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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길]이승만 시대 제1편 "인격살인은 국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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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0. 31.

[생명의 길] 이승만 시대 제1편 "인격살인은 국사가 아니다"

※ 민족문제연구소의 왜곡하여 제작된 "백년전쟁"의 반박 동영상 입니다.
※ 판단은 여러분의 몫입니다만 신중하고 현명한 판단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2013. 4. 25.)


대한민국은 [생명의 길]을 따라 달려왔고 북한은 [죽음의 길]을 따라 달려갔다.

본 동영상은 1898~1997 백년을 조명하는 역사 다큐 시리즈 [생명의 길]의 첫 작품.
거짓 뽀샵 동영상 『백년전쟁』에 대한 반박을 통해 이승만에 관한 진실을 조명한다.

이승만,그는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들어설 수 있도록 일생을 헌신한 거대한 역사의 주춧돌이었다.
다만 장기집권 야욕으로 3.1부정선거가 일생의 최대 과오가 안이었을까?..

 

http://youtu.be/gk1b4BN2D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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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국내외 저명인사들의 긍정적인 평가(55인) ♠

<평가 목차>

  

- 이승만 측근들의 평가(6인)

- 이승만 측근들의 평가, 출처 미상(4인)

- 각 신문 논설위원들의 평가(5인)

- 각 분야 전문가들의 평가(40인) 

 

- 총 55인

  

<이승만 측근들의 평가(6인)>







허정, 독립운동가로 국무총리 및 4.19혁명 이후 과도정부의 수반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국부이자, 아시아의 지도자요, 20세기의 영웅이다." 

- 허정, 3.1운동 당시 직접 시위에 참여하였고, 이어 중국에 망명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조직에 가담하였으며, 이후 프랑스에 가서 재프랑스한국인거류민회장이 되었고, 다시 미국으로 이주하여 뉴욕한국학생회장으로 지냈다. 미국에서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직접 도왔으며, 이후 미국의 한인교민총단장이 되어 미국 교민의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해서 창간된 <3.1신보>의 사장이 되었다. 광복 후 한국민주당에 관여하여 좌익에 맞서는 대표적인 우익의 정객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제헌의원선거 때 부산을구에서 한민당 후보로 당선, 이승만 정권 때 교통부장관과 사회부장관, 이후에는 국무총리와 서울특별시장을 지냈으며, 한일회담 수석대표로 활약하였고, 4.19혁명 이후 과도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1963년 박정희 군정이 민정으로 이양되려던 시기에 '국민의 당'을 창당, 대표최고위원이 되어 대통령후보로 내정되었으나 야당후보단일화를 위해 윤보선에게 양보하였고, 이후 정치일선에서 물러났다. 이후 통일원고문과 국정자문위원을 맡았고 청렴 강직한 성격은 몇 안 되는 한국정계의 원로로 대우받게 하였다. 인촌문화상을 받았다ㅣ1965년 7월 19일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서거하자, 1965년 7월 20일자 한국일보 특별부록에 올린 글의 내용 중 





로버트 올리버,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교 언론학 명예교수로 당시 이승만 대통령 정치고문

 

"이승만의 애국심, 학문적 실력, 역사적 혜안, 정치적 투지, 종교적 초월성 등은 높이 살만 하며, 한국 역사상 누구보다도 국민들의 두터운 신망을 획득한 인물로, 다른 나라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지도자이다. 그의 이름은 위인을 많이 배출한 한국 역사에서 단연 가장 위대한 정치가로 기록될 것이다. 이승만의 업적은 다음과 같다. ① 여수·순천반란사건과 같은 위기로부터 신생 대한민국을 구출하고 국가 존립에 필수 요건인 안보를 확보했다. ② 6·25전쟁 중 남한 국민의 충성을 확보하고 미국으로부터 한국군의 훈련과 장비 현대화에 필요한 지원을 받아냄으로써 막강한 군대를 육성했다. ③ 공산주의 활동 경력이 있는 조봉암(曺奉岩)을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기용한 다음 지주 출신 의원들로써 채워진 국회에 압력을 가하여 농지개혁법을 통과시켜 전 국민의 75%에 해당하는 남한 농민들을 위해 농지개혁을 완수했다. ④ 건국 초 열악한 재정 여건에도 불구하고 교육에 우선순위를 배정하여 각급학교를 대폭 증설하고, 교사들을 재훈련하여, 한글로 쓰여진 교재들을 개발함으로써 국민교육의 수준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켰고 동시에 해외 유학을 장려함으로써 경제개발에 필요한 인재를 육성했다. 이로써 그는 후세의 한국인들로부터 ‘교육대통령(The Education President)’으로 기억될 만한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⑤ 신생 대한민국은 군사, 경제면에서 미국과 유엔의 원조에 매달려야 하는 일개 속국(client sate)에 불과했지만 그는 [자신의 출중한 외교역량을 발휘해] 미국과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진정한 주권 국가로 대접받게 만들었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업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승만은 ‘미국의 앞잡이’가 아니라 동아시아에 무지했던 미국에게 되래 ‘눈엣가시’와도 같은 존재였다. 미국정부는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미국 정책에 노골적으로 반대하던 이승만을 제거하고 그의 정권을 타도하기위해 ‘이승만 제거작전(Ever Ready Plan)’을 세우고 체포하려 했을 정도로 껄끄러운 관계였다. 나와 이승만 대통령이 주고받았던 이 기록이 평가를 받을 때 한 가지 결과로서 한국 정치사와 한·미 외교사에 이승만 대통령의 역할이 재평가되었으면 한다. 이승만도 큰 결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다른 지도장들처럼 그 또한 위대한 능력과 뛰어난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승만이 때로는 적당치 못하거나 너무나도 시기를 잘못 택한 즉흥적 처사 등으로 실망스러운 결과를 가져오는 일이 있었지만, 전후 처리 과정에서 발언권 없는 신생 국가의 수장으로서 소련, 중국, 북한은 물론 때론 미국, 영국, 인도 등 적과 동지의 협공을 받으며 지략을 동원해 ‘나라를 건국하고 지켜낸 진정한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이다. 이승만의 편지를 통해 새삼 확인된 것은 우방국으로부터 ‘완고하고 늙은 폭군’이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어떤 형태로든 공산주의자들과의 합작을 강요하거나 압력을 가하는 자들은 모두 자유세계의 공적일 뿐 아니라 자신에게 맞서는 적수로 여겼다는 점이다.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반공포로를 석방하고, 전쟁으로 파괴된 나라의 재건을 위해 미국의 물질적 원조를 얻어내고, 미국으로 하여금 한국의 방위와 경제원조를 공약하도록 밀어붙인 것은 이승만이었기에 가능했다. 

- 로버트 올리버, 위스콘신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땄다. 그는 시러큐 대학 교수이자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교 언론학 명예교수로, 이승만 대통령 정치고문으로서 자문 및 홍보를 담당하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정에서, 그리고 6.25전쟁 수행 과정에서 고군분투하는 이승만 박사를 헌신적으로 도왔다ㅣ1954년에 저술한 <신화에 가린 인물 이승만>의 책 내용과 1995년에 발표한 「세계적 정치가 이승만(Syngman Rhee-A World Statesman)」이라는 논문의 내용, 그의 책 <우남 이승만, 대한민국을 세우다>, <이승만이 없었다면 대한민국 없다>의 내용 중


월터 로버트슨, 미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

 

"이승만은 빈틈이 없고 책략이 풍부한 인물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승만은 우리 미국을 궁지로 몰아 넣었고, 그리고 그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 월터 로버트슨, 미국의 트루먼,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특사로 활동했으며, 극동문제 국무차관보로 한미방위조약협상대표로도 있었다.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들을 석방시켰을 때의 상황을 그가 회고했던 책 <구술 역사 프로젝트(Oral history project)>






리처드 닉슨, 제37대 미국 대통령

 

"나는 이승만의 용기와 뛰어난 지성에 감명을 받고 한국을 떠났다. 공산주의자들을 상대할 때 예측할 수 없게 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승만의 통찰력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했다. 그 후 그의 현명함을 더욱 더 높게 평가하게 되었다." 

- 리처드 닉슨, 듀크대학교에서 법학 학사학위를 받았고 개인법률사무소를 개설, 법률가 활동을 하다가 미국 캘리포니아주 하원의원과 상원의원, 제36대 미국 부통령과 제37대 미국 대통령을 지냈다ㅣ1953년 가을에 닉슨이 미국의 부통령 자격으로 서울에 와서 이승만을 만난 뒤의 생각을 자신의 회고록 <닉슨 회고록>에 쓴 내용 중







백선엽, 최연소 육군참모총장으로 대한민국 최초의 명예 육군 원수

 

"군인의 입장에서 볼 때, 6.25전쟁의 위기를 이승만이 아닌 어떠한 영도자 아래서 맞이했다고 해도 그보다 더 좋은 결과를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단한 애국자이다. 북진통일을 주장했다. 북진통일을 안 하면 죽음을 달라며 미국을 압박했다. 그런데 미국이 자꾸 휴전하자니까 거제도에서 2만 5000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해 버렸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이게 무슨 동맹관계냐’며 한때 등을 돌리기도 했지만 결국 월터 로버트슨 극동차관보를 보내 교섭 끝에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10억달러 경제 원조하고 60만 한국군을 계속 지원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아시아에서 그런 조약을 체결한 나라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다. 결국 한·미 상호방위조약으로 미국 주도의 세계사 흐름을 탄 것이다. 전쟁으로 포화의 상흔을 입었지만 그런 협상을 이끌어내 적에 대한 억지력을 갖고 안정적인 회복과 성장의 기반을 마련했다. 나는 이 전 대통령을 7년 모셨다. 육군참모총장으로 2번, 1군사령관으로 1번 모셨다. 6·25전쟁은 이 전 대통령이 없었으면 못 치렀을지도 모른다. 반공정신과 애국심이 강하신 분이다. 항상 ‘배고픈 것도 참을 수 있고, 굴욕도 참을 수 있지만 나라 없는 설움은 못 참는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전쟁 중 북진통일을 외치셨는데 그럴 만한 힘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국민을 통합할 수 있는 것은 그 길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 백선엽, 간도특석대에 배치, 만주군 중위로 광복을 맞아 해방 이후 조만식의 비서로 일하다 김일성의 공산주의를 반대해 월남한다. 1946년 육군 장교로 임관하여 국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 제5연대장을 맡았다. 대한민국정부수립 이후 육본 정보국장을 거쳐 1950년 4월 국군 1보병사단 사단장(당시 계급 대령)으로 부임하여 한국전쟁을 맞는다.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전선 다부동 전투에서 8천명의 병력으로 2만의 북한군에 맞서 한 달 이상 버티는 전과를 올렸으며, 이후 1사단은 가장 먼저 평양에 입성하는 부대가 된다. 1군단장, 2군단장을 거쳐 1952년 7월 육군 참모총장에 부임했으며 휴전 이후에는 연합참모부장 의장을 역임하다 1960년 퇴역한다. 퇴역 이후에는 중국, 프랑스, 캐나다 대사를 거쳐 교통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2009년 3월 대한민국 최초로 명예 육군 원수로 추대되었다.

- 그의 회고록 <군과 나>의 내용과 2011년 5월 30일 문화일보와 가진 인터뷰의 내용 중







이응준, 대한민국 초대 육군총참모장

 

"이승만 박사는 현 세기가 낳은 한국 최대의 정치가 중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제1급의 애국자이자 혁명자, 지도자인 것이다." 

- 이응준,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제26기생으로 졸업하고 일본군에 배속되어 1941년 대좌로 진급, 8.15광복 직전 민족운동가들과 협력을 했다. 미군 정청 국방사령부고문을 역임했으며, 조선 국방경비대를 창설하였고, 제1여단장,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준장으로 진급하면서 초대 육군총참모장에 취임하였다. 6.25전쟁 대 수원지구방위사령관, 전라남도편성 관구사령관, 서남지구전투사령관, 마산지구와 제주지구계엄사령과 전라남도병사구사령관 및 전라남도계엄민사부장으로 복무하였으며, 제2대 상이군인회 회장을 거쳐 육군대학 총장 재임 중 중장으로 진급하였다. 제1훈련소 소장, 육군참모차장을 역임하고 체신부장관, 재향군인회 고문, 성우구락부 회장, 반공연맹 이사장, 상무재단 이사장을 지냈으며, 건국대학교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반공유공자 보국훈장통일장을 받았다. 국정자문위원과 국방정책자문위원장 및 통일원고문을 지냈다.

- 그의 회고록 <회고90년>의 내용 중 

 

<이승만 측근들의 평가, 출처 미상(4인)>


마크 클라크, 유엔군사령관

 "한국의 애국자 이승만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반공지도자로 존경한다." 


매튜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을 역임한 맥아더 후임 미국 제8군 사령관

 

"이승만은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에서는 타협을 몰랐고, 자기 국민에 대한 편애가 심했고, 불가능한 일을 끈질기게 요구했으나 마음속에는 깊은 애국심으로 가득했고, 애국심에 의지해 오랜 망명생활을 보내고 귀국한 이후 눈뜬 시간의 거의 전부를 나라를 위해 바쳤다."


제임스 밴 플리트, 리지웨이 후임 미국 제8군 사령관

 

"이승만을 위대한 한국의 애국자·강력한 지도자·강철 같은 사나이·카리스마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자기 체중만큼의 다이아몬드에 해당하는 가치를 지닌 인물이다." 


맥스웰 테일러, 밴 플리트 후임 미국 제8군 사령관


"한국의 이승만 같은 지도자가 베트남에도 있었다면, 베트남은 공산군에게 패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각 신문 논설위원들의 평가(5인)>


이준희, 한국일보 편집국 국장이자 논설위원실 논설위원

 

"이승만 전 대통령은 건국대통령이나 독재자 중 하나가 아니라, 건국대통령이자 독재자다. 늘 좌우의 경직된 시각을 질타하지만 적어도 이 문제에 관한 한 보수진영 일반의 시각이 더 유연하다. 건국과정과 한국전쟁까지의 역할은 높이 평가하되, 집권 후반기 내치(內治)까지 옹호하려 들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실제로 노태우 전 대통령 회고록에 따르면 이 전 대통령은 1954년 가을부터 이미 심각한 정신적 이상징후를 보였다. 일부는 그가 4ㆍ19혁명 때 학생들 희생소식에 주저없이 하야를 결정했다는 점 등을 들어 주변 정상배들에 의해 눈이 가려졌다는 정상론을 펴지만 당치않다. 사실이 그렇더라도 그 또한 마땅히 그의 책임이다. 친일파 청산실패를 두고 신생국 인력풀의 한계를 들거나, 북한도 김일성 동생 김영주와 이승엽을 비롯해 정권 군부에 숱한 친일파를 기용했다는 점을 들어 문제를 희석시키려는 태도 역시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반면 진보진영에선 우리가 여전히 분단상태라는 점, 또 앞서 임시정부가 존재했다는 점 등을 들어 아예 건국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승만은 오직 탐욕과 권력욕으로 민중의 통일의지를 꺾은 분단의 원흉일 뿐이다. 잇따라 발굴되는 국제문서들에서 당시 소련이 먼저 분할정부 수립을 계획했고, 이에 따라 김일성일파가 일사천리로 북한지역을 정리했으며, 남북협상 당시 김구도 북한정권수립을 막을 수 없음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 등에는 눈을 감는다. 독립운동기에도 이승만은 민족진영에 해악만 끼친 분열주의자였으나 다만 미국이 활용한 인물일 뿐이라는 주장도 편다. 그러나 그는 해방정국에서 김구, 여운형을 포함한 민족, 사회주의진영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압도적인 민중의 지지를 받은 인물이었다. 이는 당시 군정청 문서나 언론 등의 기록에서, 또 선대들의 증언에서 명백히 확인된다. 진보진영 일반의 시각으로 보자면 그는 일제강점기서부터 타계 때까지 전 생애를 걸쳐 뭐하나 긍정 평가할 것이 없는 악의 화신이다. 심지어 최근 독도 문제와 관련, 평화선을 그어 독도 실효적 지배의 계기를 마련한 그를 두고도 이승만 매판정권 때문에 독도문제가 생겼다는 식의 글을 보고 경악한 적도 있다. 그 없이는 국가정체성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승만은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을 세우고, 전쟁에서 미국과 세계를 움직여 나라를 지켜낸 지도자다. 반면 국내정치에선 유아독존식의 아집과 무능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심각하게 왜곡시킨 독재자다. 그러므로 공만큼 그의 과는 크고 무겁지만 최소한 우리의 건국대통령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걸 인정치 않고는 현대 세계사의 기적이라는 우리 대한민국의 뿌리와 정체성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다시 광복절에 즈음해 그의 재평가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 이준희, 연세대학교 철학 학사를 받았고 한국일보에서 기자와 법조팀 팀장, 로스앤젤레스 특파원, 사회부 차장, 정치부 차장, 사회부 부장, 편집국 기획취재부 부장, 문화부 부장, 논설위원실 논설위원, 전략사업본부 본부장을 지냈으며 현재 편집국 국장과 논설위원실 논설위원으로 있다. 그는 한국기자상과 제16회 삼성언론상 시상식 논평비평상을 받았다ㅣ2011년 8월 10일 한국일보에 올린 사설의 내용 중


전천실, 세계일보 논설위원실 논설위원


"많은 지식인이 이 전 대통령의 삶보다 중국의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의 삶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은 모순이다. 이 전 대통령의 행태에는 날선 반응을 보이면서 마오나 덩의 과오에는 관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여기에는 중국의 공산혁명에 대한 환상이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일종의 허위의식으로 비판할 만하다. 일반 대중의 이 전 대통령에 대한 인식도 극히 피상적이다. 한 텔레비전 프로에서 20대 여자에게 이 전 대통령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느냐고 질문하자 “독재자”라고 짧게 대답하는 장면이 기억 속에 강하게 남아 있다. 서점가에서도 이 전 대통령을 객관적으로 소개하는 책보다 일방적으로 비판하는 책들이 월등히 많다. ‘역사 속의 대통령’이 된 지 50년이 넘었어도 그는 여전히 정쟁의 늪속에 빠져 있다. 많이 개선되기는 했지만 이 전 대통령에 대한 우리 사회의 평가는 지나치게 인색하다. 인식의 편향성은 많은 폐해를 낳는다. 이 전 대통령의 공과를 종합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그가 건국 초기에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의 기틀을 잡은 것은 분명한 공이다. 그러나 장기독재를 위해 민주주의적 절차를 유린한 점이나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대에게 발포해 유혈사태를 초래한 점은 과오다.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그러나 공이 과보다 크다는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그가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 쪽으로 방향을 잡지 않았다면 한국의 번영은 없었을 것이다.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은 너무 미흡하다. 평소에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고 사는 것처럼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의 소중함을 모르고 살고 있는 것 같다. 이 전 대통령의 시대적 역할은 충분히 재평가할 만하다. 그가 아니면 할 수 없었을 역할을 그는 분명히 했다. 지나치게 명분론적이고 이상주의적 태도로 역사와 인물을 재단해서는 발전이 없다. 이 전 대통령의 일생을 살펴보면 혁명가로서의 면모가 여기저기서 엿보인다. 구한말에 태어나 평생을 비타협적 독립투쟁을 전개한 것은 간단한 삶이 아니다. 최후도 비장했다. 불명예스럽게 퇴진하기는 했지만 굳이 권력을 연장하기 위해 비겁한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 국민의 지지를 상실했다고 판단했을 때 깨끗이 나라를 떠났다. 인류 역사를 돌이켜볼 때 이는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사회감시 기능이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취약했던 그 시절에 축적한 재산이 거의 없었다는 점도 놀라운 대목이다. 이런 삶이 말년의 과오 때문에 전면적으로 폄하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게슈타포에게 총살당한 독일의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흐는 저서 ‘역사를 위한 변명’에서 “역사는 시계 제조업도 아니고 고급가구 세공업도 아니다. 그것은 더 나은 이해를 향해 나아가는 노력”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우리 역사에 대해 더 많이 고민해야 한다. 특히 이 전 대통령에 대해 더 나은 이해를 할 수 있도록 더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이 전 대통령을 너무 모른다. 이승만 재평가 작업은 그를 정확히 알리는 데서 시작돼야 한다. 우선 제대로 된 평전부터 한 권 내야 한다. 우리 사회에는 이 전 대통령을 ‘건국대통령’으로 부르는 것에 거부감을 표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엄청난 과오를 저질렀음에도 마오는 여전히 국부로 추앙받고 있다. 우리와 중국의 사정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볼 만한 대목이다."

