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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색(諸色)이 명색(名色)으로 돌변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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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삼한역사/사건

2020.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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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색(諸色)이 명색(名色)으로 돌변한 이유

 

글쓴이:한부울

 

제색은 두뇌이주자

※황해도에는 유색인종이 있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황해도 해안으로 쳐 들어온 병란이다.

※고려 중앙정부는 명이란 호를 가졌다.

 

세계삼한역사연구를 시작하게 계기가 바로 한반도역사의 표본이라고 하는 조선왕조실록이 제왕의 기록 답지 않게 어딘가 세밀하지 못하고 축소된 기록이라고 판단한데 따른 것이며 그렇게 판단하는데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축소시킨 이유야 산처럼 많다.

실제로 조선이 세계를 통치하는 체제를 갖추고 있었을 가능성이 많고 때문에 19세기때부터 예수회가 리더하는 서양세력들의 타깃이 되었을 것이며 본래 역사사실에서 핵심적이고 중추적인 사실들은 모조리 그들이 차지하고 또한 그들 몫을 하나 둘 각기 떼어 가면서 너덜너덜해질 수밖에 없었다고 불 수 있다.

그렇게 너덜너덜해진 역사를 재 편집한 시기가 바로 1925년이다.

세계사가 완성되던 해 1922년에 조선사 편찬 위원회(朝鮮史編纂委員會)가 만들어지고 이것이 1925년에 해체되고 조직을 확대하여 조선사편수회관제(朝鮮史編修會官制)에 따라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가 만들어진다.
그 이후 서양세력의 앞잡이라 할 수 있는 조선총독부는 이 조직을 이용하여 어마어마한 자금을 퍼붓고 조선사(朝鮮史) 35편, 사료총서(史料叢書) 102편, 사료복본(史料復本) 1,623책, 사료집진(史料集眞)3질(帙)을 편찬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바로 서양세력은 서양인의 우위성을 입증하고 조선체제의 정체성을 말살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같은 짓을 시도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이것의 근거는 바로 본 블로그 글 "정조론으로 본 서구와 일본역사의 동질성 http://blog.daum.net/han0114/17050816 "에서 이야기 했지만 바로 정조론(征朝論)과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1820-1903)의 사회진화론(社會進化論, .Social Darwinism)이 겹친다는 사실인데 이때 이런 식의 유사과학들이 설쳐되던 시기이기도 하다.

물론 이 조차도 1945년 이후 한반도와 열도로 축소시켰지만 말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서양세력들에 의해 너덜너덜해지기 전에 상태, 오늘날 그들이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하는 세계사(1922)를 대신해야 할 근본적이고 근원적인 그래서 원초적인 성질을 갖추고 있어야 마땅하다.

기록의 형태는 왕조실록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내용면에서는 절대로 왕조실록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오랜 분석끝에 실제로 원본기록이라고 볼 수 없는 실망스러운 결과들이 마구 돌출되었으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무수한 상황들은 필연코 본래 원본역사가 어떤 기준에 의해 조작, 수정, 날조되었을 가능성을 파악하였고 그렇다면 조선왕조실록과 그외 기타 사서들이 존재하고 있지만 이것들은 어떤 기준에 맞춘 것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며 더욱이 동양의 조선과 일본의 대결구도를 만들면서 한반도 지형 역사에 맞출 수밖에 없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사실이 그렇다면 실제로 그렇듯 감춰야 했던 사실들이 도대체 어떤 내용인가를 알아야 했고 알기 위해 시작한 긴 시간을 요하는 세계삼한역사 찾기 작업이었음을 말할 수가 있다.

 

얼마전 고전번역원의 해제(解題)로 분류된 속에 조선 후기 문신 남구만(南九萬:1629~1711)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만든 시문집 약천집(藥泉集)에서 아래와 같은 내용의 기사를 발견하게 되었다.

아래는 파란선을 친 원문을 고전번역원에서 번역한 것이다.

