恒照, 산과 강을 즐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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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6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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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c/조선왕조실록

2021. 4. 11.

선조 11 - 승전의 시작

왜군 침입이 이순신에게 알려진 것은 왜군 부산상륙 이틀 후인 4월 15일이었습니다.

경상우수사 원균은 왜적함대를 처음 대면하고는 그 규모와 위세에 눌려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망을 친 후,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한편, 조정에 전라좌수군과 합세하여 싸운다면 이길 수 있다는 장계를 올렸습니다.

원균의 구원 요청에 이순신은 "각자 맡은 지역과 소임이 있으니. 함부로 쉽게 군사를 이동시킬 수 없다"며, 지원요청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곧 이은 선조의 명령서의 내용은 "원균이 여러 포구에서 싸울 준비를 마쳤다고 하므로 전라좌수군과 경상우수군이 힘을 합쳐 맞선다면 능히 왜적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이순신이 출정을 위해 경상우수군의 상황을 파악해보니 군사도 배도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어, 사실상 전라좌수군의 힘만으로 싸움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어쨌든 1592년 5월 4일 이순신은 판옥선 24척을 필두로 여수 수영을 출발해 경상우수영 관할 포구에서 결진을 하니, 원균의 판옥선은 4척에 불과하였습니다.

5월 7일 점심쯤, 척후선이 적선 30척이 옥포 포구에 정박해 있고 왜군은 상륙하여 분탕질을 하고 있다는 보고를 하였습니다.

조선 수군은 소리 없이 포구로 접근을 하였고, 이를 발견한 왜군은 황급히 배로 돌아와 다가오는 조선 수군을 향해 조총을 난사하였습니다.

조선 수군은 넓게 진을 이루어 포위해 들어가다가 일제히 벼락같은 포격을 가하였습니다.

그동안 일본 수군의 기본적 전투 양식은 빠른 배를 이용해 적선에 접근하여 배에 올라탄 다음 백병전을 벌이는 것이었습니다. 칼싸움에 도가 텄고 조총까지 갖추었으니 두려울 것이 없었겠지요

그러나 왜군은 조선 수군의 예기치 못한 포격에 혼비백산했고, 조선함대가 접근하자 백병전을 펼치고자 했으나, 조선 수군은 그동안 훈련한 그대로 더 두껍고 튼튼한 판옥선을 이용해 충돌 공격을 감행하여 왜선을 좌초시키는 한편 일본 배보다 높은 판옥선 갑판 위에서 화살공격을 퍼부으니, 왜군은 도저히 대적할 방도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날 전투로 왜선 26척이 좌초되었고 수많은 왜군이 수장되었으나, 조선군이 입은 피해는 겨우 부상 1명에 불과했으니 실로 압도적인 승리였습니다.(옥포해전)

승리에 자신감을 얻은 수군은 이어 합포에서 5척, 그 다음날에는 적진포에서 11척의 왜선을 깨트린 뒤 백성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서 개선하였습니다.

히데요시는 육군보다 더 강하다고 자부하던 해군이 그들 입장에서는 “듣보잡”인 이순신에게 완패했다는 보고를 받고 대노하여 장검으로 평소 가장 아끼던 분재를 난도질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잘 알고 있다시피 서막에 불과했습니다.



선조 12
- 비장의 전함 거북선(龜船)

이순신은 장졸들의 전공을 치하한 뒤 곧바로 전함을 수리하고 화약과 화포를 제작하는 등 다음 전투를 위한 준비에 몰두하였습니다.

조선 수군과 백성들은 그동안 "이런다고 과연 우리가 왜군을 이길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옥포해전의 승리로 이순신을 믿고 따른다면 능히 왜군을 물리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5월 29일, 이순신 함대는 2차 출동에 나섰는데, 이 때는 비장의 전함 거북선이 함께 했습니다.

“거북선이 먼저 돌진하고 판옥선이 뒤따라 진격하여 연이어 지자·현자 총통을 쏘고, 포환과 화살과 돌을 빗발치듯 우박 퍼붓듯 하면 적의 사기가 쉽게 꺾이어 물에 빠져 죽기에 바쁘니 이것이 해전의 쉬운 점입니다.”

이순신이 임진왜란 개전 이듬해인 1593년 조정에 보낸 보고서의 한 구절입니다.

이순신이 이 장계에서 자신 있게 언급했듯이 거북선(龜船)과 판옥선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를 뒷받침한 가장 강력한 물적 토대 중 하나였습니다.

왜군들이 조선의 배로 뛰어들어 단병접전을 시도하지 못하게 막고, 조선의 장기인 활쏘기와 화약무기 사격으로 적을 제압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기본 갑판 위에 갑판을 한 층 더 높인 군함이 판옥선이고, 갑판 위에 아예 덮개를 씌운 군함이 거북선입니다.

조선 수군은 어느 정도 적선과 떨어진 거리에서 화약무기로 승부는 가르는 것을 선호했지만,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 대포를 쏘아 적함을 맞추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해상에서 사거리가 100미터가 넘는 경우 명중 정확도에 한계가 있었고,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쓰인 배가 거북선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거북선은 판옥선보다 강한 방호력을 바탕으로 적선에 최대한 가깝게 접근해 코앞에서 명중탄을 날려 보낼 능력이 있었고, 최선봉에서 인파이터처럼 돌격함으로써 후방의 판옥선이 적선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데도 도움이 됐으며, 적의 전투대형을 직접적으로 교란하는데도 그만이었습니다. 거북선은 판옥선의 가장 훌륭한 전투 파트너였던 셈이었습니다.
거북선이 이처럼 초근거리로 접근해서 전투를 했다는 목격담은 일본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즉, 일본 측 기록인 [고려선전기(高麗船戰記)]는 1592년 7월10일 벌어진 안골포해전을 묘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 큰 배 중에 3척은 메꾸라 부네(盲船:장님배)인데, 석화시·봉화시·안고식 화살촉 등을 쏘며 오후 6시까지 번갈아 접근해 공격을 걸어와 망루로부터 복도, 방패까지 모조리 격파되고 말았다.

이러한 거북선은 태종실록에도 그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이런 것과 괸련해 거북선의 발명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나오고 있습니다.

두루 두루 종합해 보건대, 거북선은 이순신이 휘하의 사람들과 함께 조선 태종 때 존재했다던 거북선을 모티브로 실제 전투에 활용할 수 있도록 실전적으로 건조한 창조적 함선인 것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거북선은 나중에 건조된 것까지 도합 5척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국운이 풍전등화 상황에서 백성 모두에게 이길 수 있고 나라를 지킬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한 이순신 장군의 승전보는 당시 백성들에게 얼마나 반가운 소식이었을까. . .


선조 11 - 승전의 시작

왜군 침입이 이순신에게 알려진 것은 왜군 부산상륙 이틀 후인 4월 15일이었습니다.

경상우수사 원균은 왜적함대를 처음 대면하고는 그 규모와 위세에 눌려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망을 친 후,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한편, 조정에 전라좌수군과 합세하여 싸운다면 이길 수 있다는 장계를 올렸습니다.

