하지 않는 듯 잠을 자고 있었다. 노숙인 2명 위로는 대추나무가 아주 작은 꽃을 피웠다. 잎보다 연한 황록색의 아주 작은 꽃은 색과 모양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관심을 가지고 살피면 오롯이 잘 보인다.

 

 

경남 진주시 장대동 어린이 놀이터는 동북아 국제전쟁(임진왜란) 때 진주성의 동문이 있었던 자리다.

 

그리고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추나무 꽃을 찾듯 눈에 힘을 주고 아무리 찾으려 해도 보이지 않았다. 흔적은 없었다. 가방에서 지도를 꺼내 펼쳐 들었지만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음력) 1593629일 미시(未時)에 비로 인하여 동문 쪽의 성이 무너져서 적이 개미떼처럼 붙어 올라오자 종인이 수하(手下)의 병사들과 더불어 궁시(弓矢)는 놓아두고 창과 칼을 들고서 상대해 육박전을 하여 쳐 죽인 적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이니 적이 물러갔다. 또 서북문에서 적이 고함을 치며 돌진해 오자 창의사의 군사가 궤산(潰散)1872) 하여 모두 촉석루(矗石樓)로 모였다. ~ 적이 본성(本城)을 무찔러 평지(平地)를 만들었는데 성안에 죽은 자가 6만여 인이었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40권중에서)

 

동북아 국제전쟁(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동문(東門)이었던 장대동 놀이터 부근에서 422년 전의 흔적을 여기에서 찾는 게 부질없는 짓인지 모른다. 이어달리기하듯 꽃 하나하나가 꽃피워 100일 동안 피는 배롱나무의 선 분홍빛 꽃의 배웅을 뒤로하고 약속장소로 향했다.

 

 

김준형 경상대 교수의 논문  ‘조선시대 진주성 규모와 모양의 변화’ (진주박물관에서 펴낸 진주성도 』중에서)

 

이른바 방석집이라 불리는 성매매를 조장했던 유흥주점들이 즐비한 골목 사이로 지났다. 청소년통행 제한구역이 길바닥에 선명하게 표시되었다. 기모노 차림의 여자가 문에 그려진 주점도 보이고 다방이며 술집이 가득한 옛 사창가 골목이다. 골목을 빠져나와 중앙시장 앞 계란전에 이르자 각종 공구 파는 가게에서 벌써 예취기를 고르는 이들이 흥정이 한창이다. 공구가게들을 지나자 전당포가 나오고 인근 콜라텍에서는 경쾌한 디스크 풍의 음악이 발걸음 가볍게 한다. 시내 중심 대로변으로 나오자 야외 의류를 파는 가게들이 여름 할인판매에 들어간다는 광고가 요란하다.

 

 

 대추나무가 아주 작은 꽃을 피웠다. 잎보다 연한 황록색의 아주 작은 꽃은 색과 모양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관심을 가지고 살피면 오롯이 잘 보인다.

 

중앙광장 앞에 섰다. 동북아 국제전쟁 때 진주성 신북문이 있던 곳이다. 여기도 흔적이 없다. 근처 휴일을 맞아 셔터가 내려진 은행 바닥에는 나의 조국~”으로 돌려보내 달라는 애절한 사연이 큼지막하게 박힌 일간신문이 말없이 오가는 이들을 올려다보고 있다. 광장 인도 변에는 왜철쭉이 차도와 경계를 이루고 자전거 보관대에 그려진 논개 캐리커처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차가 다니는 광장 한가운데 네 모퉁이에는 성령이 대한민국을 지옥에서 천국으로 인도한다는 팻말과 함께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였다. 지금은 퇴락한 지하상가로 내려갔다가 옛 도심으로 올라왔다. 지하에서 올라오는 계단에서 20여 년 전 친구들과 커피도 마시며 노닥거린 커피숍이 나왔다. 이름도 리멤버’. 그곳을 기억하고 싶었지만 가게는 임대 글자 크게 붙어 발길을 돌리게 했다.