 

약천집(藥泉集)
약천연보 제2권 [연보(年譜)]
[생략]
공은 또 아뢰기를,
“황해도 각 고을의 무오년(1618, 광해군10)ㆍ정묘년(1627, 인조5)ㆍ병자년(1636)에 전사한 여러 명색(名色)의 군사들에 대해 병조에서 지금까지 군포(軍布)를 징수하고 있습니다. 무릇 국가를 위하여 죽은 자들은 의당 정표(旌表)하고 그 고아들을 구휼하는 은전(恩典)을 내려야 할 터인데, 이렇게 하기는커녕 도리어 백사장의 썩은 뼈다귀에 역포(役布)를 징수해 온 것이 47년이나 되었는데도 면제하지 않고 있으니, 고금 천하에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담당 신하는 본 고을의 수령이 대정(代定)하지 못한 것에 핑계를 대고 있습니다. 대정하지 못한 것은 비록 고을 수령의 죄라 하더라도 어찌하여 수령이 지은 죄를 가지고 죽은 자에게 해독을 입히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른단 말입니까. 또 지금 역포를 마련하여 바치는 자들은 전사한 자의 친척이 아니면 반드시 그 이웃 사람입니다. 이들이 부당하게 징수당한 지가 이제 40여 년에 이르렀는데 아직도 대신할 자를 얻어 관청에 알리지 못했다면 대정하는 데에 따르는 어려움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이전에도 더러 군포를 감면해 준 때가 있었으나 단지 1, 2년 동안의 군포만 면제해 주고 끝내 그 이름을 도안(都案)에서 삭제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독촉하여 거두어들이는 폐해가 지금까지 근절되지 않는 것입니다. 청컨대 황해도 여러 고을의 무오년ㆍ정묘년ㆍ병자년에 전사한 군사들에 대한 징포를 모두 탕감하고, 원래의 군안 가운데에서 그 이름을 영영 삭제하소서.”하니, 상이 이르기를,“병조로 하여금 전사한 군사 중 대정하지 못한 숫자를 조사하여 입계(入啓)하게 한 뒤에 감면을 허락하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위 게시된 약천연보 제2권의 원문은 누군가에 의해 약천의 연보(年譜)가 작성된 것이겠지만 현재 고전번역원에서는 작자 미상으로 처리하고 있다.

어쨌던 윗 연보를 보면 약천이 36세때인 현종(顯宗,1641-1674,재위:1660-1674) 5년(1664) 10월에 임금에게 불합리한 사회제도폐단에 대해 개선을 청(請)한 기사임을 알 수가 있다.

포납제(布納制) 즉 일반 양인들의 병역의무에 하나로 병조(兵曹)에서 양민에게 군포를 징수하는 것에서 나타난 실태인데 비록 나라를 위해 죽은 사자라 할지라도 도안(都案)에서 삭제처리가 되지 않고 정리되지 않을 시 누군가가 지속적으로 대정(代定)하거나 그 자손들이 대물림하여 군포(軍布)를 납부하게 하였고 그로인해 전사자들의 자손이나 친척들이 근 40여 년간 군포를 지급할 수밖에 없었다는 폐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군포(軍布)는 조선시대 병역의무자인 양민 16세 이상 60세 이하 남정(男丁)이 현역 복무에 나가지 않는 대신에 베나 무명을 부담하였던 세금이다.
그리고 대정(代定)이라 함은 조선 시대, 특히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에서 한 마을의 군포 납부자가 도망가거나 죽었을 경우 그 마을에서 공동으로 책임을 지고 이를 대신 채우던 일을 리대정법(里代定法)이라고 하였는데 이를 줄여 대정(代定)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군포는 병조(兵曹)에서 입대하지 않고 정병(正兵)을 돕는 조정(助丁)에게 역(役)을 면해주는 댓가로 받는 것이며 직접 군에 복무하지 않는 양인은 조선 초기에는 봉족(奉足), 세조 때부터는 보인(保人)이 되어 현역입대 즉 번상(番上)을 하는 양인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군포(軍布)를 바치는 의무를 부여했다고 정리된다.
이것에 대한 대표적인 폐단으로는 군포 징수가 단일 관청에 의해 체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5 군영(五軍營)과 중앙 관아(官衙)는 물론, 지방의 도관찰사(都觀察使)의 감영(監營)이나 도병마사(都兵馬使)의 병영(兵營)까지도 독자적으로 군포를 징수함으로써 농민은 이중 삼중으로 수탈당하는 경우가 많았고 병조(兵曹)는 전국의 양인(良人) 장정(壯丁) 수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채, 국가 재정이 궁핍해 짐에 따라 각 군현(郡縣)에 군포 징수량을 증액 할당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농민들에게 군포 부담액은 계속 늘었다고 되어 있다.

하여 남구만(南九萬)은 무오년(1618), 정묘년(1627), 병자년(1636)에 나라를 위해 전사(戰死)한 자들이 40여 년이 지나도록 도안(都案)에서 삭제처리가 되지 않아 백골이 되어서도 군포를 납부해야 하는 폐단을 개선코저 현종에게 청한 사실임을 알 수가 있다.
국가가 죽은 자들을 위해 정문(旌門)을 세우거나 편액을 달아 표창하는 정표(旌表)를 해주어도 시원찮은데 하물며 40여년 동안 군포를 징수한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임을 임금에게 청한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알고 들어가보자.

