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이야기

해찬솔 2017. 4. 12. 09:30


 

 

추운 겨울을 장롱 속에 넣었다. 겨우내 함께했던 두툼한 겨울 잠바를 넣으면서 따스한 옷이 주는 고마움을 새삼 느꼈다. 문득 우리나라 사람들이 따뜻한 겨울을 날 수 있도록 만든 면화의 추억을 떠올리며 4차선 국도 너머로 지나가며 바라본 그곳을 330일 찾았다.

 

경남 진주-산청 국도 3호선이 지나는 길에서 330일 이날만은 늘 지나는 넓은 4차선 길에서 벗어나 먼저 노란 개나리가 뚝뚝 떨어지는 신안리 옛 국도를 따라 들어가 차를 세웠다.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 선생 유적지라는 기다란 4면체 돌비석 앞에 차를 세웠다. 선생을 모신 도천서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길목 오른편 신도비 비각으로 향했다. 멋진 소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서 있는 뒤편으로 비각이 있다. 비각 앞에는 향 피우듯 향나무가 서 있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51호인 신도비는 1834(순조 34) 강화도 물 가운데서 돌을 캐어 각 고을 성주들이 등짐으로 3년여를 운반하여 도로 옆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1935년 실화(失火)로 비각은 소실되어 1943년 현재의 장소로 옮겼다.

 

잠긴 비각 문틈으로 신도비를 훔쳐본 뒤 다시 서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향나무들의 배웅을 받으며 300m가량 들어가자 붉은 홍살문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다. 도천서원이다.

 

마침 경남문화재돌봄재단 사람들이 나와 서원 주위 돌담을 보수하는 중이었다. 상아빛 털이 따뜻하고 아름다운 개 한 마리가 걸음을 옮기는 나에게 안기듯 달려나온다. 꼬리를 흔들며 달려와 내 신발을 핥으며 반긴다. 풀밭에 드러누워 아양을 떤다.


서원으로 들어가는 배덕문 옆에는 나라의 큰 스승을 제대로 알고 읽어보라는 당부가 적힌 비문이 있다.

 

“~선생이 목화 종자를 가져와 우리나라에 전파해 온 백성들이 헐벗고 추위에 떠는 데서 영원히 구제한 공적은 나라 사람들 모두가 이미 널리 알고 있는 바이다. 그러나 선생이 목화 종자를 가져온 큰 공적 때문에, 그 학덕 충절 효행 등 여타의 뛰어난 점이 도리어 묻히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선생은 당시 중국에서 막 들어온 성리학을 포은 정몽주 선생과 함께 힘써 연구하고 보급하여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크게 일으킨 공로가 있는 분이다.~”

 

삼우당 선생은 중국에서 목화씨를 가져온 공적뿐 아니라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일으킨 학자이기도 하지만 효자다. 선생의 효심에 감동한 왜구는 효자를 해치지 말라(물해효자(勿害孝子)’라는 팻말까지 세웠다고 한다. 고려 우왕은 이를 본보기로 삼기 위해 선생이 태어난 동네를 효자리(孝子里)라 이름 짓고 효자비까지 내렸다. 효자비는 목화시배지에 지금도 서 있다.

 

배덕문을 들어서자 작은 자갈들이 곱게 깔린 사이로 상사화가 반긴다. 시경당(示敬堂)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재와 서재가 있다



동재 옆에는 선생의 제사 때 제관들의 숙소로 사용하는 신안사재(新安思齋)가 있다. 신안서재 담장 앞에는 향나무 한 그루가 햇살에 샤워 중이다.

 

잠시 시경당에 앉아 해바라기 한 뒤 바로 뒤에 있는 사당인 삼우사로 향했다. 올라가는 계단 주위에 박하사탕처럼 시원하게 생긴 꽃마리들이 있다. 삼우사 주위에는 양지꽃이며 냉이들이 피었다.

 

서원을 나와 뒤편 묘소로 향했다. 잘 단정된 150m만 올라가면 선생 묘소가 나온다. 진달래 사이 서원이 보인다. 사각형의 묘소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연꽃 봉우리 모양의 조형물이 양옆으로 붙어 있다. 앞에는 최근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사자상 뒤편으로 상석과 비, 좌우 문인석과 망주석, 석등으로 갖춰져 있다



묘소 위로 재잘대는 햇살이 간질 간질거리고 바람이 속삭인다.

 

묘소에 참례 후 돌아 나오다 유적지 입구, 신도비 비각 근처에 있는 목화약수터에서 물 한 모금 시원하게 마셨다. 늘 곁에 있어 소중함을 몰랐다. 옷의 소중함과 삼우당 선생의 공덕에 고마움을 느꼈다

고향 산청의 역사등 오늘도 좋은 자료 담아가면서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