- 전천실, 서울대학교 신문학 학사를 받고 대한결핵협회 폅집장, 세계일보 편집국 정치부 기자, 세계일보 국제부 차장, 세계일보 여론독자부 부장, 세계일보 통일부 부장 겸 남북평화연구소 소장, 세계일보 특별기획취재1팀 기획위원을 지냈으며 현재 세계일보 논설위원실 논설위원으로 있다.

- 2011년 4월 20일 세계일보에 올린 사설의 내용 중


성기철, 국민일보 논설위원실 논설위원

 

"미국에는 전직 대통령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물이 도처에 있다. 수도 워싱턴의 한복판에는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의 뜻을 담은 169m 높이 워싱턴 기념탑이 우뚝 솟아 있다. 인근에는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둘은 워싱턴의 상징물이자 세계인의 관광 명소다. 미국에는 대통령 기념관이 참 많다. 1930년대 이후 재임한 대통령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기념관을 갖고 있다. 주로 자신의 고향에 있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링컨 기념관처럼 업적 칭송 일색으로 돼 있는 것도 아니다. 공(功)과 과(過)를 함께 전시하곤 한다. 예를 들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중도 하차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 기념관에는 워터게이트 관련 포스터를 대문짝만하게 전시해 놨다. 빌 클린턴 대통령 기념관에는 르윈스키와의 스캔들 자료가 전시돼 있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에서도 대통령 기념관 건립 사업이 활기를 띠고 있다. 환영할 만한 일이다. 여러 대통령의 기념관 건립 사업이 착착 진행되고 있음에도 이승만 초대 대통령에 대해서는 깜깜 무소식이어서 안타깝다. 사단법인인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 기념사업회’가 결성돼 있고, 정부가 올해 예산에 30억원을 책정해 놨으나 현재 진행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대통령의 족적으론 사저로 쓰던 서울 이화장, 별장으로 사용된 제주도 화락관과 강원도 화진포 전시관이 있으나 초라해서 보기에 딱하다. 빛과 그늘이 크게 교차하지만 이 대통령은한국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거인임엔 틀림없다. 박 대통령 이상으로 공과가 뚜렷하다.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 바쳤으며 해방정국에선 민주정부를 수립했다. 6·25 국난도 잘 극복했다. 이런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데는 세계 최강국 미국을 움직일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청렴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하다. 그늘을 보자면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일정부분 책임이 있는데다 장기집권을 고집하고 독재를 자행한 대가로 말년을 비참하게 보내야 했다. 4·19 혁명으로 권좌에서 쫓겨난 그는 이국땅 하와이에서 5년간 살다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건국 지도자 공과를 함께 전시를 할필요가 있다. 이제 그가 대통령 직을 그만둔 지 50년, 별세한 지 45년이나 됐다. 아직 이 대통령을 평가절하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사회통합, 국민화합 차원에서 그를 재평가하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본다. 역사 속 인물이 된 지 오래지 않은가. 재평가의 일환으로 제대로 된 기념관 하나 지어보면 어떨까. 박정희 대통령처럼 기념사업회 주도로 국민모금을 시도해 보는 것도 괜찮겠다. 정부도 예산을 충분히 뒷받침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기념관에다 그의 아킬레스건인 독재 권력의 흔적을 고스란히 전시해도 상관없을 게다. 닉슨이나 클린턴 기념관처럼."

- 성기철, 경북대학교 사회학 학사학위를 받았고 이후 매일신문에 입사, 편집국 정치부 기자와 국민일보 정치부 기자, 사회부 근무, 정치부 근무, 정치부 차장대우, 교육생활부 차장대우, 사회2부 차장, 사회부 차장과 부장, 정치부 부장을 지냈다. 현재 국민일보 논설위원실 논설위원으로 있다ㅣ2010년 8월 2일 국민일보에 올린 사설의 내용 중


이진녕, 동아일보 논설위원실 논설위원

 

"미국 1달러짜리 지폐에는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초상이 들어 있다. 뉴욕에는 케네디 공항, 워싱턴에는 레이건 공항이 있다. 역대 대통령들의 기념관과 기록관도 즐비하다. 미국은 2월 셋째 주 월요일을 ‘대통령의 날’로 지정해 역대 대통령들의 역사와 업적을 기린다. 터키 이스탄불의 국제공항 아타튀르크는 초대 대통령의 이름을 딴 것이다. 필리핀의 거의 모든 화폐에는 역대 대통령 초상이 들어 있다. 우리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부터 9명의 전직 대통령이 있지만 묘지와 생가, 사가(私家)를 제외하면 그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서울의 김대중도서관과 광주의 김대중컨벤션센터 정도가 눈에 띈다. 한 달여 전에는 경남 거제시에서 김영삼기록전시관이 문을 열었다. 이 외에는 내세울 만한 전직 대통령 기념물이나 상징물을 찾아보기 어렵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자랑하고, 세계가 찬탄하는 한강의 기적을 이룬 나라에서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가 너무 소홀한 느낌이다. 어느 나라든 역대 대통령의 발자취를 통해 그 나라 국민은 역사와 국가에 대한 자긍심을 키운다. 우리는 워낙 골곡이 많은 역사를 거쳐 온 탓인지 전직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으로 엇갈린다. 기념사업이 민간의 손에 맡겨진 것도 논란을 피하기 위한 고육책인 측면이 있다. 역사와의 화해, 사회 통합을 이루려면 전직 대통령 기념사업에 정부가 주도적으로 나서야 한다. 건국 62년이 되도록 초대 대통령 동상이나 기념관이 없다는 것은 다시 생각해봐야 할일이다.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6·25를 극복한 이승만 대통령의 공적부터 재평가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 이진녕, 서울대학교 외교학 학사와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언론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동아일보 편집국 외신부 기자와 사회부 기자, 국제부 기자, 주영보 특파원, 사회부 차장, 사회2부 부장, 사회부 부장, 정치부 부장을 지냈으며 현재 동아일보 논설위원실 논설위원으로 있다ㅣ2010년 7월 28일 동아일보에 올린 사설의 내용 중


노주석, 서울신문 논설위원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지만 진보와 보수의 대립은 대한민국의 국부(國父)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인지 김구 임시정부 주석인지 헛갈리게 만든다.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지만 현행 헌법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처음 도입된 건국 60년의 개념은 보수진영의 역사 바로 세우기를 이명박 정부가 수용한 결과로 해석된다. 그동안 ‘반쪽짜리 건국’‘친일파 등용’‘분단의 시발점’ 등으로 홀대를 받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라고도 할 수 있다. 초대 정부를 수립하고 공산주의화를 차단한 우남 이승만의 공이 지나치게 폄하된 것이 사실이다. 박정희정권 이후 교과서에는 ‘독재자 이승만이 3·15 부정선거로 독재를 연장하려다가 4·19혁명에 의해 쫓겨났다.’는 식으로 기술됐다. 우남공원에서 부산 용두산공원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화폐에 새겨졌던 초상도 사라졌다. 그의 동상은 미국 하와이와 이화장 뜰에 외롭게 서 있을 뿐이다. 서울 대학로에서 사대부중 옆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이화장이 나온다. 우남이 1948년 7월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 뒤 경무대로 옮기기 전까지, 4·19혁명으로 하야하고 하와이로 떠날 때까지 거처했던 곳이다. 별채 건물인 조각당은 초대 내각을 구성한 대한민국 건국의 산실이다. 광복 이후 정부수립 전까지 김구의 경교장, 김규식의 삼청장과 함께 해방정국의 구심점이었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의 근거지였다. 서울시가 문화재청에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돼 있는 이화장을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시켜 달라고 신청했다. 역대 정부수반 중 백범의 경교장과 안국동 윤보선 대통령의 한옥, 명륜동 장면 총리의 가옥 등이 각각 사적과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있는 것과 비교하면 때늦은 감도 없지 않다." 

- 노주석, 한양대 사학과를 학사 및 동 언론정보대학원에서 석사, 국방대 안보과정을 거쳤다.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 사회부 차장, 기획부장, 논설위원으로 있다ㅣ2008년 8월 16일 서울신문에 올린 사설의 내용 중

 

 

<각 분야 전문가들의 평가(40인)>


이인호,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서양사학과 명예교수이자 명지대학교와 카이스트 석좌교수,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


"5·16으로 집권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른바 한강의 기적을 이룬 것은 이승만 시대의 유산을 잘 활용한 덕택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세우고 지키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번영의 기틀을 다졌다. 4·19 세력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질서란 헌법정신을 훼손하려 했던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이승만과 4·19는 같은 세력이다. 4·19의 중요성을 강조하다 보니 4·19가 혁명으로 불렸을 뿐이라는 얘기다. 4·19 세력은 어렵게 출발한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이데올로기를 바꾸려 했다기보다 부정선거 규탄에 강조점을두었다. 건국 대통령의 경우, 그 인물에 대해 그 나라 국민들이 느끼는 자긍심은 국민들 스스로가 느끼는 긍지와 같은데 우리 국민은 거꾸로 폄하의 길을 걸어왔다. 이승만 재평가 작업이 시급하다." 

- 이인호, 웰슬리대학 사학 학사와 래드클리프대학 소련지역연구 석사, 하버드대학교 대학원에서 서양사 박사학위를 받았고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조교수, 미국 럿거스대학고 조교수, 고려대학교 부교수와 교수, 한국슬라브학회 회장, 서울대학교 러시아연구소 소장, 주 핀란드와 러시아 대사, 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을 지냈으며, 제4회 비추미 여성대상 해리상을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서양사학과 명예교수, 명지대학교 석좌교수, 카이스트 석좌교수와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으로 있다.

- 2011년 3월 9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뉴데일리 이승만연구소 창립 및 제1회 이승만포럼에서 밝힌 내용 중


이주영, 건국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이자 한국미국사학회 회장

 

"이승만은 자유와 번영의 대한민국을 세운 건국의 아버지이다. 현행 고교 교과서 기술을 위주로 분석적인 연구와 접근이 필요하다. 이승만은 90년의 생애동안 수많은 사건에 연루돼있고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청년기엔 애국계몽운동가, 중년기·노년기엔 구미위원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가로서 활동했고 독촉국민회의를 중심으로 한 건국운동가로서 역사적 업적을 이뤘다. 이에 반해 좌편향 논란을 빚고 있는 현행 고교 교과서는 대부분 이승만을 단독정부 수립 제안자로서 분단의 책임을 거론하거나 1948년 건국과정의 의미를 왜곡-축소시키고 있다. 만민공동회에 적극 참여한 것에 대한 서술이나 중추원 최연소 의관으로 활동한 내용은 없고, 최초 일간지 매일신문 창간이나 순 한글신문으로 유명한 제국신문을 창간한 이종일은 언급하면서도 그 사업 파트너인 이승만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교과서들이 독립운동으로 보는 것이 주로 무장투쟁이기 때문에 외교독립론에 따른 활동과 역할을 주목하지 않고, 서술 역시 빈약하고 편파적인 홀대를 받는다. 이승만과 그를 도운 건국세력의 역할에 대한 서술이 빈약하다보니 대한민국이 1919년 상해 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이뤄졌다거나 1948년에는 단지 정부만 수립됐다는 소위 ‘1919년 건국설’이 끼어들 여지를 남기고 있는 실정인 것이다. 민족주의·민중주의 명분, 중국을 위주로 한 대륙문명권에 집착하는 ‘위정척사론’의 풍토가 강한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개화파 전통과 자유주의적인 인물이 제대로 평가받기 어렵다. 우리사회가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과 함께 시작된 이승만의 건국준비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며 1948년 건국과정에 대한 역할 및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건국세력의 활동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 이주영, 서울대학교 사학과에서 학사 및 동 대학원에서 서양사 석사, 하와이대학교 대학원에서 미국사 석사와 서강대학교 대학원에서 서양사 박사학위를 받았고, 프린스턴대학교와 콜럼비아대학교 사학과에서 연구를 했다. 건국대학교대학원 원장과 서울캠퍼스 부총장, 상허기념도서관 관장을 지냈으며, 현재 한국미국사학회 회장, 건국대학교 문과대학 인문학부 사학과 명예교수로 있다ㅣ그의 책 <이승만과 그의 시대>의 내용과 2011년 9월 30일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이 개최한 ‘이승만 연구의 흐름과 쟁점’을 주제로 한 1차 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내용 중


안병직,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명예교수로 1970년대 대표적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이승만의 장기집권은 정치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는 중산층의 미성숙을 고려하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한국사적 측면이 있었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수호와 경제발전을 위하여 권위주의 정치체제를 유지했던 것이다. 이승만 시기의 반공주의가 없었더라면, 과연 대한민국은 수호될 수 있었을까. 이승만은 그 어려운 정치적 여건 속에서도 농지개혁과 귀속재산의 불하로 시장경제체제를 구축했다. 그리고 적자재정 속에서도 교육 투자에 중점을 두어 한국의 근대화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였다. 따라서 4.19학생의거도 자유민주주의체제의 확립과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의 결과 가능했던 측면도 있는 것이다. 87년의 민주화는 이승만에 의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확립과, 박정희에 의한 경제발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 안병직, 서울대학교 경제학 학사 및 동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전공분야는 한국경제사로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학부 교수, 동경대학 경제학부 교수, 서울대학교 경제연구소 소장,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일본 후쿠이 현립대학 대학원 특임교수를 지냈던 1970년대 대표적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이다.

- 그의 책 <보수가 이끌다-한국민주주의의 기원과 미래>의 내용 중


이영선, 연세대학교 경제학과 명예교수

 

"기본적으로 국가의 틀이 경제에 있어서도 기초가 된다. 사회적 기반이 있어야 게임의 룰이 만들어지는 것인데 이승만 정부의 중요업적은 제대로 정부 수립을 했다는것이고, 시장경제를 도입했다는 것이다.재미있는 점은 이승만 대통령이 굉장한 평등주의자였다는 것이다. 정권확보적 차원에서였는지 아니면 포퓰리즘적 성향 때문인지 잘 모르겠지만 평등주의적 성향을 보였고 미국과의 관계에서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했다. 기본적으로 자유당 정권이 시장경제 질서를 확립해놓은 것은 이승만 정권의 업적이다. 일제시대까지 우리나라 문맹률이 90%에 육박했는데 이승만 정권때 문맹률이 급격히 떨어졌다. 대중교육의 기본적 틀을 발전시켜 놓은 게 이승만 체제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값싼 양질의 노동력을 갖고 경제발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승만 체제때의 대중교육 성공 덕분이다. 여기에 대한 논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어서 문제이다. 경제적으로 볼 때 이승만 정권은 기초를 닦고, 박정희 정권은 산업화를 했고,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 정권의 정부주도적 경제개발계획이 안고 있던 구조적 문제를 강제로 조정하며 거시적인 경제적 안정을 추구했다는 점을 평가할 수 있다. 노태우 정권은 경제적으로 좋았던 것을 나쁘게 만드는 역할 밖에는 한 게 없다."

- 이영선, 서울대학교 경제학 학사 및 메릴랜드대학교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고 한국은행 행원, 미국 메릴랜드대학교 경제연구소 연구원과 수석연구원, 한국국제경제연구원 수석연구원, 연세대학교 조교수와 부교수, 교수 및 상경대학 교학과 과장, 한국무역연구원 초빙연구원, 연세대학교 동서문제연구원 북한센터 소장과 통일연구원 부원장과 원장, 기획실 실장, 연세대학교국제대학원 원장, 국민경제자문회의 위원, 연세대학교 경제학부 BK21단 단장과 국가관리연구원 원장, 한국경제학회 회장, 제7대 한림대학교 총장을 지냈으며, 한국경제학회 청람학술상과 글로벌 리더쉽 어워드를 수상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명예교수로 있다.

- 2007년 8월 6일과 8일에 12월 대선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지와 관련해 문화일보와 가진 인터뷰의 내용 중


이정식,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정치학 명예교수이자 경희대학교 평화복지대학원 석좌교수

 

"이승만 박사는 너무나 노쇠했기에 주변의 인물들에게 좌지우지 되었다. 원래 인간이란 먼저 받은 지식을 기본으로 삼게 마련이고 웬만한 일 없이는 그걸 바꾸려 하지 않는다. 한국 현대사에 대한 부정적 시각도 이제는 종교나 신앙이 돼버린 듯하다. 이승만이 축적했던 지식과 국제적 감각, 박정희가 가졌던 기백과 추진력, 여기에 더해 온유하면서 카리스마를 한몸에 담은 리더가 나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완벽한 사람을 기대할 수는 없으니 비전을 갖고 있으면서 자기 장단점을 잘 알고, 단점을 메워 줄 수 있는 훌륭한 보필자들을 이용할 수 있는 지도자가 나왔으면 좋겠다."