먼저 지적할 것은 현재 고전번역원에서 번역한 것이 참으로 이상하다는 사실이다.

위 게시한 약천집 약천연보 제2권 [연보(年譜)]의 원문을 보면 붉은 표식을 해 둔 '제색(諸色)'을 찾을 수 있고 고전번역원에서 번역한 것에서 '명색(名色)'을 찾을 수 있다.

'제색(諸色)'을 엉뚱하게도 '명색(名色)'이라 한 것이다.

그런데 비슷한 한자 각읍(各邑)은 보이지만 이 명색(名色)이란 단어를 원문에서 눈을 딱고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다.

원문그림 아래 고전번역원에서 번역한 것을 그대로 캡쳐하여 게시하였다.

원문에서 제색이라 한 것을 고전번역원의 연구원들은 왜 명색이라 번역하고 싶었던 것일까?​
고전한문을 전공한 번역원의 연구자들이 원문에 명백하게 '제색(諸色)'이라 한 것을 무엇때문에 명색(名色)이라 번역했을까?

번역원의 연구자가 한문 제(諸)자와 명(名)자를 구분 못해 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가 없는 일이 아닌가.
이것은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인 것으로 봐야하고 한반도 역사관점에 사로잡혀 원문자체를 무시하고 한반도사관을 그대로 추종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한반도 역사관으로 "제색"이란 단어를 오히려 이해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더욱 더 그런 자세로 번역에 임하면 안된다.

무엇때문에 제색이라고 쓰여있는지 분석해야 하고 그것에 대해 분명한 설명이 병행되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한다.​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이 기존 원문을 그대로 번역하지 않고 자신의 판단대로 편향적으로 번역을 한다고 한다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한반도역사에서 고민하고 있는 많은 연구자들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추호도 기존 역사사서와 어긋난 번역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철칙이고 원칙이 아니겠는가.

여하튼 한반도 역사는 문제투성이라서 이런 웃지 못할 일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반도 역사가 발전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역사를 다루는 사람들의 한반도 역사관에 맞춰 일관되게 편향된 자세를 취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왜 이 단어해석이 문제인가 보자.
제(諸)자와 명(名)자의 차이점 부터 살펴보자.

한문사전에서 보면 제(諸)은 "모두", "모든", "여러" 이라는 의미가 있고 명(名)은 어떤 사물이나 단체를 다른 것과 구별하여 부르는 일정한 칭호라고 하였다.
색(色)과 합쳐 원문의 '제색(諸色)'과 번역원이 번역한 '명색(名色)'의 의미를 또한 보자.
먼저 '제색(諸色)'이라 함은 각 방면(方面), 또는, 각 부류(部類), 갖가지 물품(物品)으로 사전에서 풀이하고 있다.

​제(諸)는 言(말씀 언)자와 者(놈 자)자가 결합한 모습으로 '놈'이나 '사람'과 같이 추상적인 대상을 이, 저 식으로 지칭하는 것이라 하였고 옥편에서는 무리 중(衆)을 사용하여 모여 있는 것을 나타낼 때 쓰인다고 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색각은 최초 어두운 것과 밝은 것을 구분하기 시작하면서부터라고 색의 기원을 말하고 있다.

​또한 인간의 생리적 특성에 있어 피부색은 인종을 식별하는데 필요한 것으로 피부색을 기준으로 한 인종집단의 분류는 고대부터 흔한 일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 18세기 후반 성서인종용어 셈족, 함족, 야벳(Semitic, Hamitic and Japhetic)와 병행하여 괴팅겐역사학파(Göttingen School of History)에 의해 흑인종(Aethiopian or Black), 백인종(Caucasian or White), 황인종(Mongolian or Yellow), 아메리카 원주민(American or Red), 말레이 인종(Malayan or Brown)으로 나누었던 것도 색(色)을 나타내었음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무굴황제 인 아우랑제브(Aurangzeb:1618-1707)의 궁정의사였던 프랑수아 베르니에(François Bernier:1620-1688)는 그의 저서에서 지리적 분포지가 아닌 생리학적 차이에 근거한 인류의 큰 하위집단을 분류했고 그것에는 인종(人種) 또는 종족(種族)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고 하였다.

