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맥 * 지맥/기맥 - 4

조은산 2012. 1. 23. 18:46

 

 

 

 

 

 

영산기맥 1구간




2009.11.07 (토)

산길 : 새재봉~장성갈재

거리 : 9.7km

 

 


구간거리

남창골~순창새재~새재봉 (5km) 

새재봉분기점~1.3~삼성산(-0.6)~2.7~입암산~5.7~장성갈재.....9.7km

Cartographic Length = 16.3km / Total Time: 06:50 

 

 

01(새재~갈재).gpx

 

 

 

 

 

 

 

한강기맥하면서는 예맥산악회를 그럭저럭 따라다녔다. 부산에서 손수 움직이기가 너무 버거운 거리라 산악회를 이용했는데, 큰 버스에 길게 앉아 한숨 자고나면 들머리에 내려주고, 산행 마치면 다시 쓸어 담아 집에까지 데려다 주니 그 이동의 편함이야 말할 필요가 없다. 반면, 대간부터 구정맥, 이후 여러 지맥에서 여지껏 몸에 익은 산행행태(스타일)를 바꾸기가 쉽지 않았다.


늦은 밤 부산을 출발해 들머리 도착하면 새벽 3~4시다. 여러사람이 모인 단체이다보니 개인별 취향은 묻힐 수밖에 없고 단체의 생각대로 움직이게 되는데, 적당한 시각까지 대기할 형편도 못되고 그대로 ~거의 자동적으로~ 출발이 된다. 구간 안배의 형편상 거리가 짧은 구간에서는 09시에 산행을 끝낸 경우가 있었는데, 어떤 이는 집에 일찍 가서 좋다는 얘기도 있었으나 도무지 적응이 안되는 바라. 영산은 비교적 거리도 멀지 않아 우리끼리 예전 스타일로 돌아가기로 했다. 우리라 해봐야 장산과 딸랑 둘이다만 혼자가 아니니 이 또한 다행이다.


둘이 합의보기를, “양 보다 질을 추구하자, 돗내기 산행은 이제 그만”이다. 하루에 얼마씩 몇 구간으로 언제까지 마치겠다가 아닌, 되는대로 가는대로 가기로 했다. 그러다보니 전체 산행계획은 아예 없다. 한동안 어둠에 시달린(?) 터이라, 두 눈 제대로 뜨고 가자는 항목도 추가했다. 새벽 4시에 집을 출발하니 3시간 정도에, 아침밥 사먹고 천지자연이 하루를 시작하는 시각에 우리도 들머리에 섰다.


백양사 역이 있는 북이면 ‘사거리마을’은 꽤나 번화한 편이라 아침밥 하는곳도 여러곳이다. 여느 역이나 그렇듯이 역 앞에는 택시가 서너대 대기하고 있어 택시를 수배하는 번거로움도 없다. 백양사역 넓은 광장에 차를 대놓고 택시로 남창골로 들어간다(9,000원).












(시간표)

07:37 남창골 주차장

08:26 불바래기

08:54 순창새재

09:04 영산기맥 분기봉 (새재봉)

09:51 삼성산 분기봉

10:16 장성새재

11:00 산성(×651m)

11:26 북문

11:45 갓바위

12:55 시루봉

13:47 노령

14:20 장성갈재









남창골 주차장 (170m)

남창계곡은 몽계폭포에서 내려오는 하곡동골, 불바래기에서 내려오는 새재골, 입암산성 마을을 통해 내려오는 산성골과 갓바위에서 흘러내린 은선골 네 계곡물이 합해져 황룡천을 이룬다. 이 물은 장성호에 잠시 머물고는 황룡강이란 이름으로 흐르다가 나주에서 영산강이 된다.


전남대수련원이 있고 정면으로 '남경산기도원' 간판이 보인다. 기도원 정문 옆으로 난 수레길로 들어간다 [갓바위5km, 입암산성4.0km] 이정표 방향이다. 임도형태가 뚜렷하지만 자동차는 들머리부터 진입불가다. 혹시나 대간길의 여느 고갯길처럼 잘하면 차를 들이밀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택도 아닌 생각이었다. 택시기사님도 그랬지만 국립공원지역이 아니었더라면 郡에서 도로를 뚫었을거란다. 이런 장면에서는 궁닙공원이 기특해 보이기도 한다.