 

 

진주 시내 중앙광장은 동북아 국제전쟁(임진왜란) 때 진주성 신북문이 있던 자리다.

 

올라오자 바라본 풍경도 지하와 다르지 않았다. ‘일회용 N95마스크를 판다는 약국 옆에 있는 가게도 점포 임대가 붙어 있다. 혁신도시가 들어서면서 수년간 생명을 잃었던 진주 시내 일부 건물들과 토지들이 주인을 찾아 새로운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는 신문 기사를 읽었다. 생명을 불어넣는 곳이 옛 진주극장인 모양이다.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이다. 형평운동 창립 축하식이 열린 진주극장 터에 세운 기념 조형물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있다. 형평운동(衡平運動)1923년에 일어난 백정(白丁)들의 신분 해방·인권 운동이었다. 과연 수년간 생명을 잃었던 진주 시내가 새로운 변신을 하고 있는 게 맞는지 의아스러웠다.

 

 

 형평운동 창립 축하식이 열린 진주극장 터에 세운 형평운동 기념 조형물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있다.

 

기말고사를 끝난 첫 주말이라 그런지 도심은 젊은 열기로 가득했다. 신발가게 앞에서 청소년 두 명이 요모조모 살피며 웃는 모양새가 싱그럽다. 차 없는 거리에 이르자 이정표가 나온다. 약속장소 진주교육지원청 0.4km. 어릴 적 축농증과 비염을 치료받았던 병원에도 임대가 큼지막하게 붙었다. 그 앞을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가슴에 아기를 품은 젊은 부부가 지나간다. 의류판매장 앞에는 아빠와 아이가 서 있었다. 아이는 엄마의 쇼핑을 기다리기 힘들었는지 광고판에 앉았다. 아빠는 아이가 광고판에서 뒤로 넘어질까 한 손으로 등을 붙잡고 있다.

 

화단에 해바라기 활짝 핀 진주우체국. 우체국과 진주경찰서 주위에는 플라타너스로 더 알려진 버즘나무들이 가로수로 많이 심겨 있다. 먹고 살기 어렵던 시절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들이 나무의 알룩달록한 나무껍질 문양을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겨울 되면 무성하던 잎도 떨어지고 실에 매단 것 같은 작은 방울 모양의 열매가 열렸다. 북한에서는 이 때문에 방울 나무라고 한다. 교과서에도 실린 플라타너스 시 한 편이 떠올랐다.

 

 

꿈을 아느냐고 묻는 플라타너스 잎들이 싱그럽다.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너는 사모할 줄을 모르나,/플라타너스,/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을 올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이제, 너의 뿌리 깊이/ 나의 영혼을 불어넣고 가도 좋으련만,/~나는 오직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고 싶을 뿐,/그곳은 아름다운 별과 나의 사랑하는 창이 열린 길이다.(김현승의 <플라타너스>중에서)”

 

플라타너스 시 한 편을 스마트폰으로 불러 읽는 동안 마음은 평안해졌다. 어릴 적 초등학교 운동장에도 버즘나무가 심어져 여름에는 이 나무 아래에서 땀을 식히며 놀기도 했다. 겨울이면 방울 열매를 따서 친구들에게 서로 던지며 장난치기도 했다. 전 세계적으로 가로수로 가장 많이 심어진 버즘나무가 우리나라에 처음 심어진 것은 일제강점기부터라고 한다. 가로수 조성사업이 시작되면서인데 손바닥같이 넓은 잎이 무성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곤 했다. 추위와 도시공해에 강하고 생장력이 왕성한 나무였기에 가로수로 딱 맞았는지 모른다. 한때는 은행나무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상당한 비중으로 심어진 가로수였다. 요즘은 가로수로 벚나무, 메타세콰이아, 이팝나무, 배롱나무 등을 더 많이 심는다.

 

 

바퀴 달린 플라스틱 장난감 말이 간판 높이에 매달려 푸른 하늘을 내달리고 있었다.