1730년 칼 린네(Carl Linnaeus:1707-1778)에 의해 인종에 대한 체계적분류법이 도입되었고 Americanus (Americans), Europaeus (Europeans), Asiaticus (Asians) and Afer (Africans) 4대 주요 인류 아종(亞種)으로 분류하면서 아메리카원주민을 붉은얼굴과 검은머리, 유럽인을 백색과 누르스름한 머리, 아시안을 누릿끼리한얼굴과 거무스름한 머리, 그리고 아프리칸을 검은색과 칠흙같은 머리라 하여 라틴어로 명칭하고 피부색과 머리색을 가리키는 색상 형용사를 포함하여 각 유형의 신체적 외관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인종(人種)을 나타내는 색(色)이 결합하여 많은 인종 즉 유색인종을 의미하는 것으로 풀어 볼 수 있으며 여기에는 인류(人類)의 종별, 피부색(皮膚色), 모발(毛髮), 용모(容貌), 골격(骨格), 혈액형(血液型) 이런 것들이 다 들어가는 것으로써 다양한 인종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해야 맞고 그들 집단적인 것이라면 종족이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오래전부터 종족과 인종을 색(色)이라고 칭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좁은 한반도 역사 시야로 마을, 고을이라 하지만 부족, 종족이라고 풀어볼 수도 있어야 한다.

이와같은 사실은 세계삼한역사관점에서 보아도 매우 주요한 이야기다.​
그러나 고전번역원에서 번역한 '명색(名色)이라 한 것은 앞 뒤 문장을 아무리 끼 맞춰보아도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다.

명색을 풀이하면 내용이나 실속은 그 이름에 걸맞지 않지만 그러한 부류에 속한다고 내세우는 이름이나 지위 따위를 말하는 것인데 상당히 주관적이며 추상적인 것으로 내용이나 실속 따위를 논하여 그것에 걸 맞지 않다는 표현이 강한 것이다.

죽은 군인에게 붙여야 할 명색이 도대체 어떤 것이란 말인가.

단어 전체적으로 문맥상 의미가 도무지 맞지 않는다.

원문 하나의 문장 전체는 黃海道各色戊午丁卯丙子年戰死諸色軍兵自兵曹至今徵布 하였다.

이것을 고전번역원에서는 "황해도 각 고을의 무오년, 정묘년, 병자년에 전사한 여러 명색(名色)의 군사들에 대해 병조에서 지금까지 군포(軍布)를 징수하고 있습니다."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황해도 각 종족(부족)에서 무오년, 정묘년, 병자년에 전사한 여러 인종이 다른 군병들에 대해 병조에서 지금까지 군포를 징수하고 있습니다"라고 풀어볼 수는 없는 것일까?​

당연히 인종과 종족, 부족이 다른 곳에서 징발된 병사들이기 때문에 각각의 병사 인종과 종족의 실태를 파악하고 오히려 보상을 해줘야 하지만 그렇지 않았고 병조에서는 무조건 군포를 징수하고 있었다는 부당을 말하는 것이다.

크게 세차례나 황해도 해안으로 쳐 들어온 만주비족을 나서 지역 방위 차원에서 종족, 인종을 가리지 않고 나서 조선을 위해 싸웠고 그곳 현장에서 전사하였던 것은 바로 여러 인종'제색(諸色)'의 군병들임을 알 수가 있다.

상식적으로 이러한 문구는 황해도에 각 여러 고을(종족, 부족)에는 여러 인종 색깔을 가진 사람들이 거주했다는 사실도 동시에 알 수가 있다.

​또한 한반도 역사의 사서들이 모두 이 모양인가 싶지만 위 대명률직해역시 번역에서 약천집과 마찬가지 형태이다.

위는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 제26권 형률/잡범(雜犯)이란 기록을 캡쳐한 것인데 여기서도 제색(諸色)을 명색(名色)으로 덮어 위 약천집과 같이 인종에 대한 진실을 감추려고 시도 한 것이다.

특히 인종(色)에 대한 번역이 모두 이런 패턴이다.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는 중국 명나라의 형률서인 대명률을 이두로 번역한 책인데 이미 고려 말인 1373년에 도입되어 연구되고 적용의 필요성이 역설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명의 황제인 주원장이 1367년 최초로 제정되었다가 1397년 수정되었다 하는데 이미 고려에서 주원장이 1367년에 제정한 것을 6년정도가 지나 도입을 말하였다고 하니 이것은 고려가 제정한 것이 아니면 이런 발상이 적극적으로 만들어지가 힘든 것이다.

그러니 고려가 명이라는 엄연한 역사사실을 감추려 하는 엄청난 사실이 들어난 것이다.