원균의 구원 요청에 이순신은 "각자 맡은 지역과 소임이 있으니. 함부로 쉽게 군사를 이동시킬 수 없다"며, 지원요청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곧 이은 선조의 명령서의 내용은 "원균이 여러 포구에서 싸울 준비를 마쳤다고 하므로 전라좌수군과 경상우수군이 힘을 합쳐 맞선다면 능히 왜적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이순신이 출정을 위해 경상우수군의 상황을 파악해보니 군사도 배도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어, 사실상 전라좌수군의 힘만으로 싸움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어쨌든 1592년 5월 4일 이순신은 판옥선 24척을 필두로 여수 수영을 출발해 경상우수영 관할 포구에서 결진을 하니, 원균의 판옥선은 4척에 불과하였습니다.

5월 7일 점심쯤, 척후선이 적선 30척이 옥포 포구에 정박해 있고 왜군은 상륙하여 분탕질을 하고 있다는 보고를 하였습니다.

조선 수군은 소리 없이 포구로 접근을 하였고, 이를 발견한 왜군은 황급히 배로 돌아와 다가오는 조선 수군을 향해 조총을 난사하였습니다.

조선 수군은 넓게 진을 이루어 포위해 들어가다가 일제히 벼락같은 포격을 가하였습니다.

그동안 일본 수군의 기본적 전투 양식은 빠른 배를 이용해 적선에 접근하여 배에 올라탄 다음 백병전을 벌이는 것이었습니다. 칼싸움에 도가 텄고 조총까지 갖추었으니 두려울 것이 없었겠지요

그러나 왜군은 조선 수군의 예기치 못한 포격에 혼비백산했고, 조선함대가 접근하자 백병전을 펼치고자 했으나, 조선 수군은 그동안 훈련한 그대로 더 두껍고 튼튼한 판옥선을 이용해 충돌 공격을 감행하여 왜선을 좌초시키는 한편 일본 배보다 높은 판옥선 갑판 위에서 화살공격을 퍼부으니, 왜군은 도저히 대적할 방도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날 전투로 왜선 26척이 좌초되었고 수많은 왜군이 수장되었으나, 조선군이 입은 피해는 겨우 부상 1명에 불과했으니 실로 압도적인 승리였습니다.(옥포해전)

승리에 자신감을 얻은 수군은 이어 합포에서 5척, 그 다음날에는 적진포에서 11척의 왜선을 깨트린 뒤 백성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서 개선하였습니다.

히데요시는 육군보다 더 강하다고 자부하던 해군이 그들 입장에서는 “듣보잡”인 이순신에게 완패했다는 보고를 받고 대노하여 장검으로 평소 가장 아끼던 분재를 난도질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잘 알고 있다시피 서막에 불과했습니다.



선조 12
- 비장의 전함 거북선(龜船)

이순신은 장졸들의 전공을 치하한 뒤 곧바로 전함을 수리하고 화약과 화포를 제작하는 등 다음 전투를 위한 준비에 몰두하였습니다.

조선 수군과 백성들은 그동안 "이런다고 과연 우리가 왜군을 이길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옥포해전의 승리로 이순신을 믿고 따른다면 능히 왜군을 물리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5월 29일, 이순신 함대는 2차 출동에 나섰는데, 이 때는 비장의 전함 거북선이 함께 했습니다.

“거북선이 먼저 돌진하고 판옥선이 뒤따라 진격하여 연이어 지자·현자 총통을 쏘고, 포환과 화살과 돌을 빗발치듯 우박 퍼붓듯 하면 적의 사기가 쉽게 꺾이어 물에 빠져 죽기에 바쁘니 이것이 해전의 쉬운 점입니다.”

이순신이 임진왜란 개전 이듬해인 1593년 조정에 보낸 보고서의 한 구절입니다.

이순신이 이 장계에서 자신 있게 언급했듯이 거북선(龜船)과 판옥선은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승리를 뒷받침한 가장 강력한 물적 토대 중 하나였습니다.

왜군들이 조선의 배로 뛰어들어 단병접전을 시도하지 못하게 막고, 조선의 장기인 활쏘기와 화약무기 사격으로 적을 제압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기본 갑판 위에 갑판을 한 층 더 높인 군함이 판옥선이고, 갑판 위에 아예 덮개를 씌운 군함이 거북선입니다.

조선 수군은 어느 정도 적선과 떨어진 거리에서 화약무기로 승부는 가르는 것을 선호했지만, 파도가 치는 바다에서 대포를 쏘아 적함을 맞추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해상에서 사거리가 100미터가 넘는 경우 명중 정확도에 한계가 있었고,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쓰인 배가 거북선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거북선은 판옥선보다 강한 방호력을 바탕으로 적선에 최대한 가깝게 접근해 코앞에서 명중탄을 날려 보낼 능력이 있었고, 최선봉에서 인파이터처럼 돌격함으로써 후방의 판옥선이 적선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데도 도움이 됐으며, 적의 전투대형을 직접적으로 교란하는데도 그만이었습니다. 거북선은 판옥선의 가장 훌륭한 전투 파트너였던 셈이었습니다.
거북선이 이처럼 초근거리로 접근해서 전투를 했다는 목격담은 일본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즉, 일본 측 기록인 [고려선전기(高麗船戰記)]는 1592년 7월10일 벌어진 안골포해전을 묘사하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 큰 배 중에 3척은 메꾸라 부네(盲船:장님배)인데, 석화시·봉화시·안고식 화살촉 등을 쏘며 오후 6시까지 번갈아 접근해 공격을 걸어와 망루로부터 복도, 방패까지 모조리 격파되고 말았다.

이러한 거북선은 태종실록에도 그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이런 것과 괸련해 거북선의 발명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나오고 있습니다.

두루 두루 종합해 보건대, 거북선은 이순신이 휘하의 사람들과 함께 조선 태종 때 존재했다던 거북선을 모티브로 실제 전투에 활용할 수 있도록 실전적으로 건조한 창조적 함선인 것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거북선은 나중에 건조된 것까지 도합 5척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국운이 풍전등화 상황에서 백성 모두에게 이길 수 있고 나라를 지킬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한 이순신 장군의 승전보는 당시 백성들에게 얼마나 반가운 소식이었을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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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13
- 이순신, 바다를 장악하다!

이순신이 2차 출동에 나선 5월 29일, 이 때에는 전라 우수영 이억기 부대, 원균 부대와 합류해 판옥선만 50척이 넘는데다 거북선이 앞을 이끌었습니다.

조선 수군은 사천포에서 왜선 12척을 모두 격파하고, 이튿날 당포에서 20척의 왜선을 깨트렸습니다.

거북선을 선봉에 세운 조선 수군은 이어 당항포에서 26척, 율포에서 3척을 격파한 뒤 각 군영으로 복귀하였습니다.

이 싸움에서 원균은 싸움보다는 왜군의 수급 확보에 혈안이 되었다 합니다.(저기도 있다~ 건져 올려~~) 원균은 그렇게 확보한 수급과 함께 장계를 올려 선조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습니다.

한편, 거듭된 수군의 참패에 경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600명으로 5만의 조선 관군을 깨트린 용인전투의 주인공 와키자까 야스하루를 해선에 투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와키자까의 주특기는 사실 해전이었습니다. 와키자까는 “이순신? 누군지 모르지만 그대의 무운도 이제는 끝이라오”라고 호언을 하며, 합동작전을 펼치라는 히데요시의 명도 무시하고 이순신과의 일전을 서둘렀습니다.

일본 최고의 장수라는 자부심이 너무 강했던지, 와키자까는 왜군의 연전연패에도 상대를 인정할 줄 모른 채 전공에만 눈이 멀어 서둘러 70여척의 전함을 이끌고 견내량으로 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기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겨 놓고 싸우는 장수 이순신은 왜군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해 포위한 후 몰살시켜버리겠다는 웅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순신은 7월 4일, 이억기, 원균의 수군과 결진하여 한산도 앞바다에 진을 친후, 어영담의 5척 전함을 동원해 왜군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해 내는데 성공했습니다.

