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생각

조은산 2012. 1. 24. 22:01

 

 

 

 

 

전포동

 

전포동은 황령산 서편 기슭에서 서면 일대까지 뻗어 내린 지역이다. 『동래부지(1740년)』에 “전포리(田浦里)는 서면에 속해 있고, 관문에서 11리 거리에 위치한다.”라고 했다. 6·25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전형적 농촌이었으며 황령산 아래에는 산자락 마을이 있고, 저지대는 갯가였기 때문에 옛적부터 ‘밭개’라고 불렀던 것이 한자음 표기로 ‘전포리(田浦里)’가 되었다.

 

부산진구 전역의 하천은 전포동에 인접한 동천(東川)으로 흘러드는데, 오늘날 동천은 상류로부터 토사가 퇴적되어 하상이 높아졌지만 옛날에는 제법 물이 깊어 내륙 깊숙한 곳, 즉 전포동의 노막리나 농막리까지 선박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충무공전서(忠武公全書)』부산파왜병장(釜山破倭兵狀)의 장계에 의하면 “이순신 장군이 경상우수사 이억기(李億祺) 장군과 함께 거제도와 가덕도에서 왜군을 격멸하고 부산의 왜군 본영을 무찔렀을 때, 전포 농막리 일대의 왜선 4백 70여 척이 우리 수군의 위세에 눌려 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한 내용에서도 전포동이 갯가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조선시대 황령산의 남서쪽 동천 일대가 바닷물이 들어오는 포구(浦口)였다는 것이다.

 

옛날 동래와 부산으로 내왕하던 고개가 마비현(馬飛峴)이었는데 당시에는 이곳이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 고개를 넘으면 갯가 동네와 내륙 마을이 확연히 구분되기 때문에 어업에 종사하는 전포동 주민을 ‘갯가사람’이라 부르며 천시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전포동에는 양정교차로 북쪽에 15헌병대가 있었고, 남구 문현동 경계 지점에 차량재생창, 향토기업인 경남모직, 대양고무, 신진공업사, 흥아타어어 등이 자리 잡고 있었다. 군용철도인 우암선 철길이 1984년까지 동네를 관통하였고 전포2동 성전초등학교 자리에는 도축장이 있었다.

 

조선후기 동래부 서면 전포리에서 출발하여 1949년 전포리가 전포1·2동으로 분동되었다가 1970년 전포1동이 전포1·3동으로 나뉘어졌다. 1975년에는 전포2동이 전포2·4동으로 분동되었다가 1998년에 전포2·4동이 전포2동으로 통합되어 현재 전포1·2·3동이 존재하고 있다.

 

 

 

 

타이어표 보생고무  검정고무신,  실로 기워 신었다.

 

 

 

 

 

송공삼거리

 

오늘날 부산진구 서면과 양정동 길을 잇는 지난날의 고개가 평지가 되다시피 하면서 임진왜란 때 전사한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 공의 동상이 들어서고 나서는 ‘송공삼거리’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러나 이 송공삼거리는 191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화지산(和池山)과 황령산(荒嶺山)이 이어지는 능선의 가파른 고개로 그 이름도 ‘마비을이현(馬飛乙以峴)’, ‘ 신좌수영(新左水營)고개’, ‘ 모너머고개’등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이름도 다양하게 바뀌었다.

 

(1) 馬飛乙以峴 : ‘말 나는 고개’의 이두식 표기

마비을이현은 해동제국기(海東諸國紀: 1471년)의 동래부산포지도(東萊富山浦地圖)에 그렇게 적혀 있고, 부산진지도(釜山鎭地圖: 1872년)에는 이 고개를 마비현(馬飛峴)이라 적었으며 동래부지도(東萊府地圖: 1899년)에도 마비현으로 되어있다.

 

이 마비을이현은 그 당시 ‘말 나는 고개’로 불리던 고개를 우리말 표기가 널리 퍼지지 않은 때에 이두식(吏讀式)으로 한자의 음과 새김을 따서 ‘말(馬) 날(飛) 을(乙) 이(以) 고개(峴)’로 표기한 것이다. 그러던 것이 후대의 지도 작성 시에 마비현으로 적게 되었다.