단언하지만 대명률을 고려가 제정한 것이고 고려(高麗)가 명(明)임을 알 수가 있다.
조선 태조도 즉위하자마자 범죄를 처결함에 있어서 반드시 대명률을 적용할 것을 선언했고, 정도전(鄭道傳)도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의 헌전(憲典)에서 대명률의 적용을 밝혔다.

이것은 조선의 모국은 고려이며 모국이 제정한 대명률직해를 따르는 것은 인륜도리상 오히려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조선이 모화사상이라고 하여 비난하지만 조상을 섬기는 것이지 결코 비난할 대상이 아니다.

조선(朝鮮)을 국호로 하고 태조 이성계가 건립한 것이 1393년이면 대명률을 적용하고자 한 것이 오히려 주원장이 률을 수정한 1397년과 동시기에 실행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어 명은 바로 조선 내에 존재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태조는 대명률을 반포하고자 했으나 법문의 용어가 생소하고 어려워서 이해하기 어려우므로 정승 조준(趙浚)에게 명해 직해하도록 했고 조준이 고사경(高士褧)과 김지(金祗)에게 이두를 사용하여 알기 쉽게 직해하게 하였다.

어쨌던 위 내용에서 보면 404조 공무를 청탁함, 촉탁공사(囑託公事)의 404-1 凡官吏、諸色人等曲法囑託公事者,笞五十。但囑卽坐。원문에서 고전번역원의 번역본을 보면 "관리나 여러 명색의 사람들이 법을 굽히고 공무를 청탁하면 태가 50이다"에서 또 다시 '제색(諸色)' 대신에 '명색(名色)'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아래 직해를 보면 관리, 여러 명색의 사람들이 이치에 맞지 않게 공적인 일을 청탁하면 태(笞) 50 이다 했다.

​태(笞)는 볼기를 치는 형벌이다.

제색인은 여러 인종의 사람들로 정부에서 무역 장사꾼 즉 돈을 많이 가진 사람으로 별도 관리를 한 부류가 아닌가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공무적으로 필요에 의해 청탁을 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 같고 이런 부류가 공무적으로도 관리와 접촉을 많이 하는 편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제색인(諸色人)이라 함은 유색인종이지만 정부가 관리를 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번역원에서 이와같이 지속적으로 제색인을 명색인이라고 번역 해놓고서도 특별히 그것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없다.

그렇게 번역한 연구원 당사자도 스스로도 이상했던 것이다.

하지만 제색인은 우리나라 조선왕조실록에서 절대 생소한 것이 아니라 제색장인(諸色匠人), 제색민장(諸色民匠), 제색군(諸色軍), 제색병(諸色餅), 제색가미(諸色價米), 제색군(諸色軍), 제색군도감(諸色軍都監), 제색군병(諸色軍兵), 제색군사(諸色軍士), 제색군사가계조(諸色軍士加階條), 제색군인(諸色軍人), 제색군정(諸色軍丁), 제색군포(諸色軍布), 제색보(諸色保), 제색인諸色人), 제색잡인(諸色雜人), 제색장(諸色匠), 제색장인(諸色匠人), 제색집사(諸色執事), 제색총관부(諸色總管府), 제색표하군(諸色標下軍)이 나타나고 만기요람(萬機要覽) 훈련도감(訓鍊都監) 군총(軍摠)편에는 각색군(各色軍)이라 한 사실도 존재한다.

이와같이 조선사회에서 제색(諸色)이라는 특정대명사가 상당히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는데 대명률직해의 예를 보면 조선 태조때부터 존재했던 대명사임을 알 수가 있다.

제색인(諸色人)을 실제로 조선사회에서 어떤 계층부류에 속하였는지는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일단 정부에서 이 부류를 계층화하고 관리한 것이 아닌가 하며 글쓴이는 이들계층을 유럽사의 두뇌이주민으로 알려진 위그노(Huguenot)로 보고 있으며 대체적으로 전자에 열거해놓은 명칭에서 장인(匠人), 민장(民匠), 집사(執事)등에서 특수한 직업과 관계되는 특히 유색인종 기술자들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지금의 한반도 황해도에는 다인종적인 사회구성체란 여지가 눈꼽만큼도 없다.

옛 황해도 땅에 ​아프리카계(African), 라틴계(Latino), 아시아계(Asian), 토착원주민(Native), 대양제도계(ocean Islander), 중동계(Middle Eastern) 그리고 다인종(multiracial)을 왜 찾을 수 없다 하는가.