 

에나 진주길이라는 이정표를 지나자 진주교육지원청. 대사지 안내판을 살피고 건너편 모이는 장소인 커피숍으로 옮겼다. 은행나무 가로수 아래 초록 긴 의자에 밝은 회색빛 헌팅캡을 쓴 할아버지 한 분이 책을 읽는다. 그 옆에는 바퀴 달린 플라스틱 장난감 말이 간판 높이에 매달려 푸른 하늘을 내달리고 있었다.

 

커피숍에서 시원한 냉커피 한잔하며 생활정치 시민네트워크 <진주같이>의 소모임 마실회원들과 오늘 둘러볼 진주도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동아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한 19세기에 만들어진 진주성도(晋主城圖)와 김준형 경상대학교 교수의 논문 진주시대 진주성의 규모와 모양의 변화에 나온 진주성의 영역변화 그림을 복사해 나눠주었다.

 

 

생활정치 시민네트워크 <진주같이>의 소모임 마실회원들과 이날 둘러볼 고지도에서 진주 속 진주진주도심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이날 내가 고지도에서 진주 속 진주찾기 길라잡이로 나섰다. 먼저 전국 최초의 남녀공학이 시행된 진주초등학교에서 출발해 대사지가 있었던 진주교육지원청, 옛 경상우병영 군대가 주둔한 진주 진영터인 옛 진주의료원, 진주 동헌이 있는 KT진주지사, 진주객사터인 롯데인베스아파트, 진주향청터 갤러리아백화점 진주점, 진주교방터 백화점 야외주차장, 진주 권번터인 우리은행 뒤 차 없는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걷는 코스다.

 

회원들에게 먼저 진주박물관에서 펴낸 진주성도를 중심으로 진주성에 관해 입을 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진주성은 진주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진주성 이야기를 하면 진주시민은 물론이고 관광객들도 동북아 국제전쟁(임진왜란) 때의 진주성 1, 2차 전투를 떠올린다. 현재의 복원된 진주성을 떠올려 그때를 기억한다. 하지만 현재의 진주성과 그날의 진주성은 달랐다. 훨씬 크고 넓었다.

 

 

전쟁 직전에 넓힌 진주성을 설명하면서 오늘 걷는 코스에는 있지 않지만, 진주성 내에 있는 용다리전설도 곁들였다. 북장대 옆에 있는 돌무더기 용다리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이야기가 깃들어있다. 머슴과 주인 아씨라는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해 결국 죽은 아씨를 따라 목숨을 끊은 머슴의 사랑 이야기가 복원되면 프랑스 파리의 퐁네프 다리 못지않은 다리가 되리라는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남녀공학이 시행된 진주초등학교 앞.

 

간략한 설명을 한 뒤 초여름의 햇살을 맞으며 커피쇼을 나와 진주초등학교 앞으로 걸어갔다. 학교 정문 옆에 붙어 있는 경상우도 소학교 터라는 표지판에서 길라잡이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1895년 경상우도 소학교는 진주성 내 관찰부 회의실에서 문을 연 학교는 두 달 만에 휴교에 들어갔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의병봉기 등으로 나라가 을씨년스러웠기 때문이다. 이후 1896년 문을 다시 열었다. 1909년 우리나라 최초의 남녀공학인 여자학급(3년제)을 설치해 100여 년의 시간이 흘러 현재에 이른다.