 - 이정식, UCLA 정치학 학사 및 캘리포니아대학교버클리교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조교수, 부교수, 교수와 연세대학교 영재 석좌교수를 지냈다. 그는 박정희 치하에서 어용 학자가 되기 싫어 미국으로 이주를 했으며, <한국공산주의운동사>로 70년대에 이미 세계 학계에 필명을 날렸던 학자이자 미 의회 청문회에서 유신체제를 비판했던 인물로 한국 현대정치사 연구의 대가이다. 현재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명예교수이자 경희대학교 평화복지대학원 석좌교수로 있다.

- 2012년 4월 3일 조선일보와 가진 이메일·전화 인터뷰의 내용과 중앙일보와 가진 인터뷰의 내용 중


양동안,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 명예교수이자 현대사상연구회 회장

 

"이승만에 대한 기존의 여러 부정적 평가는 수정돼야 한다. 이승만은 정권장악을 위해 민족 분열을 불사한 정치인이 결코 아니었다. 적어도 해방정국에선 ‘통합주의자’였으며, 공산주의자도 포용할 수 있는 융통성을 지녔다. 하지만 자주독립을 실현하기 위한 정치세력 통합노력이 공산당의 방해로 실패한 후 강력한 반공입장으로 선회했다. 또 이승만 미국 의존적이라는 평가와 달리 민족자주의식이 매우 강했다. 한반도에 신탁통치를 실시하려는 미국의 계획에 대해 시종일관 강경한 반대입장을 견지했다. 남한정부수립과 관련해 이승만과 김구가 지속적으로 대립했다는 평가도 옳지않다. 1947년 12월 초까지 남한정부수립을 위한 이·김간의 협력관계는 유지됐으며, 12월 하순이후 김구가 건국 진영으로부터 이탈한 후에도 이승만은 김구를 끌어안으려고 노력했다. 이와 함께 이승만이 정치엘리트보다 민중을 더 중요시해 농민과 노동자 같은 사회적 약자의 지위향상과 생활개선에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철학을 재조명해 보면 해방공간에서 좌익과 중도파의 격렬한 악선전에도 불구, 이승만에 대한 대중의 지지도가 높았던 사실 등을 설명할 수 있는 단서의 일부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 양동안,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서 학사와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언론계에 투신했다.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로 일하면서 이후 1980년대 말까지 언론계와 학계 두 분야에서 활동했다.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로 일하면서는 중앙대 강사로 활동했고, 조선대학교, 경기대학교,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등의 교수로 일하면서는 경향신문 및 세계일보의 비상임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언론인으로서의 활동을 접고 학문연구에 집중했으며, 학문연구 틈틈이 여러 월간지들에 한국사회의 사상적 동향을 분석하고 예측하는 많은 글들을 발표했다. 25년간 한국학중앙연구원(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재직했으며, 현재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명예교수와 현대사상연구회 회장으로 있다ㅣ근현대사 교과서의 '좌편향'을 둘러싸고 국정감사에서 여야 의원들이 치열한 공방을 벌이던 2008년 10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학술 계간지 '정신문화연구'가 가을호로 올렸던 한국한중앙연구원 양동안 교수의 '이승만과 대한민국 건국'의 내용 중


정진석, 한국외국어대학교 언론정보학부 명예교수

 

"미군정이 검열을 없애는 등 언론의 절대적 자유를 선언한 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자유민주주의 언론의 이념적 토대가 됐다. 미군정의 이념을 이어받은 제1공화국은 좌우익 대립 상황과 권력유지를 위해 원시적 방법으로 언론을 탄압했지만 법과 제도 등 조직적인 언론정책을 갖고 있지는 못했다. 자유당 정권이 언론을 탄압했고 이에 대한 저항이 4.19혁명으로 이어졌다는 것은 너무 도식적인 평가이다. 이승만 정권은 반공이념을 장기집권에 활용한 측면이 분명히 있지만 남북이 극한 대립하며 전쟁까지 치른 상황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려 한 점은 재평가받아야 한다." 

- 정진석, 중앙대학교 영문과 학사와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식문학과 석사, 런던대학교정치경제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방송위원회 위원, 서재필기념사업회 이사, 종합유선방송위원회 위원, LG 상남언론재단 이사, 언론중재위원회 위원, 위암장지연기념사업회 이사, 사회과학대학장 겸 정책과학대학장, 기자협회 편집실장과 관훈클럽 사무국장, KBS 방송조사실 연구원, 한국외국어대학교 언론정보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제22회 인촌상 언론출판부문을 수상했다ㅣ2008년 8월 11일 연합뉴스와 가진 인터뷰의 내용 중


남시욱, 고려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과 석좌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세종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석좌교수

 

"이승만 초기 대통령은 장기집권과 3.15부정선거 등 비판받아 마땅한 정치적 과오가 있지만 전 생애에 걸친 독립운동과 대한민국 수립, 6.25동란에 나라를 수호하는 등 빛나는 업적은 마땅히 평가돼야 한다. 모택동이 일으킨 문화대혁명의 희생자였던 등소평이 그랬듯 이승만 박사에 대한 재평가도 이제 균형 있게 이뤄져야 한다. 과거 좌파 지도자들은 대한미국이 분열세력이 통일세력을 누르고 세운 나라이며, 기회주의가 득세한 사회가 대한민국이라고 공언하여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했다. 그에게 분단책임과 단독정부 수립의 책임을 지우려고 하는 것은 그 개인에 대한 부정적 평가에 그치지 않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한 부정으로 연결된다. 공과를 있는 그대로 균형있게 보아야 한다. 가장 큰 공로는 대한민국을 건립했다는 것이다. 분단이 되기는 했지만 한반도 분단은 이미 기정사실화되어 있었고 여기에는 소련이 앞장섰다. 이승만 때문이 아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많은 연구성과들이 있었는데, 당시 소련은 한반도 북단만이라도 사회주의를 하는 것이 소련의 국가이익에 좋다는 입장이었다. 소련의 경우 주변에 우호국가(friendly government)를 만드는 것이 급선무였고, 이러한 소련의 의도를 이승만이 간파한 것이다. 해방 직후 한강 이북에 소련군이 온다는 소문이 돌았었는데 만약 서울을 소련이 점령했다면 우리는 동유럽의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것을 막아낸 것은 대단한 공로라 할 수 있다. 그 외에는 자유민주주의체제를 도입한 것이나 농지개혁, 교육혁명을 실시한 것도 큰 공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해방당시 85%에 이르는 문맹률을 극복하기 위해 의무교육을 도입한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한 대목이다. 문맹률 85%에서 민주주의는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가장 큰 과오라 하면 영구집권을 꿈꾸었다는 점이다. 이 분이 재선까지만 했더라면 국부로서 존경을 받았을 것이다. 왜 독재자의 길로 접어들었는지 안타깝다. 친일파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은 것이나 언론을 탄압한 것 등도 과오라 할 수 있겠다." 

- 남시욱,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및 동 대학원에서 외교학 석사를 받았고 동아일보에서 정치부 차장과 출판국 국장, 관훈클럽 총무, 동아일보 편집국 국장, 신문편집인협회 부회장, 한국언론회관 이사, 동아일보 상무이사, 한국신문편집인협회 회장, 서울평화상문화재단 이사, 문화일보 대표이사 사장, 국제언론인협회 한국위원회 이사, 아시아신문재단 한국위원회 회장,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 고려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석좌교수, 성균관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 겸임교수를 지냈으며 제8회 언론상 신문칼럼상과 중앙언론문화상 신문부문, 제51회 서울시문화상 언론부문, 제1회 임승준 언론상 논설, 논평부문, 제7회 서울대 언론인 대상을 받았으며 현재 세종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석좌교수와 제3기 광화문문화포럼 회장으로 있다ㅣ2010년 4월에 열었던 '4·19혁명과 이승만'의 주제의 세미나에서 발표했던 내용과 2006년 1월 11일 시사웹진 뉴라이트 닷컴과 가진 인터뷰의 내용 중


공로명, 전 동국대 석좌교수로 현재 동서대 국제관계학부 석좌교수이자 세종연구소 이사장, 한일포럼 회장

 

"1945년 12월 모스크바의 미∙영∙소 3국 외상회의에서 한국은 5년의 신탁통치를 거쳐 독립한다고 한 결정을 뒤엎고, 1947년 유엔이 한국정부 수립을 결정한 것은 이승만 박사의 남한단독정부수립론이 인화선이 된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은 대한민국수립에 이르는 과정에서 그(이승만 대통령)가 한 역할도 역할이려니와 한국전쟁에서 보여준 그의 지도력은 한미동맹 관계를 수립하게 했고, 오늘날 대한민국의 융성과 번영의 터전을 닦은 위업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특히, 요즘 건국대통령인  이승만 박사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의견들이 표명되고 있어 다행스럽다. 외부세계에 어두워서 나라를 잃었던 한국에 있어 해방정국에 이승만 박사와 같은 국제정세에 대한 깊은 통찰력과 혜안을 가진 분이 있었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국운이었다." 

- 공로명, 육군 장교로 대위를 지내고 이후 1958년 외무부에 들어간 이후 요직을 두루 거친 중럅급 정통 외교관이다. 서울대학교 법학과 학사를 받았고 영국 런던대학교 정경대학원(LSE)에서 국제법 디플로마 과정을 이수했다. 미국대사관 3등서기관, 일본대사관 2등서기관, 외무부 아주국 심의관, 아주국장, 카이로 총영사, 외무부 정무차관보, 뉴욕 총영사, 러시아 대사, 외교안보연구원 원장, 남북고위급회담 대변인, 일본 대사, 외무부 장관과 동국대 석좌교수, 2002년 2010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 위원장, 한림대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외교정책전공 특임교수 겸 일본학연구소장과 함경북도 행정자문위원을 지냈으며, 현재 한일포럼 회장, 동아시아재단 '글로벌 아시아' 발행인, 동서대 국제관계학부 석좌교수, 재단법인 세종재단 이사장으로 있다. 1983년 외무부 정무차관보 재직시, 중국 민항기 불시착 사건의 한국측 협상 대표로 사건을 해결했고, 초대 모스크바 영사처장으로 한소 수교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홍조ㆍ청조근정훈장을 받았다.

- 2010년 8월 4일 동북아역사재단 주최 국제학술회의 기조연설에서 했던 말의 내용 중


이달곤, 경원대학교 행정학과 석좌교수이자 전 한국행정학회 회장

 

"2차대전후 신생국들의 최우선 과제를 얘기할 때 보통 스테이트 빌딩(state building·국가수립), 혹은 네이션 빌딩(nation building·정부형성)을 말하는데 우리는 이승만시대에 그게 형성이 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민주주의 체제와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해서 국가틀을 만들었다. 김구 자서전을 읽어봐도 국가적 비전이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임시정부 때부터 입법원, 행정원 등을 나누고 공화정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고를 했다. 우리는 정부 수립후 6·25전쟁을 겪었지만 전쟁때도 민주주의체제를 유지했고 의회선거도 했다. 우리가 후회하지 않는 것은 선거를 통해 공화정을 실시했고 입법·사법·행정을 나눈 것, 그리고 이승만 체제때 지방자치가 도입된 것도 의미가 있다. 1950, 60년대 미국식 지방자치를 실시해 읍·면·동 대표를 뽑았다. 박정희 체제 때 통일이 될 때까지 유보한다고 결정했지만 지방자치를 건국과 더불어 실시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대통령은 실수도 많았지만 인정해야 할 게 많다고 생각한다. 평등주의적 성향의 대표적 사례는 농지개혁입니다. 좌파에서는 완벽하게 되지 않았다고 비판하지만 엄청난 시도이다. 필리핀의 경우 그런 농지개혁이 안되어 지주층이 사회상류층으로 그대로 존속하는데 파키스탄도 아직 봉건적 잔재가 많아서 제대로 발전이 되지 않는 것이다."

- 이달곤, 서울대학교 공학 학사 및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와 이스트캐롤라니아대학교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하브더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채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와세다대학 방문교수, 미국 일리노이스대학교 연구교수, 미국 하버드대학교 옌칭학자, 미국하버드대학교 EEPC Research Associate, 21세기위원회 위원과 간사, 국가공기업 평가단 평가위원, 한국정치학회 상임이사, 한국정책학회 총무위원장, 한국행정학회 연구위원장, 서울특별시 분쟁조정위원회 위원, 행정안전부 정책자문위원과 국가전문행정연수원 지도교수, 경찰개혁위원회 위원, 4대 사회보험통합추진기획단 위원, 한국지방행정연구원 원장, 국무총리실 정책평가위원회 위원, 공공기술연구회 이사, 중앙공무원교육원 겸임교수, 한국행정학회 회장, 제17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법무행정분과 위원, 제18대 한나라당 비례대표 국회의원, 제18대 국회 윤리특별위원회 위원, 제18대 국회 지식경제위원회 위원, 한나라당 대표 특보단, 한미 FTA TF팀 한나라당 부위원장, 행정안전부 장관을 지냈다. 현재 제9대 서울시정개발연구원 이사장과 지방행정체제개편추진위원회 민간위원, 경원대학교 행정학과 석좌교수, 하이닉스 사외이사, 대통령실 정무수석비서관으로 있다,

-2007년 8월 6일과 8일에 12월 대선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지와 관련해 문화일보와 가진 인터뷰의 내용 중




유영익, 전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 석좌교수로, 현재 한동대 T.H. Elema 석좌교수, 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 초대 소장으로 있다

 

"해방 당시에 저는 9살이었다. 그때 우남 이승만은 ‘국부(國父)’로 무조건 존경받는 대상이었다. 그 후 나는 6·25를 겪었고 전쟁 와중에 장성들이 군수물자를 빼돌리는 바람에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된 국군 사병들이 대거 아사하거나 동상으로 병신이 되는 비참한 광경을 목격했다. 그때 나도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어요. 그 후 서울대를 졸업하고 4·19를 겪으며 나는 완전히 反이승만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저는 그러한 생각을 가슴 속에 품은 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하버드대에서 동양사를 전공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하버드-옌칭 도서관에서 우연히 청년 이승만이 저술한 <독립정신>을 발견해 읽었다. 그런데 이 책을 탐독하면서 이승만에 대한 저의 생각이 크게 달라졌다. 당시 나는 동학농민봉기와 청일전쟁 같은 19세기 후반의 조선 역사를 연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근대 중국과 일본의 선각자들에 대해 꽤 많이 알고 있었다. 그런데 1904년 이승만이 한성감옥에서 쓴 <독립정신>에 나타난 그의 개혁사상과 국제정세에 대한 식견은 중국의 쑨원이나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의 것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느꼈다. 커다란 충격이었다. 19세기 후반 조선의 역사를 공부해 보면 당시의 한국은 정말 비참하고 암울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이승만한민족이 부활할 활로를 용기 있고 명쾌하게 제시한 글을 읽으며 크게 놀랐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학에 조예가 깊었다. 상당히 많은 간찰들이 한문으로 작성되어 있는데 웬만한 한문 실력이 없으면 그 필체를 해독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였다. 그리고 영문으로 된 문서들을 읽어보면 이 대통령의 영어실력이 한문보다 낫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마디로, 한문과 영어에 동시에 능통하지 않으면 손대기 어려운 작업이었다. 제일 먼저 착안한 것은 그의 인품과 재능인데, 이승만은 한마디로 탁월하게 유능한 애국자라고 말할 수 있다. 이승만은 여러 권의 저서와 함께 수백편의 신문논설, 외교문서 등을 남겼는데 그 수준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한국인이 남긴 글 가운데 최상급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이승만이 동시대 지성인 가운데 최상급의 인물이었다는 것은 그가 5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미국의 일류대학(조지워싱턴, 하버드, 프린스턴 대)에서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모두 취득한 사실이 증명해준다. 그는 동서양 학문에 두루 통달한 출중한 학자였고 역사와 국제정치를 파악하는 안목이 뛰어난 세계적 정치가였다. 아울러 그는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확고한 소명의식을 가진 카리스마적 인물이었다. 그는 23세의 나이에 고종황제의 폐위를 도모하다 실패하여 옥에 갇혔을 때 기독교에 귀의했다. 그는 옥중에서 영한사전을 만들면서 간수와 죄수들을 전도했다. 그 결과 40여명이 기독교로 개종했다. 이승만의 투철한 소명의식과 불굴의 의지는 바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자신을 지키고 있다는 일종의 선민(選民)의식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승만은 한 마디로 '일벌레'였다고 할 수 있다. 엄청난 노력가였고 항상 톱이 되어야 한다는 모범생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그의 일기를 보면 항상 어떤 일에 몰두해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동시에 그는 꼼꼼히 금전출납을 기록할 정도로 매사를 주도면밀하게 처리했다. 그는 항상 남보다 3배 정도의 일을 하고 그 만큼 성과를 냈다. 예컨대, 5년 8개월의 한성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는 죄수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도서실과 옥중학교를 개설, 운영했다. 틈틈이 영한사전도 편찬했다. 그러면서 <독립정신>이라는 대작을 탈고했다. 이승만은 항상 자신은 공인(公人)이라는 의식 속에 살았다. 그래서 책임의식이 대단히 강했다. 왕족의 후예인데다 어린 시절 서당과 배재학당에서 항상 우등생이었던 그는 무슨 일을 하든 최고를 지향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그렇게 많은 문서를 남긴 것도 그의 몸에 밴 책임의식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모든 면에서 완벽을 기하다 보니 스스로 자기가 최고라는 의식을 갖게 되고 이러한 자부심은 남들에 대한 우월감을 자아내어 결과적으로 사람들에게 유아독존적이라는 나쁜 인상을 남겼다. 그 점은 매우 아쉬운 부분이다. 그가 이동휘, 안창호, 김규식 등 여러 빼어난 독립운동가들과 원만한 인간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그가 6대 독자로 태어나 고집이 워낙 센데다 다른 독립운동가들에 비해 학력과 능력 등이 탁월했기 때문에 자부심 내지 자만심이 생겨 자기를 비판하는 사람을 포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 외에, 그는 정치가로서 언제나 원칙을 중요시하여 자기와 이념을 달리하는 인물들과는 타협을 거부하고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와 같이 일부 독립운동가와 정치인들에게 비타협적이고 독선적 인물로 비춰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처신한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는 대단히 폭넓은 사교가였다. 그는 국적, 연령, 남녀를 구별하지 않고 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교제를 펼쳤다. 그 가운데 독립운동 기간에 이승만이 가장 신뢰하고 의지한 친구들은 배재학당의 선후배와 동창생, 그리고 한성감옥의 옥중동지, 서울YMCA와 하와이의 한인 기독교회 교인들과 목회자들, 그리고 호놀룰루와 로스앤젤레스에 근거를 둔 대한인동지회의 멤버들이었다. 이승만의 동업자들 가운데는 양반(兩班) 출신보다는 중인(中人)이나 상민(常民) 출신들이 많았다. 이승만은 또 하와이에서 한인기독교회나 대한부인 구제회 등을 통해 사진 결혼을 했기 때문에 가정적으로 불행했던 여성들로부터도 헌신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승만은 동시대의 어느 독립운동가들 보다 월등히 많은 외국 친구들을 포섭했다. 그 가운데에는 언더우드, 게일 등 선교사를 비롯 맥아더, 굿펠로우와 같은 군인들이 있었고 특히 윌슨 대통령과 그의 딸 제시,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인 엘리너 루스벨트 여사, 노벨 문학상 수상자 펄 벅 여사,  중국의 린유탕(임어당), 필리핀의 로물로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그의 폭넓은 국제적 사교력이 오스트리아 출신 여성 프란체스카와 결혼하게 되는 배경이었다. 잘 알려진 대로 이승만은 철저한 친미, 용미(用美)주의자다. 미국의 힘을 빌려야 한민족은 독립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른바 ‘외교독립노선’이다. 반면에 민족주의 계열은 자강(自强)을 통한 자력으로 독립을 추구했다. 이러한 민족진영은 후에 이승만을 친미주의자로 비판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지만 사실 이승만의 건국비전은 좀 더 넓고 깊었다. 이승만은 1919년 임시정부의 수반직을 맡은 순간부터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군주제를 폐지하고 미국을 본 뜬 민주공화제 국가를 수립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동시에 그는 새로 태어나는 조국을 아시아 최초의 기독교 국가를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다시 말해 이승만이 추진한 독립운동의 궁극적 목적은 미국을 벤치마킹한 아시아 최초의 모범적인 기독교적 민주주의 국가였다. 이승만은 미국이 세계 제일의 부강하고 문명한 나라가 된 비결이 바로 기독교를 숭상하는데 있다고 본 것이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신라가 한반도 통일을 이룩한 후 그 지도자들이 스스로 중국을 따라잡자는 소중화(小中華)의식 내지 모화(慕華)사상을 갖고 국력배양에 힘을 기울인 것과 상통한다. 그것은 자신감에서 나온 것이지 비굴한 사대주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승만은 민족의 광복이 실현된 다음 미국을 따라잡는 아시아 최초의 기독교적 민주국가를 건설함으로써 신생 한국이 적어도 동아시아권의 패자(覇者)가 되어 한민족에게 최대의 복락을 안겨주는 꿈을 꾼 독립운동가이자 애국자였던 것이다."