한산도 앞바다로 들어 온 와키자까의 왜군은 이순신이 미리 구상해 놓은 학익진에 걸려들었고, 조선 수군은 특유의 함포 사격과 뒤이은 강력한 박치기, 그리고 정밀한 마무리 공격으로 59척의 왜선을 격침시켰으며, 일본 최고의 장수라는 와키자까는 겨우 목숨을 건져 도망을 치기에 급급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한산대첩으로서, 진주대첩, 행주대첩과 더불어 3대 대첩으로 불리웁니다.

조선 수군은 50여일 뒤 다시 출병하여 부산포를 공격해 적선 100척을 깨트리는 전과를 올리니, 이로써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조선의 바다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히데요시는 한산대첩으로 인해 해전을 포기하는 등 전쟁의 구도 자체를 변경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불패의 이순신은 조선 백성들에게 구국의 영웅으로 추앙받기에 이르렀습니다.



(66
선조 14
- 열혈남아 홍의장군 곽재우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
의무는 적고(병역? 그런 거 난 몰라), 권리는 무한 (벼슬하여 백성 위에 군림하고, 땅 늘리고~)했습니다.
그 많은 것을 누리던 사대부들은 왜적이 쳐들어왔다는 소문만 듣고는 대거 도망했고, 방어의 책임을 맡은 이들도 대부분 왜적의 모습만 보고는 도망을 쳤습니다.
이러한 때에 사대부의 명예를 지킨 이들이 있었으니, 이는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격렬하게 싸운 의병장 입니다.

최초의 의병장 곽재우는 왜적이 부산에 상륙하고 열흘이 지난 뒤 경상도 의령에서 가산을 털어 의병을 모집한 열혈남아입니다.

의령은 낙동강과 남강이 만나는 왜적 보급로 상의 중요 지점이었는데, 곽재우는 게릴라전으로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습니다.

곽재우는 적의 보급 수송선단이 지나가는 강바닥에 말뚝을 박아두었다가 적선이 여기에 걸려 전복되는 사이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왜적의 수송선단을 괴멸시키는 등 임진왜란의 방향을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곽재우는 이벤트 능력도 매우 뛰어났습니다. 그는 붉은 비단옷과 백마를 타고 스스로를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 : 붉은 옷을 입은 하늘이 내린 장군)’이라 부르면서 신출귀몰하게 게릴라전을 수행하였습니다.

또한 홍의장군이라는 명칭이 유명해지자 여럿에게 자신과 같은 차림을 하게하고는 여기저기에 나타나도록 하여 왜적을 혼란에 빠뜨리는 전술을 구사했습니다.

거듭된 승리로 어느덧 홍의장군 곽재우는 백성들에게는 희망의 이름으로, 적들에게는 공포의 이름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임진왜란 때 활약이 컸던 의병장으로는 곽재우 외에도 고경명, 조헌, 김천일, 김면, 정인홍, 정문부 등 상당수가 있었으며, 1593년(선조 26) 정월에 명나라 진영에 통보한 전국의 의병 총수는 관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2만2600여명에 이르렀습니다.

의병이 관의 지휘를 받지 않는다고 해서 무질서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컨대, 이정암은 황해도에서 의병을 일으키면서 8개 항목의 군율을 스스로 정했는데, 그 내용은 “적진에 임하여 패하여 물러가는 자는 참수한다(臨賊退敗者斬), 민간에 폐를 끼치는 자는 참수한다(民間作幣者) 斬)”는 등 엄격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의병은 아무런 대가도 없이 무능한 관군 대신 지역과 백성을 지키기 위해 절대적 열세의 전력으로 목숨을 바쳐 왜적과 싸웠으며, 임진왜란의 방향을 틀 정도로 큰 공을 세운 경우가 많았으나, 대부분 마지막에는 장렬히 전사하였습니다.



67
선조 15 - 반전의 토대

전회에서 의병의 활약과 희생에 대해 살펴 보았지만, 안타깝게도 왜란 통에 모든 백성이 의병이 되어 왜적과 맞서 싸운 것은 아닙니다.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도망가면서 왕자들을 곳곳에 파견해 백성들을 위무(위로하고 어루만져 달램)하고 근왕병을 모집하도록 했습니다. 이에 따라 함경도로 떠난 임해군과 순화군을 그곳 백성들 중 일부가 붙잡아 왜군에게 넘기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들이 그곳에서도 백성을 수탈하기에 바빴는데다, 조사의의 난, 이시애의 난 이후 이곳 백성들에 대한 차별이 커 원성이 컸고, 게다가 임금이 도망갔다는 소식에 이 지역 백성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지요

한편, 의주에 도착한 선조는 언제든지 요동으로 도망갈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습니다.

그러나 명은 선조의 요동행 타진에, “부득이 오겠다면 인정상 막지는 않겠으나, 그럴 경우라도 인원을 백 명 이내로 하라”라는 싸늘한 답변을 하였습니다.

또한, 조선의 파병요청에도, 조선이 함락된 게 아니라 앞장서서 왜군의 길안내를 한다는 의심을 하여, 여러 경로를 거쳐 현황을 파악한 후 파병하는 것으로 방침을 정했습니다.

그런데 이즈음 조선은 자체의 역량으로 전쟁의 흐름을 바꿔가고 있었습니다.

즉, 이순신의 연이은 승전과 의병들의 분전으로 조선군의 사기가 올라가기 시작했고(우리도 이길 수 있다!), 권율, 김시민 등 유능한 장수들이 지휘를 맡게 된데다, 고려 말 그리고 세종 조에 개발에 힘쓴 천자총통 등 화약무기를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왜군과 싸움다운 싸움을 할 기반을 마련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러한 조선의 저력이 발휘된 대표적인 싸움이 김시민 장군의 진주대첩입니다.

왜군은 이순신으로 인해 수로를 통한 호남 진출이 좌절되자 육로를 통한 호남 진격의 일환으로 진주성을 치기로 했고, 이 싸움에서 김시민은 진주 백성들 그리고 곽재우 등 의병과 힘을 합쳐 장장 6일간의 전투 끝에 왜적을 크게 무찌르는 쾌거를 이루니, 이로써 조선의 혼이 살아 날 토대를 마련하게 된 것입니다.



68
선조 16 - 행주대첩

드디어 파병 결정을 한 명나라.

파병결정 후 처음 조선으로 들어 온 명나라 장수 조승훈은 왜군을 얕잡아 보고 평양성을 공격하였다가 명나라군 4천 5백, 조선군 3천을 잃는 대패를 하였습니다.

그 후 5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온 이여송은 조선으로부터 작전권을 인수한 후 조명 연합군을 이끌고 곧바로 평양성 공격에 나섰습니다.

사실, 전쟁 시작과 함께 패배를 모르며 북진을 계속 해 온 고니시의 제1군은 이즈음 이순신으로 인해 서해 바다를 통한 증원군과 군수품 지원이 막힌 데다 조선군과 의병의 반격으로 고립을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차에 조명 연합군이 물밀 듯이 밀려오자 기세에 밀릴 수밖에 없었고, 결국 평양성 점령 6개월 만에 왜군은 추위와 굶주림 속에 한양으로 퇴각하게 되었습니다.

