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맥 * 지맥/기맥 - 4

조은산 2012. 1. 23. 18:47

 

 

 


 

 

영산기맥 2구간




2009.11.28 (토)

산길 : 갈재~문수산

사람 : 조은산 장산

거리 : 18.2km


 

 

구간거리

장성갈재~4.0~방장산~1.1~고창고개~2.9~양고살재~3.2~솔재~7.0~문수산......18.2km

(문수산~휴양림임도~금곡영화마을 4km)

Cartographic Length = 19.7km / Total Time: 07:45

 

 

02(갈재~문수산).gpx

 

 

 

 

 

(대동여지도 : 입암-노령-반등산-고사치-송현-문수사-취령산)

 

 

 

 

 

방장산과 반등산

동쪽 갈재에서 오르면 첫봉인 변산지맥 분기봉인 ×734봉과 담양21 삼각점이 있는 744.1봉 그리고 페러글라딩장으로 사용되는 민둥봉인 ×640봉. 이 세봉우리의 이름이 서로 뒤죽박죽이다.


현재의 지형도마다 표기가 다르다. 최신 25000 지형도에는 두 곳(×734, ×640)에 ‘방장산’ 지명표기가 되어 있고, 구 5만지형도에는 ×734봉은 방장산(方丈山), ×640봉은 방문산(方文山)으로 따로 표기되었다. 25000지형도의 서쪽 ×640봉에 표기된 方丈山은 方文山의 한자가(文, 丈) 비슷한데서 발생한 오기(誤記)로 보인다만, 방문산은 또 뭔가. 게다가 정작 최고봉인 744.1봉에는 아무런 표기가 없다.


△744.1봉에 전북산사랑회가 세운 스텐기둥에도 이름이 첫글자인 방자만 남아있고 가운데자는 긁혀있다. 산이름에 논란이 있다는 얘기다. 지리산 무등산과 함께 호남의 삼신산이라는 방장산이 정확한 자리를 못잡고 왔다갔다하는 중인 것이다. 국가기관(국토지리정보원)에서 중심을 못잡고 있는게 근본 원인이다.


(산경표) 半登山(井邑南十里 興德南十五里 長城北四十里 高敞東五里 分三歧)


방장산의 옛 이름은 반등산이고, 더 예전으로 돌아가면 방등산이다.

×640봉을 지난 능선 아래 방장굴 앞에 세운 방등산가(方等山歌)에 근거하듯 백제시대에는 방등산이었고, 반등산의로 바뀌었다가 후에 방장산이 된 것이다. 각 바뀐 시점은 알 수가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전라도(全羅道) 고창현(高敞縣)【산천】

반등산(半登山) 현의 동쪽 5리에 있는 진산이다. 신라 말기에 도적이 크게 일어나 이 산에 웅거하여 양가의 자녀가 많이 잡혀갔다. 장일현(長日縣)의 아낙이 그 가운데 있었는데 노래를 지어, 그 지아비가 곧 와서 구해주지 않는 것을 풍자하였다. 곡명을 방등산(方等山)이라고 일컫는데, 방등이라는 말이 바뀌어 반등이 되었다. 장일현은 곧 장성(長城)인 듯하다. 구왕산(九王山) 현의 남쪽 25리에 있다. 취령산(鷲嶺山) 현의 남쪽 13리에 있는데 우리산(牛利山)이라고도 일컫는다. 화시산(火矢山) 현의 서쪽 15리에 있다. 송현(松峴) 현의 동쪽 10리에 있는데 장성현 경계이다.



예전(백제시대)의 방등산이 현재에 방장산이 되었는데, 이 방등산이 정확하게 언제부터 방장산이 되었는지는 명확치 않다. 원래 방등산으로 불리었으나 도적떼가 쫓겨나고 난 뒤, 모든 백성을 포용한다는 의미로 방장산으로 불리게 되었다거나, 방등이 부르기 쉽게 ‘반등’으로 불려 반등산(半登山)이 되었다가, 조선조에 와서 사대주의자들이 중국의 명나라의 삼신산(방장, 봉래, 영주)의 본을 따라 방장산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다는 장성군 홈의 설명도 맞지 않다. 산경표와 대동여지도에 이어 일제시대(1918) 지형도까지 半登山이고, 1961년 건설부 고시에서 반등산과 방장산이 혼용되었다가 2003.5.17.에 방장산으로 확정되었다.