 

이 고개로 날아가듯 달리던 말은 석포목장(石浦牧場)의 말이었다. 1469년에 편찬된『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에 석포목장에는 목마 232필(匹)이 있다고 했다. 이 목장은 오늘날의 남구 대연동을 ‘석포’라고 했을 때의 목장으로 나라에서 경영하던 국마장(國馬場)이었다.

 

이 국마장에서 방목하던 말이 황령산에서 풀을 뜯다가 주위에서 가장 낮은 산등성이인 오늘날의 송공삼거리로 자주 달아나서 ‘말 나는 고개’라 한 것으로 보인다.

 

 

(2) 신좌수영고개, 개항 후에는 모너머고개

‘신좌수영고개’라 한 것은 동래 쪽에서 ‘송공삼거리’고개를 가리킬 때 부른 말이었다. 이는 울산 개운포에서 이전해온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좌수영)을 임진왜란 이후 오늘날의 동구 범일동에 있었던 부산진지성(자성대성)에서 재편성했다. 재편성을 마친 좌수영은 본래 있어야 할 지금의 수영으로 옮기고, 옮긴 그 자리는 부산진첨사영(본래 좌천동에 있었음) 진영으로 삼았다.

 

그런데 좌수영을 재편성하는 과정이 제법 길었던 모양으로 재편 과정에 있었던 자성대성을 신좌수영이라 불렀고 동래지역에서 부산 쪽으로 가는 고개인 송공삼거리를 신좌수영 쪽으로 가는 고개라 해서 신좌수영고개라 한 것으로 여겨진다.

 

서면에서 동래온천장으로 오가는 전차길이 있었을 때(1915~1968)는 지금의 송공삼거리의 송상현공 동상에서 거제리 쪽 약 10m 아래에 ‘신좌수영역’이 있었다. 그 전차역 이름도 신좌수영고개의 이름을 따서 신좌수영역이라 한 것이다.

 

‘모너머고개’라 한 것은 1876년 부산이 개항된 뒤부터 붙여진 이름이다. 이는 개항이 된 부산항에서 일본인의 거류지인 간행리정(間行里程)을 처음에는 10리로 한정했다는데서 유래한다. 그런데 그 10리를 꼭 어디까지라 표시하기도 곤란하다 보니 서면의 신좌수영고개는 넘지 못한다 하여 ‘못 넘어가는 고개’라고 했다. 일본인은 발음이 잘 되지않아  ‘모너머고개’라 하고 우리 쪽에서 그들 말을 흉내 낸 것에 지나지 않았다.

 

또 다른 설을 살펴보면 ‘마비을이현’이 고개 주위에 도적이 많아 말을 달리듯 빨리 올라야 하는 고개라 해서 ‘말 나는 고개’라 하였다는 말도 있고, ‘신좌수영고개’는 좌수영이 한동안 이 고개에 있어서 그런 말이 생겼다고도 하고, ‘모너머고개’는 부산 갯가의 천민은 동래 양반이 사는 곳으로 못 넘어간다 해서 그런 이름이 생겼다고 하지만 그 모두는 역사적 사실에 맞지 않는 말이다.

 

 

(3) 경편철도 부설로 사라진 고개

그런데 이 고개가 지금처럼 낮아진 것은 한일병합이 된 뒤 국도(國道)를 개설하느라 땅을 깎고, 1915년 부산과 동래 사이 경편철도(輕便鐵道)를 부설하면서 최대한 평탄작업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10년대 이전에는 고개가 아주 가파른 데다 주위는 숲이 우거져 동래장과 부산장(釜山場, 당시에는 범일동에 있었음)으로 오가는 장꾼을 노리는 도둑떼가 많았다고 한다.

