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소리

    하늘과 땅 2011. 4. 11. 05:33

     

     

     

     

    십자가로의 초대 2011 Koste Paris 폐회예배 설교

    (눅23: 39-43) 

     

    유럽 코스테 대표  

    베를린선교교회 담임목사 한은선

     

    본 메시지는 지난 2011 Koste Paris 폐회예배에서 누가복음 23:39-43절을 본문으로

    한은선 목사가 행했던 설교 내용을 유크 독자들과도 함께 나누고자

    정리하여 게제합니다. <편집자 주>

     

     

    어느 날 한 거인과 키가 작은 한 재봉사가 사람들 앞에서 힘자랑을 하게 되었습니다.

    거인은 어디선가 제법 큰 돌을 주워오더니 힘껏 하늘 높이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하늘 높이 날아간 돌은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구경꾼들은

    거인의 가공할 힘에 탄성을 질렀습니다. 거인은 재봉사를 향해 봤느냐는 표정을

    지으며 의기양양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그 돌은 떨어졌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재봉사는 집에 들어가더니 무엇인가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가 손을 펴자 작은 새 한 마리가 하늘을 향해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새는 결코 땅으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삶을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거인과 같이 스스로 힘을 길러

    그 힘이 다인 것처럼 살아가는 유형입니다. 그러나 얼마가지 못해 그 힘의 한계를

     절감하지만 돌이킬 때는 이미 너무 늦은 때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재봉사와 같이

    별 볼일 없는 것 같고 힘없어 보이지만 새를 날리는 삶입니다. 훨훨 날아서 하늘에

    이르는 새와 같이 이 세상의 힘이 아니라 영원한 세계를 구하며 사는 삶입니다.

     

     

     

    예수께서 사십 주야를 주리시고 난 후 사단의 시험을 받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로 재미를 본 사단은 이번엔 예수께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돌이 떡이 되는 것으로

    증명해 보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것을 세속의 것으로 영원한 것을 제한된 것으로

    하늘의 영성을 세속의 물질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먹어도

    다시 배고파지는 떡이 아니라 영원히 배고프지 아니하는 떡을 주기 위해 오신

    것인데 말입니다. 다시 사단인 자기에게 머리를 한번만 조아리면 온 천하의 영화를

    누릴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제의를 합니다. 주님이 영광 그 자체이신데 말입니다.

     

     

     

    영혼을 팔아 세속의 가치를 추구하도록 하는 것이 사단의 전략입니다.

    주님은 그의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절할 테니 제발 세상의

    영광을 달라고 할 때가 많습니다. 생각으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육은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은 인류의 구원을 이루는 기독교 최고의 정점인 십자가상에서 구원에로의

    첫 초대의 대상, 메시야를 증거 하는 첫 전도자, 현실 구원을 버리고 영혼의 구원,

    세속의 가치를 버리고 영원한 가치를 구한 첫 주인공이 아이러니하게도

    행악자였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인류 최대의 역설이며 반전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십자가 영성이 무엇인지를 살피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

     

     

    이 사람은 다른 편의 강도가 예수님을 향하여 비방하는 소리를 듣고 그를 꾸짖으면서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라며 책망합니다. 예수를

    비방한 강도의 마음에는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없었기에 자신에 대하여 무지했고

    따라서 회개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구원 받은 행악자는 다른 편의 강도와는 달리

    하나님께 대한 영적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기독교는 거룩한 두려움에서 출발합니다. 회개도 거룩한 경외심에서 가능합니다.

    기독교가 종종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는 모든 문제도 이런 영적 두려움의 부재에서

    생기는 것들이며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온갖 부끄러운

    일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한 분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비겁한 삶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세상이 믿는 자들을

    두려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도 거룩에 이르는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무서워서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큰 사랑 큰 은혜 너무 완전한 분이시기에

    가지게 되는 내적 경외심이 외적 두려움인 것입니다.

     

     

     

    한번은 언젠가 평양을 방문했던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방북하기 전 주변에서 말하기를 북한은 감시가 심한 나라이니 조심하라는 말을 들었던터라,

    짐을 풀자마자 혹시 방안에 감시 카메라가 없는지 살피는데 천정에 작은 점 하나가

    보이더랍니다. 그 순간 소름이 끼치면서 윗 양복만 벗고 넥타이도 풀지 않은 채 잠을

    잤다고 합니다. 다음날 일어나 홀로 새벽기도회를 하는데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평생을 신앙생활 해오면서 단 한 번도 그렇게 하나님을 두려워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아침에 참 많이도 회개 했다고 합니다. 거룩함에 대한 영적

    두려움은 올바른 신앙의 출발입니다.