국토지리정보원의 산 지명현황표

지명번호

표기지명

시도

시군구

읍면동

도엽명

고시지명

고시일자

4688000645

방장산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백암리

사가

반등산

19610422

4518000452

방장산

전라북도

정읍시

입암면

연월리

사가

방장산

19610422

4579001216

방장산

전라북도

고창군

신림면

가평리

사가

방장산

19610422

 


최근고시

 행정구역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백암리

 지명종류

 산

 고시일자

 2003-05-17

 고시지명

 방장산

 한자

 

유래

노령산맥의 줄기로(742m) 장성과 고창 경계로 백제가요 방등산가의 소재 장소임

 



위 표를 살펴보면 최초고시(1961년)는 주소지별로 3곳인데, 장성 정읍 고창의 경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3군의 경계라면 현재의 변산지맥 분기봉인 ×734봉이다. 2003년 개정고시에서 산이름이 반등산에서 방장산으로 바뀌었는데, 현재의 삼각점이 있는 △744.1봉을 방장산으로 정한걸 알 수 있다.


물론, 산이 왔다갔다 한 것이 아니라 고시가 왔다갔다 했음이다. 일전에도 정리한 적이 있지만 우리나라 산 이름이 이런 식이다. 즉, 장성군 정읍시 고창군에서 각각 하나씩 갖고 있으니 우리나라에 방장산은 3개가 존재하는 것이다. 방장산뿐만 아니라 지리산도 세 개이고, 각 경계에 있는 산은 지역마다 따로 고시를 한다. 이리되다보니 우리나라 산이 몇 개냐 하는 질문에 그 누구도 대답을 못하는 것이다.


1961년의 고시는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보면, 5-16 군사정변 한 달 전이니 뭔 정신이 있었겠냐마는 이를 2003년까지 40년간 그대로 두었다는 점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위 고시 중 정읍시와 고창군의 지명고시는 폐지가 되었으면 좋겠다만 아직 그대로이다.


어쨌거나, 방장산은 최고봉인 △744.1봉이 맞고, 방등이나 반등은 방장산의 옛 이름으로 알 일이며, 방문산은 없다. 또, 몇몇 등산 안내도에 적힌 벽오봉 억새봉 투구봉 갈미봉 쓰리봉 등등은 고시지명이 아닌 현지에서 부르는 이름인 모양이나 이것도 안내도마다 표기가 다르므로 정비가 되어야겠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대동여지도를 보면서

동에서 서로, 입암-노령-반등산-고사치-송현-문수사-취령산으로 이어지는데 반등산 북쪽골짜기는 현재에도 용추계곡이고 고사치는 양고살재, 송현은 솔재로 바뀌고, 취령산은 현재 문수산이나 장성군에서는 ‘축령산’이다. 취령산(鷲灵山=鷲靈山)의 취를 축으로 읽은 것은 양산 통도사의 영취산(靈鷲山)이 영축산이 된것과 같다. 









(시간표)

07:30 갈재

08:28 ×734m

09:38 방장산

10:04 고창고개

10:31 활공장

10:57 갈미봉

11:18 양고살재 

12:25 솔재

13:18 △399.8m

14:09 들독재

15:15 문수산

15:33 휴양림 임도

16:23 금곡마을


 

 



지난차에 백양사역이 있는 사거리마을의 동태파악은 다 된 바라, 아침밥은 준비하지 않고 바로 내달렸다. 4시에 집을 출발하고, 둘이서 교대로 핸들을 돌리며 3시간만에 백양사IC를 내려선다. 아침식당이 여럿이라 골라먹는 여유까지 있다. 기중에 ‘향숙이네 식당’이 끌려 들어갔는데 기대한(?) 향숙이는 아주 노숙한 아주머님이 되어 있다. 그래도 5천원짜리 콩나물국밥은 달달 긁어 먹을 만큼 향이 있었다.


바로 옆에 버스터미널이라 시간표를 보니 정읍행은 07:45이라 30분이 아까워 택시를 불렀다. 당연히 저번에 한번 탔던 그 기사님이다. 그 때 양고살재까지 간다고 했다가 갈재에서 끊은걸 기억하시는지라 어디까지 갈꺼냐 물으신다. 축령산 금곡영화마을 이라 하니 미심쩍은 듯 “많이 먼디~?”


“첨 잡은 목표만 생각해야지, 중간에 자꾸 딴 생각하믄 안되능겨~...” 오늘은 필히 기사님의 성원에 보답이라도 해야겠다. 중간에 딴 생각 없기다. 익숙한 듯이 산길 들머리 바로 앞에 차를 대준다.