평양성을 탈환한 이여송은 기세를 타고 남진을 계속했습니다.

한편, 한양에는 함경도의 가토 기요마사 부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왜군이 집결했고, 이들은 강하게 반격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 결론을 내린 후 4만의 병력을 총 동원해 벽제관에 진을 쳤습니다.

평양성에서 판 맛을 본 이여송은 일본군을 일거에 칠 기세로 강하게 밀어붙였으나 일본군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결국 이여송은 대패를 하고 개성으로 도망을 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즈음 광주 목사 권율은 일본군이 한양에 집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양의 일본군을 견제하고 향후 명나라 군대가 한양을 칠 때를 대비해, 2-3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행주산성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벽제관 패배로 겁을 먹은 이여송은 개성에서 내려올 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일본군은 전략상 요충지인 행주산성에 주둔한 조선군이 영 신경이 쓰였던지 무려 3만의 군사를 동원해 행주산성을 공격하였습니다.

권율은 산성 아래에 이중으로 목책을 설치하고 포진지를 구축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고, 곧 적은 해일처럼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미리 준비된 화포와 다연발 신기전, 그리고 죽음을 불사하는 병사와 군민의 대 투혼에 권율 장군의 지략이 더 해진 불퇴전의 전투에서, 일본군은 일곱 차례에 걸쳐 대 공세를 펼쳤으나 모두 무위로 끝나고, 결국 일본군은 한양으로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입니다.

일본군은 행주산성에서의 패배로 요충지를 확보하지 못해 전체 전략 운용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반면에 조선은 일본군을 조선땅에서 몰아낼 절호의 기회를 갖게 된 것입니다.



69
선조 17 - 진주성 대학살

벽제관 패배 이후 명나라 측은 싸움 보다는 강화에 무게를 두었습니다.

이러한 사정은 일본도 마찬가지였는데, 행주싸움 패배로 전황이 여의치 않다고 여긴 히데요시는 이즈음 “순차적으로 퇴각하되 명과 유리한 협상을 이루라”는 명령을 하달하였습니다.

일본군은 안전한 퇴각을 위해 명나라와 담판을 시도해 결국 고니시와 심유경이 만나 명나라가 두 명의 강화사를 일본군에 보내기로 했고, 일본군은 심유경과 강화사, 임해군과 순화군을 앞세우고 퇴각하기 시작했는데, 그 퇴각 행렬은 여유가 넘치는 나들이 같은 행군이었습니다.

권율은 퇴각하는 일본군을 추격하고자 했으나 명나라측은 이를 제지했고, 명나라 군대는 일본군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추격하는 시늉만 하였으며, 일본군은 결국 안전하게 남해안 왜성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히데요시의 뜻밖의 명이 하달되니, 이는 “군사를 총 동원해 진주성을 쳐서 지난날의 수모를 갚아라”는 것이었습니다.

일본군은 10만의 대군으로 진주성을 공격하기로 했고, 진주성에는 진주목사 서예원과 관군, 김천일 의병, 최경희 의병, 충청병사 황진이 이끄는 군사, 고경명의 아들 고종후의 의병 등 대략 1만 명이 집결했습니다.

명나라 측은 일본군의 진주성 공격 시도를 막고자 협상을 시도하다 실패하자 뒤로 물러나 앉아 구경꾼 모드를 취하였습니다.

선조는 진주성 싸움에서 조선병사들의 몰살이 우려된다는 보고를 받고, 명나라 측에 지원을 요청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이때는 이미 진주성이 함락당한지 열흘이 지난 후였다고 합니다.

10만의 일본군은 6월 22일 공격을 시작하였고, 조선군은 죽기로 싸워 버텼으나, 결국 공격 7일 만인 6월 29일 병사들은 사실상 모두 몰살을 당하고 진주성은 함락되었습니다.

진주성에 입성한 일본군은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수만 명의 성 안 백성을 닥치는 대로 살육하니 백성들이 흘린 피가 사흘 밤낮을 흘러 강을 만들었다고 합니다.(일본군의 자축연에 참여했던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 물에 투신했다는 이야기가 야사에 나오는데, 그 때가 바로 이 때입니다)

전쟁이 발발하고 피난길에 오른 선조의 위신은 선위를 주장하는 상소가 여러 차례 있을 정도로 땅에 떨어졌습니다.(왕조 시대에 선위 요구는 반역으로 목이 떨어질 일입니다)

처음 위기에 마냥 몰릴 때는 요동으로 갈 수만 있다면 선위도 할 수 있다고 하던 선조는 상황이 호전되자 선위 문제를 오히려 왕권을 강화하는 방편으로 사용하는 꼼수를 부리기에 이르렀습니다.

선조는 “나는 역사의 죄인이니 선위하겠소”라고 하고, 신하들은 이를 죽기로 말리는, 이런 밀땅이 계속되다가 슬그머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선위의 뜻을 거두었습니다.

백성들은 왜적의 칼과 굶주림에 그 반수가 죽어 나가는데 조정은 선위 논쟁으로 소일했고, 재미를 붙인 선조는 조금만 곤란한 상황에 처하면 여지없이 선위 카드를 들고 나왔습니다.

내 생각에 선조는 조선 최악의 임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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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18
- 아 !!! 인육을 먹는 풍조라니

일본군이 한양을 뜬 것은 4월이지만 선조는 환도를 계속 미루다 10월에야 한양으로 돌아왔습니다.(다시 올라올까 걱정했나?)

전쟁의 참화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참혹했습니다. 전쟁과 굶주림, 역병 등으로 죽은 백성들의 시체가 들판마다 수없이 널려 있었고, 들개와 산짐승들의 먹이가 되었습니다.
한양 도성 밖에는 도성 안에서 갖다 버린 시체들이 곳곳에 산을 이루었고, 농토는 황폐화되어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굶주림이 극에 달한 백성들 사이에는 인육을 먹는 풍조까지 생겨났습니다.

다음은 선조 27년 1월, 사헌부가 아뢴 내용입니다.

- 기근이 극도에 이르러 인육을 먹으면서도 전혀 괴이하게 여기지를 않습니다. 길가에 쓰러져 있는 굶어 죽은 시체에 온전히 붙어 있는 살점이 없을 정도이며, 심지어는 산 사람을 도살해 내장과 골수까지 먹은 일도 있었다고 하옵니다.

사정이 이런데도 조정은 백성을 구제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데 힘을 기울이지 못했고, 군사 역량은 오히려 약화되었습니다.
명의 참전 이전에 이미 자력으로 전세를 반전시켰던 조선군, 목숨을 아끼지 않는 의병, 이 모든 것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조정의 무대책으로 이러한 자발성이 모두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굶주림에 지친 백성들 중 일부는 세력을 형성해 약탈을 하는가 하면 더러는 의병의 행세를 하기도 하였는데, 그 와중에 의병장 토정 이지함이 참소를 받아 제대로 된 증거도 없이 목이 잘려 나가는 일까지 발생하니 의병 운동이 지속될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신망 높은 의병장 김덕령마저 약간의 오해가 있자 자세한 조사도 없이 목을 쳐버리니, 이 후 용력이 있는 자는 모두 숨어 버리고 다시는 의병을 일으키지 않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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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19 - 파탄 난 대 사기극

진주성 대학살을 벌인 일본군은 부산 인근 왜성으로 모두 들어갔고, 명나라 측은 진주성 대학살을 전혀 문제 삼지 않은 채 강화에 열을 올렸습니다. (명 군대가 조선에서 벌인 약탈, 강간 등 만행은 왜군 못지 않았습니다)

조선 조정은 일본군의 진주성 대학살에 대한 보복은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두 나라가 벌이는 강화 협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강화 협상의 두 주인공인 명나라의 심유경과 일본의 고니시는 죽이 잘 맞았고 형세판단도 현실적이었습니다.