얼마안가 만나는 예전의 매표소는 ‘시인마을’이란 간판을 달고 있다. 여기서 상왕봉, 몽계폭포는 우측이고 [몽계폭포 1.0km], 새재는 직진이다. 지리산의 벽소령 작전도로처럼 널찍하게 열려있는 ‘남창골 자연관찰로’는 울긋불긋한 낙엽이 두텁게 깔려있어, 시 한수 읊기에 충분한 풍경이다만 시상(詩想)을 글귀로 만들어 내기에는 역부족이다.

 

 

(남창골 들머리)


 

 


 

 


(몽계폭포와 하곡동 계곡) 남창 탐방안내소 목조 건물을 끼고 오른쪽으로 1km 정도 오르다가 큰 바위벽 못 미쳐 오른쪽으로 50여m 나가면 상왕봉에서 내려온 시원한 폭포수가 우렁찬 소리와 함께 쏟아져 내리니 이곳이 바로 몽계폭포다. 하곡 정운용의 필체로 추정되는 蒙磎瀑布 네 글자가 바위에 선명하다. 하곡 정운용은 조선 중종 37년(1542)에 장성군 북일면 사동리에서 태어나, 고창 현감 때는 뜻을 같이 한 분들과 장성 남문에 의병청을 만들어 의병을 모아 각처에서 왜적과 싸워 큰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탐방안내소에서 왕복 50분소요.


 

편안히 걷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는 돌길이라 발아래도 살펴 밟아야 되는 길이다. 출발 10분만에 다시 갈림길이다. 직진은 입암산성이고, 기맥 접근을 위한 순창새재는 우측으로 꺾인다. 오르막이라 할 것도 없이 평지나 다름없는 수레길이 불바라기까지 이어진다.


갈림길.

지도를 보면 장성새재까지는 300m를 남겨둔, 뚜렷한 갈림길이 있는 곳은 아니다. 길은 곧장 올라가나 우측으로 넓은 분지를 이룬 곳으로 예전에 마을이 있었음직한 곳이다. 여기저기 감나무가 보이고 축대와 밭터가 보인다. 수레길은 새재까지 올랐다가 우측으로 꺾이나 우리는 여기서 질러가기로 한다. 우측으로 희미한 길 흔적을 찾아 들어가면 집은 없지만 마을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있다. 옛지도(1918)에 ‘鳥峙里’로 표기되어 있을 만큼 분명한 마을터다. 새재마을을 한자로 억지로 맞추니 鳥峙里가 된것일게다.


불바래기 (330m)

새재마을터를 벗어나면 장성새재까지 올라갔다 돌아온 수레길과 만나고, 10분 더 가면 우측 비탈에 일군 밭에 푸른색 배추밭이 나오더니 앞에 보이는 골짝에 사람 사는 집이 있다. 남창골 입구에서 우리걸음으로 50분 걸렸으니 거진 한 시간 거리가 되는 깊은 골짜기에 민가가 있다.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아무런 기척이 없고 감나무에는 따기를 포기했는지 노란 감이 주렁주렁하다, 내 키가 닿는 가지에 달린거 하나를 따  닦고 자시고 할것도 없이 한 입 물었다. 겉은 달고 속은 떫으니, 겉 다르고 속 다른 감이로다.


‘불바래기’는 내장산 국립공원 안에 있는 오지마을. 행정구역은 정읍시에 속해 있지만 전기도 안들어오는 곳에 단 한 가구 살고 있다. 불바래기란 이름은 전국적으로 여러 곳에 있는데, 옛날 화전을 일궈먹고 살던 시절 밭을 만들기 위해 불을 질렀다는 것과, 가을 단풍 때면 온 산이 불에 타는 듯 붉어 붙여진 것이라는 얘기가 있는데, 이곳 불바래기는 어느 쪽일까.


그 집 앞에서 우측으로 도랑을 건너가면 서서히 경사가 급해진다. 고도 200m를 올리게 되지만 그리 길지는 않다. [내장10-01] 표지목이 있는 지능선에 올라 숨한번 고르고, 우측으로 휘돌아 가면 순창새재다. 남창골에서 5km 가량되는 거리지만 1시간 반만에 올랐다.

 

 

 

 

(불바래기)

 


순창새재 (514m)

호남정맥 마루금이다. 우측은 상왕봉이고 정면 뚜렷한 길로 정맥 리본들이 걸려있으나 올바른 마루금은 입간판 뒤쪽 낙엽위로 보이는 희미한 길이다. 분기봉까지는 호남정맥과 일치하니 정맥리본을 따르면 되겠다 싶어 몇걸음 들어가보나 그 길은 골짝으로 내렸다가 까치봉으로 올라가는 국립공원에서 내놓은 탐방로다.