 

 

진주교육지원청 앞은 진주 대사지(大寺池) 터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다니던 진주공립심상소학교이었던 배영초등학교 건물을 개축해 들어서 있는 진주교육지원청으로 이동했다. 이곳은 진주성 대사지(大寺池)였다. 동북아 국제전쟁(임진왜란)때 호남을 지켜내고 이 나라를 구한 진주대첩에 빛나는 진주성의 방어 기능을 가진 해자(垓字)였다. 처음부터 이 연못은 766년 신라 혜공왕 때 대사라는 큰 절이 있었는데 동쪽 땅이 점차 꺼져 연못이 생겼다고 한다. 세로가 13, 가로 7(390cm×210cm)의 작은 연못이었는데 잉어 5~6마리가 생겨나더니 몸통이 커지면서 연못도 따라 커졌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 아쉽게도 일제강점기 도시정비사업으로 진주성을 헐어 이 연못을 메워 현재의 교육청과 경찰서, 우체국 등이 들어서 천혜의 요새였던 진주성의 위용을 제대로 알 수 없다.

 

진주교육지원청 옆에 세워진 진주는 우리나라 소년운동의 발상지이다라는 표지석에서 우리나라 어린이 운동의 힘쓴 강영호 선생에 관해 들려주었다. 강영호 선생의 아버지 강재순은 진주 대안면장으로 있으면서 민간 서당인 봉양재를 승계해 면 소유의 농지에 1910년 사립 진주봉양학교를 주도적으로 세워 초대 교장으로 취임했다. 이런 부친의 영향인지 큰 형인 강상호는 형평운동을 비롯한 독립과 교육, 인권 운동에 힘썼다. 진주지역 최초의 서양화가로 스물넷에 요절한 강신호는 아래 동생이다.

 

 

 마른 가지를 부러뜨리면 댕강 소리가 난다고 하는 꽃댕강나무가 담장사이로 하얗게 꽃을 피워 반겼다.

 

진주교육지원청을 돌아 조선 시대 군대가 머물렀던 진영 터가 있는 진주중앙병원으로 갔다. 병원 담장에는 마른 가지를 부러뜨리면 댕강 소리가 난다고 하는 꽃댕강나무가 하얗게 꽃을 피워 반겼다.

 

조선 시대 진주성은 경상우병영의 근거지였다. 진주성 밖에 있던 진주진영(鎭營)은 경상우도 남부지역 각 고을의 군 훈련을 감독하는 병영이다. 1894년 병영혁파(갑오개혁) 이후 1896년에는 인재 양성 기관인 낙육재(樂育齋)가 들어섰다. 19104월 일제에 의해 폐교당한 후 도립실업학교(경남과기대 전신)가 세워졌다. 이후 1923년 진주 자혜의원이 설립되었다. 진주자혜의원은 1925년 경상남도립 진주료원으로 개칭되어 1992년까지 이 자리에 있었다. 아쉽게도 진주의료원은 초장동으로 이전한 뒤 2013년 폐업되어 폐쇄되었다.

 

 

진주 중앙병원은 조선 시대 경상우병영 군대가 주둔했던 진주 진영(鎭營) 터다.

 

진주 관아터였던 KT 진주지사 맞은편에 이르렀다. 맞은 편에 교방 터, 진주 관아 터를 중심으로 옆으로 진주 객사 터가 있고 대각선으로 향청터, 맞은편으로 교방 터가 있다.

 

현재 진주의 진산인 비봉산을 복원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움직임 속에는 봉명루(鳳鳴樓)를 산자락에 복원하자는 제안도 있다. ‘봉황의 울음소리 들리는 누각이라는 뜻의 봉명루는 진주 객사의 정문에 세워진 누각이다. 진주 객사 터는 일제강점기 때는 재판소가 들어섰다가 해방 이후 진주 MBC가 들어섰고 2008년에는 주상복합아파트가 22층 높이로 우뚝 서 있다. 문화재는 제자리에 있어야 그 가치를 빛나고 의미가 있다. 비봉산 자락에 복원할 봉명루는 덩그러니 건물로만 남고 생명은 없는 셈이다. 경제개발이라는 허울 아래 훼손되고 흔적조차 없는 현실이 슬프다. 머무르지 않고 진주성만 휙 둘러보고 끝나는 관광도시 진주는 개발 이익에 천년 고도(古都)의 예스러움을 잃었다.