 

 

 

송상현공 동상과 동래성 전투

 

 

송상현공 동상

 

건립일자 : 1978.3.1. 부산진구 전포동 864-1번지 높이 4.5m

송상현(宋象賢, 1551~1592) 공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덕구(德求), 호는 천곡(泉谷),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1570년(선조 3)에 진사과, 1576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경성판관(鏡城判官) 등을 지냈다. 1584년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귀국 후에 호조·예조·공조 정랑(正郞)을 거쳐 1591년(선조 24)에 동래부사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동래성에서 백성들과 힘을 합쳐 왜적과 싸웠으며 42세를 일기로 의연하게 순절하였다. 성이 함락되자 조복(朝服)을 갈아입고 북쪽의 임금께 절을 올린 후 성문 누각에 앉은 채 적병에게 목숨을 내주었다. 충절에 탄복한 적장이 공의 목숨을 앗아간 부하를 참하고 시(詩)를 지어 제사를 지내주었다. 전란이 끝난 후 조정에서는 이조판서·좌찬성에 추증하고 동래 안락서원(安樂書院)에 위패를 모셔 제향하게 했다.

 

동상은 단정한 조복차림에 양팔을 모아 손에는 홀(笏)을 든 입상이다. 2단으로 쌓은 반월형의 석축 위에 좌대가 있고 그 위에 동상이 서 있다. 좌대 뒤에는 당시의 순절도(殉節圖)를 그린 청동 병풍을 양쪽에 세우고, 그 가운데 석판에 찬양의 글을 새겼다. 주변에는 화단이 공원처럼 잘 가꾸어져 있다.

 

시선은 부산 남항 앞바다로 향하여 마치 후손들에게 “내 나라, 내 땅을 잘 지켜 달라”고 부탁하는 듯하다. “길을 빌려 달라”는 일본군의 요구에 “전사이가도난(戰死易假道難: 싸워서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 주기는 어렵다)”라고 회답한, 충신의 기개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300번지

 

집창촌(사창가, 유곽)이 들어선 장소를 더듬어보면 기지촌과 역전(驛前), 부둣가, 재래시장, 철길 주변에 주로 위치해 왔음을 알 수 있다. 1993년도 부산시 자료에 의하면 윤락여성 선도 대상 지역으로 서구 완월동, 동구 텍사스, 부산진구 범전동 300번지, 동래온천장, 해운대 육공구(609번지)의 집창촌을 거론하고 있다. 그러나 예전의 부산에는 이 외에도 더 많은 유곽(遊廓)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범전동 300번지’는 일대의 지번(地番)이 300대로 나갔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으로 기지촌(미 하야리아 부대), 역전(부전역), 재래시장(부전시장), 철길가(동해남부선과 구 우암선)를 끼고 형성됐다. 시발은 1945년 광복과 1950년 6·25전쟁과 더불어 범전·연지동 일원, 경마장이 있던 자리에 UN군 기지와 하야리아 부대가 들어오면서 자연스레 집창촌을 이루었는데, 당시만 해도 이 일대에 미나리꽝이나 웅덩이 같은 못이 많았다고 한다.

 

초창기에는 미군을 상대로 윤락행위를 하였으나 점차 내국인까지 범위를 넓혀갔으며, 업소에서 거래되는 성매매는 물론이거니와 속칭 ‘여관발이’(숙박업소에서 윤락녀를 불러 이루어지는 성매매)도 성행했다. 1960~70년대에는 120여 업소에서 일하는 여성이 600명을 넘었다고 한다. 시설 면이나 직업여성들의 용모, 나이(50~60대도 있었다)등이 또 다른 집창촌인 완월동이나 영도 봉래동에 비해 차이가 났기 때문에 화대(花代: 꽃값)가 비교적 싼 편이었다. 1992년 부산시 공식 기록을 보면 이곳에 업소 62군데가 있고 237명의 여성이 종사한다고 했다.