 



영산기맥 분기봉 (새재봉 535m)

호남정맥 하면서 여기를 지난게 05년 8월이었으니 4년전인데, 풍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 때 박성태님이 걸어놓은 ‘영산기맥 분기점’ 표시판을 봤지만 사실 꿈도 안꿨다. 기맥이고 지맥이고 모두 ‘남의 일’이었는데 불과 4년만에 다시 되돌아 왔으니,  한 4~5년 정도는 내다보는 안목도 필요하겠다만 인생살이 어디 뜻대로 되는게 있나. 두터운 낙엽위로 희미한 흔적만 갈라질 뿐 아무런 표지판도 없어 쓸쓸하다.


급한 내리막 비탈을 내려가면 능선에는 온통 산죽밭이다. 빽빽한 산죽밭 사이에 겨우 남겨놓은 발자국을 쫒아 나가면 이파리 떨어진 나무사이로 불룩솟은 봉우리가 다가온다. 그 봉우리 정점에 하늘을 떠받치듯 우뚝솟은 기둥바위가 보인다.


마당바위 (×568m)

불룩솟은 암봉을 왼쪽으로 돌아가다가 우측 비탈로 기어오르면 열댓명은 둘러앉을 마당바위이고, 돌아보는 조망이 훤하게 열린다. 좌에서 우로 지나온 능선과 망해봉 신선봉 상왕봉 능선이 펼쳐지는데 높은 봉우리는 모두 구름 속에 숨었다. 내일 비가 온다는 예보에 따라 하늘에서도 사전준비작업을 하는가 보다.


삼성산 분기봉 (530m)

마당바위에서 내려서는 길에도 산죽은 여전하고, 나무사이로 삼성산이 잠깐 보일뿐 조망은 갑갑하다. 25000 지형도에 아리쏭하게 표기된 ‘새재’는 이렇다할 흔적도 없고 삼성산 분기봉 역시 그저그런 봉우리다. 삼성산(△547.9)은 0.8km 거리에 있다만 들러볼 생각이야 없다.


×530봉(삼성산분기봉)에서 왼쪽으로 급히 꺾어 내려서고 ×536봉까지는 순탄한데, ×536봉에서 새재로 내려서면서 방향잡기가 난해하다. 다들 그랬는지 리본도 없고 길 흔적도 드러나지 않는다. 우로 좌로 조금씩 벗어났다 싶으면 다시 방향을 고쳐잡으면서, 고도 400정도 내려오니 길이 살아난다. 

 

 

 

 

(장성새재)

 


장성새재(325m)

펑퍼짐하게 넓은 안부 고갯길이다. 한여름에는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빽빽한 숲길이지만 나무마다 얼마 남지 않은 잎을 마저 털어내는 듯 낙엽이 비 오듯 날린다. 옛날에는 고갯마루에 마을과 주막이 번성했다고 하나 흔적도 찾을 길 없다.


임도 방향이 잠시 혼란을 가져온다. 내려선 자리에서 본, 정면의 임도는 남창골에서 올라온 즉, 우리는 오르다가 미리 불바래기로 꺾어 갔는데, 계속 따라왔더라면 이곳까지 오게된다. 그리고 왼쪽으로 꺾어가는 임도를 따라가면 순창새재로 올라가고, 우측(북)으로 난 소로길은 정읍으로 간다.


내려선 자리에서 눈에 보이는대로 정면 넓은길로 가다보니 GPS는 원점(출발점)을 가리킨다. 무턱대고 갔더라면 남창골로 도로 내려갈 뻔했다. 특히 객꾼이 유념해야할 지점이다. 입암산 들머리는 남창골 내려가는 길을 100m가량 따르다가 우측으로 올라가는데, 우리는  곧장 방향을 잡아(210도) 흔적도 없는 숲을 가로질렀다. 잠시 후 왼쪽에서 올라온 뚜렷한 길을 만난다.


입암산 오름길은 금방 내려섰던 건너편 비탈보다 더 곧추섰다. 고도 300을 올리는 작업이다. 꾸역꾸역 오르다보니 정상 직전에 뒤쪽으로 훤히 트인 전망바위가 나온다. 내장산 쪽이 훤하게 보인다.


