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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하의 종 2016. 2. 8. 13:38

으름을 보면

                                이 종 월

 

으름이 나뭇지게에 매달려 산에서 내려오면 가을은 무르익어간다. 우금암 골짜기에서 소나무를 감고 오르는 덩굴이 으름 몇 개를 매달고 있었다. 추억은 그 시절로 되돌릴 수 없기에 더 애틋한 것일까? 한 동네 복례가 빙긋 웃으며 내밀던 초승달 같은 으름을 입에 넣으니 입 안 가득 단맛으로 채워졌다.

세 가호뜸 복례 아버지는 거무죽죽한 헝겊조각에 찐 고구마 서너 개를 싸가지고 산에 올라간다. 가리나무 한 짐을 지고 산에서 내려올 때면 불그레한 햇살까지 덤으로 얹어 오곤 했었다. 지게가지에 덩굴 채 매달린 으름은 입을 떡 벌리고도 덩싯덩싯 춤을 추었다. 그 바람에 내 눈은 벌어진 입에 꽂히고 목구멍에 침 넘어가는 소리가 귀청을 울렸다. 토실한 으름은 복례에게 요긴한 간식이 되려니 싶었다.

아이들에게 농촌의 가을은 봄, 여름은 물론이고 겨울보다는 나았다. 마을은 산을 등지고 들녘을 마주하고 있어 가을이면 먹을거리가 더러 있었다. 들에는 누런빛으로 살찐 메뚜기와 미꾸라지를 잡아 구워먹는 맛은 고소했었다. 풀어놓은 망아지마냥 산속을 헤매 산밤이며 정금, 으름 등 열매를 따먹는 일은 재미있었다. 그러나 그 무엇하나라도 주린 배를 채워주지는 못했다.

산열매 가운데서도 으름은 얼핏 초승달을 닮았다. 송편만한 크기에 난작난작하여 부드럽고 맛도 있었다. 긴 넝쿨에 매달려 나무를 타고 오르다가 조개처럼 벌어지면 가을도 함께 익어갔다. 주로 골짜기 같은 험한 곳의 높다란 나무를 감고 오르기 때문에 따기가 힘들고 위험했다. 자칫 나무에서 떨어지거나 헛디뎌 다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학교가 끝나고 산그늘이 마을로 내려오기 전에 줄방죽 둑에 매어놓은 소를 끌고 오는 게 나의 일상이었다. 그럴 때면 복례가 가끔 으름을 두세 개를 들고 들샘 가에서 나를 기다렸다. 어느 때는 달랑 하나만 들고 있기도 했다. 그래도 아버지가 힘들게 따온 으름을 나한테만 주는 복례는 고마운 아이였다. 나는 야들야들한 속살에 검정깨처럼 씨가 섞였어도 단 맛이 진득한 으름을 받아먹는 게 좋았다. 그런 나를 보는 복례는 흐뭇한 표정으로 수줍은 웃음을 지었다.

복례는 내가 허락한 일도 없는데 스스럼없이󰡐오빠󰡑라고 불러 쑥스러웠다. 나보다 한 살 아래인 복례는 나를 퍽 좋아했었다. 외양간에 소를 매고 솥에서 여물을 푸고 있는데 문밖에서󰡐오빠!󰡑하고 불렀다. 하던 일을 멈추고 나가보니 복례는 얼굴에 웃음까지 짓고 있었다.

다른 때보다 작고 쭈글쭈글하게 못생긴 으름을 네 개나 들고 왔다. 복례의 상기된 표정으로 봐서 덜 여문 으름을 억지로 익혀 들고 온 성싶었다. 아무튼 눈요기하라고 들고 온 게 아니니 항상 그렇듯이 고맙다는 말보다는 먼저 입에 넣었다. 내 모습을 보는 복례는 흐뭇한 표정이었다. 좋아하는 동네 오빠에게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으름 밖에 없었기에 먹고 싶어도 아꼈다가 가져왔을 것이다.