 

이후 정부 차원의 지속적인 자활 선도와 단속이 강화되고 2004년 성매매 특별법 제정, 2006년 하야리아 부대 이전, 마사지방 등 유사 성매매 업소의 등장, 유흥주점으로의 도우미 전업 등 사회적 여건과 환경이 변화되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특히 2007년 이 일대에 주상복합건물 건립계획이 확정됨에 따라 대부분 문을 닫았으나, 몇몇 개 업소는 아직 그대로 남아 옛 모습을 연상케 한다.

 

 

 

 

 

2015.12.31. 현재, 300번지 일대는 완전히 철거되고, 그 자리에는 (주)삼한종합건설에서 아파트공사를 시작했다.

 

 

 

 

전포동 15헌병대

 

지금 부산광역시청이 위치한 자리, 부산진구 양정동 일부와 연제구 연산동 일대에는 1960년 1월에 창설된 ‘육군 군수기지사령부’가 있었다. 초대 사령관으로 박정희(朴正熙) 소장이 부임했다. 부산·경남 지역의 작전 및 군수 지원 기능을 수행하다가 1970년 군수사령부로 개편되어 현재는 대전에 주둔하고 있다.

 

그 예하 부대로서 중앙로변 전포동 109-1번지(송공삼거리)에 ‘15헌병대’가 있었다. 1959년 부산시가 군사시설로 이 땅을 환지(換地)한 기록을 볼 때 군수기지사령부와 같은 시기에 부대가 들어선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부산·경남 지역의 헌병 관리와 훈련, 배치 등을 총괄했다.

 

주변엔 늘 경계가 삼엄하였고 게양대에는 별 2개(소장 계급)가 그려진 깃발이 펄럭였다. 연병장에선 헌병의 의장 시범과 제식 훈련, 그리고 단체기합을 받는 훈련병의 모습도 간간히 볼 수 있었다. 새벽에는 기상나팔, 저녁엔 일과 종료를 알리는 나팔소리가 부근 동네에 울려 퍼졌다.

 

2007년 부산 군수사령부가 대전으로 이동하면서 헌병대도 따라 이전하고 총 2만9,950㎡(9,060평) 부지에 도심 공원과 주상 복합형의 국민임대 아파트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

 

 

군수기지사령관

 

 

 

 

 

서면로터리와 부산탑

 

부산 서면의 중심에 원형의 ‘서면로터리’가 조성된 시기는 1957년,  ‘부산탑’은 1963년에 세워졌다. 부산시가 1963년 1월 1일 직할시로 승격됨에 따라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62년 12월 1일 대대적인 기념행사가 열렸다. 부산 공설운동장에서 거행된 이날 기념식에는 박정희(朴正熙)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을 비롯한 정부 요인, 재부 기관장 그리고 부산 상공인과 시민 2만여 명이 참여했다.

 

또한 부산상공회의소는 직할시 승격을 기념하는 부산탑 건립 공사를 추진하였는데 예산 250만원(부산시 100만원, 부산상공회의소 150만원)으로 1962년 12월 25일에 기공식을 가진 뒤 1년간의 공정을 거쳐 1963년 12월 14일 제막식을 거행함으로써 부산의 명물, 부산탑의 탄생을 보았다.

 

탑의 전체 높이는 23m, 상부에는 오륙도(五六島)를, 중앙에는 자유의 횃불을 든 4.2m 높이 남녀 동상을 안치하여 부산의 영원한 번영을 염원하였고 가로 61㎝, 세로 91㎝, 두께 14.2㎝ 크기의 기념비도 세웠다.

 

기념비에는 “이 탑은 넓은 바다와 맑은 하늘의 복과 덕을 입어 자유와 평화에의 굳은 신념으로 새로이 출발한 직할시 부산의 영원한 번영과 자손만대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는 온 시민의 정성으로 모아진 것이다.”라는 취지문과 탑 건립에 참여한 당시 부산상공회의소 회장인 姜錫鎭과 具仁會, 金智泰, 朴敬奎, 朴正寬, 申景浩, 申德均, 申世均, 愼重達, 梁泰振, 王相殷, 李秉喆, 李英震, 張洪植, 鄭翼鈺, 鄭泰星 外 釜山商議議員一同이라는 명단을 새겼다.