산성(×651m)

전망바위에서 3분 오르면 산성 울타리다. 성벽에 올라서고 북으로 성벽을 따라 돈다. 잠시가면 산성마을터가 다 내려다보이고 우측 끝으로 갓바위 봉우리도 보인다. 입암산 전역을 구름이 덮고 있는데  정읍(입암)들판만은 햇빛이 훤히 비춘다.


지형도에 표기된 입암산(笠岩山) 정상 위치가 애매하다. 방금 처음 올라섰던 지점이 651m이고, 산성을 잠시 따라가면 더 높은지 어떤지 구별도 가지 않는 곳에 ‘입암산’ 표기가 있다. 나무가 빽빽하고 성벽으로 계속 이어질 뿐 어디가 정상인지 구분이 안된다.

 

 


입암산성

입암산성의 축성시기는 삼한시대로 추측되고 있다. 후백제시대 나주를 왕건에게 점령당한 견훤의 중요한 요새이기도 했던 이 곳은 고려 고종 43년(1256년) 몽고 6차 침입때의 격전지였음이 고려사절요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말 몽고에 대항할 때 송군비 장군이 몽고군을 물리친 성으로도 유명하며, 조선시대에는 왜적에 맞서 대항하던 윤진장군이 장렬히 전사한 곳이기도 하다. 4곳의 포루와 2개소의 성문, 3개소의 암문이 있었으며, 9곳의 연못 외에 샘 14곳이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 / 전라도 / 전주부 / 정읍현(井邑縣)

본래 백제의 정촌(井村)이었는데, 신라에서 정읍현으로 고쳐서 태산(太山)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고부(古阜)의 속현(屬縣)으로 삼았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진산(鎭山)은 내장(內藏)이다.(현의 동쪽에 있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순창(淳昌)에 이르기 19리, 서쪽으로 흥덕(興德)에 이르기 17리, 남쪽으로 장성(長城)에 이르기 23리, 북쪽으로 태인(泰仁)에 이르기 9리이다. 호수가 1백 30호요, 인구가 8백 58명이다.

입암산 석성(笠巖山石城) [둘레가 2천 9백 20보요, 안에 시냇물이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아니한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10년 경인(1410년)

2월29일 (병인) 경상도·전라도 등지에 산성을 수축하다.

경상도(慶尙道)·전라도(全羅道) 여러 고을의 산성(山城)을 수축하였는데, 창녕현(昌寧縣)의 화왕산(火王山), 청도군(淸道郡)의 오혜산(烏惠山), 감음현(感陰縣)의 황석산(黃石山), 선주(善州)의 금오산(金烏山), 창원부(昌原府)의 염산(廉山), 계림부(雞林府)의 부산(夫山), 남원부(南原府)의 교룡(蛟龍), 담양부(潭陽府)의 금산(金山), 정읍현(井邑縣)의 입암산(笠巖山), 고산현(高山縣)의 이흘음산(伊訖音山), 도강현(道康縣)의 수인산(修因山), 나주(羅州)의 금성 산성(錦城山城)이다.

 

 


북문

북서로 향하던 산성이 서쪽으로 꺾이고 산성 축대가 열린 통로가 있다. 여기서 북쪽은 한우재를 통해 오봉산으로 갈 수 있다. 다섯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오봉산이란다. 성곽을 따라 내려가면 북문이다. 왼쪽 [남창주차장]에서 올라온 길로 사람들이 연이어 올라온다. 우리가 나온쪽으로는 [탐방로 아님]이다.


넓어진 길을 따라 일반 산객들과 함께 간다.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은 학생들도 보인다. 조금씩 나아감에 따라 갓바위의 형체가 조금씩 드러난다.


나무계단 위쪽에 거대한 선바위가 있는데 버섯처럼 윗부분이 뭉퉁하고 기둥은 가늘다. 다른 곳에서는 별것도 아닌데 일일이 이름표를 붙여놨던데, 여기는 아주 특이한 모습이다만 둘러봐도 이름표는 없다.


갓바위 직전봉 (625m)

계단을 올라서면 갓바위가 지척으로 다가오며, 마치 거대한 사자머리로 보이기도 한다. 이 봉에서 산성은 남쪽으로 내려가고, 이제 산성밖으로 나가게 된다. 내려선 안부에서 기맥은 왼쪽 [주차장5.4km]으로 내려가고, 갓바위로 오르는 철계단이 있다. 오르고 내리도록 두 줄로 되어있어 서로 엉키지는 않겠다. 