갈재(268m)

전라남도 목포시에서 평안북도 신의주시까지 이어지는 1번국도 [갈재정상입니다 해발 220m] 도로표지판이 우리를 환영하는 듯 하다. 도로 옆 국기게양대에 만국기가 춤을 추며 바람의 세기를 알려준다. 방풍자켓을 꺼내 입었다.


농장으로 들어가는 철문 우측으로 들머리가 있다. 잠시 오르니 왼쪽에서 올라온 수렛길을 만나고 오름길 시작이다. 여기서 방장산까지 장장 470m을 올려야 하는 비탈이니 서두르다가는 다치겠다. 한발한발 느린 템포로 내딛는다.


첫봉 (510m)

등줄기가 끈적해질 무렵 오름이 다한다마는 아직은 절반밖에 안된다. 갈재 건너편의 벙커봉과 같은 역할을 했는지 교통호가 이리저리 파져있고 나무가 둘려쳐있어 조망은 없다. 오늘은 나무숲 때문이 아니라 전체 대기가 뿌연게 지척의 봉우리도 보이지 않는다.


살짝 내려선 안부 왼쪽으로는 금줄 여러가닥에 [산삼재배단지] 플랭카드가 걸려있다. 갈재 입구 농장이 산삼재배 농장이었던 모양이다.


510봉은 전초전이었다. 안부를 지나고는 아예 바짝 쳐든다. 땀구멍이 있는대로 다 열려 줄줄 샌다. 지난번 둘이서 갈재에 앉아 계속 갈까말까 갈등을 하다가 그만뒀는데, 한 고집 부려 그대로 계속 갔다가는 중도에 오도가도 못하고 퍼졌지 싶다. 역시 우리의 통빡은 탁월했음을 재확인한다.


변산지맥 분기점

한 삼십분 올랐나. 이 높은 곳에 잘 꾸어진 묘가 있다. 高興柳公이다. 아직 x734m봉 정점은 멀었고, 묘 앞에서 우측으로 반듯한 길이 갈라진다. 바로 국립공원 변산반도의 끝까지 가는 변산지맥이다.


×734m

잠시 더 올라가니 큰 바위덩어리들이 삐죽삐죽 솟은 봉우리다. 바위 틈에 스텐기둥의 정상표지판이 서 있고 정상부다운 터는 없다. 이 봉이 방장산의 첫봉이자 변산지맥 분기봉인 734봉이다. 누구는 쓰리봉이라 한다더만 완, 투, 쓰리 해서 쓰리봉인지, 써래봉에서 와전된건지는 몰라도 산 이름 함부로 지을 일 아니다.


734봉은 단일봉이 아니라 여러 암봉들로 이어진다. 이리저리 바위 사이로 구불구불 돌아가면서 나아가는데 아무바위에나 올라서면 무등산, 지리산 반야봉까지 보인다는 곳이다만 그런 조망은 시도때도 없이 아무 때나 보여주는건 아니라는 듯, 오늘은 도통 오리무중이다. 일기예보를 제대로 보지 않았는데 나중에 보니 다음날 내릴 비의 전조였다. 하루 늦게 내릴 비에 감사라도 해야하나.


변산지맥이 정읍시와 고창군을 경계지으니, 이제부터 고창땅이다. 곳곳이 조망바위라 맑은날은 쉽게 지나지 못할 지경이겠다만 보이는게 없으니 걸음은 빨라진다. 잠깐씩 옅어지는 박무 속에 앞봉이 겨우 보일 뿐이다.


673봉 직전 우측 가평리 갈림길이 있는 안부에는 멧돼지가 파헤친 흔적이 선명하다. 요즘 부쩍 극성인 멧돼지에 신경이 안쓰일 수가 없는데 이 높은데까지 올라온 넘은 더 포악한 넘이 아닐까. 산행 마칠 때까지 염두에 두긴 했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래야 고작 나무에 기어오르는 일 밖에 더 있겠나.


×673m봉을 넘어 내려선 용추폭포 갈림길 안부에는 산악회에서 깔아놓은 방향표시 쪽지가 널려있어 흥겹던 기분을 망쳐놓는다. 성남청산 한뫼 중앙 청우...산악회다. 방장산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반듯하게 서 있는데 뭐하러 이중 삼중으로 표시판을 깔아놓는지, 놓았으면 걷어 가기나 하지. 이런 넘들이 입만 열면 자연사랑 산사랑을 떠들 것이다.