 

서면로터리는 중앙로, 가야로, 새싹길, 동성로를 연결하는 부산 교통의 중심은 물론 상업·금융·유통·문화·정보 등이 교차하는 소통의 로터리였다. 찻길은 늘 차량의 홍수를 이루었는데, 솜씨가 서툰 신출내기 운전자는 로터리를 빠져 나갈 기회를 잡지 못해 몇 바퀴나 뺑뺑이를 돌기도 했다.

 

1970년대 이후 급격한 산업화로 도시가 발전하고 교통량이 폭증하자 부산에도 지하철 공사가 시작되면서 부산탑은 1981년 7월 부산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고 로터리는 신호등이 달린 교차로로 바뀌었다. 자유의 횃불을 든 남녀상은 부산박물관 뜰에 보관되어 있으며 기념비는 종적이 묘연하다 2009년 3월, 부산박물관 지하 수장고에서 발견되었다.

 

 


 

 

 

 

 

서면을 누비던 전차

 

부산에 전차가 등장하면서 부산사람들은 전차를 “쇠막대기로 전기를 잡아먹고 그 힘으로 달리는 괴물”, “전깃불 잡아먹고 달린다”고 입방아를 찧었다. 처음 전차가 달릴 당시, 공중의 전기 케이블에서 방전되는 섬광을 본 사람들은 그 불빛을 번갯불로 여겼다고 한다. 초창기에는 일정한 정차장도 없었다. 굳이 정차장을 정해놓고 운행을 할 만큼 손님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데서나 손을 번쩍 들고 전차를 세워서 탈 수가 있었고, 내리고 싶은 곳에 내릴 수도 있었다.

 

부산전차(釜山電車)는 1915년에서 1968년까지 부산 시내에서 운행하던 노면 전차를 통칭하는 표현이다. 남선(南線)전기주식회사(한국전력의 전신)가 운영하던 노선이었기 때문에 남전(南電)이라 불리기도 했다. 총 연장은 21.7km, 궤도 폭 1,067㎜에 33개의 역이 있었다.

 

1915년 11월 1일 부산우체국~동래 온천장 간의 노선에 첫선을 보인 전차는 주로 일본인들이나 여행객들이 위락 시설이 많은 온천장을 찾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그 뒤 1916년 대청동선, 1917년 광복동선이 개통되고 1928년 대신동선, 1933년 범일동선, 1935년 영도선이 연장 개통되면서 그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1960년대 부산에는 서면을 기점으로 하는 3개 전차노선이 운행됐다. 서면~구덕운동장, 서면~영도 남항동, 서면~동래 온천장 노선이 그것이다.

 

전차는 대중교통으로서 역할을 톡톡히 했다. 1918년 부산부(釜山府)의 인구가 62,567명이었는데 1년간 전차를 이용한 승객은 203만 3천27명으로 한 사람이 연간 33번 정도 전차를 이용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전차 삯도 만만찮았다. 처음 전차가 운행될 무렵, 부산역~동래 온천장까지 왕복 운임은 50전, 당시 날품팔이 하루 품삯 40~50전과 비슷했다. 1962년의 요금은 1구간이 2원 50전, 2구간이 3원이었다.

 

사고도 많이 일어났다. 특히 전찻길을 건너다 부상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는 일이 허다했다. 1918년 여름에는 지금의 자성대 동문 근처인 영가대(永嘉臺) 언덕길에서 좌천동으로 내려오던 전차에 한국인 어부가 치여 즉사했는데 일본인 기관사가 전차를 몰고 뺑소니를 쳤다. 회사 측에서 성의 있는 수습대책을 내놓지 않자 울분에 찬 민중들이 영가대에 정차 중이던 전차로 몰려가서 전차에 로프를 매고는 언덕 아래로 끌어내려 박살을 냈다고 한다.