 

 


갓바위(×638m)

거대한 사자머리처럼 생긴 봉우리 위에 흔들바위처럼 생긴 또 하나의 바위가 있는데 올라서서 굴려봐도 흔들리지는 않는다. 나무데크로 만든 전망대에는 사람들로 빼꼭하다. 입암저수지와 입암 들판이 넓게 펼쳐지고, 조망판에는 변산반도와 새만금간척지까지 표시가 되어 있지만 흐린 날씨탓인지 보이지는 않는다.


입암과 입암산의 지명은 갓바위가 마치 갓(草笠)을 쓴 것 같은 형상에서 유래되었고, 입암 주민들은 남쪽 산정의 암봉을 올려다보면 뚜렷이 다가오는 갓바위를 정상으로 부르고 있다는데 어찌하여 정상석 하나 없을까. 지나오면서도 봤지만 산성둘레에는 정상부라 할만한 곳도 없었다. 옛지도에는 갓바위봉을 ‘입암산’으로 표기했는데 왜 새지도는 어문데를 표기하고 있는지, 산성 울타리 바깥쪽에 있어 외면당한 것일까.

 

 

 

(갓바위)



  

 

 

 

 

 

 

(입암저수지)

 


 

다시 계단으로 내려서고, [주차장] 팻말따라 내려가다가 적당한 자리잡아 점심을 먹고 간다. 바람이 세게 불어 느긋하게 꼭꼭 씹을 여유도 없다. 우물우물 대충대충 넘기고 다시 배낭 둘러맨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주차장4.9km]은 산성 울타리 바깥쪽의 은선골로 해서 남창주차장으로 가는 길이다. 현 지도에는 표기가 없지만 옛지도에는 산성마을 안쪽은 城內里, 은선골은 隱仙里라는 지명이 보인다. 사람이 거주했음을 말한다.


삼각점 발견

자세히 보니 지도에도 표기가 없고, 모양만 비슷할 뿐 삼각점이 아닌것도 같다. 봉우리도 아닌 길가에 그냥 박혀있다. 어쨌든 오늘구간 유일하게 만난 삼각점(?)이라 반갑기도 하다. 곧 이어 공식적인 탐방로는 왼쪽 은선골로 내려가고[주차장4.4km], 정면 마루금은 [탐방로아님]이다.


이미 이런 장면에는 단련이 되었듯이 혹시나 볼세라 얼른 퍼뜩 숨어든다. 한 봉우리 넘고 보이는 시루봉은 거저 밋밋한 봉이다. 아까와는 반대로 돌아본 갓바위가 구름속이다.


시루봉(×649m)

지형도 표기지명은 아니고, 입암산 등산안내도에 나오는 이름이다. 입암면에서는 어른봉, 애기봉으로 불린다는데, 애기봉은 어딜 말하는지 모르겠다. 특이한 아무것도 없어 그대로 내려가면 정면으로 뾰쪽솟은 바위봉이 능선상에 솟아있다. 그 뒤로 호남고속도로와 장성갈재가 보인다. 방장산은 오늘 그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 모양이다.


정작 시루봉은 그 봉우리에 서면 아무것도 볼 수 없고, 장성갈재에서 북이면으로 내려가는 도로에서 쳐다보면 그 위용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장성갈재쪽에서는 송곳처럼 솟은 하나의 봉우리로 보이고,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쳐다보면 앞의 암봉이 마치 코뿔소의 뿔처럼 보이기도 한다.


시루봉에서 갈재로 내려서는 길은 마치 절벽을 하강하는 듯 하다. 볼록솟은 암봉은 암벽 전문가나 올라붙을만하고 우리같은 지팡이족은 옆으로 비켜가야 되는데 잠깐 우회하는게 아니라 고도 100m 가량 떨어지고 다시 끙끙거리며 기어 올라야하는 판국이다.

 

 

 

(시루봉 아래 암봉)

 

 


그리 크지도 않는 암봉 하나를 이렇게 멀리 돌아야하나 싶다. 7-80도 되는 비탈에 진땀을 뺀다. 뒤에 오는 장산의 오늘 조짐이 영 좋지않다. 우리집 앞에 대놓은 차를, 언넘이 이사를 나간다고 차를 빼달라는 전화가 바리바리 오는가 하면, 시루봉 내려서다 팔뚝과 무릎을 바위에 갈고, 연이어 미끄러진다. 평소와 다른 조짐에 각별히 신경을 더 써보지만 오늘 짜여진 일진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암봉을 피해 우측으로 한참 내렸다가 다시 기어올랐다. 무시무시한 바위벽을 뒤돌아보니 그 중간쯤에 아는 리본이 하나 나풀거린다. 어쩌자고 저기를 기어올랐단 말인지 대단하다 못해 무모해 보인다.