헬기장 (730m)

예전에는 봉화대터였다고 한다. 남쪽으로는 깎아지른 절벽이고 북으로도 훤히 열려있어 봉수대 자리로는 손색이 없겠다. 희미하긴 해도 방장산이 우뚝 솟은 자태로 눈앞에 다가온다. 담양소방서 구조목(현위치: 큰바위2)이 있는데, 담양소방서가 여기까지 관할하는가 보다.

 

 

 

 

 

 

 

방장산 (方丈山 744.1m △담양21)

넓지 않은 정상부에는 스텐기둥 표시판과 등산안내도, 2등삼각점이 있다. 조망이 흐린게 더없이 아쉬운 장면이다. 734봉에서부터 줄지어 솟아있는 암봉들과 험난한 산세로 인해 주위에 내장산, 백암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리, 무등과 더불어 호남의 삼신산이 될 수 있었던 걸까. 산술적인 높이야 그리 못하더라도 호남평야에서 우뚝솟은 기상으로 전혀 눌리지 않는 당당함이 있다.


남쪽 아래 백암리의 수도골에는 절이 많았다하고, 예부터 한말에는 천주교인들의 은신처가 되기도 했단다. 동으로 헬기장봉과의 사이에 유독 흰바위로 이루어진 절벽이 있었는데 이 바위에서 백암마을 이름을 짓고, 삼한시대의 성으로 전해오는 벽오산성(碧梧山城)이 벽오봉을 남긴 것으로 짐작된다.


조망을 못건진 아쉬움은 도리없이 훗날을 기약할 뿐이고, 서편에 희미한 민둥봉이 이만한 높이로 어서오라 부른다. 이제 내려서면 목포 앞바다까지 700되는 봉우리도 없다.


고창고개(536m)

송전철탑을 지나 내려선 안부가 고창고개다. 십자가처럼 생긴 이정표가 우측으로 용추계곡(신림)을 가리킨다. 용추라는 이름도 한둘이 아니지만 이곳 용추는 대동여지도에도 표기가 되어있다.


[페러행글라이딩장]을 향해 올라가면 전기톱 소리가 요란한데 한 두 대가 아니다. 편백나무 숲이 시작되는가 했더니 간벌작업중인 인부들과 맞닥뜨린다. 한 두명이 아닌 앞의 620봉 사면 전체에 걸친 광범위한 작업장이다. 그들이 잘라놓은 나무가 등로를 뒤덮음은 물론이다. 작전상 후퇴라 하나, 도리없이 왼쪽 아래 임도로 내려서면서 620봉은 본의 아니게 생략이 된다.


봉우리 오르기는 힘들지만 옆구리로 질러가는건 장난이다. 10분도 안결려 620봉 지난 안부에 도착되고, 임도는 계속해 올라가지만 이제 산길로 들 때다. 마침 양지쪽이라 배낭 내리고 빵 하나씩 나눠먹고 간다. 왼쪽 아래 [방장산자연휴양림]에서 올라온 길도 보인다.

 

 

 


활공장 봉우리 (633m)

어디나 그렇듯이 활공장은 까까머리 민둥봉이다. 인근에 세워놓은 표지판을 보면 이 봉을 억새봉, 지척에 ×640봉을 벽오봉, 또 (남쪽) 다음봉을 반등산으로 표시해 놓기도 하고, 조금전 건너뛴 620봉이 벽오봉인지 도무지 일관성이 없이 표지판 마다 제각각이다. 이런 표지판은 없음만 못하다.


서쪽 땅바닥으로 내려앉는 산줄기따라 신림면과 고창읍이 갈라지고, 고창시가지가 내려다보인다. 활공장이라 그런지 바람은 더 세게 불어 오래 바라보지도 못하겠다. 돌아서 나아가니 전주이공 묘 앞에 노인 두 분이 앉아있다. 아래쪽에서 올라온 임도가 끝나는 지점이고, 우측 아래로 [옹달샘70m] 팻말이 있다.


이어진 봉우리에 한 가족이 있는데 엄마가 고함을 질러 대다가 문득 나타난 우릴 보고 겸연쩍어 한다. 여기도 묘가 있는데 방장산을 바라보고 있다. 묫자리도 그렇지만 이 지역의 조상님 섬김이 다른 곳과 다름을 알 수 있다.