그렇듯 옛 조선사회는 생각처럼 간단한 것이 아니다.​
고전번역원에서 번역한 명색이라 한 것은 3차례 발생한 만주비족이 침입한 역사적인 사건과 맞지 않고 인종이 다르다고는 하나 전사한 병사를 명색이란 엉뚱한 것으로 함부로 해석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어쨌거나 한반도 역사를 유지하려는 세력들은 우리역사에 절대로 다민족, 다인종이 존재할 수 없고 단일민족만이 존재했을 뿐이라는 당치도 않는 고집과 인식이 그들의 뇌를 지배하기 때문인 것으로 치부할 수 있을 것이다.

​황해도 각읍(各邑)이라고 한 원문도 풀이를 하면 황해도 각 종족, 또는 민족, 촌락, 부락등으로 해석할 수가 있다.

황해도에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라고 할 때 종족 또는 인종을 나타내는 색(色)이 등장하는 것은 우리가 인식하는 것 보다 더 폭 넓은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거나 말거나 한반도 역사에서 다민족, 다인종적인 요소가 존재했다고 한다면 용납이 되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기존 역사학자들은 거품을 물고 길길이 미쳐 날뛸 것이다.

이 약천집 원문만을 보더라도 각 민족, 종족의 부락, 촌락을 뜻하는 각읍(各邑)과 여러 인종, 종족의 제색(諸色)이라고 생생하게 나타나고 있다.

1945년 한반도에는 단일민족의 역사가 구성되어야 했고 여러인종 다민족, 다인종을 나타내는 제색(諸色)은 한반도 사관과 어울리지 않는 용어이기때문에 명색(名色)이라고 번역하고 축소시켜 버린 것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미 나라를 위해 죽은 전사자들에게 그것도 47년 간 백사장에 방치되어 뼈다귀만 남은 상태에서 무슨 명색을 따질 것인가.
명확하게 명색이 아니라 '제색(諸色)'을 제대로 번역하고 풀어야 마땅한 일이다.

조선사회는 다원주의국가체제, 다민족, 다문화국가체제였다는 사실을 누누히 이야기했다.

본 블로그 글 " 동조선과 서조선 그리고 광동조선http://blog.daum.net/han0114/17050838 " 과 " 암내(axillary odor)와 삼한역사 http://blog.daum.net/han0114/17050833 " 그리고 " 4개 조선(朝鮮)의 흩어짐과 참역사의 가르침 http://blog.daum.net/han0114/17050835 "에서 살펴본 내용들이다.

사람들의 피부, 외모, 머리색깔, 그리고 눈 색깔 등 인종에 대한 색상용어는 차고 넘친다.

앞에서 피부색깔에 대해 용칭한 것 이외 눈 색깔만 하더라도 갈색 눈(Brown), 헤이즐넛색(Hazel), 호박색 눈(Amber), 녹색(Green), 회색 눈(Gray), 파란색(Blue), 보라색(Violet), 그리고 0.001%불과하지만 심지어는 붉은 색(Red)의 눈도 있다 했다.

오늘날에는 유색인종이라 하면 백인 이외의 인종을 말하지만 예를들어 1796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미국문화유산가이드에서는 분명 유색인종의 용어가 인용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것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African Americans), 라틴계미국인(Latino Americans), 아시아계미국인(Asian Americans), 아메리카원주민(Native Americans), 태평양제도계미국인(Pacific Islander Americans), 중동계미국인(Middle Eastern Americans) 그리고 다인종 미국인(multiracial Americans)으로 나누는 것이다.

 

약천집에 등장하는 1618년 광해10년 무오(戊午), 1627년 인조5년 정묘(丁卯), 1636년 인조14년 병자(丙子)년에 어떤 사건이길래 수많은 다른 인종의 전사자가 황해도 땅에서 발생되었던 것인지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첫번째 사건년도 1618년(광해10)은 목구멍을 뜻하는 후금(後金, 喉衿)의 누루하치(奴児哈赤:1559-1626)가 7대한(七大恨)을 내걸고 명조(明朝)와 개전하던 시기이다.

1618년에 조선파병이 즉시 이루어지지 않았고 1년 뒤 강홍립에게 1만을 맡겨 참전하게 하였지만 부차(富察)전투에서 후금에 포위되어 항복한 사실로 인해 더 이상 후금이 조선을 괴롭히지 않았다고 역사는 설명한다.

때문에 황해도와는 거리가 있는 이야기다.​
두번째 사건년도 1627년(인조5)은 바로 후금(後金)이 조선에 직접 침입한 정묘호란(丁卯胡亂)을 말하는데 이것의 침략경로를 보면 한반도 북쪽 의주와 안주, 평양, 그리고 평산까지 밀고들어온 것인데 황해도 해안과는 상관이 없는 역사 사건이다.

