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2022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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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야기/명시 사다리집 풍경 / 임승훈

그림 / 김경희 사다리집 풍경 / 임승훈 허공에 걸린 밧줄에 여덟 개의 발이 꺼꾸로 매달려 수없는 곡예를 반복하는 무공해 건축 기법 수학 공식은 잊지 않았는지 팔각형 모서리마다 줄을 걸고 자로 잰 듯 가지런하게 집을 짓는 건축사 모진 태풍에도 까딱없는 사다리 집 짓고 외줄타기하는 곡예사 작은 녀석이 맹랑하다 이슬 내린 보금자리에 아침 햇살이 내려왔다가 하얀 궁전 위에 핀 이슬 꽃이 되었다 진실과 거짓 사이에 숨어있는 모습이 밉지만 성실하게 사는 징그럽지만 귀여운 아이 임승훈 시집 / 꼭, 지켜야 할 일

23 2022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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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야기/명시 타이탄 아룸 / 박순

그림 / 이영애 타이탄 아룸 / 박순 칠 년에 한 번씩 꽃피우는 타이탄 아룸 몸에서는 36도 열을 발산한다 동물 썪는 냄새가 난다 저 꽃, 칠 년 기다림으로 단 이틀을 견디다 점 하나로 스러져 갈 뿐이다 꽃잎보다 더 큰 기둥만 한 중심을 세우기 위해 시체 냄새를 피웠으리라 어찌 좋은 냄새만 갖고 살 수 있을까 당신과 타협하지 못한 가슴은 썩어 문드러진다 가슴앓이는 악취를 내며 입과 코를 움켜쥐게 한다 누군가는 나의 냄새를 좋아할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튕겨져 나오려는 시간 속에 중심을 세우려 애를 쓴다 *타이탄 아룸 : 적도 부근의 열대우림에 자생, 시체꽃으로 불림 박순 시집 / 페이드 인 (fade-in)

22 2022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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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야기/명시 여승 / 백석

그림 / 심은구 여승 / 백석 여승은 합장(合掌)을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공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늬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 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섭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 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시집 / 백석 시집 *일제 강점기 어려운 현실 배경으로 한 여인이 여승이 되기까지의 삶, 민족의 비극적 현실 반영 *가지취의 내음새 (속세와의 단절 / 후각적 심상) *금덤판 (금광/ 평안도 방언)

21 2022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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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야기/명시 서글픈 바람 / 원태연

그림 / 손기옥 서글픈 바람 / 원태연 누가 오기로 한 것도 아니면서 누굴 기다리는 사람처럼 삐그덕 문소리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누가 오기로 한 것도 아니면서 누굴 기다리는 사람처럼 두 잔의 차를 시켜놓고 막연히 앞 잔을 쳐다본다 누가 오기로 한 것도 아니면서 누굴 기다리는 사람처럼 마음속 깊이 인사말을 준비하고 그 말을 반복한다 누가 오기로 한 것도 아니며서 누굴 기다리는 사람처럼 나서는 발길 초라한 망설임으로 추억만이 남아 있는 그 찻집의 문을 돌아다본다. 원태연시집 /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

20 2022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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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야기/명시 등에 관하여 푼다 / 박순

그림 / 정금자 등에 관하여 푼다 / 박순 꺾인 허리를 반쯤 펴고 들어올린 들통 엿질금을 물에 담가 불리고 팍팍 문질러 꼬두밥 넣고 불앞에서 밤을 지새운 엄마 밥알이 껍질만 남긴 채 쏙 빠져나온듯 세상에서 젤루 어려운 것이 넘의 맴 얻는 거라며 투닥대지 말고 비위 맞춰 살라고 맴 단단히 붙들고 강단지게 살라고 했다 어여 가거라, 와이퍼처럼 손을 흔들며 겨울비 우산 속 키 작은 엄마는 어둠속으로 묻혀갔다 어매, 어쩌다 꼬드밥이 되야 불었소 시집 / 시작 (시시한 일상이 작품이 될 거예요)

20 2022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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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야기/명시 가끔씩은 흔들려보는 거야 / 박성철

그림 / 김향희 가끔씩은 흔들려보는 거야 / 박성철 가끔씩은 흔들려보는 거야 흐르는 눈물을 애써 막을 필요는 없어 그냥 내 슬픔을 보여주는 거야 자신에게까지 숨길 필요는 없어 물이 고이면 썩어들어가는 것처럼 작은 상심이 절망이 될 때까지 쌓아둘 필요는 없어 상심이 커져가 그것이 넘쳐날 땐 스스로 비울 수 있는 힘도 필요한 거야 삶이 흔들리는 건 아직도 흘릴 눈물이 남았다는 건 내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니까 가끔씩 흔들려보는 거야 하지만 허물어지면 안 돼 지금 내게 기쁨이 없다고 모든 걸 포기할 필요는 없어 늦게 찾아온 기쁨은 그만큼 늦게 떠나니까 시집 / 눈물편지

18 2022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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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야기/명시 미래가 쏟아진다면 / 김소연

그림 / 송세라 미래가 쏟아진다면 / 김소연 나는 먼 곳이 되고 싶다 철로 위에 귀를 댄 채 먼 곳의 소리를 듣던 아이의 마음으로 더 먼 곳이 되기 위해선 무얼 해야 할까 꿈속이라면 아이가 될 수도 있다 악몽을 꾸게 될 수도 있다 몸은 자꾸 나침반 바늘처럼 떨리는 아이가 되어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까 봐 괴로워하면서 몸이 자꾸 깃발처럼 펄럭이는 아이가 되어 어리석은 사랑에 빠졌을까 봐 괴로워하면서 무녀리로 태어나 열흘을 살다 간 강아지의 마음으로 그 뭉근한 체온을 안고 무덤을 만들러 가는 아이였던 마음으로 꿈에서 깨게 될 것이다 울지 마, 울지 마 라며 찰싹찰싹 때리던 엄마가 실은 자기가 울고 싶어 그랬다는 걸 알아버린 아이가 될 것이다 그럴 때 아이들은 여기에 와서 모르는 사람에게 손을 흔든다 꿈이라면 ..

17 2022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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