방장굴 갈림길

전반적인 내림길로 가다가 문득 이정표를 만난다. 왼쪽 아래를 가리키는 [방장굴 90m]에 지체없이 좌틀했다. 꼴랑 90m를 생략할까. 경사는 좀 있어도 통나무 계단으로 길도 잘 내놨다. 2분 거리다.

 

 

 

(방장굴)

 

 

 

 

 

 

 

 

 

 

 


방장굴

방등산가 안내판이 서 있고 거대한 바위아래 굴이 있다. 입구는 낮아 허리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고, 내부는 너댓평 정도에 길쭉한 바닥이고 높이는 충분해 나같이 짧은 사람은 선 자세에서도 걸리지 않는다. 도둑놈들에게는 소굴로, 빨치산들에게는 은신처로, 우리 산꾼들에게는 비상시 훌륭한 대피소가 되겠다. 안내문에 방등산가가 자세히 적혀있다.


方等山歌(방등산가) 

남편이 구하러 오지 않음을 탄식한 여인의 노래

方登山 在羅州屬縣 長城之境 新羅末 盜賊大起 良家子女 據此山 多被擄掠長日縣之女

방등산 재나주속현 장성지경 신라말 도적대기 량가자녀 거차산 다피로략장일현지녀

亦在基中作此歌 而諷其夫不卽來救也

역재기중작차가 이풍기부불즉래구야


[해석] 방등산(方登山)은 나주의 속현(屬縣)인 장성(長城) 경계에 있다. 신라 말엽 도적이 크게 번져 이 산에 은거하여 양가(良家)의 자녀들을 많이 잡아가는 등 노략질을 했다. 이때 장일현(長日縣)의 한 여인이 이 가운데 있었는데, 이 노래를 지어 그 남편이 구하러 오지 않는 것을 한탄했다.


작자, 연대미상이다.「고려사」권71, 삼국 속악조에 가사는 전하지 않고 노래의 내력만 전한다. 「고려사」에는 제목이 「방등산(方登山)」으로 되어있고 「증보문헌비고」에는 반등산곡(半登山曲)으로 되어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백제시대 5대 가사에 선운산가, 방등산가, 무등산가, 지리산가, 정읍사가 있는데,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의 정읍사(井邑詞)와 방장산가, 선운산가 셋 모두 남편을 그리며 우는 아낙의 노래다. 백제 여인들의 님사랑하는 마음은 지금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모자람이 없지 싶다. 어찌 백제만 그럴까 치술령에서 남편을 기다리다 돌이 된 여인도 있는데. 

 

 


선운산가

백제시대에 지어진 작자. 연대 미상의 노래. 노랫말도 한역사(漢譯詞)도 전하지 않는다. 다만 고려사 악지와 증보문헌비고에 각각 [선운산], [선운산곡]이라는 제목과 해설이 기록되어 있어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長沙人 征役過期不至 登禪雲山 望而歌之

백제 때에 장사(長沙) 사람이 정역(征役 나랏일에 복역 하는것)을 나갔는데 기한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므로, 그의 아내가 남편을 사모하다 선운산에 올라 이 노래를 불렀다.


방장산 등산로이다보니 일반 산객들이 하나둘 올라온다. 양고살재에서 산행을 시작한 분들이라 ‘벌써 내려가느냐?’ 묻는다. 올라오는 사람에게는 숨넘어가는 까꼬막이지만 내려가는 나는 수월하기 그지없다.

 

문넘어재, 갈미봉에도 퇴색된 나무 안내판이 서 있지만 벽오봉이 지맘대로 왔다갔다 하는 그림이라  더 이상 들여다보고 싶지 않다. 배너미재에서는 더 이상 마루금을 고집하지 않고 우측 내리막으로 간다. 실제 능선으로는 들이민 흔적도 없다.

 

 

방장사

배넘이재에서 잠깐 내려가면 대나무숲이고 이어 절집 같이 보이지 않는 방장사 앞이다. 지도에 표기는 ‘임공사’인데 이름이 바뀐것인가. 불경소리가 잔잔히 흘러나온다. 양고살재로 내려가는 길은 방장산 출구가 된다. 시원한 조망을 못 본 아쉬움이야 있지만 미련은 짧게 남기고 방장산을 벗어난다. 


 

 


 

 

 

 


 

양고살재 (318m)

15번지방도로인데 1번국도인 장성갈재보다 더 번잡다. 많은 등산객들과 이어지는 차량행렬에 관광안내소도 있고, 건너편 비탈에는 ‘양고살재 해발300m' 표석이 있다.