- 유영익,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와 브랜다이스대학교 서양지성사 학사, 하버드대학교 대학원에서 동아시아지역학 석사와 동양사 박사학위를 받았고 고려대학교 사학과 교수와 한림대학교 사학과 교수, 한림대학교 부총장, 연세대학교 국제대학대학원 한국학 석좌교수를 지냈으며, 한일역사공동연구촉진위원회 운영위원,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연세대학교 국제대학원 석좌교수를 지냈다. 하성학술상과 제13회 성곡학술문화상 인문사회과학부문, 제3회 효령상 문화부문, 옥조근정훈장, 제2회 경암학술상 인문사회부문을 받았으며 현재 한동대 T.H. Elema 석좌교수, 연세대 현대한국학연구소 초대 소장으로 있다. 그는 40여년을 한국 현대사와 이승만 연구에 힘써왔으며, 이화장 내에 있던 10여만 장에 달하는 이승만의 일기와 편지, 메모 등을 분석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재평가를 처음으도 주도한 인물로 꼽힌다. 4.19혁명 당시 이승만 대통령을 반대했었다.

- 2011년 8월 17일 미래한국과 가진 인터뷰의 내용 중


김진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립위원회 위원장

 

"이승만 대통령은 그야 말로 20세기 한국민족의 운명을 개척한 최고의 지도자이다. 그는 19세기 크리스찬으로 개종하면서 1939년에 한국을 아시아의 최초의 기독교 국가를 만들겠다고 선언한 사람이다. 혁명가이다. 대한제국이 있는 상황에서도 대한민국 최초의 공화정을 만들겠다는 혁명가였다. 냉전시대를 꿰뚫어 보고 한국의 살길을 찾은 사람이다. 그 당시에 국민들은 분단을 반대였고 미국도 반대했다. 그러나 냉전시대를 내다보는 안목을 가지고 UN을 끌어들여 남한만이라도 유일한 합법국가를 만든 지도자이다. 위대한 선도자고 위대한 사상가였다. 정치개혁자이고 위대한 문명철학자였다. 냉전시대 전개를 예측하고 제일 정확하게 본 정치지도자였다. 토지개혁을 통해 농민들에게 토지를 주고 보통교육을 강화했다. 국가의 능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안 지도자였다. 교육을 중시해 6.25전쟁 기간에도 대학생의 징집을 연기해준 지도자였다. 과학쪽에서도 그 분의 위대한 지도력이 점점 나타나고 있는데 달러가 부족할 때 정부부처의 예산을 아껴서 유학한 학생들에게 유학비를 넉넉하게 지원한 지도자였다. 이런 노력이 산업화에 성공하는 밑거름이 된 것이다. 반민특위 해체와 정적에 대한 정치적 탄압 등 마이크로하게 보면 잘못한 부분은 있지만 김일성 김정일 모택동에게 비교할 수는 없다. 백성을 굶어 죽지 않게 하기위해서 최대한 노력한 것만은 사실이다. 독재의 성격이 있긴 했지만 나는 이승만 정권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유교적 가치가 전부이던 사회에 기독교적 가치를 심기도 했고, 대학생의 징집을 면제해 대학교육을 보편화, 활성화하기도 했다. 또한 한국의 화학공업을 발전시키고 원자력 개발을 시작한 사람도 이승만 박사다. 우리가 이룩한 많은 것은 이승만 정권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승만 정권에서 폭발적 교육 확대, 군대에서 시민 기술훈련과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의 작성이 없었다면 박정희 정권의 경제 개발은 성공하기 어려웠다. 앞선 두 정권의 교육과 경제 발전에 의한 시민 중산층이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또 미국ㆍ독일과 유엔에서 경제지원이 없었더라면 제3세계 국가들과는 다른 대한민국의 일관된 자유의 성취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독특한 과정의 연속 합작을 거쳐 나온 '대한민국의 자유'는 대한민국 정통성의 중심에 서 있다. 이 귀중한 가치와 자산을 지키고 키우는 것이 대한민국과 한민족의 제일 과제다." 

- 김진현, 서울대학교 사회학 학사와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셔 경제학 명예박사, 공학 명예박사를 받았다. 한국기자협회 부회장, 동아방송 보도국 국장, 한국경제연구원 대표이사 부원장, 한국국제조세협회(IFA) 창립이사, 제13대 과학기술처 장관, 한국경제신문 회장, 서울시립대학교 총장, 문화일보 대표이사 회장, 한국무역협회 수석객원연구원, 세계평화포럼 이사장을 지냈으며, 현재 한국무역협회 연구자문위원회 위원장,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이사장,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립위원회 위원장으로 있다ㅣ2008년 1월 25일 동아일보와 가진 인터뷰의 내용과 2009년 6월 15일 매일경제에 올린 사설의 내용과 2007년 2월 26일 업코리아와 가진 인터뷰의 내용 중




유용옥, 경기대학교 국제대학 국제관계학과 교수이자 학장

 

"이승만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낸 대한민국의 건국은 우리 민족사에서 최대의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그것은 한반도에 그 이전에 존재했던 왕조 국가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정치체제와 제도를 기반으로 한 국가가 성립되었다는 점에서 그러하고, 또 우리 한국인이 처음으로 근대적 개념의 권리를 지닌 국민으로 새롭게 태어났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바로 이러한 한국인의 존재론적 변화가 해방 후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낸 국가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음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요즘 우리 사회에서 과연 대한민국의 건국과 이승만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현재 우리는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이라고 찍혀 있는 여권을 지니고 언어연수다, 관광이다, 사업이다 하면서 세계 곳곳을 누비고 있다. 그럼에도 제대로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를 가르치려고도, 배우려고도 하지 않았기에 건국 대통령 이승만과 건국과정에 대해 제대로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남산에서 거행된 이승만 전 대통령 동상 개막식만 보더라도 스티븐스 미국 대사는 물병세례를 받으면서까지 행사에 참석한 데 반해, 직접적으로 이승만 전 대통령의 뒤를 이어 이 나라를 이끌어가고 있는 우리 정부 관계자는 단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아 빈축을 샀다. 게다가 지난 10년간의 좌파정권은 대한민국의 역사를 왜곡하고 폄하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역사 속에서 건국 대통령 이승만이라는 이름을 지우려고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결과 이승만과 대한민국의 건국 및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부정적인 해석은 우리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매우 일반적인 상식이 되었고, 대한민국은 자랑스러운 조국으로 영원히 지켜나가야 할 가치 있는 이름이 아니라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나라로, 불의가 정의를 눌러온 역사를 지닌 나라로 매도되었다.이렇게 스스로 자신의 건국의 역사를 훼손해온 지난 10여년의 결과들을 우리는 지금 보고 있다. 조국에 대한 애정과 신뢰가 옅어지면서 국가허무주의가 우후죽순처럼 솟아나고 건국 초기 우리가 목숨 걸고 지켜나가려 했던 자유민주주의 제도가 흔들리고 있다. 우리가 해방 후 지금까지 과연 무엇을 어떻게 이루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정립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근대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루어낸 유일한 국가라는 자긍심은 한순간의 신기루처럼 사라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 위대한 역사의 중심에 있었던 건국 대통령 이승만을 잊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유영옥, 스트레이어대학교에서 학사를, 조지워싱턴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책학 박사,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행정학 박사,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행정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한나라당 이명박 대통령후보 특별보좌역을 지냈으며, 현재 경기대학교 국제대학 국제관계학과 교수 및 국제대학 학장으로 있다.

- 2011년 10월 13일 국민일보에 올린 사설의 내용 중




정종섭,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부 교수, 법과대학 학장, 법학대학원 원장이자 법학전문대학원협의회 이사장

 

"독립과 건국 직후의 혼란스러운 정치 과정에서 이승만의 역할에 대한 그간의 평가는 정치적 헤게모니 투쟁의 성격이 강했다. 또 신념화하는 양상도 보였다. 4․19를 체험한 '4월의 아이들'은 신념으로 저항하였기에 이승만정부와 이승만은 언제나 안티테제(Anti-these)로서 신념화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늘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4월의 아이들'이거나 그 세례를 받은 세대이다. 그러기에 그 안티테제는 당연히 부정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4․19의 안티테제가 독재냐 이승만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보면, 이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특히 독립 투쟁과 건국과 6․25를 거치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오늘의 대한민국을 바라보면 이승만은 헌정사에서 근본적으로 재평가되어야 할 점이 적지 않다. 4월의 세례를 받은 아이로서 이를 수용하기는 심정적으로 쉽지 않지만, 헌법학자로서는 사실에 접근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리하여 이승만이 저술한 원래의 사료와 활동에 접근하고 다시 판독하는 작업을 할 수 밖에 없다. 이승만에 가까이 접근하면 할수록 많은 질문이 생긴다. 가장 쉬운 질문은 '역대 대통령 중에 이승만보다 높이 평가할 수 있는 대통령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기까지의 교육의 수준, 동서 학문에 대한 박학함, 지식의 깊이, 역사 의식, 청년기부터의 문제의식, 독실한 실천, 글로벌 리더로서의 수준, 국가 철학, 위기극복의 지도력 등등에서 역대 대통령과 비교해 보면 누구나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이승만에 대한 연구는 국내적으로만 한정하기 어렵다. 미국, 프랑스, 일본, 중국 등의 건국 과정과 그 과정에서 활동한 국가지도자들과 비교하여 연구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이에 관한 정보와 지식은 이제 일반인들도 어렵지 않게 접근할 수 있으므로 이러한 작업을 통하여 이승만의 위치를 살펴보는 것도 필요하다. 4․19의 안티테제가 독재라는 항목에서도, 이승만 이후 대통령들이 독재를 한 점은 없는가 하는 점을 분석, 비교할 필요가 있다. 국가 운영에서 대통령의 권력을 전횡한 것, 국민의 목소리를 거부하고 독선과 독단으로 나라를 위태롭게 한 것, 국가의 한정된 자원을 자기 세력끼리 나눠먹기, 부적절한 사면, 권력형 부정과 부패, 권력을 이용한 재산 축적, 반대세력 탄압, 지역주의를 이용한 국민 분열 등등의 항목별로 비교할 필요도 있다. 이렇게 보면, 대통령마다 기념관을 건립할 것이 아니라, 대통령 역사관을 지어 역대 대통령을 항목별로 상세한 비교를 하는 것이 역사적 교훈의 면에서 더 적절하다고 본다. 올해 4월은 이승만의 원본 문서들을 읽어가 본다. 연구자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평가 이전에 이승만의 원 모습을 확인하는 일부터 해보자." 

- 정종섭, 서울대학교 법학과 학사와 경희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과 석사,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과 박사학위를 받았고 제24회 사법시험에 합격, 헌법재판소 헌법연구관과 건국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교수와 한나라당 공직자후보추천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현재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부 교수, 제25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장, 서울대학교 법학대학원 원장, 제3대 법학전문대학원협의회 의사장, 새누리당 공직자후보추천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있다ㅣ2010년 4월 18일 한국일보에 올린 사설의 내용 중




김용직, 성신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및 사회과학대학 학장

 

"이승만의 단정수립 제안은 당시 상황에서 평화적 합의에 의한 통일이라는 목표가 소련과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거부당하여 사실상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나왔다. 이승만의 단독정부론에 대해 그에게 모든 분단의 책임을 전가하려는 시선을 경계해야 한다." 

- 김용직, 서울대학교 학사 및 동 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 석사와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채플힐교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 채플힐캠퍼스 정치학과 연구조교, 한림대학교와 서울대학교, 서강대학교, 경희대학교, 충북대학교, 국민대학교 강사와 공보처 해외공보관 전문위원을 지냈으며 현재 성신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와 사회과학대학 학장,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있다.

- 공동저술한 <대한민국 건국의 재인식>의 내용 중




양승함,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와 행정대학원 원장으로 한국정치학회 회장


"이승만 전 대통령은 몰락한 왕족의 후예로 태어나 소외된 엘리트로서의 자질을 가졌다. 이는 나라가 어려운 시기에 혁명적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또 이 전 대통령은 미국 유학 생활로 미국식 가치에 익숙했기 때문에 ‘최초의 민주적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4·19 때 사태가 더 번지기 전에 하야한 것을 봐도 이 전 대통령은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자이다. 이런 면에서 자기제한적 권위주의자로 볼 수 있다." 

- 양승함,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 학사와 워싱턴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정치외교학과 교수와 한국정치학회 회장,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원장으로 있다ㅣ2006년 11월 23일 연세대학교 국가관리연구원에서 주최한 '한국의 국가관리와 대통령 리더십'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내용




라윤도, 건양대학교 군사경찰대학 군사학과 및 문학영상정보학부 교수로 군사경찰대학 군사학과 학과장

 

"오는 8월 건국60주년을 맞아 다양한 축하행사들이 준비되고 있다. 행사들 중에 눈길을 끄는 것은 건국 대통령 이승만박사의 동상을 건립하자는 것이다. 건국60주년을 맞아 건국 대통령의 동상을 서울 남산의 자유센터에 세워 그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되새기고 본받자는 취지로 크게 환영할 일이다. 단순히 이승만 박사 개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의 국기(國基)를 세운 초대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재정립함으로써 후손들에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자긍심과 애국심 고취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인 것이다. 일제가 우리 민족에게 심어놓은 자학적(自虐的) 역사관에서 탈피하여 민족자존의 긍지와 민족번영의 진취성을 높여나가는 일이야말로 건국60년에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차제에 현 대통령까지 건국 이후 모두 10명의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도 필요하다. 역대 대통령의 업적을 과대평가해서도 안되지만 단편적인 기준으로 쉽게 폄하해버리는 태도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정확한 평가를 통하여 본받을 것은 본받고 반성할 것은 반성해나가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독재자’로 낙인찍혀 있는 이승만 박사에 대한 재평가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고 그 공과(功過)를 분명히 하는 일은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고 민족 자존심을 되찾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 라윤도, 한국외국어대학교 인도어과 학사 및 동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네루대학교대학원 및 인하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서울신문에서 워싱턴특파원과 문화부장, 국제부장을 지냈고 한국인도학회 이사, 한국관훈클럽 임원, 서울신문 편집자문위원, 한국아프리카학회 회장, 민주평화통일 충남평화통일포럼 위원, 건양대학교 출판부 부장과 대외협력부장, 총장 비서실장과 대전서구문화원 편집위원, 한국인도학회 회장, 실버TV 시청자 자문위원, 건양대학교 대학원장과 국방관리대학원장, 한국 인도학회 편집위원, 세계지역 종합연구 자문위원을 지냈으며 건양대학교 군사경찰대학 군사학과 교수와 문학영상정보학부 교수, 실버문화콘텐츠사업단 단장, 건양대학교 20주년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위원장과 군사경찰대학 군사학과 학과장, 한글사랑 나라사랑 국민운동본부 이사로 있다.