즉, 심유경은 “남의 나라에 와서 목숨 걸고 계속 싸울 필요가 어디에 있겠는가”라는 생각을 했고,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 상태로 명나라 정복은커녕 조선 지배도 어렵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명나라 황제와 일본 히데요시의 강화 조건은 이 두명의 생각과는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명나라 황제의 강화 조건은 히데요시가 항복하고, 즉시 철군하며, 영원히 침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히데요시의 강화 조건은 명나라가 황녀를 일본 왕의 후궁으로 보내고, 조선 4도를 일본이 지배하며,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인질로 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이면 강화가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미 강화는 기정사실화 되어 있었고, 양국에 강화를 전제로 한 보고(강화를 위한 사실상의 허위보고)와 조치가 계속 이루어진 상태였으므로, 이제 와서 강화가 되지 않을 경우 심유경과 고니시의 목이 떨어질 판이었습니다.

이에 심유경과 고니시는 기상천외한 사기극을 벌이기로 모의 하였습니다.

즉, 고니시가 히데요시의 항복문서를 가짜로 만들어 심유경에게 전달하고, 심유경은 명나라와 조선의 사신을 항복사절인 것처럼 히데요시에게 보내는 등의 방법으로 양쪽을 속여 일단 강화를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1월에 중국을 출발한 명나라 사신이 11월에 이르러서야 겨우 부산에 도착할 정도로 나라 간의 연결 고리가 느슨하고, 그럴듯한 통신수단도 없었기에, 이런 사기극의 시도가 가능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나 심유경과 고니시의 위와 같은 사기극은 히데요시의 면전에서 발각되었고, 불같이 화가 난 히데요시는 다시 조선침략을 결정했으며, 고니시의 목을 베는 대신, 고니시에게 마지막 기회를 부여하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작전권이 없으니 쯧쯧 참으로 한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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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20 - 이순신을 제거하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 사기극을 벌인 고니시의 목을 베지 않는 대신, 고니시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습니다.
- 지난 원정의 실패는 바닷길과 호남을 장악하지 못한데 있다. 조선 수군을 박살내고 호남을 장악하라. 그리고 조선 백성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신속히 남해안의 성으로 복귀하라. 그러기를 여러 번 하다 보면 조선 왕이 강화를 애걸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강화가 되어가던 차에 일본이 다시 침략을 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정유재란입니다. 또 다시 조선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 신세가 되고 만 것입니다.
조선 수군의 격퇴, 호남 점령이라는 양대 과제를 명 받은 일본군 장수들에게 이순신의 제거는 최우선의 공통 과제였습니다.

히데요시로부터 마지막 기회를 부여 받은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한 작전을 짜기에 골몰했고, 드디어 계책을 마련하였습니다.

조선 침략 당시 제1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제2선봉장 가토 기요마사는 이웃한 지역의 영주들로서, 상인 출신인 고니시는 무장 출신인 가토를 "무식한 놈"으로, 가토는 고니시를 "얍삽한 놈"으로 치부하는 앙숙의 관계였습니다.
이 둘 사이의 관계는 조선에도 많이 전해져서, 가토는 전쟁광인데 반해 고니시는 강화를 하고 싶어 하므로, 고니시는 괜찮은 자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니시가 누구입니까
일본군 제1선봉장으로 부산에 상륙하여 부산성, 동래성에서 조선판 킬링필드를 연출한 살인마 중의 살인마가 바로 고니시 유키나가입니다.

고니시는 가토와의 관계를 이용해 이순신을 제거하기로 하고, 평소 선이 닿아있던 간자 김응서에게 장계를 올리도록 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 고니시가 사람을 통해 전하기를, “강화가 안 되는 것은 가토때문이니 가토를 제거하면 나의 한도 풀리고 귀국의 근심도 사라질 것입니다. 모월 모일 가토가 가덕도에 정박할 것이니 잠복했다 기습해 처치하시오”라고 하더이다.

일본의 낚시 밥을 덜컥 문 선조는 곧 이순신에게 가덕도로 나아가 가토의 선단을 무찌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선조로부터 출정 명령을 받은 이순신은 일본군의 흉계를 단번에 간파하고는 선조의 명을 들을 수 없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그런데 사실은 이순신에게 가토를 치라는 명령을 내릴 당시 이미 가토는 군대를 이끌고 상륙한 상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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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21 - 이순신 제거되다!

이순신이 일본군의 흉계를 간파하고 가덕도 출전을 거부하던 그 때에 맞추어 원균의 장계가 도달하였는데, 그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 신의 생각으로는 수백 척의 수군으로 질러나가 큰 바다에서 위력을 보이면 해전에서 이기지 못해 겁을 먹고 있는 가토는 필히 군사를 거두어 돌아갈 것입니다.
선조는 이순신의 출정 불가론을 자신의 권위에 대한 정면도전으로 간주하고 이순신을 제거하는 쪽의 의견을 수차례 밝혔고, 조정은 선조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이제는 이순신이 가토의 목을 베어 온다 해도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다.(선조)
- 이순신은 성품이 강하고 뜻을 굽힐 줄 모르는데, 무릇 장수는 뜻이 차고 기가 펴지면 반드시 교만해지기 마련이옵니다.(유성룡)
- 위급할 때 장수를 바꿀 수 없사옵니다.(정탁)

뜻을 굽히지 않은 이순신은 곧 한양으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게 되었고, 선조는 이순신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정탁의 “군사상 문제는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으니, 살리시어 후일에 대비하여야 합니다”라는 의견이 받아들여져, 다행히도 이순신은 겨우 목숨을 부지한 채 백의종군의 길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이순신을 파직하고 원균을 통제사로 임명한 조정은 수군이 강력하므로 출전만 하면 뭔가 될 것이라는 환상에 젖어 있었습니다.

조선 수군은 안중에도 없던 이들이 이순신이 연승을 하자, 조선 수군이 원래부터 강군이었던 것으로 착각을 했던 것이지요

선조와 조정은 원균에게 가덕도로 나아가 가토의 왜군을 칠 것을 명했으나, 휘하 장수들은 “불가능한 작전입니다. 장수가 전장에 있을 때에는 임금의 명도 받들지 않는 법입니다”라고 하며 출정을 반대했고, 원균 자신도 이 작전의 성공 가능성이 얼마나 적은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 꾀에 제가 넘어간 원균, 출정을 거부할 명분이 없었고, 결국 그 동안 건조된 전선까지 총 동원된 최대 규모의 출전을 감행하였습니다.

원균은 척후선, 사전 정보도 없이 강행군을 거듭했고, 적선 몇 척이 보이면 유인선인지도 모르고 전력을 다해 쫒곤 하다가 지칠 대로 지쳐 7월 16일 새벽 칠천량에 정박했습니다.