복례의 착한 마음을 몰라주어서였을까? 저녁이 되니 뱃속이 슬슬 비틀기 시작했다. 그리고 밤이 깊어지자 측간으로 내달려야 했다. 밤새 몇 번이나 들락거렸는지 모른다. 어머니는 뱃속에서 광란이 났다며 걱정을 하셨다. 밤중에 큰형수님과 등불을 들고 집 언덕을 더듬어 쑥을 뜯어다 짓이겨 즙을 냈다. 처음 마시는 쑥즙은 왜 그리도 쓴지 그냥 아픈 대로 참았으면 싶었다.

이로운 약은 입에 쓰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고통으로 지샐 것 같던 배는 신통하게 평온해져서, 새벽녘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아침에는 다리가 후들거리고 눈은 삼십 리나 들어갔다. 어머니에게 말은 안했지만 아마 어제 먹은 으름 때문인 것 같았다.

덜 여문 으름은 장독대에 놓아두면 햇볕을 받아 억지로 벌어진다. 오래된 바나나처럼 색깔이 검어지고, 속살은 달고 부드러우니 벌레들이 모여들기 마련이다. 당연히 쉽게 부패되기 십상이었다. 철딱서니 없는 나는 속으로 복례를 원망했었다.

소를 끌고 오는데󰡐오빠!󰡑하며 으름을 내민 복례에게 나는 새치름한 투로 말했다.

󰡒이제 이까짓 것 안 먹어. 복례 네가 주는 것은 아무것도 안 받을 거야.󰡓

그 순간 복례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글썽이는 눈을 보이지 않으려는 듯 뒤돌아섰다. 검정 치마폭에 싸가지고 온 으름을 다시 감추고 눈물이 그렁그렁했던 복례의 어두운 얼굴을 지금까지도 잊울 수가 없다.

어쩌면 복례는 밤새 잠을 설치며 가슴을 쥐어뜯었을 것이다. 고구마 몇 개를 싸들고 산으로 가는 아버지에게 다시는 으름을 따오지 말라고 애원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찌하여 복례가 받을 마음의 상처를 헤아리지 못했을까?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주지 않아 상처받은 복례의 자존심을 보상해줄 수 없는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복례는 검정 솥에 보리를 볶으면 어머니 몰래 한 줌이나 쥐고 와서는 내 조끼 호주머니에 넣어주기도 했었다. 그 궁핍한 가운데서도 나를 향한 복례의 마음을 나는 몰랐다. 해맑은 호의를 어지럽히고 몽니를 부리던 나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무안한 얼굴로 뒤돌아가던 단발머리 복례의 뒷모습은 내 마음을 곤두박질치게 했다. 이런 내 마음이 복례에게 다가가기를 간절히 바란 것은 끊임이 없었다.

많은 시간이 흐른 뒤 읍내 시장을 헤매어 복례를 찾았다. 순간 내 몸은 화석처럼 굳어버렸다. 어색한 만남이라 생각하는 내가 도리어 이상했다. 안타깝게도 옹색하고 척박하게 보여서일까. 절박감에 헤매는 고된 한숨소리가 역력히 귀청을 울렸다. 햇볕에 말리어 억지로 익힌 으름껍데기처럼 입가에 자글자글한 주름이 내 마음으로까지 깊은 골을 파고들었다. 힘없이 나이 들어가는 인생을 복례한테서 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로 복례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나의 여유 있는 처신이라 생각하니 더 껄끄러웠다. 착한 복례 마음만큼이나 친숙하고 정겹던 유년 시절이 잔상이 기억 속에 또렷했다.

햇볕 든 울타리 앞에 동생 봉국이를 업고 있던 복례가 들샘 길로 소를 끌고 오는 나를 보고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뭉실한 으름까지 들고 뛰었다. 철없이 내뱉은 무서운 내 말 한마디를 이제는 용서해달라고 내가 먼저 달려가 빌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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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정보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