고개 이름에 대한 유래를 찾아보면 가장 많이 보이는 글이 “병자호란 때 고창 출신 무장 박의(朴義)가 누루하치의 사위인 양고리를 살해(楊古殺)했다는 역사적인 연유에서 이름 붙여졌다”이고,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명유래는, “큰 재(峙), 작은 재(峙) 두개가 있다고 하여 양고령이라 부르며 양고령이 발음 변화로 양고살재라 부르게 되었다.”고 되어 있는데, 장성군 죽청리 마을에는 이와는 다른 유래가 보인다.

 

 


죽청리 청운(靑雲)마을

일제 말에 웃고살터·아랫고살터·망골 등지에 33호가 살다가 6·25를 만나 22명이 죽고 전 가옥이 소각되었다. 그 후 26호까지 되었으나 현재 10호가 살고 있다. 창녕조씨가 140여년전에 들어왔고 많은 성씨들이 거쳐 갔으며 그 외는 6·25후에 입향하였다.

동명유래 : [고살재]아래에 있어 [고살터]라고 했는데 한문표기는 [고사치(古沙峙)]이다. [고시이(고실)재]에서 유래된 듯하다.

(長城郡史 http://history.jangseong.go.kr/sibbs3/etc/history/index.asp?hid=08010100)

 

 


또, 세종실록 지리지(권제151, 16장) 장성현에 기록되기를,

-長城縣 古百濟古尸伊縣 新羅改岬城郡 高麗改長城郡 爲靈光任內 明宗二年壬辰置監務 本朝因之-

(해석) 장성현은 본래 백제의 고시이현인데 신라에서 갑성군으로 고쳤다. 고려에서 장성군으로 고쳐서 영광의 임내로 하였다가 명종 2년 임진에 감무를 두었다. 본조에서도 그대로 따랐다.

 


즉, 장성의 옛 이름이 고시이(古尸伊)이고, 고시이로 가는 고개라 고사치가 되고, 고사치가 고살재로, 웃고살 아랫고살 보태서 양고살로 변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대동여지도의 표기 역시 古沙峙이니, 누루하치의 사위 楊古를 殺했다는 내용은 "카더라 통신" 외에는 찾을 수 없다. 영월지맥 태기산 아래 양구두미재 역시 양쪽 구두미마을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솔재 들머리는 우측 도로 아래쪽에 있는 공영주차장 안쪽이다. 정면 비탈을 올라가봐야 바로 공영주차장으로 떨어지게 되어있다. 임도 수준의 널찍한 길에 편백나무 숲이 조림되어있어 산책하기 좋은 길이다만 그 길은 왼쪽 사면으로 돌아가고 우리는 곧장 올라간다.


400m쯤 되는 봉우리인데 정점 직전에서 우측으로 돌아 능선에 올라선다. 비교적 조은길 따라간다고 휘돌았지만 능선에 올라서고부터 고생문이 열린다. 길흔적만 희미할 뿐 가시잡목이 긁어댄다. 20분 가량 잡목을 헤치며 나가다가 북이면과 북일면을 가르는 ×421봉 직전에서 우측으로 틀어 널찍한 창녕조공 묘터로 내려서는데 거의 왕릉수준이다. 여기서부터는 묘터로 들어온 경운기길을 따르면 된다.


솔재 오르는 도로가 보이고, 능선 너머로는 노동저수지와 고창읍까지 보인다. 경운기길이 솔재까지 이어지나 했더니 막판에는 왼쪽 아래로 향한다. 다시 만나는 창녕조공묘 직전에서 우측 숲길 덤불로 들어간다. 철탑에서 왼쪽 봉우리 헤치고 올라가니 덤불 숲속에서 갇히고 만다. 전지가위를 안 챙긴게 후회된다만 어쩔 수 있나. 몸을 최대한 수구리며 뚫고 내려가니 광산김공묘가 있고 바로 아래 솔재다.

 

 

 

 

 


솔재 (290m)

대동여지도의 松峴이다. [여기는 솔재 해발399m] 표석 옆에 새겨진 고도는 GPS와 100m 차이가 난다. 포장마차 하나 있으면 좋을만 하다마는 주인없는 차만 몇 대 주차되어 있다. 쉼터에 앉아 점심먹고 간다.