- 2008년 6월 13일 업코리아에 올린 사설의 내용 중




이영훈,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학부 교수이자 낙성대경제연구소 소장

 

"대한민국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그를 지지하는 자유민주주의 세력에 의해 건국됐다. 그런 뜻에서 이승만은 건국의 아버지다. 아버지가 없으면 아들이 없듯이 이승만이 없었으면 대한민국은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라시아대륙의 대부분이 공산혁명의 파도에 휩쓸릴 때 한반도의 남부를 자유민주주의로 지켜낸 것은 차라리 기적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승만이 그 일을 해낸 것이다. 혹자는 미국이 있었는데 무슨 소리냐고 할지 모르겠다. 2차 대전 후 이 땅에 들어온 미국은 준비되지 않은 지배자였다. 미국은 전쟁이 끝나면 한반도를 신탁통치하자는 소련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좌우합작을 추진했다. 이승만은 그 길은 공산주의로 가는 길이라며 저항했으며, 그 일로 미군정의 박해를 받았다. 1948년 대한민국이 세워지자 미국은 소임을 다했다며 홀가분하게 떠났다. 마침 냉전이 격화해 발칸반도에서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자 미국은 양쪽을 다 감당할 수 없다며 대한민국을 태평양방위선에서 제외했다. 그 경솔함은 김일성의 오판을 일으켜 6·25전쟁의 참화로 이어졌다. 혹자는 김구가 있었는데 무슨 소리냐 할 지 모르겠다. 김구는 독립운동에 큰 공로를 남긴 분이다. 그렇지만 김구는 자유민주주의의 투철한 신봉자가 아니었다. 그는 대한민국의 건국에 끝까지 반대했다. 보다못한 중국의 장개석 총통이 서울의 중국영사를 그에게 보내 권했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로 한민족을 통일한 보루가 될 터이니 그 나라에 부통령으로 참여해 이승만을 도우라고. 하지만 김구는 완강하게 거절했다. 그의 답변을 자세히 뜯어보면 그는 차라리 공산주의를 하고 말지 민족분단은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승만이 건국의 아버지인 것은 나라를 세울 길은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밖에 없음을 굳게 믿고 작으나마 지지세력을 결집해 끝내 그 일을 해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통일은 어떻게 하는가. 그것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먼저 세운 다음 국력을 키워 북한에서 공산주의세력을 몰아내면 된다고 했다. 그는 그렇게 단순명쾌하고 강력한 논리로 흩어진 민족을 모으고 허물어진 나라를 세우고 새로운 문명 국민을 만드는 역사적 과업에 착수했다. 그의 시대가 지나고 50년의 세월이 흘렀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 하에서 정치적으로 성숙했고, 경제적으로 번영했다. 북한의 공산주의는 세습적 왕조체제로 타락했고 온 국민을 국제 거지의 신세로 만들었다. 그렇게 이승만의 정당성은 세월과 함께 증명됐다. 그의 노선에 따라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로 민족통일을 이룰 만한 용기와 지략을 갖추고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이승만의 건국과 통일 방안은 아직 미완성이다. 그렇지만 그 방향 밖에 없음은 누구의 눈에도 훤하게 됐다. 그래서 그는 다시 한 번 우리 건국의 아버지다. 이승만연구소가 최근 문을 열었다. 개소 기념식에서 들은, 그가 남긴 수많은 통치사료가 아직 정리도 안된 채 묻혀 있다는 지적에 가슴이 아렸다. 어느 20대 젊은이의 연설은 더욱 큰 아림이었다. “우리에게 경제적 풍요와 민주주의를 주어서 고맙습니다. 그런데 왜 대한민국은 주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어릴 때부터 한반도를 배웠지 대한민국을 배운 적이 없습니다.” 집안을 일으킴에 공이 큰 아버지를 다소간의 과(過)가 있다고 형제들이 불목하면서 제사하나 제대로 모시지 못한다면 그 집안은 패가의 망신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의 독재는 비판돼야 하지만 온통 그의 책임만도 아니었다. 사회 자체가 너무 가난해 부패하고 분열해 있었다. 그런 가운데 공산주의라도 좋으니 민족통일이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지금도 많지만 그때는 더욱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 이영훈, 서울대학교 경제학 학사 및 동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고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규장각 조교, 한신대학교 경제학과 전임대우교수와 조교수, 경제사학회 연구이사,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 부교수와 교수, 일본 경도대학 경제학부 방문교수를 지냈다. 한국경제학회 청람상을 받았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학부교수로, 다산학술문화재단 이사, 낙성대경제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 2011년 3월 18일 문화일보에 올린 사설의 내용 중




오영섭, 연세대학교 현대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

 

"이승만은 3.1운동이후 독립운동 지도자로부상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대통령으로 의정원의 탄핵으로 물러난 1925년까지 6년간 직무를 수행했다. 학계는 ‘독립전쟁론’·‘의열투쟁론’에 천착한 나머지 ‘외교독립론’과 ‘실력양성론’을 폄하해왔지만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서의 의미를 재평가해야 한다.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론은 일본의 무단통치가 시작되는 와중에 한국의 즉각적인 완전독립이 불가능한 현실을 고려,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라며 국제정세를 감안한 단계적이고 점진적인 독립구상이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파리 강화회의와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제출키 위한 위임통치 청원서는 1919년 2월25일자 이승만·정한경의 청원서만 알려졌으나, 상해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견된 김규식도 유사한 문건을 강화회의에 보냈다. 이 역시 이승만·정한경의 청원서와 마찬가지로 현실적인 차선책으로 위임통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론은 독립정신·대내외 정세에 대한 냉철한 인식에 기반해 한국을 서구형 선진국가로 만들려는 근대적 계몽사상을 품고 있었다. 또 윌슨 대통령에게 청원서를 제출 때 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와 기타 임원들의 검토를 거쳐 승인을 받은 뒤 제출된 만큼 청원서는 미주 한인사회를 양분한 이승만계와 안창호계의 합작품으로 볼 수 있다. 학계일각에서 “주체적 독립운동을 부정한 것”이란 인식이 팽배한데, 이는 식민지 통치에 저항한 독립운동가들에 가혹한 평가기준을 들이대고 있다. 한편 국제연맹의 위임통치제도는 국제연합의 신탁통치제도와 같은 성격을 지닌 것으로 양자 공히 1·2차 세계대전 후 전범국가인 피식민지 처리방안으로 고안된 제도로 규정될 수 있다. 실제로 해방이후 한국이 미군정으로부터 3년간 신탁통치를 받은 다음 UN의 감시아래에 총선거를 통한 남한만의 자주적 민족국가를 수립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한국은 이 과정을 거쳐 국가의 실력을 길러 세계사상 유례없는 성공을 거뒀다." 

- 오영섭, 서강대학교에서 사학 학사 및 한림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고 연세대학교 현대한국학연구소 전문연구원을 지냈으며, 현재 연세대학교 현대한국학연구소 연구교수로 있다. 제33회 월봉저작성을 받았다.

- 2011년 9월 30일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에서 개최한 1차 학술회의에서 했던 말의 내용 중




김충남, 하와이 동서문제연구소 포스코펠로십 조정관

 

"이 전 대통령의 위대한 역사적 공적에도 불구하고 그 분만큼 잘못 알려지고 비난받는 지도자는 없을 것이다. 이 전 대통령은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를 거쳐 해방과 건국,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역사상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확고한 원칙으로 나라를 세웠고 공산 침략자들을 물리친 탁월한 지도자였다. 현실주의자인 이승만은 당장은 통일이 불명하다면 휴전반대라는 지렛대를 이용해서 국가 안전을 확보하는, 즉 미국과는 상호방위조약을 얻어내고자 했다. 그는 단순한 국가지도자가 아니라 진정한 애국자였고 위대한 사상가였으며 국민적 영웅이었고 건국의 아버지였다. 그가 스스로 말했듯이 그는 평생을 ‘선동가’로 살아왔으며 정치적 목적을 위해 대중을 설득하고 동원할 수 있는 능력(웅변술)이 뛰어났다. 한국의 조지 워싱턴이 되려고 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공로 중 가장 중요한 것이 한미 방위조약이다. 미국은 절대로 한미 방위조약을 안 하려고 했는데, 이 대통령이 우기고 우겨서 했다. 휴전만 하고 방위조약이 없었으면 어떻게 됐겠나? 방위조약이 없었으면 한일 국교정상화도 성사됐을지 의문스럽다. 미국이 반공동맹국이라고 악착같이 밀어서 한일 국교정상화를 했다. 그러니까 일본 자본과 투자가 들어온다. 미군이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도 우리나라에 투자를 한다. 또 동맹국이기 때문에 미국이 시장을 우리에게 열어줬다. 동맹국이기 때문에 우리가 월남에 참전을 하고, 달러도 벌어왔다. 우리가 미국의 안보울타리 안에 있었기 때문에, 방위비를 적게 들이고 경제개발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런 안보구상이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이 데모하고 민주화를 할 수 있었다. 이 대통령이 닦아 놓은 이 기초가 없었으면 박 대통령이 절대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 김충남, 육군사관학교와 서울대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미국 미네소타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육군사관학교와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를 지냈고, 청와대에서 사정비서관, 정무비서관, 공보비서관으로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등 세 분의 대통령을 9년여에 걸쳐 보좌했다. 미국 RAND 연구소 아시아태평양 정책센터의 자문위원을 10여 년간 역임하는 등 다양한 자문경력이 있으며, 하와이 동서문화센터(EAST-WEST CENTER)에서 10여 년간 연구위원으로 있었고 최근에는 세종연구소 객원연구위원으로 있었다ㅣ2006년 3월 24일 서울 정동제일교회 문화재 예배당에서 제131회 이승만박사 탄신 추모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역사적 위상'이란 주제의 강연으로 했던 말과 그의 책 <대통령과 국가경영–이승만에서 김대중까지>의 내용과 2006년 3월 29일 제516회 수요간담회에서 ‘대통령과 국가경영 - 이승만에서 김대중까지’를 주제로 했던 강연의 내용 중


강규형, 명지대학교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전 오하이오대학교 현대사연구소 연구원

 

"문제가 된 금성출판사 근현대사 교과서의 경우 무려 300여 군데에 걸쳐 오류와 편향을 수정했지만 아직도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지난 60년간의 성취를 대체적으로 부정하고 북한체제에 호의적인 근본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남북한 토지개혁과 관련해 사실관계가 잘못된 대표적 사례로 이 교과서에 언급된, 가상의 남한 농민을 내세운 삽화와 더불어 이승만의 토지개혁을 비하하는 내용이다. 좌파학자들도 인정하듯 이승만 대통령의 농지개혁은 진취적이고 성공적이었던 데 비해 북한의 토지몰수는 농민에게 소유권을 주지않고 경영권만 줘 집단농장으로 흡수된 실패한 정책으로 내용이 반드시 수정돼야 한다. 현행 근현대사 교과서는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정하고 북한체제에 대한 호의적인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학교수업을 통해 학생들에게 왜곡된 역사관을 심어준 측면이 있어 바로잡는 것이 바람직하다. 김대중 정부에서 ‘건국’ 50주년을 기념할 때는 별 문제가 없다가 이제 와서 굉장한 논란이 일고 있는 것은 정치적인 의도가 깔려 있는 것같다. 교과부장관에게 교과서 내용의 수정권한이 있기에 바로잡는 것이 마땅하다. 근현대사 수정이 정치적 논쟁으로 비화되는 배경에는 제1공화국, 특히 5·10선거에 대한 부정과 긍정의 문제와 더불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 6·25전쟁의 성격과 관련된 학계 등의 상반된 의견이 자리잡고 있다. 근현대사 수정 문제는 뿌리깊은 학계의 갈등과 연관된 복잡한 사안인 만큼 위에서부터 무리하게 추진하기보다 학계의 합의 도출 과정을 거쳐 서서히, 신중하게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강규형, 연세대학교 사학과 학사와 인디애나대학교 역사학 석사, 오하이오대학교 역사학 박사학위를 서양현대사, 러시아가, 국제관계사 전공으로 받았고 오하이오대학교 현대사연구소 연구원, 연세대학교 통일연구소 연구원,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의학행동과학연구소 객원연구원, 명지대학교 방목기초교육대학 조교수와 부교수, 주임교수, KBS 교향악단 운영위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중앙일보 고정 칼럼니스트,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을 지냈으며, 현재 명지대학교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 서울 스프링 실내악 페스티벌 집행위원, 동아일보 객원 논설위원, 기후변화·에너지대책포럼 국제협력위원장, 수필가로 있다.

- 2008년 10월 6일 문화일보와 가진 인터뷰의 내용 중




이철순, 부산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정치외교학과 부교수

 

"이승만 대통령은 사실 미국과 사사건건 대립하고 대한민국의 국익을 지키려다 미국과 수차례 갈등을 빚었다. 미국은 이승만을 견제하려 했으나 정세의 변화로 이승만의 단정노선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을 뿐 그가 미국에 순응적인 맹목적 친미주의자이거나 대미 사대주의자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이승만을 혐오한 미국의 민간 관리들이 번번이 이승만을 대체하고자 했지만 대안을 찾을 수 없었다. 이승만은 이러한 미국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강대국을 상대하면서도 당당하게 대한민국의 국익을 지켜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 이철순,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 및 동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부산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정치외교학과 부교수로 있다ㅣ2010년 4월에 열었던 '4·19혁명과 이승만'의 주제의 세미나에서 발표했던 내용 중



차상철, 충남대학교 사학과 교수

 

"반공주의자라는 표현은 맞지만 숭미주의자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지미(知美)나 용미(用美)가 적절한 표현이다. 긴 미국유학과 망명생활을 거치면서 미국이 저지른 기만과 배신, 무관심을 목격한 이승만은 결코 맹목적인 숭미ㆍ친미주의자가 될 수 없었다. 이승만은 약소국의 희생이 다반사로 벌어지는 살벌한 국제정치 현실에서 초강대국 미국이 지닌 힘과 영향력을 익히 간파하고 신생 대한민국의 독립과 생존을 담보하기 위해 철저히 미국을 이용했다. 용미주의자 이승만의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협상이다. 이승만은 험난한 협상과정에서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을 포함한 미국 고위 정책결정자들에게 과거 미국이 저지른 실책과 배신을 자주 상기시켰다. "미국에 대한 우리의 확고부동한 신뢰에도 불구하고 1910년 일본의 한국합병과 1945년 한반도의 양분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는 과거 두 번씩이나 미국에 배신당했다. 지금의 사태진전은 또 다른 배신을 시사하고 있다"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위해 서울을 방문한 월터 로버트슨 극동문제 담당 국무차관보는 이승만의 날카로운 지적에 얼굴을 굳히고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위해 이승만은 '벼랑 끝 전략'도 서슴지 않았다. 남한 내 북한 포로 가운데 반공의사를 밝힌 2만7천 여 명을 직권으로 석방한 이른바 '반공포로 석방'은 이승만의 승부수였다. 이승만은 미군 감시원을 내쫓으면서 반공포로를 석방했고 휴전을 낙관하던 미국에 한국의 동의 없이는 휴전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시켰다. 또 한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보장하지 않는 한 결코 휴전에 동의하지 않을 것임을 강조했다. 1953년 8월8일 서울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이 가조인된 날 이승만은 "우리는 앞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많은 혜택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조약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앞으로 번영을 누릴 것이며…우리의 안보를 확보해 줄 것이다"라고 감회를 피력했다. 이승만에게 한미군사동맹의 체결은 신생공화국의 사활이 걸린 생명줄과 같은 것이었다. 이승만의 '나라 세우기(建國)'와 '나라 지키기(保國)'가 제공한 단단한 기반 위에서 1960년대 이후 고도성장을 통한 '나라 키우기(富國)'이 가능했다."

- 차상철, 연세대학교 사학과 학사와 동 대학원에서 석사, 마이애미 대학교에서 미국 외교사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워싱턴 대학교 풀브라이트 연구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충남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있다ㅣ2007년 8월 8일 연합뉴스와 가진 인터뷰의 내용 중


김일영,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오늘날 남한만의 단정 수립을 비판적으로 보는 풍조가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부정적 사고의 이면에는 통일정부를 수립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민족주의적 입장에서의 회한이 깔려 잇다. 당시나 지금이나 통일정부 수립의 당위성과 필요성에 대해 부인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다만 당시의 국내외적 조건에서 그것이 실제로 가능했겠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당위성과 현실성 사이에는 상당한 괴리가 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승만의 단정 노선은 냉전에 저항하기보다는 미국에 편승하여 남한에 먼저 정부를 세우고, 그것을 토대로 북한을 통일하자는 2단계 전략의 일환이었으며, 냉전의 종언을 지켜본 현시점에서 최선은 아니지만 가능한 범위 내에서의 차선의 선택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냉전 질서에 저항에 나선 나라들은 많지 않았다. 독자 노선을 택한 나라로는 유고슬라비아,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 드골 치하의 프랑스 등이 있었다. 이 중 냉전 초기부터 독자 노선을 취한 나라는 유고슬라비아 정도였다. 그나마도 유고슬라비아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은 적어도 1950년대 후반에 가서야 이런 입장을 취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나라들은 순응의 길을 택해 미·소 양진영 중 하나에 가담했다. 전 세계적 차원에서 냉전에 대해 각국이 취했던 순응과 저항의 태도는 한국 내부에서 모두 그대로 나타났다. 중간파의 노선은 명분은 있었으나 냉전이 본격화된 초기에, 분할 점령을 당한 나라에서, 세력도 갖추지 못한 중간파가 성공시키기에는 '때 이른' 시도였다. 남한에서 이런 맥락을 잇는 움직임은 1950년대 후반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으로 나타났다. 두 노선 사이의 첫 번째 차이는 이승만의 단정 노선은 실제로 북진통일론으로 나아가지 못했지만, 김일성은 한국전쟁을 일으켜 민주기지론을 국토완정론(남진통일론)으로 현실화시키려 했다는 점이다. 이승만과 김일성 노선의 또 다른 차이는 냉전의 종언으로 드러났다. 이승만 정부가 이 땅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꽃피운 것은 분명 아니다. 당시 정치는 권위주의적이었고, 시장은 경제를 움직이는 부분적 메커니즘에 불과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권위주의가 전체주의보다 나으며, 부분적으로 작동할지라도 시장이 전면적인 통제와 계획보다는 효율적이라는 점이다. 권위주의와 부분적 시작 속에서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시장이 꽃필 여건이라도 만들어지지만 전체주의와 통제경제 속에서는 그마저도 불가능하다. 이 점에서 오늘날 전체주의의 북한의 곤궁은 김일성의 민주기지론에 뿌리를 두고 있고,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이승만의 단정 노선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동안 농지가 실제로 분배된 시점에 대한 중요한 오해가 계속되어 왔다. 정부 수립 이전부터 농지개혁에 적극적이었던 이승만의 의지 덕분에 전쟁이 터지기 전인 1950년 3월에서 5월 사이에 적어도 농지의 70%~80% 정도에 대한 분배가 단행되었다. 또한 한미동맹의 '삼위일체+1' 구조, 즉 정전협정과 한미상호방위조약, 한미합의의사록의 삼자와 인계철선으로서의 주한미군이 합쳐져 이루는 이 구조는 이승만의 노력의 결실이었다. 이러한 군사적 안정과 경제적 지원이 없었더라면 1960년대 이후 한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은 생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요컨대 지난 반세기 동안 한미 양국은 이러한 한미동맹의 '삼위일체+1' 구조 위에서 북한의 군사적 위협을 억제하고, 동북아시아에서 안정과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으며, 더 나아가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한국이 경제발전에 성공한 요인으로 가장 많이 지적되는 것이 효과적인 국가개입과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발전국가이다. 한국에서 이러한 발전국가가 본격적으로 형성·발전된 것은 1960년대 이후이지만 그 사회적 토대는 1950년대에 만들어졌다. 특히 농지개혁과 전쟁은 자율성이 큰 국가를 낳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1950년대는 대개 잿빛 이미지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전쟁, 궁핍, 지저분함, 무규범, 퇴폐, 혼란, 독재 등이 우리가 연상하는 이 시대의 이미지이다. 그러나 근자에 들어 1950년대에서 이후 시기의 싹을 발견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1950년대를 건너뛰어서는 1960년대 이후 한국 사회가 보여준 정치경제적 역동성을 설명할 수 없다. 적어도 자료를 통해서 본다면 1950년대는 불임의 세월만은 아니었다. 1953~1960년 사이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연평균 4.9%로 비슷한 수준의 후진국들의 평균성장률 4.4%를 조금 상회했다. 이 시기 원조자금으로 건설된 사회기반설비는 1960년대 이후 산업화의 밑거름이 되었다. 해방 당시 13세 이상 인구의 80%가 어떤 형태의 교육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1952년부터 실질적인 의무교육이 시작된 결과 1959년에는 순 문맹율이 22.1% 대로 낮아졌다. 같은 기간 고등교육 이수자도 크게 증가함으로써 1960년대 이후 노동집약적 산업화의 밑바탕이 되는 양질의 풍부한 노동력의 풀이 형성되었다. 1960년대 이후 산업화를 이끌어갈 엘리트 관료들이 재무부와 부흥부 주변에 속속 충원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이다. 이런 점에서 이 시기는 1960년대 이후 꽃피는 역동성의 싹을 회임한 시기였다." 