 

53년의 세월 동안 서민의 발이 되어 온 전차도 결국 쇠락의 길을 걸었다. 시내버스가 등장하면서부터 적자폭이 눈덩이처럼 늘어났고 전반적인 시설의 노후화가 주된 요인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도시개발 문제였다.

 

부산의 대동맥을 이루는 대로 한가운데에 선로가 깔려 있었고, 하늘에는 전선줄이 매달려 있었으니 말이다. 1968년 5월 19일 마지막 운행을 끝으로 부산사람과 함께 해오던 전차는 한 시대를 마감하고 말았다. 옛날의 전찻길 아래 땅속에는 지금 지하철이 달리고 있으니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양정동 하마비(下馬碑)

부산진구 양정동 거제로 동해남부선 철로변 높이 33㎝, 폭 66㎝

 

1413년(태종 13)에 최초로 종묘와 대궐문 앞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표목을 세웠는데 “이곳을 지나는 사람은 상·하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려라”는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하마비는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하마비는 주로 왕장(王將)이나 성현, 명사·고관의 출생지나 분묘 주변에서 볼 수 있는데 마을 사람들이나 후손들이 선열(先烈)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만들어 세웠다.

 

양정동 하마비는 거제로 가로화단에 위치하며 뒤로는 동해남부선 철길이 지나고 있다. 높이 33㎝에 폭이 66㎝이며 직사각형 화강암에 단순히 ‘하마(下馬)’ 두 글자만이 새겨져있다. 고려 때 정문도 공의 묘소가 화지산에 있었기 때문에 분묘(墳墓)의 입구인 이곳에서 경의를 표하고 가라는 의미로 세웠다고 볼 수 있다. 하마비로 인하여 주변 양정동과 거제동 일대를 ‘하마정(下馬停)’이라 부르고 있다.

 

 

 

 

 

범천동 낙지골목

 

낙지는 쫄깃쫄깃하게 씹히는 맛이 매력인데 씹을수록 단맛이 나는 음식이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낙지는 성질이 평(平)하고 맛이 달며 독이 없다고 기록돼 있다. 한문으로는 ‘낙제(絡蹄)’라고 하는데 수험생에게 먹이면 ‘낙제(落第)’를 한다고 금기 음식으로 여겼다. 임신부가 먹으면 낙지같이 흐물흐물한 아기를 낳는다고 하여 그 또한 금기로 쳤다.

 

그러나 낙지에는 뇌 기능을 돕는 DHA(곰팡이 발생을 억제하는 작용, 방부제 역할) 성분이 많고 영양이 풍부해 오히려 수험생과 태아에게 도움이 된다고 한다. 낙지의 맛은 계절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남해안의 세발낙지나 서해의 밀낙(주꾸미처럼 작은 낙지)은 음력 4~5월부터 초여름까지가 제 맛을 내고 성숙한 낙지는 가을 것을 최고로 친다.

 

부산사람들은 ‘낙지’하면 보통 ‘조방낙지’를 떠올린다. ‘조방(朝紡)’이라 함은 동구 범일동에 있었던 조선방직(朝鮮紡織: 1917년 설립, 1968년 해산)을 줄인 말인데, ‘조방’이 곧 지명(地名)이 되었다. ‘조방낙지 골목’은 조방 주변인 범천동 일대에 낙지볶음 집이 몰려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방낙지의 원조는 범천동 837번지의 ‘원조(元祖)할매집’, 창업주는 빈정순 씨로 3대가 가업을 이어오고 있다. 1963년에 문을 열었으니 50년 가까운 세월로 접어든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주변에 조선방직 공장과 시외버스터미널이 있었고 자유시장, 평화시장, 부산진시장 등이 번창하던 때라 전국 각지에서 상인들과 주변 노동자들이 몰려들었다.