 

 

고지도 속 진주 도심을 찾아 나선 생활정치 시민네트워크 <진주같이> ‘마실 회원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우리은행 진주지점 뒤편은 <진주 권번 터>. 조선 말기 진주교방이 폐지되자 진주 관기들이 생업을 위해 기생조합을 결성, 활동했다. 1914년 권번으로 바뀌었다가 1939년 주식회사 형태의 진주예기권번으로 거듭났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쓴 진주대관에서는 기생 100여 명과 견습생 50~60명으로 학부를 설치해 오전, 오후 두 번에 걸쳐 가무, 음곡, 산수, 국어, 예법 등을 가르쳤다. 견습생들은 각 과목에 있어 약 3개년의 수업 연한을 붙여 고전시조, 가야금 등 무곡 외에 유행가, 서화, 국어, 산수, 예법, 수신 등을 배우고 합격자에 한해 기생 자격을 부여했다고 했다.

 

 

  

 진주 권번 터가 있는 진주 시내 차 없는 거리.

 

 

엄격하게 양성한 진주 기생의 전통은 1919319일 진주 기생들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친 기상에서 엿볼 수 있다. 진주성 2차 전투 때 7만 민관군이 순국한 뒤 왜장을 껴안고 죽은 논개도 진주 관기다. 진주 기생들은 순국한 논개 제사를 지내왔다. 전통은 오늘날에도 이어져 이달에 진주성에서 논개제가 열린다.

 

그러나 아쉽게도 논개는 사후에 죽음을 둘러싸고 펼쳐진 이야기가 더 풍부하다. 덧붙여진 이야기는 시대에 따라 또는 논개를 기억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관점에 따라 새롭게 채색되고 엮어졌다는 점에서 만들어진역사다.” (조선의 여성, 역사가 다시 말하다중에서)

 

1622년경 어우당 유몽인이 쓴 어우야담이후 논개에 관한 이야기는 18세기 이후 빠르게 퍼져나가면서 그 행적도 새롭게 창안되기 시작했다. 19세기에 들어오면서 논개의 이야기는 여러 방면으로 증폭되었다. 20세기 초반에는 논개가 양반가의 딸이었으나 부모를 일찍 여의고 집이 가난해 기녀가 되었다는 기록도 등장한다. 이 주장들은 1960년대 논개를 소재로 한 소설에 그대로 반영되었고, 심지어 논개와 함께 남강에 빠져 죽은 일본 장수의 이름까지도 구체적으로 거론되기에 이르렀다. 급기야 일본에서는 부부 금실을 좋게 하는 '섹스의 신'으로 날조 둔갑하기도 했다.

 

 

 진주 도심 속을 걸으며 어제를 돌아보고, 오늘을 마주하고 내일을 그려본 생활정치 시민네트워크 <진주같이> ‘마실 회원들.

 

천한 기생이라고 국가로부터 의열(義烈)’을 떨친 인물로 인정받지 못했다가 시대가 변하자 한 지역을 빛낸 구국의 인물로 추앙되었다. 다시 지아비를 그리워한 순애보를 간직한 여인으로 변모한 논개에 대해 통탄할 수밖에 없다.

 

한 명의 진주 기생을 더 소개했다. 산홍이다. 경상도 관찰사도 역임했던 을사오적 중 하나인 친일파 반역자 이지용이 진주기생 산홍을 첩으로 삼으려 하자 산홍은 세상에서 대감을 오적의 우두머리라고 합디다. 첩은 비록 천한 창기이오나 자유로이 살아가는 사람이니 무슨 이유로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며 절의를 지켰다고 한다.

 

진주 권번 터를 끝으로 오늘 일정을 마무리했다. 걸으면서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우리 문화유적지를 마주하는 것도 아쉬웠지만 해방 이후에도 경제개발의 논리 속에 우리의 전통과 문화가 사라진 현장을 살펴보는 쓰라린 날이었다. 그런데도 진주 도심 속을 걸으며 어제를 돌아보고, 오늘을 마주하고 내일을 그려보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