아래쪽 암봉은 이번엔 왼쪽으로 우회한다. 마치 건너편 능선으로 갈아타는듯 벌어지지만 다시 휘돌아 붙게 된다. 암봉 아래 마루금에 붙으니 축대와 집터를 만나고 비로소 능선이 순해진다. 이 능선상에 절이라도 있었던건지 분명 인위적인 터다.


[南平文公突伊之墓] 그냥 눈으로 읽어야지 소리내 읽으면 실례가 되겠다. 내려가면 묵은 헬기장이다. 되돌아보면 시루봉 암봉이 뾰족하게 보인다. 연이어 헬기장 터가 나오고, 자꾸 시루봉을 돌아보게 되는건 그만큼 힘이 들었음이다. 두 번째 헬기장 아래로 호남선 기찻길이 지나가고 이어 골처럼 깊게 파인 고갯길인 노령에 이른다.




노령(蘆嶺 270m)

금북정맥의 차령과 마찬가지로, 옛길 삼남대로의 ‘갈재’가 이곳이다. 현 지형도에 표기된 1번국도상의 장성갈재는 새 도로를 내면서 이름을 빌려간(뺏아간) 것이고, 새 도로가 나기전의 옛길 ‘갈재’가 바로 여기다. 1918년 발행 지도를 보면 장성에서 정읍으로 넘어가는 유일한 길이다. 한양에서 남도로, 또는 남도에서 한양으로 오가는 사람은 모두  이 고개를 넘었다. 발령을 받아 임지로 가는 수령방백이나 과거보러 한양으로 가는 이도령은 물론이요  남도로 유배를 떠난 모든 사람들, 송시열과 윤선도, 강진으로 간 정약용도 여기 갈재를 넘었을 것이다.

 

 

예부터 갈대가 많은 곳이라 ‘갈재’로 불렸건만, 현 지도에는 노령으로 표기되어 있어 혹자는 일제가 갈재를 노령(갈대蘆)으로 왜곡했다하나(월간山 2005.11월호), 일제시대 이전인 산경표와 대동여지도 모두 蘆嶺으로 표기하고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조선왕조실록(중종20)에는 葦嶺(위령)으로 기재했는데,  한자 노(蘆)와 위(葦) 모두 갈대를 뜻한다. 즉 이곳에 예부터 갈대가 많아서 갈재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흔히들, 옛 우리말 이름과 다른 한자명칭이 나오기만 하면 주저없이 “일제가...” 라는 접두사를 붙이곤 하는데 이는 잘못이다. 물론 일제시대에 한자로 빠뀐 지명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기도 한다만 이는 소위 말하는 민족정기를 말살키 위해, 또는 왜곡을 위한 개명이 아니라 일제가 이 땅에 들어오기 이전부터 모든 공부(公簿)상에는 ‘한자표기 원칙’이 적용되면서 한글을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의 오류다. 


산경표만 하더라도 여러종류의 본(本)에 따라 한자가 다르게 표기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작성자의 의도일 수도, 오류일 수도 있는 것이다. 속리산 천황봉 역시 옛문헌에 따라 천왕으로, 또는 천황으로 표기가 다른걸 볼 수 있다. 상주군에서는 이를 천왕봉으로 개명을 했는데(인접 보은군에서는 천황봉을 유지), 원래의 제 이름을 찾겠다는데야 반론이 있을 수가 없겠지만, 여기서도 ‘일제의 민족정기 운운’이 인용된게 안타까울 뿐이다. 인왕산은 일제가 발행한 지도에는 仁王山인 것을, 1961년 대한민국정부에서 새로 지도를 발행하면서 仁旺山으로 표기한 어처구니없는 경우도 있다.


살펴보면, 이런 현상들은 일제의 민족정기 운운과는 전혀 상관없이 조선시대의 한글은 상놈의 글이고 한자는 양반의 글이라는 사대사상의 결과물에다가, 지도 제작자마다 나름의 주관이나 혹은 무지의 결과로 추정된다. 즉, 조선시대 당시에 현지 주민들은 "갈재"라 불렀는데 이를 문서로 작성하면서 쓰는 사람에 따라 蘆자 또는 葦자를 취한 것이라.  조선시대 공문서는 오직 한문만 쓰였다.