 

당초에는 공장 일에 지친 노동자들, 시장 상인들, 장을 보러 온 사람들이 이 식당을 찾아 막걸리 한 잔에 녹두전, 곱창으로 허기를 달랬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안주는 없냐?”는 단골들의 말에 삼천포에서 지인(知人)이 가져온 낙지를 삶아서 초장과 같이 내놨더니 반응이 좋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때부터 산낙지에 물기를 빼고 다양한 양념과 야채를 넣고 볶아서 상에 올렸는데 이것이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곧 ‘낙지볶음’의 시작이었다. ‘조방낙지’요리가 탄생하면서 이 가게를 중심으로 낙지볶음집이 줄지어 생겨났다. 1990년대까지 이 일대는 낙지볶음 골목으로 명성을 떨쳤다.

 

낙지볶음 메뉴는 ‘낙(낙지만 들어감)’과 ‘낙새(낙지+새우)’, ‘낙곱(낙지+곱창)’, ‘낙곱새(낙지+곱창+새우)’로 나눠지지만 당면, 떡볶이, 라면, 우동 등을 넣어 요리하는 방법도 다양하게 개발됐다. 세월이 흐르면서 번성했던 낙지볶음집도 하나둘 사라지고 이제는 단 네 곳만이 남았다. ‘본가(本家)낙지볶음, 큰마당 낙지볶음, 새낙지볶음 할매집’이 원조할매집과 이웃해 있다.

 

 

 

 

 

 

부전역 곰장어거리

 

속칭 ‘곰장어’를 표준말로 하면 ‘먹장어’이고 지방에 따라서는 묵장어, 꾀장어, 꼼장어 등으로 불리는데 부산사람들은 몸이 뱀처럼 생긴 장어(長魚) 종류를 통상 꼼장어라하고, 횟감으로 즐겨 먹는 붕장어를 아나고(일명 아나구)라 호칭한다. 혼동하기 쉬운 장어로는 뱀장어(민물장어), 갯장어(일본어명‘하모’)

 

곰장어는 깊은 바다에 살다 보니 눈이 퇴화되어 흔적만 남아 있고 뱀처럼 꿈틀거리는 몸짓과 점액질로 끈적대는 흉측한 외관 때문에 재수 없는 물고기로 천대를 받아왔다. 대신에 껍질이 부드럽고 질겨서 한때 일본 사람들은 껍질을 말려 나막신 끈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또 그 껍질이 핸드백이나 구두, 지갑 등의 피혁 제품을 만드는 데는 제격이어서 1970년대까지는 껍질을 벗겨 일본으로 수출을 하기도 했다.

 

곰장어 구이가 토종 음식으로 자리 잡은 것은 조선 말기 배고팠던 시절에 기장 지역사람들이 껍질 벗긴 곰장어를 짚불에 구워먹었다는 데서 유래됐다는 설이 있고, 6·25전쟁 전후로 기장 곰장어가 ‘자갈치시장’으로 흘러들어 지금의 먹을거리로 변했다는 설이 있다. 곰장어라는 명칭은 껍질을 벗겨낸 알몸을 불판에 올려놓으면 ‘곰지락·꼼지락’ 거린다는 데서 곰장어·꼼장어로 불렀다고 한다.

 

부전역 옆 부전동 346번지 일대에는 규모 면에서 ‘자갈치시장 통’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곰장어거리’가 있다. 이곳 상인들의 말에 따르면 8·15광복 직후부터 터를 잡았다고 하는데, 이곳이 부산 곰장어 구이의 원조(元祖)라는 점을 강력히 주장한다. 기장에서 잡힌 곰장어를 동해남부선에 싣고 와서는 난전을 펴고 장사를 시작한 게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철도역과 부전시장 권역에 위치하여 손님이 북적대던 시절엔 22개 정도의 업소가 성업을 이루어 사시사철 곰장어 굽는 냄새가 주변을 진동시켰다. 그런데 2003년 부전역확장 공사로 인해 일부 건물이 철거되면서 지금은 12개 업소가 남아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연탄불에 풍로를 돌려 지글지글 구워내는 양념구이, 석쇠구이, 소금구이, 통구이 맛이 일품이며 소주 한 잔을 곁들이면 세상 시름을 잊을 만하다.