- 김일영,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대한국정치외교사와 국제정치경제론, 법정치학을 다룬다. 하버드대학교 옌칭연구소 초빙교수, 일본 규수대학 법학부 객원교수,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 한국미래학회 회원, 한국산업사회학회 회원, 국제정치논총 편집위원,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 전문위원, 성균관대학교에서 사회과학연구소 소장과 정치외교학과 교수를 지냈다. 그는 소통하는 보수로서 보수적 성향에 서서 진보진영의 논리에 대해 논리적으로 비판함으로써 보수와 진보간 논쟁과 소통을 주도해온 지식인이다.

- 그의 책 <건국과 부국>의 내용 



전형권, 창원대학교 사학과 교수

 

"현대사 연구는 '운동권' 사학으로 출발했고 반공파시즘 정권에 치열하게 대립하다 보니 좌편향 친북적으로 흘러갔다고 생각된다. 금기를 깨고 현대사 연구를 개척한 공로는 일정 부분 평가해야 한다. 하지만 반(反)반공의 도그마에 빠져 자신만의 역사해석을 고집하는 것은 또 다른 독선일 뿐이다. 역사는 집단적 가치와 시대정신에 대한 해석학이다. 따라서 현대사에 대해서도 오늘날의 시대 변화를 반영한 재해석은 불가피하다. 이승만은 해방 후 거의 무(無)의 상태에서 국가를 건설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3~60년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4.9%, 제조업 성장률은 12.4%였다. 이승만 정권의 수입대체공업화가 후일 박정희 정권의 수출주도 경제의 토대가 된 것은 분명하다.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불과 2개월 만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이승만 정부가 1년 8개월에 걸쳐 완성한 경제 개발 3개년 계획을 급히 수정한 것에 불과하였다. 6·25전쟁의 재난 속에서 국가 존립과 경제 부흥의 토대를 마련한 이승만의 공적은 마땅히 평가 받아야 한다. 이승만 비판의 또 하나는 친일 잔재 청산의 미흡이다. 만약 청산이 완벽했다면 일본 육사를 나와 만주군 장교였던 박정희의 공직 진출은 차단되었을 것이다. 또 남로당 가입으로 여순반란사건에 연루되었던 박정희를 살려 주지 않았다면 대통령 박정희는 탄생되지 않았을 것이다." 

- 전형권, 부산대학교에서 사학과 학사와 동 대학원에서 사학으로 문학 박사를 받았다. 현재 창원대학교 인문대학 사학과 교수로 인문대학장이기도 하며, 교육대학원장이다ㅣ2011년 5월 31일 부산일보에 올린 사설의 내용 중


류석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나는 최소한 대한민국을 세운 건국 대통령에게 그 정도 관심과 평가는 해드려야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분들이 많이 등장해서 여러 가지 흔드는 작업을 보고 대한민국이 한반도에 나타난 국가로서 5천년 역사에서 가장 번영하고 번성하는데 왜 이렇게 부정적인 평가만 하느냐라는 그런 생각을 가진 분들이 문제제기를 해서 이승만 대통령을 다시 보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45년 그 당시에, 혹은 48년 그 당시에 사실은 한반도가 뭐 적화라고 표현할 수도 있고, 공산정권이 들어올 수 있었던 그런 상황인데도 그런 어려움을 뚫고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가능한 지역이라도 만든 것이 굉장히 중요한 거였다. 그 시대는 부분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100% 기능하지 못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그것은 인정을 하지만, 우리 대한민국 역사를 쭉 한반도에 존재했던 그 과거하고 한번 이렇게 연속선상에서 평가를 해보면, 우리가 민주주의라는 것을 실현하고 실천할 수 있었던 기회가 없었다. 조선시대는 왕조 국가였고, 그 이후에는 식민지 시기를 거쳤다. 그 이후에 처음으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질서를 기초로 하는 헌법을 만들어서 그 헌법에 기초해서 우리가 이런 나라를 운영해보자라고 만들었는데, 그 시도 자체가 나는 굉장히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식민지 사회에서 태어난 나라 중에 많은 국가들이 공산화에 적극적인 선택을 하거나 아니면 소련의 공산화 관리, 정책에 따라서 공산화가 되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89년을 거치고, 지금의 시점에서 보면 미국의 선택이 분명히 옳았다 혹은 이승만의 선택이 옳았다, 사회주의가 잘못되었다라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 이미 세상이 다 그런 평가를 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 당시에만 해도 사실 사회주의가 좋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아니고 그 당시에 예를 들면 김구 선생 같은 분이 남북협상을 주장하고 선거에 참여하지 않는 입장이었는데, 나는 그 당시 국제정세와 남북한이 대치하고 있는 그런 상황에서 남북협상론이 과연 가능했을까. 남한이 북한식 체제를 따르는 선택을 하지 않는 이상 남북협상은 어차피 불가능한 거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 공과 과를 있는 그대로 봐야 한다는 말에는 나도 100% 동의한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갓 시작한 48년에 출범한 대한민국의 국민소득이 뭐 50불에서 100불 하는 그 상황에서 인권 문제의 수준은 사실 굉장히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본다. 다른 한편으로는 실제 이 좌파, 우파의 대결이 당시에서는 그게 그냥 의회에서, 혹은 언론에서 대립하는 정도에 그친 게 아니라, 사실 4.3사건, 혹은 그 사건의 배후에 있는 5.10선거에 참여하느냐, 말 것이냐, 하는 것이 결국은 50년 6월 25일날 6.25전쟁으로, 열전으로 진행한 것이다. 그 열전이 이제 해방 공간에 완전히 이렇게 숨어있는 것 아닌가? 국가 전체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존망의 기로에 섰던 게 6.25전쟁이다. 그 6.25전쟁 과정에도 또 수많은 양민들이 희생당했다. 그 앞뒤로 굉장히 치열한 정치적 선택, 갈등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사람들이 피해 받은 사실이 있다고 인정을 하지만, 동시에 그분들이 피해 받지 않도록 하느라고 국가 전체가 무너지는 상황은 우리가 피해야 된다고 본다. 6.25전쟁이라는 것은 실제 우리는 전혀 준비가 안 되어 있는데, 북쪽에서 소련과 다 계획을 다 세워서 남한을 먹으려고 밀고 내려왔지 않았나. 그거를 우리가 잘 이승만 대통령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 전쟁 중에 선거를 여러 번 치렀다. 6.25전쟁이라는 엄청난 전쟁을 치르면서도, 주기적인 선거를 때를 놓치지 않고 계속 시행했다. 그런 걸 보면 이분이 자유민주주의적인 절차를 지키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은 전쟁 중에도 그런 걸 좀 유예해도 우리가 전쟁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 말이다. 나는 이승만 대통령이 집권하고, 나라를 세우고 나서 한 일들 중에 가장 잘한 일이 농지개혁을 성공시킨 일이라고 생각한다. 농지개혁에 대해서 그동안은 했지만 전혀 성과가 없는 거다라는 견해가 없지 않아 있었던 적도 있는데, 요새 내가 알기로는 전체적인 평가가 사료를 잘 정리해서 분석한 논문들을 보면 굉장히 성공적이었다. 그 당시에 독립한 나라들 중에서는 이만큼 잘한 농지개혁이 없다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인데, 이 농지개혁의 개혁의 대상이 된 사람들이 누구였을까를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일제시대 때 돈을 많이 번 지주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승만 대통령이 친일 청산에 미온적이었다라는 평가를 친일 반민특위 활동하고 연관 지으면서 실제 인적 청산이 좀 미온적, 좀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농지개혁이라는 것은 인적 청산은 아니지만, 그 당시 경제적 상층 계급이었던 친일적인 모습을 가졌을 지주들일 가능성이 높은데, 그 사람들의 물적 기반을 허무는 작업을 이승만 대통령이 했고, 그것이 6.25전쟁 때에도 우리 국민들이 남한의 편에서 북한에 대항해서 싸우고. 그 이후에 또 박정희 시대의 어떤 경제적 발전에 굉장히 큰 인프라를 깔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서 그 부분을 좀 다시 재조명했으면 하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런 부분은 지금 말씀드린 여러 가지, 입체적으로 여러 가지 각도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공과 과를 우리가 재평가하면은 아, 이 대통령을 우리가 어느 정도 기념해도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그런 결론을 나는 얻을 거라고 확신한다."

 - 류석춘, 연세대학교 사회학 학사 및 일리노이대학교 대학원 사회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고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부교수와 한국사회학회 총무 운영위원, 한국동남아학회 총무이사,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사회학전공 주임교수, 연세대학교 대학원 지역학협동과정 주임교수, 연세대학교 사이버교육지원센터 소장, 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사회학과 학과장을 지냈으며 현재 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사회학과 교수와 한국동남아연구소 이사로 있다ㅣ2011년 10월 3일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2부와 3부에 걸쳐 이승만에 대해 토론한 내용 중


박석흥, 건양대학교 대우교수로 대한언론인회 편집위원이자 언론법학회이사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산림녹화 독려로 벌거숭이산이 금수강산 본연의 모습을 되찾은 결실이다. 1957~60년 국무회의록을 보면 대통령이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산림녹화 구체방안이 제시된다. 이 대통령이 하야 의사를 밝힌 마지막 국무회의 안건에도 산림녹화와 사방사업이 올라 있었다. 1957년 국무회의에서 쌀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산을 개간하겠다는 농림부 장관의 제안에 이 대통령이 질책을 했다. 큰 목소리로 농림장관을 꾸중하던 대통령은 “함부로 산을 훼손하면 안 된다. 산에 나무를 열심히 심고 강을 잘 정비해 우리 강산이 푸르러지면 후손들이 잘살게 될 것”이라며 대안으로 수확량이 많은 인디안 쌀 연구와 석탄 생산에 군 공병대 지원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같은 시기 북한은 농지확충 명목으로 울창한 산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50년이 지나 전 국토가 황폐화된 북한은 가뭄과 홍수로 식량을 구걸하는 거지국가로 전락했다. 세계식량농업기구(FAO)와 환경운동가들은 일제 침략기 자연 파괴와 6·25 후 사회 혼란을 극복하고 산림을 푸르게 가꾼 한국의 성공을 개발도상국의 교본으로 제시하고 있다. 반면 북한은 산림 황폐화로 사막화가 우려되는 불량국가로 낙인 찍혀 반면교재로 이용되고 있다. 지난주 열린 유엔사막화방지협약(UNCCD) 회의에서도 북한의 심각한 토지 황폐화와 가뭄, 몽골 중국의 사막화 대책이 거론됐다. FAO 통계에 따르면 산악국가인 북한의 산림이 매년 줄어들어 2010년 현재 국토면적의 47%뿐이다. 분단 후 북한 산림이 대폭 감소했다. 매년 서울 면적의 약 2배에 해당하는 산림이 훼손되어 국토의 5분의 1이 되는 거대한 산림이 최근 20년 만에 사라진 것이다. 산에 나무가 없어진 후 북한은 1980년부터 2010년까지 19회 대홍수를 비롯한 지진, 전염병, 태풍 등의 큰 자연재해가 매년 있었다. 식량 증산 욕심으로 산을 농지로 개간한 후 생긴 인재다. 김일성은 6·25전쟁을 일으켜 많은 인명을 살상한 데 이어 아름다운 산과 강도 파괴한 것이다. 빅터 테플리아코프 서울대 산림과학부 교수는 북한이 산림 훼손을 방치하면 오래지 않아 사막화 위험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승만 대통령의 자연보호와 전범 김일성의 무모한 산 개발이 반백 년 만에 이렇게 상반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탁월한 선택과 최악의 선택으로 평가된다. ‘대한민국을 움직인 사람들’ 이승만 편을 TV로 시청한 많은 사람들이 “한국 언론의 현대사 인식 수준이 겨우 이 정도냐?”고 질문한다. 이승만 시대 해석과 평가 모두 수준 이하였다. 이승만 박사는 대한민국 건국에서도 탁월한 선택을 한 훌륭한 지도자다. 이 박사는 임시정부와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 좌파의 극렬한 도전을 물리치고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세웠다. 임정 수립에 참여한 급진좌파 지식인은 러시아 혁명을 보고 소련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 건국을 주장했으나 이 박사는 미국식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이상적인 국가라며 좌파 주장을 일축했다.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도 사회주의 국가 건국론이 우세했으나 이 박사는 물러서지 않았다. 20세기 말 소련 및 유럽 공산주의 국가 자멸과 3대를 세습하면서 매년 식량을 구걸하는 북한과 비교할 때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국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추수폭동, 제주 4·3폭동, 여수순천 반란사건 등에 대한 대응으로 강력한 반공법 제정 또한 시의적절한 결단이었다. 6·25전쟁 1년 전 철군했던 미군이 6·25참전 1년 만에 또 떠나려할 때 이 대통령은 한미 방위조약을 요구 관철하여, 한국의 안보를 튼튼히 했다. 6·25 전쟁 영웅으로 미국에 초대된 이 대통령은 뉴욕 거리에서 시민들의 환영과 의회 연설을 하는 국빈대우를 받았으나 미국의 일본 중심 극동안보 전략을 끝까지 반대했다. 국내 뿌리 깊은 좌파 세력에 대한 반공 정책과 미국의 일본 중심 지역전략에 대한 거부 등은 대한민국 안보를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으나 이 박사 개인의 적은 늘어갔다. 이들의 원망이 이 대통령 폄하와 무관하지 않다. 지난주 미 의회의 한미 FTA 비준과 이명박 대통령의 미 의회 연설, 서울대학 일본학과 개설, 반월가 시위 참여 등을 보면서 건국대통령이 떠올랐다. 자본주의도 한계를 드러낸 21세기 초 건국대통령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고 국민들을 어떻게 설득했을까." 

- 박석흥,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불문학과와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을 졸업햇다. 이후 경향신문 문화부 기자와 문화부장, 학술문화부장, 논설위원과 문화일보 편집국 부궁장, 대우 학술문화부장, 편집국 국장 대우, 출판장 겸 편집국 오피니언 포럼 담당국장, 독립기념관 감사, 문화재위원, UNESCO 한국위원회 문화분과위원, 건양학원 이사, 간행물 윤리위원회 위원, 국제기독청소년교류 한국위원회 위원, 관훈클럽 43대 편집위원, 서울 Y.M.C.A 국제친선위원회 위원, 한국행정학회 회원, 한국정치학회 회원, 한국 언론학회 회원, 언론법학회 감사 이사, 한국외국어대학교 언론정보학부 강사와 겸임교수, 숙명여자대학교 정법대학 정보방송학과 강사, 건국대학교 시간강사, 대전대학교 문과대학 한국문화사학과 강사와 겸임교수, 가톨릭대학교 영성대학원 강사를 지냈으며 현재 대한언론인회 편집위원, 한국전통문화연구회 이사, 건양대학교 대우교수, 문화재위원, 서울 Y.M.C.A 홍보위원회 위원, 언론법학회이사로 있다ㅣ2011년 10월 16일 대전일보에 올린 사설의 내용 중


김성호, 한국농촌경제연구원 고문

 

"이승만 대통령의 농지개혁은 시국을 정확하게 본 결단이었다. 좌익세력이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북한 토지개혁을 높게 평가하고 ‘유상매입 유상분배’를 한 이 대통령의 농지개혁은 폄하하지만 이는 잘못된 판단이다. 북한이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주장하지만 실제 내용을 보면 '몰수‘는 무상이었지만 분배는 부상이 아니었다. 나눠준 토지에 대해 공식적으로 25% 공출한다고 했지만 사실상 40%를 공출한 ’유상분배‘ 였다. 또 분배한 토지도 한국동란 이후엔 협동조합에서 일괄 관할해 토지거래가 중단됐으며 1977년 4월엔 저들의 토지법에 따라 농협이 관리하던 사유토지도 모두 국유화했다. 결국 무상분배란 농민을 기만한 권력장악 수단이었을 뿐이다. 이에 반해 이 대통령의 농지개혁은 농민과 자본주의를 살리는 개혁이었다. 이 대통령의 농지개혁은 농민과 사업가를 구해 신생 대한민국 경제 건설의 토대를 이룬 것이다. 이 대통령은 공산화를 막으려면 농지개혁부터 서둘러야 한다고 관계 장관들에게 입버릇처럼 채근하곤 했다. 이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시행된 ‘농지개혁에 대한 임시조치법’은 그야말로 민주적이었다. 이 대통령의 임시조치법은 지주의 삶을 보장하면서도 농민에겐 자신의 토지를, 사업가에게는 자본의 축적을 가능하게 해 경제건설 기회를 준 일거삼득이었다." 