     

     

     

     

     

    영안이 열린 사람

     

     

    행악자는 다른 편의 강도에게 예수를 가리키면서 ‘예수를 두려워하지 않느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이는 예수를 보면서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스테반은 돌을 들어 치려는 사람들 저 너머에 예수의 서신을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나타난 것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말미암았음을 보는 자가 영안이

     열린 사람입니다. 그는 지금 예수께서 하시는 일이 하나님의 계획안에 들어 있음을

    구속사적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세속에 묻혀 살았던 행악자의 영성이 성령 안에 영성을

    추구하는 우리들보다 높은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죄 값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진실한 참회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구원과 신앙성장은 바로 이런 영적자각에서

    비롯되며 영안을 가진 사람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자화상 - 구원받지 못한 강도

     

     

    현실의 고통에서 구원해 줄 것을 구한 그 강도의 부르짖음은(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강도가 당면한

    상황에서 현실구원만을 외쳤기에 그는 현실도 구원받지 못했지만 영혼도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랬듯이 언제부턴가 한국 교회가 세속의 축복과 현실의 구원을 바라며

    기복신앙으로 흐르게 된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을 향해 영원한 것을

    제시하는 선지자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세속으로부터 종종 지탄을

     받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신뢰관계를 구하는 행악자

     

     

    구원받은 행악자는 예수님을 향하여 "예수여" 하고 불렀습니다.

    '그리스도'는 주님의 구속사적 직분을 말한다면 '예수'는 그 분의 본명입니다.

    구원 받은 강도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제 딸아이가 독일

    킨더가르텐에 다니기 시작 한지 얼마 후 집에 오더니 절보고 "은선"하며 제 이름을

    불러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알고 보니 독일에서는 친하면 이름을 부른다는

    사실을 그날 유치원에서 배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강도가 주님의 직분을 부르지

    아니하고 주님의 본명을 부른 것은 일대일의 관계, 곧 개인적인 사귐과 관계를

    가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구원도 믿음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창대한 이름과 큰 민족과 복의

    근원이 되게 하리라는 약속을 통하여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하나님은 다시 하늘의 별을 보여주시며 그와 언약을 재확인하십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그 언약보다 그 말씀을 하신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은 그의 믿음이

    아니라 그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우리가 보통 ‘어떻게 구원받습니까?’라고 물으면

    대개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믿음으로가 아니라 믿을

    수밖에 없도록 역사 하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지만 실상은 은혜도 아니고

    그 은혜의 주인공 되시는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습니다. 구원은 인간편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 편의 사랑의 성취며 믿음은 목적이 아니라 인격적 관계를

    이루는 수단입니다. 그런 점에서 신뢰 관계를 구한 행악자는

    신앙의 본질을 깨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영원에로의 소망을 추구하는 강도

     

     

    구원받지 못한 행악자는 예수를 현실적인 가치로만 상대하고 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도 구원하고 우리도 구원하라." 이것이 그 사람이 보는

    예수께 대한 일반적인 시각이었습니다. 하지만, 구원받은 행악자는 주님에 대한 가치를

    영원함에 두고 있습니다. 구원에 이른 강도도 다른 편의 강도처럼 매우 고통스러운

    상황입니다. 그도 다른 편의 강도처럼 현실에서 구원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실로 엄청난 기도를 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누구보다 현실구원이 절박한 상황에서 그는 영원한 가치를 구하고 있습니다.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 갈리는 순간입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이 갈리는 순간입니다.

     영과 육이, 하나님의 나라와 세속의 세계가 갈리는 순간입니다.

    행악자가 고통스런 현실의 구원을 넘어 영원을 소망했듯이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극복해야할 기도를 강도가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기록한 누가는 강도를 통해

    세속의 가치를 영적 가치보다 더 많이 외치는 천박한 신앙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는 축복의 원리는 맞습니다.

    그러나 따라오는 축복을 따라가듯 구하는 것은 잘못이며 그 나라를 먼저 구했더니

    따라오는 축복이 현실의 축복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십자가 영성은 바로 현실을 넘어 하나님의 영원한 가치를 구했던 강도의 기도 속에 있습니다.

    또한 주님은 제자들에게 한 번도 너희가 세상을 바꾸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음에도

    세상을 바꾸겠다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러나 자기도 하나 바꾸지 못하면서

    누가 누구를 바꾼단 말입니까?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가 소금이 되어라,

    빛이 되어라,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말씀을 하신 것은

    상황의 변화가 아니라 존재의 변화를 주문하신 말씀입니다.

    곧 자신부터 바꾸라는 말씀입니다.

     

    십자가 영성은 영원한 가치를 통하여 이 세상을 구하는 데 있지 바꾸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그리스도인들이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며 십자가의 영성을

    회복해야만 하는 절박한 순간에 와 있습니다. 나의 현실을 구하기 위해

    영원한 가치를 버리는 강도와 나의 현실을 버리며 영원한 가치를 구한 강도는

    오늘 우리들의 자화상 중에 하나입니다.

     

     

     

    세상 밑바닥에서 영원에로의 소망을 구한 행악자에게 주님은

    ‘진실로’라는 말씀으로 확언을 주십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기사펌: 유럽크리스챤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