 

 

 

 

 

 

 

서면 돼지국밥골목

 

돼지국밥은 부산·경남 지방에서 즐겨 먹는 서민적·대중적 음식이다. 사전을 찾아보면 ‘국밥’, ‘따로국밥’은 나와도 ‘돼지국밥’은 나오지 않으니 역사가 그리 오래된 음식은 아닌 듯하다.

 

국밥 가운데에는 간장을 탄 국물에 밥을 만 것을 장국밥이라고 부르며 대체로 김치를 곁들여 먹는다. 야채와 고기 등을 꼬챙이에 꿰어 구운 산적을 고명으로 얹는 경우도 있다. 지방에 따라 종류도 다양해서 경기도는 순대국밥, 부산·경상도 지역은 돼지국밥, 전북 전주에서는 콩나물국밥이 유명하다. 그밖에 나물과 북어를 넣고 끓인 북어국밥도 있으며, 계란 등을 넣어 깔끔한 국에 밥을 만 계란국밥, 쇠고기 국물에 갈비가 들어간 갈비탕도 국밥의 일종이다. 국과 밥을 따로 내어 먹는 사람이 알아서 먹는 따로국밥도 있다.

 

우리나라 기록으로는 19세기 말에 발간된 요리책인 ‘시의전서(是議全書)’에 탕반 요리법이 등장한다. 한편으로는 고려시대에 임금이 백성들에게 돼지고기와 개고기를 나눠준 것에서 비롯됐다는 설과 6·25전쟁 때 피란민들이 돼지로 설렁탕을 만들어 먹었다는 데서 비롯됐다는 설도 있다.

 

서면 중앙로에서 서편으로 한 블록 건너 도로변, 부전동 255번지 일원에 ‘서면 돼지국밥 골목’이 형성되어 있다. 현재 8개 업소가 자리 잡고 있는데 그 시발이 ‘송정3대식당’이다. 1945년 연지동에서 국밥가게를 차렸다가, 1948년 이곳에 터를 잡아 3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으니 사람 나이로 치면 환갑을 넘겼다. 그 뒤(1950년대 중반)로 ‘합천식당(지금은 없어짐), 경주식당, 포항식당, 부전식당’ 등이 차례로 들어서서 부산에서도 알아주는 돼지국밥 거리로 변모했다.

 

어느 가게나 입구에는 가마솥이 용광로처럼 펄펄 끓고 있는데 뚝배기에 국물을 떠 담아 밥과 돼지 수육을 넣고 고추, 양파, 새우젓, 정구지(부추)무침, 깍두기, 김치와 함께 내어오는 뜨거운 국밥은 보기만 해도 절로 군침이 돈다. 메뉴는 극히 단출하다. 살코기만 넣은 돼지국밥, 내장국밥, 따로국밥이 있고 술안주로 돼지 수육과 순대 정도가 있다.

 

수십 년 세월을 거치며 부산사람의 입맛을 사로 잡아온 ‘서면 돼지국밥’, 그 비결은 별것이 없다. 조미료를 전혀 쓰지 않고 육수를 정성스럽게 잘 우려내면 양념을 적게 써도 국물 맛이 좋다는 것. 고기는 기름기를 제거한 앞다리를 쓰고 순대도 고급 내장만 골라 쓰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뚝배기에 담긴 국물만큼 뜨거운 정성이라고 이곳 상인들은 말한다.

 

   

 

 

 


부산진구이야기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한주 마무리 잘 하시고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
반갑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안녕하세요. 대학교 4학년 학생입니다 .
과제자료조사 중 글을 읽게 되었는데요. 제가 필요한 전포동 역사를 인문적으로 접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출처를 좀 알 수 있을까요? 좀 더 깊은 자료를 조사하는 데 도움이 될 거 같습니다.
좋은 자료에 다시한번 감사인사 드립니다.
여기저기 오만데서 끌어모은 자료라 출처를 일일이 못 적었습니다(부산시청, 부산진구청홈페이지,지역일간지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