이 때 1,000여 척의 일본 적선이 포위해 들어오니, 조선 수군은 싸움 다운 싸움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무참히 전멸했고, 원균은 육지로 도망가다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일본군이 유일하게 두려워했던 막강 조선 수군은 이렇게 칠천량 바다를 밝히며 사라져 간 것입니다 에라이 밴댕이 속알딱지 선조 네 ~ 이~놈 간신배 원균은 천벌을 받았노라
왕이란자가 어찌 이렇게도 아둔할 수가 있단말인가 임금이란자가 아까운 충성스런 군사들을 모두 잃게 만들었고 진정충신을 몰라보다니 선조야 ~~쯧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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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22 - 명량해전(1)

백의종군의 길을 가던 이순신에게 어머니의 부고가 전해졌습니다. 노모를 걱정하는 마음을 난중일기에 가득 채울 만큼 효자인 이순신.

그는 1597년 4월 19일자 난중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 일찍 집을 나서야겠기에 어머니의 빈소 앞에서 울며 하직했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어서 죽는 것만 못하다. 그리고 곧 그동안 애써 키운 분신과도 같은 자신의 수군이 모두 사라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며칠 뒤 이순신은 선조로부터 3도수군 통제사로 복귀하라는 교서를 받고 곧바로 남해안으로 떠났습니다. 에휴~ 우리 이순신 장군님은 사람도 좋지~내같으면 마~확~그냥~

선조는 이순신을 다시 임명하며 다음과 같이 한탄했다 합니다.

- 출병을 독촉해 이런 일을 했으니, 이는 사람이 아니고 하늘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엥? 우리 장군님이 오죽하면~이런 썩을~)

이순신은 보름 동안 연안 고을들을 샅샅이 훑어 흩어진 장수와 병사들을 불러 모았고, 군량과 무기들도 마련했으며, 병사들도 백성들도 강한 의지를 보였습니다.(장군님과 함께라면!)

그나마 다행인 것은 칠천량 전투에서 경상우수사 배설이 휘하의 함대를 이끌고 진영을 이탈함으로써 판옥선 열두 척이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유명한 상유십이~)

조정은 이순신을 다시 3도 수군통제사로 삼기는 했지만, 수군이 무너진 마당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여겨, 선조는 이순신에게 수군을 파하고 육군에 복속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지랄도 가지가지합니다. 이런게 임금이라고~)

이에 대한 이순신의 답변이 유명합니다.

- 임진년으로부터 5,6년 동안 적이 감히 충청, 전라도를 바로 찌르지 못하고, 퇴각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우리 수군이 그 길목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전선의 수는 적지만 신이 죽지 않는 한 적은 감히 우리를 가벼이 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신에게는 아직 열 두 척의 배가 남아 있나이다. 미천한 신하 이순신은 죽지 않았나이다. 그 유명한 상유십이(尙有十二) 미신불사(微臣不死) 입니다.

이순신은 왜적이 함대를 총동원해 남해를 접수하려 들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단 12척으로 얼마가 될 지 모를 엄청난 규모의 일본군을 격퇴할 특단의 방안을 강구하는데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이순신은 벽파진에 진을 치고 왜군 함대를 불러들였습니다. 과거 한산도에 위풍당당하게 진영을 구축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초라하기가 이를 데 없었습니다.

왜군은 열두 척에 불과한 조선 수군을 짓이겨 버림으로써 지난날의 수모를 한 번에 갚고자 했고, 이를 위해 300척의 배를 동원하였습니다.

왜군이 어란진에 도착하자 이순신은 다음과 같이 출사표를 던졌습니다.

- 병법에 이르기를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이길 것이요, 살려고 한다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또 한 사람이 길목을 막아 지켜도 능히 천 사람을 두렵게 할 수 있다 했는데, 이곳이 바로 그런 곳이다. 울둘목에서 적을 기다려 모조리 수장시키고야 말겠다.

명량해전의 서막이 오르고 있습니다. 두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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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23 - 명량해전(2)

이순신의 판옥선은 한 척이 더해져 13척, 백성들의 어선 100여 척을 전선으로 위장해 후미에 배치하였습니다.

왜군 함대는 물살이 순방향인 때를 선택해 급격한 조류를 타고 울둘목을 일거에 통과해 벽파진에 진을 친 조선 수군을 박살내고자 했습니다.

또한 설령 울둘목을 조선군이 막아선다 해도 빠른 조류를 타고 대규모 선단이 진격한다면 몇 척 안 되는 조선 수군이 견딜 수 없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함선이 많아도 해협이 좁아 한꺼번에 나아갈 수 있는 수는 제한될 수밖에 없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순신이 명량해협을 전장으로 선택한 첫 번째 이유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선 함대의 규모에 겁을 먹고 뒤로 빠지려는 휘하 장수들이었습니다.

이순신은 초요기(招搖旗 - 군사가 전진하거나 행진할 때에 대장이 장수들을 부르고 지휘하던 깃발)를 올려 장수를 부르고는 다음과 같이 독전하였습니다.

- 군법에 죽고 싶은가, 도망가서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울둘목에서는 적이 아무리 많아도 소용이 없으니 이곳만 죽기로 봉쇄한다면 승산이 우리에게 있다. 나와 함께 싸워 한 번이라도 패한 적이 있더냐

조선 함대는 역방향의 물살에도 견딜 수 있도록 배를 횡으로 세우고 특수 제작한 닻을 내려 물살을 버티어 냈습니다.

드디어 어란진에서 출발한 133여 척의 왜군 함대가 강한 순조의 물살을 타고 10-15대씩 대열을 이루어 울둘목을 최대한 빠르게 통과하기 위해 명량해협에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조선 판옥선이 역방향의 물살을 당당히 견디며 배를 고정시킨 채 우뚝 서 포격을 가하자 왜군은 몹시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좁은 해협에 줄줄이 들어선 일본 함대는 조선 수군의 좋은 표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조선 수군이 왜선 선두를 함포로 두들기자 후미의 왜선이 순차적으로 추돌하였고, 이로 인해 왜선의 진영은 급격히 허물어졌습니다.

급한 순조(조수의 흐름)를 타고 빠르게 전진하려던 계획이 오히려 급한 순조로 인해 모두 무위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조선 수군이 울둘목을 가로막고 버티며 선두의 배를 집중 타격하는 방식으로 왜선과 대치하는 사이, 드디어 조류의 흐름이 왜군 쪽으로 바뀌었습니다.

왜군은 조류의 흐름이 바뀔 때까지 이곳에 발이 묶여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순신이 명랑해협을 전장으로 선택한 두 번째 이유입니다.

비록 규모는 상대가 되지 않았으나, 가능한 모든 역량을 총 동원한 함포 사격에 빠른 조류와 강한 판옥선을 이용한 충돌 공격, 숨 돌릴 새 없이 몰아치는 자신감에 찬 거친 공격에 일본 수군은 견딜 재간이 없었고, 마침내 왜군은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명량해전에서 왜선 130여 척 중 30여 척이 격침되었고, 60여척이 쓸 수 없을 정도로 파손되었으며, 최소 1,800명의 왜군이 죽었고, 조선의 전선은 하나도 격침되지 않았으며 100여 명의 전사자가 발생했으니, 실로 세계에 유례가 없는 해전이었습니다.(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이 명랑해전을 치른 후 “참으로 천행이었다”고 수 차례 적고 있습니다)

명량해전으로 인해 일본군의 수륙병진작전이 모조리 무산되었고,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에 분산되어 왜성을 쌓고 농성전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이로써 정유재란을 일으킨 일본은 계속 전쟁을 수행할 동력을 잃게 된 것입니다.



76 선조 24 - 별이 지다!