- 김성호, 서울대 농업대 농엽경제학과에서 학사학위를 받았고 일본 교토대학에서 농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소농론·농업지대론·농지제도를 전공하였으며, 농촌진흥청 농림부의 농림관료였다가 이후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서 근무하였고 현재는 동 연구원의 고문으로 있다. 건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사학과를 졸업하고 역사분야 논문과 저술활동도 했다.

- 2009년 8월 20일 정동제일교회 아펜셀러홀에서 열린 우남 이승만 연구회 제46차 콜로퀴엄에서 강사로 '이승만과 농지개혁'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했던 내용 중


남정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이승만은 철저히 독립외교 노선을 지향했다. 그러나 그의 방식은 평화적 방식에 의한 독립외교였다. 그는 국제외교의 틀과 격을 갖춘 품위 있는 외교활동으로 루즈벨트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 국무장관 등에게 서한을 보내 임시정부 승인을 줄기차게 요청했다. 이러한 노력이 결과적으로 한국을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켜 준다는 카이로 선언을 채택하는데 기여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40년간 독립운동을 통해 단련된 평정심을 잃지 않고, 국가지도자로서 취해야 될 조치를 의연하게 처리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쟁 초기 위급한 상황에서 다음 4가지의 조치를 내렸다. 첫째, 한국에서 일어난 전쟁이 세계대전의 빌미를 제공하는 場(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둘째, 한국민 모두가 참여하는 총력전을 펼치겠다, 셋째, 북한의 불법남침을 남북통일의 절호의 기회로 삼겠다, 이 위기를 타개하고 북진통일을 위해서는 미국과 유엔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특히 한반도의 통일을 원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북진통일’에 대한 의지는 그의 전쟁 목표로 정립되어 일관되게 추진되었다. 이 대통령은 이를 위해 국군 작전지휘권을 유엔군 사령관에게 이양하며 미국 및 유엔에 적극적인 협조를 보냈다. 통일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양보할 의사가 있었던 것이다. 이 대통령에게는 오로지 북진통일에 의한 남북통일만이 존재했다.또 하나 전쟁 수행 중 이승만 대통령이 지켰던 또 하나의 원칙이 있다. 아무리 전황이 불리해도 망명정부 구성과 일본의 한국전 개입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반도의 통일을 저해하고 민주주의를 압살시킨 우리나라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려놓은 시대착오적 독재자라는 비판이 있지만, 6·25 전쟁 당시 이 대통령과 함께 전선을 누비며 전쟁을 지휘했던 한국과 미국 장군들은 이승만을 훌륭한 지도자 및 반공지도자로 평가하고 있다." 

- 남정옥, 충남대학교와 단국대학교에서 미국 현대사를 전공하였고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이자 우남 이승만 연구회 이사로 있다.

- 2010년 3월 15일 서울 정동제일교회에서 이승만 박사의 탄신 135주년을 맞이해 건국대통령 이승만박사 기념사업회가 주최하고 국가보훈처가 후원하는 학술회의에서 했던 말의 내용과 <사진으로 보는 6·25전쟁과 이승만 대통령>이라는 책의 서문에 쓴 글의 내용 중


이영일, 한중문화협회 총재

 

"이젠 이승만 대통령을 재평가해야 할 때이다. 재평가 당위성의 이유 3가지는 다음과 같다. 우선 한국 갤럽과 한국논단이 실시한 한국 정치지도자에 관한 여론조사 결과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친미사대주의자(53%), 반민주적 독재자(18%), 남북영구분단의 원흉(18%)이라는 등 부정적 평가가 주를 이루었고 ‘독립투사이며 건국의 아버지’라는 평가는 1.3%에 불과해 한국 청년들 다수가 김일성보다 이승만을 더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4.19혁명 이후 이 대통령을 보는 사회분위기가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면 이 문제는 한 정치인 이승만의 실패에 그치지 않고 자칫 대한민국의 국가적 정통성에도 위기를 조성할 수 있는 심각한 문제가 된다. 한 인간의 생애는 누구나 장점과 단점, 과오와 업적의 결합체일진데 그의 생애의 특정시기와 몇 가지 사건만을 떼어내서 과오, 실책만을 들추는 것은 정당하고 공정하지 않다. 또 냉전 종식과 소련 및 동구 공산권의 붕괴에 따라 한반도에 관한 공산권 소장 자료들이 공개됨으로써 베일에 가려졌던 한반도에서의 분단국가 성립과정과 한국전쟁발발원인의 진상이 밝혀진 것도 재평가해야 할 하나의 이유이다. 셋째 이유로 냉전으로 한반도가 분단되는 상황에서 이승만이 추구했던 유엔감시하의 총선거로 세워진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가 소련 군정이 세운 북한 공산정권에 비해 국가발전의 모든 부문에서 너무나 올바른 선택이었음이 현실 역사 속에서  입증되고 있다. 우선 이승만 대통령이 한반도가 남북한으로 분단될 수밖에 없던 역사적 상황 속에서 내외정세에 대한 예리한 통찰과 자율정부수립이라는 신념을 가졌던 것은 높이 평가해야만 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 같은 신념을 바탕으로 대미외교를 통해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특히 유엔감시하의 자유총선거를 통해 대한민국을 수립함으로써 대한민국을 유엔이 결의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의 지위를 얻게 한 점도 크게 평가되어야 한다. 이 점은 소련의 위성정권으로 출발한 북한과 너무나 대조가 되는 부분이다. 이 대통령은 나아가 건국의 기틀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향하는 헌법을 갖는 국가로 세움으로써 공산독재를 추구한 북한과는 달리 오늘날 세계사의 중심대열에 올라서서 국가의 수준을 G20반열에 끌어올린 기초를 다졌다. 이 점에서 초대 대통령으로서의 이승만 박사의 공헌을 인정치 않을 수 없다. 또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시작된 6.25동란에서 공산침략군 몰아내고 대한민국을 지킨 지도력과 전시외교능력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승만 대통령의 공로를 각별히 인정해야 한다. 특히 미국과 한미방위조약을 체결해 6.25동란 후 60년 동안 한반도에서의 전쟁재발을 방지해 한국이 오늘과 같은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안보환경을 조성한 점은 중요한 공헌으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건국의 기초를 마련하는 내정개혁에서 보인 성과도 주요 치적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해방된 한국은 자유민주주의가 제대로 꽃필 여건이 아니었다. 당시 문맹률 78%의 한국에서 이 대통령은 초등교육 의무화를 서두르고 학교도 대폭 증설해 오늘의 교육 강국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또 건국과정과 6.25전란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경제 재건에 힘썼고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고 원자력연구소를 만들어 원자력의 연구개발을 지원한 점도 빼놓을 수 없는 공적이며, 또 소작농 체제를 기반으로 한 민주당의 반발을 극복하고 농지개혁을 단행, 자작농지의 비율이 전체농지의 92.4%에 달하게 한 것은 한국농업구조상의 획기적인 변화였다. 한국에서 60년대부터 시작된 개발연대가 이승만대통령 집권기에 그 기초가 마련되었다. 현재 밝혀진 사료에서 보면 이승만 대통령이 한반도의 영구분단의 원흉이라거나 6.25동란을 초래했다는 평가는 공산권 자료들이 공개되기 이전의 자료부족에 기인하거나 아니면 냉전사에 뿌리를 둔 잘못된 평가이다. 1990년대 공산주의의 길을 택한 소련을 비롯한 동구제국이 몰락하고 오늘날의 참담한 북한실정을 보게 되면 이승만 대통령의 건국노선이 너무 정당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거론된 평가논의의 핵심은 (이승만 대통령의)공(功)보다는 과(過)를 들추는데 치중했다. 과오를 지적함으로써 후세에 귀감을 삼자는 것은 옳지만 동시에 공헌도 평가해 줘야 할 것이다. 4.19 혁명 50주년을 맞아 이승만 대통령의 공과를 바르게 평가하는 움직임이 절실하다." 

- 이영일, 서울대학교 정치학 학사와 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제11대 민정당 국회의원,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 원장, 제12대 국회의원, 광주권발전연구소 이사장, 제15대 국회의원, 국민회의 대변인, 노무현대통령후보 통일특보, 중국베이징대학 동북아 전략연구 중심 초빙연구원, 일본 츠쿠바대학 국제정치 객원연구원을 지냈으며, 호남대학교 및 우석대학교에서 초빙교수를 지냈다. 4.19혁명 당시 서울대학교 문리과 대학 정치학과 학생으로 데모 준비, 조직,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헀다. 호남대학교 명예 법학박사를 취득 및 홍조근정훈장과 벨기에 정부의 대십자수교훈장을 받았고 현재 한중문화협회 총재로 있다

- 2010년 4월에 열었던 '4·19혁명과 이승만'의 주제의 세미나에서 발표했던 내용 중



남덕우, 제14대 국무총리로 당시 재무부 장관

 

"우리나라의 이념적 지도자로는 백범 김구 선생, 도산 안창호 선생 등을, 실천적 지도자로는 이승만, 박 정희 두 대통령을 꼽아야 한다.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은 실사구시 가치관에 입각한 개화주의 노선을 이어 받은 지도자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친일파를 중용해 민족정기를 말살했고 그 결과 대한민국은 민족적 정통성이 없는 나라가 되고 말았다는 비판이 있는데, 이는 관념론과 실사구시로 볼 수 있다. 민족정기니 민족정체성이니 하는 관념만으로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실사구시의 경륜과 정책이 필요하다. 민족정기와 정체성을 세웠다는 김일성은 동족상잔의 6ㆍ25 동란을 일으켰고 김일성 부자는 북한 사회를 지금과 같은 비참한 상태로 만들었다."

- 남덕우, 국민대학교 정치학 학사 및 서울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석사와 오클라호마주립대학교대학원 경제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고 국민대학교 교수, 서울대학교와 연세대학교 강사, 서강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초청교수, 경제과학심의위원회 위원, 제24대 재무부 장관, 제12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 대통령 경제담당 특별보좌관, 국무총리 서리, 제14대 대한민국 국무총리, 한국태평양 경제협력위원회 회장, 국정자문회의 위원, 외무부 정책자문위원회 위원, 코리아헤럴드 회장, 제18대 한국무역협회 회장, 대한상사중재원 이사장, 세계무역센터협회(WTCA) 이사, 재우회 회장, 제19대 한국무역협회 회장, 경기도민회 회장, 제20대 한국무역협회 회장, 한국무역협회 명에회장, 동아시아경제연구원 회장과 제1대 재경회 회장, 우석문화재단 이사, 동아대학교 이사, 제2대 재경회 회장, 동북아경제포럼 한국위원회 위원장, IBC 포럼 이사장을 지냈으며, 청조근정훈장과 수교훈장 광화대장, 제5회 한미우호상, 욱일대수장, 제21회 시장경제대상 공로부문상을 받았다. 현재 민족중흥회 고문, 한국무역협회 고문, 전국경제인연합회 국내 원로자문단, 경기도민회 고문, 서강포럼 고문, 전국경제인연합회 윤리위원회 위원, 해공 신익희선생 기념사업회 이사, 한일협력위원장 회장, 한국선진화포럼 이사장으로 있다.

- 2005년 6월 10일 세종문화회관 1층 세종홀에서 박정희대통령 기념사업회가 주최한 조찬세미나에서 '근대화와 박정희'를 주제로 한 강연에서 말했던 내용 중


노무현, 제16대 대한민국 대통형

 

"예전의 지도자들은 실책이 더러 있었지만 그래도 한가지씩은 다 했다. 국가 발전에 필수불가결한 한가지 또는 몇가지를 해놓았고 그 뒤에 혼란과 갈등을 겪더라도 극복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 때의 자유당 시대를 완전히 독재시대·암흑시대·어두컴컴한 시대로 생각했었는데 그때 토지개혁·농지분배를 했고, 지나고 보니 정말 획기적인 정책이고 역사를 바꾼 사건이었다. 그것을 해서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국민이 하나로 뭉쳐 체제를 지켜냈다." 

- 노무현, 부산상업고등학교를 나왔고 모스크바대학교 정치학 명예박사, 알제대학교 정치학 명예박사, 원광대학교 정치학 명예박사를 받았고 이후 제17회 사법시험을 합격해 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대전지방법원 판사와 변호사를 지낸 후, 제13대 국회의원, 민주당 최고위원, 제15대 국회의원,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고 제16대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냈다. 카타르 독립대훈장과 무궁화대훈장을 받았다.

- 2004년 11월 20일 칠레의 산티아고를 방문하셔 가진 동포간담회에서 했던 말의 내용 중


강영훈, 국가비상대책협의회 명예의장으로 제21대 대한민국 국무총리이자 전 한국외국어대학교대학원 명예교수

 

"이승만 대통령은 한평생 나라를 위해 고생하고 분투함으로써 오늘날 세계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나라의 기초를 세웠다. 우남 선생은 독립운동으로 옥중에 갇혀 언제 형장에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세계인과의 소통을 위해 영어공부에 매진, 주위를 놀라게 했다. 후손들이 이승만 박사 동상 앞에 섰을 때 고개 숙이고 '나도 이분처럼 무엇인가 중요한 일을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으면 좋겠다."

- 강영훈, 만저우건국대학교와 육군참모대학을 수료했으며,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대학원 국제정치학 석사와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주미 대사관 육군무관, 육군 제2사단 사단장, 연합참모본부 본부장, 육군 제6군단 군단장, 육군사관학교 교장, 육군중장 예편, 재워싱턴 한국문제연구소 소장, 한국외국어대학교대학원 원장, 외무부 외교안보연구원 원장, 주영국 대사관 대사, 주로마 교황청 대사, 한국외국어대학교대학원 명예교수, 민주화합추진위원회 위원, 제13대 국회의원, 국무총리 서리, 제21대 대한민국 국무총리, 대한적십자가 총재, 세종재단 이사장을 지냈으며 충무 무공훈장, 화랑 무공훈장, 충무 무공훈장, 을지 무공훈장, 수교훈장 흥인장, 비오9세 대십자훈장을 받았다. 현재 국가비상대책협의회 명예의장, 한국인성교육협회 고문으로 있다ㅣ2008년 3월 26일 정동제일교회 문화재 예배당에서 제131회 이승만 박사 탄신 추모식에서 개회사로 했던 말의 내용과 2008년 6월 5일 배재대학교 국제교류관 아트컨벤션홀에서 열린 '우남 이승만 박사 동상 제막식'에서 했던 말의 내용 중



정운찬, 제40대 대한민국 국무총리로 서울대학교 경제학 명예교수이자 제36대 한국경제학회 회장

 

"우리 사회 발전의 토대를 이루게 만든 장본인,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탁월한 지도력과 외교적 수완에 대한 업적을 이제는 재평가를 해야 한다. 한국 발전에 기여한 요소로 한-미 상호 방위 조약가 있다. 조약 이후 방위에 큰 걱정을 안 하고 경제에 매진하게 됐다. 사회 일각에서 이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데 아직 노력이 부족하다." 

- 정운찬, 서울대학교 경제학 학사와 마이애미대학교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프린스턴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조교수,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학과 교수, 미국 하와이대학교 초빙 부교수, 영국 런던정경대학 경제학과 객원 부교수,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학부장, 제8대 한국금융학회 회장, 한국금융연구원 자문위원, 독일 보쿰대학교 초빙교수, 재정경제부 금융발전심의회 위원장,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학장, 보건복지부 국민연금발전위원회 위원장, 제23대 서울대학교 총장, 제36대 한국경제학회 회장, 한국사회과학연구협의회 회장, 제1대 서울대학교 금융경제연구원 원장, 제40대 대한민국 국무총리를 지냈으며 현재 세계7대 자연경관 선정 범국민추진위원회 위원장과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운영위원회 위원장, 제1대 제주영어교육도시 명예시장으로 있다.

- 2011년 2월 17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극동포럼 초청 특강에서 했던 말의 내용 중


김정옥,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원장이자 국제극예술협회 세계본부 명예회장·회장

 

"역대 정부에서 문화 정책을 가장 잘 한 때를 답하자면 어려운 것인데…내 생각에는…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미래를 내다보는 눈이 있었던 것 같다. 문화정책을 뛰어넘은 이야기지만, 그 어려운 시절에 과학 발전을 위해 국비 유학생을 보낸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공산주의와 싸운다는 명분으로 언로(言路)를 막은 것은 잘못했지만…. 군사 정권의 대통령들도 스스로 식견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오히려 문화 분야를 존중하는 의식은 있었다. 오히려 문민정부 대통령들이 문제였지요. 노무현 대통령 때 문화예술진흥원을 문화예술위원회로 만들었다. 각 분야의 위원들이 모두 자기 분야를 대변한다고 나서니 효율적이지 못하다. 그리고 위원회인데 국가가 간섭을 하며 정부의 하급기관으로 전락시켰으니 문화진흥이 제대로 되겠나."

- 김정옥,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 학사를 받았고 극단 민중극장을 설립, 극단 자유 예술감독을 지냈으며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국제극예술협회 세계본부 명예회장과 회장,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원장과 예술대학 학장,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원장으로 있다.

- 2012년 4월 6일 문화일보와 가진 인터뷰의 내용 중


◈ 이기택, 4.19 혁명 공로자회 회장이자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이 대통령의 공도 인정해야겠지만 과도 잊어서는 안 된다. 1948년 건국 당시 상황에 건국헌법의 정신은 한마디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고 할 수 있지 않겠나. 그 시기에 이승만 대통령은 아주 중요한 결단을 내린 것이다. 요즘 와서 생각하면 민주주의 국가로 건국된 게 참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전 대통령의 건국정신은 세월이 흘러도 인정할 점이 충분하다." 