세번째 사건년도 1636년(인조14)은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생된 년도인데 인조(仁祖,1595-1649,재위:1623-1649)가 삼전도에서 항복하고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하였다고 한반도 역사는 크게 떠드는사건이다.

이것 역시 왜 한반도 역사는 유독 삼배구고두례를 강조하고 기념비까지 남겨두어 선조대왕들을 치욕스럽게 만드는 것인지도 알 수가 없는 노릇이지만 마찬가지로 침략경로는 의주를 거쳐 안주, 평양, 평산, 토산, 개성을 거쳐 한성에 들어왔고 이어 강화도까지 쳐들어 갔다고 하지만 황해도 해안과는 전혀 상관 없는 전쟁이다.

그런데도 위 약천집에서는 세차례 큰 사변으로 만주비적들이 모두 황해도 해안에 침입해 들어온 경황을 말하고 있으며 이것 들은 한반도 역사와는 완전히 따로 놀고 있다.

분명히 수많은 각양각색의 인종들이 황해도 해변 백사장에서 쓰러져 썩은 뼈다귀가 되었다고 하였다.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한반도 역사가 말하는 것처럼 황해도 양민들이 징집되어 중국 명나라고 갔다고 하면 황해도 해안 백사장에 그들의 썩은 뼈다귀가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때 제색의 전사자가 발생했다는 사실로 명쾌하게 풀어볼 수 있는 것이다.

이들 후금(後金, 喉衿)세력은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보았을 때 절대로 지금의 한반도 북만주의 세력의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 북쪽에서 밀고 들어온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해 본 블로그 글 " 잠두(蠶豆) 누에콩과 지중해 http://blog.daum.net/han0114/17050851"와 " 강남(江南)을 섬멸하면 조선(朝鮮)은 주머니 속에 든 물건이다. http://blog.daum.net/han0114/17050634 " 그리고 " 망강남(望江南:Senna occidentalis)으로 본 강남(江南) http://blog.daum.net/han0114/17050640 "에서 ​주창했듯이 목구멍을 뜻하는 곳에서 태동하였다 하여 후금(喉衿)이라 하는 것이며 이것은 남북아메리카를 연결하는 요충지 목구멍을 가르키는 것인데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사이에 위치한 과테말라(Gwatemalla), 벨리즈(Belize), 온두라스(Honduras), 엘살바도르(El Salvador), 니카라과(Nicaragua), 코스타리카(Costa Rica), 파나마(Panama)가 속해 있는 육교처럼 좁다랗게 길게 뻗어 이어진 중앙아메리카대륙이라고 하였다.

이곳에 있던 만주족들이 조선을 침범했다면 어디로 침범해야 했을까?

그것도 해변, 해안이라 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세력들이 침입할 수 있는 곳은 한정될 수밖에 없다.
만약 황해도가 해안을 따라 이어진 지형을 가졌다면 아마도 지금의 멕시코만일 가능성이 크고 루이지애나주의 뉴올리언즈가 보이는 그곳으로 밀고 올라 왔을 가능성이 크며 상황이 긴박하자 황해도에 있던 수많은 제색의 인종들이 합세하여 만주비족들을 막았을 것이라고 풀어 볼 수 있다.

이렇듯 조선사회는 확실하게 다양한 제색(諸色), 즉 다민족, 다인종 체제였음을 알 수가 있다.

이제 마무리하자.

그러나 또 다른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약천집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첫번째, 누루하치가 7대한(七大恨)을 내걸고 명조(明朝)로 쫓아들어간 때가 1618년이고 두번째, 인조5년인 1627년은 명조의 숭정제(崇禎帝)가 즉위와 후금이 조선을 침입한 정묘호란이 발생할 때이며 세번째, 1636년은 조선에서 후금국서를 거절한다 하여 홍 타이지가 다시 병자호란을 일으켰다는 때인데 공교롭게도 1618년부터 1648년까지 동시기에 주로 유럽 독일에서 30년전쟁이 벌어진 시기와 일치한다.