솔재 건너편 능선 양쪽으로 임도가 있는데, 왼쪽 임도는 북당골까지 이어지고 우측 임도는 신수동(고창읍)으로 가는데 MTB코스로는 좋겠다만 둘 다 마루금과는 멀다. 능선따라 올라서면 산길은 서서히 지맥본색을 드러낸다. 벌목가지가 나뒹굴고 가시줄기는 팔목을, 칡넝쿨은 발목을 건다.


△399.8m

봉우리 일대는 벌목으로 헐빈한 상태다. 삼각점은 기반이 부셔져 번호 식별이 안된다. 잠시 한숨 돌리고 다시 덤불속으로 들어간다. 그런대로 길 흔적이 있다가 아래로 불당골 축사가 보이는 봉에서 우측이 맞는데 사람이 다닌 흔적이라고는 없다. 덤불을 헤집으니 온갖 솜털이 뒤덮힌다. 바짝마른 줄기지만 가시는 살아있어 마구잡이로 밀어붙이지도 못한다. 지옥이 따로없다. 두 손을 앞 세워 얼굴을 감싸고 헤치고 나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북당골 안부

겨우 밀림에서 빠져나가니 묘터이고 붉은색 기둥의 송전철탑이 있고 왼편 아래 북당골 푸른지붕 축사가 지척인 안부. 북당골에서 여기까지 수렛길이 올라온다.

 


검곡치 (劍谷峙 315m)

금곡마을에서 신수동으로 넘어가는 임도다. 지형도상  표기 위치가 모호하다만 여기 말고는 따로 고개가 없다. 잡목에서 해방되고 임도바닥에 앉아 지도를 열심히 들여다보니 마루금은 앞에 불룩 솟은 440봉으로 올랐다가 ⊂자로 휘돌아 금곡동 안부(들독재)로 떨어지고, 왼쪽으로 가는 임도는 일직선으로 들독재로 가는 그림이다.


망설일 일이 있나. 지가 지맥본색을 드러내면 우리는 임도본색으로 응수할 밖에. 산길 1.8km에 고도차 130m를 임도따라 고도차 없는 0.5km로 축지법을 시전한다. 임도에서 10분만에 들독재 안착이다.

 


들독재 (306m)

임도를 빠져나오니 금곡마을 맨 윗집이고 [洗心院] 팻말이 걸려있다. 들독재 바로 아래다.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440봉을 올랐다 내려온 희미한 산길이 보인다. 뭐가 그리 고소한지 웃음이 절로 나온다. 어차피 즐기러 다니는 산길에 요런 재미라도 있어야 안되겠나...


전라남도 금곡마을에서 전라북도 수량동으로 가는 고개인데 좁은 시멘트포장길이지만 자동차도 무리없이 넘어간다. ‘들독재’ 이름은 장성군의 청량산안내도에 나오는 이름이다. 금곡동 윗골짜기가 들독골이라 들독재라 하는 모양이고,  지형도의 검곡치(劍谷峙)는 금곡마을에서 딴 이름으로 보인다. 한자표기는 그렇더라도 금곡마을과 같은 음이니 더욱 그렇다.


여기부터는 문수산 일반등산로로 산길이 활짝 열려있다. 널찍하고 잘 닦인 임도로 올라간다. 우측 공터에 한 무리의 등산객이 우리를 보고 막걸리 한잔 하고 가란다. 요란한 사투리가 전라도임을 다시 느끼게 해준다. 왼쪽으로 쳐진 푸른색 철망은 휴양림 영역을 표시한 모양이다.


×565m

들독재에서 꾸준한 오름길로 40분 걸려 문수사 갈림길이 있는 565봉에 올라섰다. 문수사 가는 길은 희미하지만 500m 정도 거리다. 문수산 이름을 갖게 한 문수사의 창건설화를 보면,


자장율사가 중국의 당나라 청량산에 들어가 삼칠일 기도를 한 끝에 문수보살을 알현하게 됩니다. 그리고 문수보살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자장율사는 다시 귀국하여 이곳을 지나게 되는데, 산세가 중국의 청량산과 많이 닮았음을 보고는 산속의 암굴에 들어가 기도를 올리게 되었고, 이곳에 '문수사(文殊寺)' 라는 사찰을 세우게 되는데, 이를 바탕으로 문수산 또는 청량산, 축령산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어지고 있습니다.


대동여지도에 축령산으로 기재되고 장성군에서 축령산이라 부르는 연유인 것 같은데, 1918지도부터 현재까지 지형도에는 문수산이다. 결국 한 봉우리를 두고 고창에는 문수산이고, 장성에는 축령산인 것이다.