 

 


옛 정취나마 느껴보고자 고개 남쪽을 살펴보니 고개로 올라오는 흔적이 뚜렷하다. 소나 말이 끄는 작은 수레 정도는 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골을 이룬 바위벽면에 음각된 글자가 눈에 띈다.

 

 

 

(노령)

 

 

 



府使 洪侯秉瑋 永世不忘碑  壬申九月

 

‘부사 홍후병위 영세불망비’ 나름대로 한자를 해석해보면,

府使(부사)는 관직, 洪(홍)은 성씨, 侯(제후 후)는 조선시대 현령이나 현감을 지내는 등 지방 수령 벼슬을 한 사람에게 성 다음에 붙이는 명칭. 秉瑋(병위)는 이름, 永世不忘碑(영세불망비) 세상이 다하는 그날까지 잊지 말자는 비석...

 

壬申九月의 임신은 매 60년마다 돌아오므로 년대를 추정하기가 쉽지않은데 이는 비석을 세운 날일 것이다. 홍병위라는 인물이 어느 기록에 나온다면야 더 명쾌한 답이 나오겠다만 지금으로서는 ‘여기까지’일 수밖에 없다. 다만, 이 각자(刻字)를 통해서 옛길 노령의 더 선명한 흔적을 찾은거 같아 잔잔한 흥분마저 인다.

 

 

‘홍병위’ 검색하면 나온다.

- 순조 5년 生(1805년). 헌종(憲宗) 12년(1846)에 식년시(式年試) [진사] 2등(二等)으로 급제.

- 고종 8년(1871년)에 홍병위에게 장성부사를 하사하였다.

 

- 갈재와 노아낭자(蘆兒娘子) (정읍의 전설 : 김동필)

정읍시 입암산(笠岩山) 기슭의 관구(關口)로서 십 리가 넘는 험한 재가 있다. 일명 장성(長成)갈재, 노령(蘆嶺)갈재라 부른다. 이 재 때문에 이곳을 넘어 다니는 사람들의 불편은 너무도 컸다. 행인들의 불편을 덜어 주고자 옛날 장성부사(長成府使)로 있던 홍병위(洪秉瑋)라고 하는 사람이 재 위에 있는 많은 암석을 뚫어서 통행하는데 큰공을 세웠다.

 

 


한편, 아쉬운 바는 이런 조상님들의 발자취와 애환이 서려있는 옛길들이 그대로 내팽겨진 채 묻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옛길은 그 자체로 유형문화재 대접을 받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지자체마다 서로 시합이라도 하듯이 각자의 업적이나 사업을 개발하고 확장하면서 어찌 이런데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것일까.


노령 옛길을 뒤로하고 올라선 봉우리는 벙커가 묻혀있다. 6-25때 쓴 벙커인지는 몰라도 북으로 향하고 있다. 입암산성이 돌로 쌓은 옛 산성이면, 이 벙커는 두꺼운 콘크리트로 구축한 현대식 산성이겠다. 몇십년 몇백년 후의 후손들은 현재 우리가 입암산성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이 콘크리트 산성을 관찰할지도 모를 일이다.


다음봉에도 땅에서 솟아나온 굴뚝을 보니 여기도 지하벙커가 있는 모양이다. 묵은 헬기장을 하나 더 지나면서도 날카롭게 솟은 시루봉으로 눈길이 자주 돌아간다. 송전철탑을 지나 내려서면 장성갈재인데 우리가 나온쪽으로는 역시나 [탐방로 아님]이다.

 

 


 

(돌아본 시루봉)

 

 

 



 

장성갈재 (260m)

목포에서 신의주까지 이어지는 1번국도다. 일제시대에 착공이 되고 지역별로 순차적으로 개통이 되었다 한다. 물론 지금처럼 깨끗하게 아스팔트가 덮힌 시기야 오래되지 않았을 것이다. 옛길 노령은 이 도로가 뚫리면서 점차 낙엽에 묻혔을 것이고, 또 현재 땅속으로 4차선 새도로가 뚫리고 있으니 이 장성갈재 또한 서서히 사람들로부터 멀어질 것이다.