정유년 2차 침략 시 히데요시의 목표는 조선 땅의 절반인 4도를 확보하는 것이었고, 히데요시는 이를 위해 조선인의 무자비한 살상을 공식적으로 지시하였습니다. 무자비한 살상으로 조선 국왕의 항복을 받고자 한 것입니다.

이에 일본군은 한강 이남까지 갔다가 다시 남하하면서 무자비한 살육을 감행하였고, 그 징표로 일본에 보낸 조선인의 코가 산을 이룰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군이 명량에서 이순신에게 패했다는 소식과 명나라의 2차 파병 소식이 전해져 왔고, 여기에 예상치도 않게 히데요시가 병으로 죽기에 이르자, 일본군은 철수를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명나라 군대도 이번에는 도망치는 일본군을 제대로 박살내자는 의지를 불살랐으나(사기극 주범 심유경의 죽음도 고려한 것임), 울산성, 사천성, 순천 왜교성 싸움에서 조명 연합군은 모조리 참패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명군은 다시 일본군의 철수를 용인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고, 순천 왜교성의 고니시 군도 명군에게 뇌물을 보내는 등 작업을 통해 안전 철수를 보장 받았으며 선조도 일본군의 철수를 용인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큰 문제가 발생했으니, 이는 이순신 이었습니다.

이순신은 명군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결코 적을 살려 보낼 수 없다”며 강경하게 길목을 지켰고, 결국 사천성의 일본 해선이 고니시군을 구원하기 위해 출동할 수 밖에 없게 되자, 이순신은 노량 앞바다에 진을 치고 일본군을 모조리 수장시킬 준비를 하였습니다.

드디어 노량 앞바다에서 최후의 싸움이 벌어졌고, 조선 수군은 멏 배의 왜적을 크게 무찔렀으나 눈 먼 총탄이 이순신의 가슴을 파고들고 말았습니다.(싸움이 급하다. 내 죽음을 알리지 마라)

싸움은 대승으로 끝났으나, 승리의 환호성은 이내 통곡으로 바뀌었고, 오래지 않아 그 통곡은 남도 전역을 뒤덮었습니다.

1598년, 7년에 걸친 전쟁이 끝났습니다.

일개 장수로서 완벽하게 전쟁에 대비했고, 임금과 신하들 그리고 다른 장수들이 도망가기 급급할 때 함대를 이끌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단 한 번도 패하지 않고 23회에 걸쳐 기적과도 같은 승리를 이끌어 낸 이순신!

그토록 무섭고 강력한 일본군이 이순신이라는 이름만 듣고도 두려움에 떨었고, 부하들은 물론이고 백성들에게까지 진심으로 존경을 받았던 무장 이순신!
실로 큰 별이 졌습니다.(노량에서 전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결국은 선조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리라 보는 관점이 많습니다)
ㅡ ㅡ ㅡ ㅡ ㅡ

인구 3분의 1 가량이 줄고 농경지의 반이 소실 되었으며 인육을 먹는 극단의 풍조까지 생길 정도로 측량 불가의 고초를 준 왜란이 종결되었으나, 백성을 보호할 책임과 의무를 가진 선조는 대국민 사과는커녕 논공행상에 있어서 마저 후안무치의 극치를 보여주었습니다.

나라를 보전한 공을 명나라에 돌리는가 하면, 자신을 호종한 자에게는 엄청난 선물을 주었습니다.

반면에 조국 수호에 소중한 목숨과 가산을 바친 의병장들과 백성들을 애써 무시했고, 장수들에 대한 평가도 불공정하기 이를 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그들의 고귀한 정신과 활약상은 점점 더 빛을 발해 오늘을 사는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고 있으니, 이것이 역사의 교훈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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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 1 - 광해의 恨(1)

광해군은 후궁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첫째는 임해군) 공빈은 아들 둘이 서너 살일 때 세상을 떴고, 왕실에는 달리 적자가 없었습니다. 광해는 비록 서자이나 형인 임해군과 달리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도량이 넓어 일찍이 왕재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왜란이 발발하자 도성을 버리고 도망친 선조는 부랴부랴 광해를 세자로 삼고, 곧 다음과 같은 명을 내렸습니다.

- 나는 의주로 가 명에 원병을 청할 것이니, 세자는 남아 군무를 담당하라.

광해는 분조( 임진왜란 때 임시로 세운 작은 조정, 선조는 지는 신의주로 토끼면서도 원조라고 칭함. 병신 육갑을.떨어요)를 이끌고 사실상 적지나 다름없는 요소요소를 풍찬노숙하며 내달았습니다.

세자인 광해가 솔선하여 항전을 독려하고 백성을 위무하자 흩어졌던 민심이 다시 모이고 도망쳤던 사대부와 조정 중신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18세에 불과한 광해가 평양성 탈환 시까지 사실상의 조정인 분조를 이끌며 훌륭히 임금의 역할을 해낸 것입니다.

명나라도 광해의 이러한 활약을 인정했고, 급기야 명나라 장수 송경락은 "영웅의 풍채에 위인의 기상이 드러났다"는 내용의 자문을 조선에 보내기에 이르렀습니다.

선조가 의주에서 요동만 바라보고 있을 즈음, 광해의 활약 소식을 들은 젊은 신하들은 노골적으로 "군국의 기무를 모두 세자 저하께 맡겨 처리하심이 옳은 줄 아옵니다"라는 상소를 올리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임금 자리를 지키기 위해 선조가 생각해 낸 꼼수가 바로 선위 파동입니다.

선조가 왜란 동안 선위 파동을 일으킨 것은 실록에 나오는 공식적인 것만 해도 19회입니다. 뉘미~선조 임마~이게 진짜 이 나라의 임금이가~ 마~~그냥~콱~

에휴~어쨌든~이순신 장군께서 졸라 싸울실때, 조정의 신하들은 선조의 선위 파동이 있을 때마다 선조임금에게 죽기 살기로 이를 말려야 했고, (전하~통촉하여 주시옵소~뭐 이런거였겠지요)

세자인 광해는 며칠씩 끼니까지 굶어가며 차가운 뜰 앞에 꿇어 앉아 명을 거두어 달라는 읍소를 하여야 했으니, 전쟁 통에 국력 낭비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선조는 이런 방법을 통해 흔들리는 권력을 움켜잡았지만, 떨어진 위신까지 회복할 수는 없었습니다.

선조는 도망 다니며 제 한 몸 건사하기 바빴던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 볼 때마다 어린 나이에 위풍당당하게 나라의 구심역할을 한 광해에게, 이순신에게 느껴야 했던 열등감을 또 다시 느껴야만 했습니다.

선조의 이러한 질투와 열등감은 미움으로 변해갔고, 이는 결국 광해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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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 2 - 광해의 恨(2)

왜란 통에 어쩔수 없이 광해를 세자로 책봉한 선조는 명나라에 세자책봉 승인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런데 광해를 그렇게 높이 평가한 명나라 조정이 광해의 세자책봉을 반대하였습니다.

이는 명나라 황제의 태자 책봉 문제와 맞물려 명나라 조정이 "장자로서 세자를 삼아야 한다"는 입장을 유지해야만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선조는 명나라의 상황과 입장을 파악한 후 세자 책봉 승인을 위한 노력을 대폭 줄이는 한편, 나아가 광해를 사실상 세자로 인정하지 않는 기묘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덧붙여 광해의 앞날에 암운이 드리운 일이 또 하나 생겼으니, 이는 선조의 새 장가였습니다.