- 이기택, 고려대학교 학사 및 동 대학원에서 경영대학원 석사학위를 받았고 제7, 8, 9, 10대 신민당 국회의원과 신민당 사무총장, 부총재와 제12대 신민당 국회의원, 제13대 민주당 국회의원, 민주당 총재와 공동대표위원, 민주당 대표최고위원, 제14대 민주당 국회의원, 한나라당 공동선대위 의장, 한나라당 부총재, 민주국민당 최고위원, 새천년민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상임고문을 지냈으며, 건국포장과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현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과 4.19 혁명 공로자회 회장으로 있다.

- 2011년 4월 16일 중앙일보와 가진 인터뷰의 내용 중

 

◈ 조갑제, 월간조선 전 대표이자 칼럼니스트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그 공적에서 민족사의 10대 인물, 20세기 세계 지도자중 10대 인물에 들어가야 할 영웅으로, 번영하고 자유롭고 강력한 대한민국의 성공스토리의 주인공이다. 그럼에도 이 전 대통령은 국내외로 과소평가받고 있다. 친북세력, 위선적 지식인뿐 아니라 그의 노선을 계승한 후대 정권에 의해서도 무시됐고, 그의 자주노선에 진저리를 쳤던 미국과 일본으로부터도 외면당하고 있다. 그가 남긴 것은 주로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이라, 눈에 보이는 것이 많았던 박정희 전 대통령과 대조적이다.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 체제, 한미동맹, 농지개혁, 교육개혁, 국군건설은 이승만의 5대 업적인데, 너무 크고 보이지 않으므로 선전하기도, 설명하기도 어렵다. 이 전 대통령을 기리는 일은 대한민국을 기리는 일이고, 기적의 현대사를 만든 선배세대의 노고를 함께 기리는 일이며, 미래의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세대에게 애국심과 자유통일 의지를 심는 일이다. (그러나) 이 전 대통령은 안목이 높은 사람, 생각이 깊은 사람, 역사를 아는 소수의 의인들에 의하여 높게 평가되고 있을 뿐이다. 대한민국의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건국 대통령을 제대로 평가하고 구체적으로 기념할 필요가 있다. 화폐도안에 이 전 대통령을 포함시켜야 한다. 국가상징물에서 민족사의 최고 성공작인 대한민국의 주인공들을 밀어내고 조선조 인물만 기리는 것은 복고적 분위기를 퍼뜨릴 수 있다. (화폐도안의) 조선조 편중은 대한민국 박대의 다른 표현이고, 스스로 ‘대한민국은 부끄러운 나라’라는 고백을 하는 셈이다. 신사임당과 이율곡 중 한 사람을 빼고 이 전 대통령을 넣어야 한다. 특히 광화문 광장은 대한민국의 심장부에 있는 국가적 상징물이므로, 이순신, 세종대왕 동상과 함께 건국 대통령 동상이 서 있어야 광장의 상징성이 살아난다. 지금처럼 조선조 인물만 기리면 생동하는 대한민국은 실종된다. 대한민국의 심장부에 건국 대통령의 동상이 올라가는 날 대한민국은 더 이상 정통성 시비에 말리지 않고 편안해질 것이다. ‘건국 대통령 동상 건립 범국민운동’을 벌여야 한다." 

- 조갑제, 월간조선 전 대표로 1971년 부산 국제신보 (국제신문의 전신)의 입사 시험에 1위로 합격하며 기자로 활동하며 입사 4년차인 만 29세에 한국기자상(7회)을 수상하기도 했다. 당시 박정희를 비판한 글을 자신 만큼 많이 쓴 사람이 없다며, 사회부기자로서 권력에 쓰러져가는 사람들, 고문 받는 사람들, 억울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쫓아다니면서 기사를 썼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 정부를 비판하다 두 차례 강제해직 당했다. 또한,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취재를 자청했던 것이 주요 동기로 신군부에 의해 해직됐다.

- 2009년 9월 20일 그의 사이트 ‘조갑제닷컴’에 올린 그의 사설 내용 중



◈ 이기수,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교수로 제9대 이승만기념사업회 회장이자 제17대 고려대학교 총장, 연변과학기술대학교와 러시아 모스크바국립대학교 명예교수

 

"이승만 박사의 역사적 공과를 놓고 논란이 있고 또 그가 독재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대한민국의 초석을 닦은 건국대통령으로서 평가하고 기념하는 작업은 필요하다. 조지 워싱턴도 흠결이 있지만 미국인들은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하고 있다. 기념물을 만들고 기념관을 건립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은 이 박사의 발자취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확산시키는 것이 전제돼야 한다. 4.19 세대와의 소통, 민주화 세력과의 소통도 함께 진행돼야 한다. 3.15 부정선거에 가장 거세게 항의한 고려대의 총장이 이승만 기념사업회장을 맡은 것은 과거 역사와 화해하고 소통시키고 반성할 것은 반성하고 기념할 것은 기념해야 할 때가 됐다는 의미이다. 오늘날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3.15 부정선거를 통해 독재를 했고 4.19 혁명으로 물러났다, 그 부분만 되어있다. 사실은 대한민국이 일제 하 35년간 피식민지 국가로써 있었고 독립을 쟁취하고 단일국가를 이룩하는 그 모든 과정에서 이승만 박사만큼 공을 세운 분이 없다. 그 분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대한민국이 없었고 6.25 전쟁 발발 후 이분이 조지 워싱턴, 하버드,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학위를 취득하면서 이룩했던 인맥, 그것에 의한 외교력이 없었더라면 UN군의 파병을 이끌어 내고 종전 이후 한미 상호 방위협정 등을 체결할 능력자가 아마 없었을 것이다. 즉, 이 분이 있었기에 우리가 일제 식민지에서 독립되고 국가를 창설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한 국가건설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0대라는 젊은 나이에 왕권을 비판하는 글을 써서 거의 7년 가까이 옥고를 지냈다. 그 때 감옥에 있으면서 독립정신이라는 책도 쓰고 영어공부도 열심히 해서 영한사전도 만들고 하셨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일제치하에서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치셨다." 

- 이기수, 고려대학교 법학 학사와 서울대학교 대학원 법학 석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법학 박사과정 수료, 튀빙겐에베르하드카를대학교 법학 박사,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 법학 명예박사, 연세대학교 교육학 명예박사, 메이지대학교 법학 명예박사를 받았고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부교수, 대한상사중재원 중재인, 독일 튀빙겐에베르하드카를대학교 객원교수, 독일 마인츠대학교 객원교수, 한국법학교수회 부회장, 국가경쟁력연구원 이사장, 독일 마부르크대학교 객원교수, 고려대학교 법학연구원 경제법 연구센터 소장, 뮌헨 막스 플랑크연구소 객원교수, 고려대학교 법학연구원 지식재산권법연구센터 소장, 대한중재인협회 상임위원, 육군사관학교발전기금 감사, 고려대학교경제인회 감사, 한국법학교수회 회장, 제8대 한국중재학회 회장, 제17대 고려대학교 총장, 제16대 한국대학교육협의회 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교수, UNDESA GAID 전략기획의원, 연변과학기술대학교 명예교수, 러시아 모스크바국립대학교 명예교수, 제9대 이승만 기념사업회 회장으로 있다. 한국법률문화상, 독일 알렉산더 폰 훔볼트재단 연구대상, 독일연방공화국 대십자공로훈장, 제19회 대한민국 무궁화 대상 교육 부문, 러시아정부 푸쉬킨 메달을 받았으며 4.19혁명때 이승만 정권을 붕괴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 2011년 9월 9일 대학생 경제 기자단 8조 신승민, 이영웅과 가진 인터뷰의 내용 중



◈ 정창인, 전 육군사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현재 우남이승만연구회 회장이자자유통일포럼대표

 

"나는 초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대한 반국가적 내용에 대한 실태분석을 하는 연구팀에 참여하여 교육부의 교과서 편수지침에 “독재자 이승만”으로 아예 못박아 편수지침이 내려진 것을 보고 놀랐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이승만에 대해 물어보면 조건반사적으로 ‘독재자’라는 대답이 나온다. 건국대통령이 독재자로 무조건적으로 매도되는 상황에서 대한민국에 대한 올바른 국가관을 가질 것으로 기대하기는 힘들다. 이것은 국가적 불행이요 재앙이다. 건국 당시 공산주의자들은 폭동과 반란으로 건국을 방해하였지만 이를 진압하였고 건국 후에도 김일성은 스탈린과 모택동의 지원 아래 공산군으로 남침하였으나 이승만 대통령이 막아냈다. 그래서 이승만은 무조건 북한이 독재자로 매도하고 있다. 그러나 김일성이나 김정일은 이승만 박사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최악의 독재자이고 보면 이런 공격이 단지 사상전이며 거짓임을 알 수 있다. 한국의 친북좌파 반역세력은 북한의 이 노선에 따라 이승만 박사를 무조건 나쁜 사람으로 매도하고 있고 이것을 국가적으로 맹신하게 되었으니 대한민국의 현실이 참으로 안타까울 정도로 정상적인 상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승만 박사의 경우, 그는 평생을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는 자유민주국가를 건국하는데 일생을 바쳤다. 대한민국의 건국이나 유지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고 일정기간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정착되어 민주주의가 제도화될 때까지는 일종의 민주주의에 대한 보호가 필요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은 소련과 중공을 등에 업고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한 대한민국을 없애기 위해 건국전부터 폭동과 반란으로 방해하였고 급기야 북한의 공산주의 집단은 우세한 공산군으로 대한민국을 말살하기 위해 남침을 하였다. 이런 국가적 위기에서 우리는 고대 로마에서 필요로 하였던 것과 같은 선의의 독재가 필요하였다. 절대적 권력을 가진 사람이 필요한데, 그 절대적 권력은 이승만 개인이 가진 카리스마, 그 개인이 가진 절대적 권위에서 비롯된 것이다. 민주주의의 경험이 없는 한국민과 민주주의가 제도화 되기 이전의 그 취약성을 보완하여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제도화되기까지 필요한 기간 민주주의를 보호할 섭정, 곧 절대적 권위를 가진 인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승만 박사는 그러한 권위를 보유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대한민국은 오히려, 공산주의자들의 건국 방해 및 대한민국 전복을 노린 군사적 침략 기간 절대적 권위로 나라를 지킬 인물이 필요하였고 이승만 대통령이 그 권위를 제공하였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절대적 권력을 보유한 적이 있는가? 없다! 대한민국은 처음부터 삼권분립 원칙에 의해 입법, 사법, 행정권이 분리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승만 대통령이 절대적 권력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다만 이승만 대통령은 신생 독립국가에서 민주주의가 제도화하는데 필요한 개인적 카리스마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바로 그 개인적 권위에 의해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민주주의가 제도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이 국민을 차별적으로 대우한 적이 있는가? 다시 말해 이승민 대통령이 자신의 권한을 차별적으로 행사한 적이 있는가? 없다! 대한민국 헌법은 모든 사람의 권리와 의무를 평등하게 부여하고 보장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혈통이나 신분에 따라 차별적으로 법을 적용한 적이 없다. 삼권분립에 의해 그것은 애당초 불가능하였다. 또한 이승만 대통령이 법치주의를 무시하고 법 위에 군림한 적이 있는가? 없다! 선거를 거부한 적이 없고 법에 어긋난 일을 한 적이 없다. 심지어 4.19에는 학생들의 의거를 칭찬하고 부정선거에 대해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사임하였다. 그의 사임은 신생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최소한의 정도에서 제도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학생들의 정의로운 행동으로 그 민주주의 제도가 보다 더 확고하게 정착되고 발전할 수 있을 것을 믿을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카리스마를 개인의 이득을 위해서나 자신을 지지하는 특정 계층을 위해 사용하지 않았다. 이 대통령은 모든 사람이 자유와 평등을 보장받는 자유민주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해 자신의 권위를 행사하였다. 부산정치파동은 전쟁 중 통일이냐 휴전이냐 하는 중대한 갈림길에서 자신의 정치적 리더쉽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했던 조치였다고 본다. 자신을 제거하기 위한 쿠테다 계획이 마련되어 있을 정도로 중대한 시국을 맞아 통일을 성취하고 민주주의가 정착할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였다고 본다. 구체적으로 독재자로 알려진 짐바브웨의 무가베, 북한의 김일성과 김정일, 그리고 미얀마의 탄 수웨와 비교하여 우리가 이승만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부를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어떻게 보아도 이승만 대통령은 이들과는 구별되는 리더쉽을 행사하였다고 보아야 한다.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적 민주주의’를 내세웠고 인도네시아 스카루노 대통령은 교도민주주의를 내세웠다. 이와 같이 신생독립국가에서 민주주의를 제도화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 어려움이 극복되기 전까지 국가는 특정 위기상황으로 보아야 하며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절대적 권력이 필요한데 이승만 대통령은 권력이 아니라 권위로서 그 위기를 극복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국가 위기시에 절대권력이 절대로 필요하다. 절대권력이 제도화되어 있지 않을 경우 ‘독재’ 또는 ‘독재자’가 나타나거나 필요하게 된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를 해 본 적이 없는 상태에서 민주주의 제도를 도입하였고, 국가를 건국하여야 하였으며, 민주주의를 정착시켜야 하였다. 이것은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며, 그 필요한 기간 독재가 필요한 작업이다. 이 필요한 독재를 이승만 대통령이 개인적인 카리스마로 대체하였다.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그를 독재자로 매도하지만 당시로서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봐야 한다.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독재자로 매도하는 것은 한국 정치에서 좌파들의 음모라고 보아야 하며 그리고 4.19세대와 5.16집단의 독선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만약에 이승만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그 제도화에 필요한 기간을 확보하지 못하였을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신생 대한민국이 절대로 필요한 절대적 권위를 제공한 인물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 절대적 권위를 자신의 영광을 위해 행사하지 않았다.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민주주의가 뿌리내리는데 필요한 시간을 확보하였으며 국민의 보편적 권리를 보장하는데 썼다. 다만 반공주의에 따라 국가를 전복하려고 하는 세력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하였는데 이것은 권력의 나쁜 행사가 아니라 정당한 행사다. 마치 범죄자에게 엄정하게 법을 적용하는 것이 필요하듯 국가를 전복하려는 세력을 단호하게 단속하는 것은 대통령으로서의 권한을 정당하게 행사하는 것이지 공산당처럼 특정 계급을 학대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만약에 이승만이 독재자라면 그는 선한 의미의 독재자다. 이승만의 ‘독재’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은 탄생할 수도 없었으며, 공산집단의 6.25남침에서 국체를 유지할 수도 없었으며, 신생 민주국가로서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도 국가의 기간산업의 기반을 닦아 놓아 그 이후 대한민국이 경제적으로 발전하는 기초를 만들어 놓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독재자가 아니라 건국과 호국의 영웅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공산주의자들의 폭동과 반란, 그리고 군사적 침략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키는데 필요한 절대적 권위를 제공하였다. 그는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서 또는 개인적 재산을 불리기 위해서 그 절대적 권위를 행사하지 않았다. 오직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의 제도화를 위해 헌신하였다. 말년에 하와이에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오직 지지자들의 도움으로 생계를 꾸리고 조용히 가족과 제자 한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운명하신 것은 그야말로 영웅에 걸맞는 죽음이다. 재산을 불리거나 추종자들에 둘러쌓여 죽었다면 그는 한 사람의 독재자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재산도 없고 추종자도 없는 쓸쓸한 죽음이야 말로 그를 진정한 건국과 호국의 영웅으로 불러 손색이 없도록 만든다. 우리는 이승만 같은 절대적 권위를 가진 건국 대통령과 호국대통령을 가졌던 것을 자랑으로 생각해야 한다.이승만대통령은 독재자가 아니라 건국과 호국의 영웅이다." 

- 정창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대학교 경영대학를 졸업하고 한국과학기술원 경영과학과를 졸업한 뒤 하버드 정책대학원을 거쳐 영국 뉴캐슬 대학에서 정치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육군사관학교 경제학과 교수, 전우신문 주필, 군상평론가협회 부회장,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연구위원, 한국소설가협회 회원, 인터넷 독립신문 주필, 자유지식인선언 대변인 겸 편집주간을 지냈으며, 친북반국가행위진상규명위원회 집행위원을 지냈으며 현재 국가 정상화위원회 고문, 자유통일포럼 대표와 우남 이승만 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다.

-2010년 7월 19일 뉴데일리에 올린 사설의 내용 중



◈ 박창달, 한국자유총연맹 회장이자 아시아태평양 자유민주연맹 총재, 세계자유민주연맹 의장으로 있다

 

"이승만 박사는 민족사상 처음으로 대한민국 헌정질서를 만들고 북한의 침략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켜냈으며, 또한 산업화와 민주화의 초석을 다지며 오늘날의 발전과 번영을 가능하게 했던 인물이다. 자유총연맹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부통령선거의 부정선거에 통치권자로서 책임을 지고 하야한 것은 사실이다. 하야를 결심하는 과정에 국가와 대학생들을 아끼는 마음도 분명히 있었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역사적 업적을 폄하하고 음해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과 국가정체성을 부정하는 일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공과(功過)는 재평가될 필요가 있다."

- 박창달, 한국외국어대학교 학사와 영남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를 받았고 용인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명예박사, 계명대학교교육대학원에서 교육학 명예박사를 받았다. 한나라당 대구 중구지구당 위원장, 제15,16,17대 한나라당 국회의원, 국회 실업대책특별위원회 위원, 한나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유세본부장, 한·캄보디아 의원 친선협회 회장, 국회 교육·운영위원회 위원, 한나라당 교육위원회 부위원장, 국회 산업자원위원회 위원, 한나라당 원내 부총무, 국회 한·슬로바키아 의원 친선협회 부회장,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 국회 국제경기대회 지원 특위 위원, 한나라당 중앙 청년위원회 위원장, 국회 교육위원회 간사,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위원, 제17대 대통령 선거 이명박 특보단장과 취임준비위원회 상임 자문위원을 지냈으며 현재 한국자유총연맹 회장, 아시아태평양 자유민주연맹 총재, 세계자유민주연맹 의장, 국가정체성회복국민협의회 의장으로 있다ㅣ2011년 8월 15일 장충동 자유센터에서 한국자유총연맹이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상'이란 이름의 이 전 대통령 동상을 제막한 이후 가졌던 기념사의 내용 중

 

[출처] : http://cafe.naver.com/rightofkorea/54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