입암산과 방장산 사이의 낮은 능선인 노령부터 장성갈재까지가 전라남도에서 북으로 가는 대표적인 고개가 된다. 국도1호선과 호남선 철도, 호남고속도로가 모두 여기를 통과한다. 이 고개 남쪽은 전남 장성군 북이면이고 북쪽은 전북 정읍시 입암면이다. 전남에는 목란마을이, 전북에는 군령마을이 고개 첫 마을이며 모두 예전에는 주막거리가 있었을 것이다. 옛날 과거길 가는 선비들로부터 소금장수 소장수 새우젓장수에다 우리처럼 괴나리봇짐 둘러맨 수많은 민초들의 발길이 바빴을 것이다.


갈재를 한자로 갈대 蘆자를 써 蘆嶺으로 했다지만 다른 시각도 있다. 우리 토박이 이름으로 풀어보면 갈재는 갈라지는 고개, 즉 입암산과 방장산을 가르거나, 물을 가른다(분수령)를 뜻하는게 아닐까. 실제로 주위를 둘러봐도 갈대는 보이지 않는다. 목란마을에 갈애바위가 있는데 역시 갈재에서 옮겨진 이름이다.


갈재 남쪽 목란마을 아래 원덕리 원덕제(저수지) 북쪽에 암봉으로 이루어진 봉우리가 있다. 이 암봉을 바라보면 눈, 코, 입이 확연한 미인의 모습인데 조선 중엽 이전에는 처용암이라고 불렀으나, 천하일색이었던 갈애 전설이 얽혀있다.

 
 

갈애바위 (가래바위)

지금으로부터 약 오백여년 전 장성땅 목란마을 갈재고개 아래에 주막집이 하나 있었다. 그곳은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라 많은 사람들이 그 주막에서 묵어갔다.

어느날 주모는 태몽을 꾼다. 오색영롱한 구름이 가래바위를 애워싸더니 바위틈에서 어여쁜 처녀가 나오는 것이었다. 처녀는 부인에게 다가와 넙죽 절을 하며 “저는 가래바위의 정기를 받아 부인의 몸을 빌려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하더란다. 이 후 주모는 꿈에 본 처녀와 똑같은 아기를 낳고 가래라 이름 지었다.

가래는 커갈수록 아름다움이 더해갔고, 시와 가무에도 남다른 재주를 보였다. 그러자 주막에 들른 선비들이 가래의 미모에 반해 며칠씩 묵어가기도 하고, 과거도 잊은채 떠날줄을 몰랐다.

그러던 어느날 전라도 관찰사가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가는 도중에 목란을 지나다가 가래라는 처녀에게 반해 허송세월을 하는 자가 많아 피해가 막심하다’는 상소를 올리자 왕은 그냥 두었다가는 인재가 모두 절단 나겠다며 가래를 없애라고 장수를 보내나 명을 받은 장수조차 가래의 아름다움에 정신을 빼앗겨 주저앉고 만다.

왕은 크게 노하여 선전관에게 친히 어룡도를 내리며 모두를 죽이라는 명을 내린다. 목란으로 내려온 선전관은 장수의 목을 치고 다시 가래를 내리쳤다. 순간 괴이한 바람소리와 하늘에서 여인의 통곡이 들려오는 기이한 일이 벌어지기에 선전관은 때늦은 후회를 하나 이미 엎질러진 물. 가래는 얼굴에 칼을 맞아 눈이 일그러진 채 죽었는데, 이 일이 있은 후 산봉우리의 바위가 한쪽이 일그러진 사람얼굴 모습으로 변했고 마을사람들은 가래의 억울한 혼이 바위에 스몄다며 해마다 위령제를 지내주었다...

 

 

(갈애바위)


 

 

갈재에 내려서서 방장산을 쳐다보니 까마득하기 말을 할 수 없다. 시간상으로야 세 시간을 잡으면 해지기 전에 양고살재에 떨어지겠다만 아침부터 전화에 시달리고 평소와 다른 장산님의 일진 등등을 핑계삼아 여기서 ‘그만~’ 하기로 한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그만산악회’다. 까짖꺼 둘이서만 합의보면 바로 실행이 가능하니 이 얼마나 수월한가. 해방감마저 맛본다.


아침에 탔던 택시를 부르니 금새 달려온다. 아침에 남창골 들어가면서 양고살재까지 갈꺼라 했었는데, 기사님 왈, 그럴줄 알았다나. 갈애바위를 물으니 조망이 잘되는 곳에 차를 세워준다. 백양사역에 대놓은 차를 회수하고, 역앞 도로따라 남쪽으로 500m 가량 내려가니 마을회관 목욕탕이 있다. 장날과 토,일요일에만 문을 연단다.(택시비7,500원 목욕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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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새재~갈재).gp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