들독재에서 문수산까지 절반이 훨씬 지난 지점이다. 문수산 봉우리가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몇 걸음 내려가니 이번에는 왼쪽으로 ‘우물터’ 내려가는 갈림길이다[축령산1.02km]. 우물터 내려가는 길따라 장성군 북일면과 서삼면이 갈라진다.

 

 

 

 

 

 

 

 

문수산 (文殊山 △621.6m)

 

전위봉을 두 개 지난다음 헬기장 같이 넓은 문수산 정상에 올라선다. 산불초소가 있고 철탑에는 감시카메라가 360도 회전하며 삑삑 소리를 낸다. 사방으로 조망이 열리고 정상부의 풍채도 예사롭지 않건만 반듯한 정상석 하나 없다.


계획대로 휴양림으로 내려선다. 더 이상 진행하면 암치재까지는 마땅히 끊을데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암치재까지는 10km 거리다.


먼지 폴폴 이는 비탈길을 10분 미끄러지듯 내려오니 축령산휴양림 조림기념비 앞이다. 광장같은 임도에는 사람들이 많다. 자동차도 여럿 있는데 서삼면 괴정마을을 통해서 올라온 것이고, 휴양림쪽으로 더 이상은 진입이 안된다. 북쪽 금곡마을에서 여기까지 임도에는 차단기를 설치하여 자동차 진입을 막고 있다.


전북 고창과 경계를 이룬 축령산 일대에는 4~50년생 편백과 삼나무 등 늘푸른 상록수림대 1,148ha가 울창하게 조성되어 있어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독림가였던 춘원 임종국선생은 6·25동란으로 황폐화된 무입목지에 1956년부터 21여년간 조림하고 가꾸어 지금은 전국최대조림 성공지로 손꼽히고 있다.


축령산 하면 경기도 남양주에 있는 축령산(879m)이 더 알려져 있다만(100대 명산), 장성에도 축령산이 있다. 남양주의 축령산휴양림은 잣나무로 유명하고 이곳은 편백과 삼나무다. 문수사 창건설화와 대동여지도가 아니면 짝퉁 축령산으로 오해 받을만도 하겠다만 이곳도 유래가 깊은 곳이다.


전국최대인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알려져 일부러라도 찾아오는 곳이라 오늘 기맥구간과 연계하여 둘러보기로 한 것이다. 특히 항암효과가 있다는 편백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톤치드를 듬뿍 마시고 가야겠다. 마루금 타고 내려온 산길과 평행으로 거꾸로 올라가는 길 금곡마을까지 4km 임도트래킹이다.


임도따라 걸으면 편백나무 숲길로 연인들과 부부지간 또는 어떤지간인지 아리쏭한 사람들, 다양한 끼리끼리 산책을 즐기고 있다. 산에서 내려온 [우물터 갈림길]을 만나면 넓은 광장 저편에 우물터가 있고 통나무집 같은 휴양림 시설이 보인다.


굵직한 나무기둥은 구분이 되지 않지만 잎을 보면 확연히 차이가 난다. 편백은 편편넓적하고 삼나무는 바늘이다. 일본의 산마다 빽빽하게 밀림을 이루는 삼나무 숲을 보고 부러워했는데, 우리도 산에다 이런 경제림을 많이 조성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임도트래킹 40분만에 금곡마을쪽 차단기를 넘는다. 금곡마을에서 500m 지점으로 자동차는 여기까지 들어올 수 있다. 10분 더 가면 금곡영화마을이고 임도길 4km를 50분 걸렸는데 우리걸음 보다도 그만큼 길이 평탄했다는 얘기다.



금곡영화마을

바로 아래 영화마을에는 오두막과 여러 촬영 셋트장이 보인다. 축령산의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촬영된 곳이라 하는데, 임권택 감독의 '태백산맥'  이영재 감독의 '내 마음의 풍금'  김대승 감독의 '가을로' 등의 영화와, 드라마 '태왕사신기' ' 왕초' 등이다.



북이면복지회관

통화한 택시기사님과 만나 백양사역으로 돌아왔다. 예상외로 택시비가 얼마 안나온다(13,000원) 지난차와 마찬가지로 마을회관 목욕탕에 들렀다. 토,일요일과 장날(1,6일)만 문을 연다.

 

 

 

 


(축령산휴양림)

 

 

 


(금곡영화마을)

 

 

 

 

 

 

 (장성군의 축령산안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