그리고 1636년인 인조14년 병자(丙子)년 호란사태는 스페인 군들이 프랑스 북부의 코비(Corbie)에 이르렀을때 파리에서 공황을 일으켰다고 하는 때와 맞물려 있어 이때 조선인들도 적지 않는 공포심을 가졌을 것이라고 보인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남만(南蠻)으로 알려져 있고 프랑스는 세계삼한역사관점으로 조선과 매우 겹쳐 나타난다.
30년 전쟁(Thirty Years' War)은 유럽종교전쟁시기로 로마 가톨릭교회를 지지하는 국가들과 개신교를 지지하는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종교 전쟁이라고 설명되지만 글쓴이는 그들끼리 영역싸움에 불과한 것이다.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제국이 합세하고 나머지 신교국가 네덜란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덴마크, 스웨덴, 프랑스, 오스만제국, 작센선제후국, 신성 로마 제국 내 개신교 국가였던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국,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등도 이들과 동맹을 맺고 전쟁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신성로마제국만 빼고 전부가 하나의 체제에서 존재가치를 설명하기가 어려웠을 잔챙이 해양세력들이다.

재차 반복되는 이야기지만 15세기부터 유럽역사의 메카니즘은 예수회의 장난에서 벗어날 수가 없고 종교전쟁이란 것도 그것과 밀접하다고 볼 수 있다.
유럽사 전체가 종교주의로써 종교로 시작하여 종교로 끝난다.
물론 역사적으로 종교전쟁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유럽사에서 종교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체제에서 그들 용어인 나와바리, 영역싸움일 뿐 체제싸움은 아니라는 말이다.

늘 상 정숙해야 할 종교인들이 맨날 전쟁이나 일으키고 피터지게 아귀다툼이나 하면서 저무는 해를 더욱 저물게 하였는데 한반도 역사가 말하는 나와바리로 형성된 당파와 붕당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식의 체제, 완전체가 성립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일단 종교는 인정한다.

그러나 종교가 역사를 대신할 수 없다.

특정종교가 역사를 지배하는 것은 지금의 유럽역사이야기의 상징적인 것에 불과하다.

하나의 체제아래 수많은 인종으로 구성된 사회에서 각자의 민족, 종족이 달라 사상이 다르고 그에 따라 문화와 종교가 달랐을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으며 신교회세력들과 구교회세력들간에 다툼이 상존했다고 하는 것은 그들 나름의 영역 싸움일뿐 체제의 완전체와는 관계가 없는 이야기다.

이것을 마치 세계전체가 종교싸움으로 얼룩진 것처럼 꾸며대고 있는 지금의 유럽사가 개탄스러울 뿐이다.​
19세기후반부터 종교적인 문제는 사회적으로 혼란을 가중시켜 하나의 체제를 위협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어느정도 인정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종교가 주도된 르네상스, 서유럽문화운동 또는 부흥따위는 믿지 않는다.

오늘날 현대 역사학적 구분에서 동양과 서양을 구분할 수 있는 것에서도 바로 특정종교가 큰 역할을 했다.

역설적으로 종교는 스스로 체제일 수가 없다.

그것들의 영향력은 19세기이후부터 활개친 유사과학에 의한 헤게모니이었을 것이란 추측이 크다.

하나의 체제에서 산업혁명에 의해 자본을 축적한 유럽해양세력이 몰라보게 강해지고 독단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힘을 갖추었을 것이란 사실과 굳이 체제에 자신들을 의탁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독자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면서 서양 즉 유럽세력들은 오히려 하나의 체제를 지배하려했기 때문에 일본이 아니라 서양의 정조론(征韓論)이 성립된다.

이후부터 그들이 마음먹은대로 역사가 움직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했을 것이므로 내부로부터 흔들고 굳건하던 체제가 한꺼번에 와해되어 순식간에 중심축이 기울어지는 상황에서 마지막까지 조선은 그들을 막으려 했겠지만 힘들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하다.

조선체제는 어느날 갑자기 무너진 것이 아니다.

서양세력들이 등장하면서 야금야금 서서히 좀먹듯이 사라진 것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조선은 나약함에 대명사가 되었다.

우리국민전체가 그렇게 생각한다.

더욱 답답한 것은 감히 19세기전까지 삼한인의 언저리에 맴돌면서 언감생심 함부로 접근조차 할 수 없었던 해양세력인 일본을 신흥국가로 만들고 역사적으로 조선과 대결구도로 만들어 놓았다.

세계삼한역사는 분명 이 좁다란 한 영역에 갇혀 있을 역사가 아니다.

약천집에서 우리는 조선체제 속에 일개 고을, 마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민족이나 종족들이 거주하고 생존하던 곳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한반도 사관이 명색이란 단어로 덮고 감추려 했던 제색(諸色)은 바로 다민족, 다인종, 다원주의체제를 나타내는 단어이었음을 알게 한다.[세계삼한역사연구:한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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