선조는 전쟁 이후 의인왕후가 죽자 새 중전을 맞이했는데 이 때 선조의 나이 51세, 새 중전 인목왕후의 나이 17세, 세자인 광해의 나이가 26세였습니다.

광해의 고민은 깊어갔습니다.
- "명나라는 세자 인정을 거부하고, 아버님은 날 미워하신다. 이제 또 새어머니께서 대군이라도 낳게 되면 나는 어떻게 되는가"

광해의 우려대로 인목왕후는 곧 선조의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을 낳습니다.

이즈음 정권을 잡은 북인은 정인홍이 이끄는 대북, 유영경이 이끄는 소북으로 분열되었습니다.

이 중 소북의 리더 영의정 유영경의 장기는 왕의 의중을 잘 읽고 그 뜻에 부합하는 능력이 출중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유영경은 이와 같이 생각했습니다.
-임금의 뜻은 광해가 아니라 영창대군에게 있다. 명분만 있으면 바꿀 것이다. 명분은 "적자승계"이다. 10년만 임금이 더 산다면 틀림없이 세자는 바뀐다. 영창대군에 올인한다.

선조는 자기 마음을 알아주는 유영경을 더욱 총애했고, 덕분에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유영경의 무리가 조정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후궁들과 심지어 상궁 나인들마저 광해를 임시직 계약직 비정규직 세자로 여기고 무시하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상황이 이쯤 되면 인목왕후라도 중심을 잡고 후궁 등을 단속하여야 할 것인데, 그러기는커녕 영창대군에게 세자 의상과 비슷한 옷을 입히기까지 하는 등 광해의 마음을 몹시도 불편하게 하는 행동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이러한 두려움과 외로움과 울분이 뒤섞인 사면초가의 상태를 광해는 전쟁이 끝난 후 무려 10년이나 견디어 냈으니, 그 속에 품은 한이 참으로 컸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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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 3
- 임금 광해는 어느 길을 갈 것인가

선조 40년 10월, 선조는 갑자기 쓰러져 자리에 누웠습니다.

죽음을 예감한 선조는 오만 가지를 생각했으나 차마 두 살에 불과한 영창대군으로 어찌해 볼 수는 없었고, 결국 비망기를 내려 장성한 광해에게 전위 또는 섭정을 하도록 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갑자기 선조가 몸져누워 위와 같은 뜻을 밝히자 급해진 것은 영창대군에 올인한 소북파의 유영경과 인목왕후였습니다.

인목왕후는 현실을 어찌할 수 없는 것으로 인정하고 선조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밝혔으나 유영경은 여러 이유를 들어 선조의 뜻에 반대를 하였습니다.

반면에 정인홍을 비롯한 대북파는 유영경이 세자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불충을 저질렀다며 유영경을 강하게 공격하였습니다.

대북과 소북이 건곤일척의 목숨을 건 대립을 하고 있던 이때에 칼자루를 줜 이는 당연히 임금!

선조는 다소간 기력을 회복하자 소북 유영경의 손을 들어 주고 정인홍을 귀양 보내버렸습니다.

이로써 광해를 지지하는 대북파의 패배가 분명해 보였으나, 한강의 앞물이 뒷물의 흐름을 거부할 수는 없는 법!

선조는 1608년 2월 향년 57세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재위 장장 41년, 초유의 임진왜란을 겪었고 4색당파의 분화와 당쟁을 지켜 본 선조, 권력유지에는 큰 수완을 보였으나 특별히 내세울 만한 업적 하나 없이 그렇게 살다 갔습니다.

숱한 장애를 딛고 33세의 나이에 마침내 보위에 오른 광해, 일찍이 왕재를 인정받았으나 16년의 세자 생활은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살얼음판을 걷는 하루 하루였습니다.

창업자인 태조에 견줄 만큼 나라 곳곳을 누볐고 문종에 견줄 만큼 실무 경험이 풍부한 새 임금 광해를 백성과 신료들은 진심으로 반겼습니다.

그러나 신료들 중 일부의 마음속에는 불안감이 늘 남아 있었습니다. 그동안 광해를 너무 핍박한 것이 마음에 걸린 것이겠지요

과연 광해는 어떤 길을 갈 것인가? 풍부한 경험을 살려 모두의 소망에 부응할 것인가 아니면 쌓였던 16년의 한을 푸는 길로 나아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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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 4 - 폭군 광해!

광해가 왕위에 오르자마자 대북은 광해를 대놓고 반대한 소북의 유영경을 탄핵했고, 유영경은 곧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이와 거의 동시에 광해의 형인 임해군의 역모 고변이 있었는데, 광해는 겉으로는 "내 형이 그럴 리가 없다"라고 하면서도 거론된 이들과 임해군을 모두 죽이니, 조정 신료들의 불안감은 더욱 커져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광해는 전혀 개연성이 없는 역모 고변임을 잘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사건을 부풀려 수많은 관련자들을 모조리 죽이는 옥사를 수차례 벌렸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억울한 죽음이 발생하였습니다.(영화 “광해”에서 광해의 충신으로 나오는 허균 역시 석연치 않은 역모 사건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광해가 벌인 여러 옥사 중 대표적인 것은 “계축옥사”입니다. 이에 대해 잠시만 살펴보겠습니다.

광해는 즉위 후 유영경과 임해군을 죽였고, “봉산옥사”로 수백 명을 죽이는 과정을 통해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으면서도, 근본적인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했습니다.

점차 성장하고 있는 영창대군의 존재 자체가 광해를 불안하게 한 것이지요.

이와 같은 정국이 이어지던 1613년(광해군 5)경, 문경새재(조령)에서 도적이 상인을 죽이고 은자(銀子) 수백 냥을 탈취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은 그 주모자가 서인의 거물 박순의 서자 박응서, 서양갑 등 유력 집안의 서자들(7명)인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진술이 나왔습니다.

즉, 박응서와 서양갑의 공초에서 “거사 자금을 확보해 김제남(영창대군의 외조부)을 중심으로 왕(광해군)과 세자를 죽이고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말이 나왔던 것이다.

광해는 직접 국문에 나서 허름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사건을 일파만파 부풀려 거대한 역모 사건으로 만들어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과 수백의 관련자를 모조리 처형하였습니다.

또한 거기에 그치지 않고 인목대비의 아들 7세의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강등해 강화도로 유배했다가, 그 이듬해 강화부사 정항을 시켜 밀실에 가두어 증살(蒸殺)(아궁이에 불을 지펴 쪄 죽이는 것)로 죽이고 말았습니다.

졸지에 아버지와 아들을 잃은 인목대비에게 광해는 아들이 아니라 원수였습니다.

인목대비는 왕실의 법통 상 광해의 어머니였지만, 이제 두 사람은 함께 있기에는 너무나 먼 관계가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광해는 ‘어머니’ 인목대비를 1615년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옮겨가게 하고 외부인의 출입을 막았으며, 3년 후 ‘서궁(西宮)’으로 명칭을 격하시켰습니다. 이것은 실질적으로 인목대비를 폐위한 것과 다름이 없는 조치였습니다.

일찍이 대내외적으로 왕재를 인정받은 광해이지만, 16년에 걸친 혹독한 경험과 권력에 대한 갈망으로 인해 묘호도 받지 못한 폭군 중의 폭군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것 역시 무능한 선조의 업보라 할 것이고, 아울러 크게 보면 공화정이 아닌 왕정의 한계가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