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는 곳엔 사랑이 있다.

물건너 작은섬에 종달새 운다 종달새 우짖으니 밭이 있겠지 . 거기엔 또한 사람이 살고, 사람이 사는 곳엔 사랑이 있다.

서정주의 ‘눈섭’ 윤동주의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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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Arts

2021. 12. 31.

시로 읽는 세상

서정주의 ‘눈섭’ 윤동주의 ‘바람’…시련 견뎌내는 소망 담아

중앙선데이

입력 2020.11.14 00:21

711호 24면

시로 읽는 세상

시로 읽는 세상

언어영역 문학 문제의 풀이를 두고 어느 국어 교사와 대화를 나눈 뒤에 궁금증이 생겨, 문학 교과서들을 이곳저곳 들추어 보았다. 그러다가 오래 읽어 온 두 작품의 설명에서 선뜻 수긍하기 어려운 대목들을 만났다. 시를 지은 분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짐작하기 어렵지만, 이 시들을 이분들의 작품세계와 관련지어 더 숙고해 볼 여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50대 명장 ‘동천’ 20대 청년 ‘서시’
‘눈섭’은 초승달 아닌 보름달 비유
혼란 수습된 뒤 고요의 순간 그려

‘바람’은 어두운 시대의 엄습 표현
부정적 시련 아닌 하나님의 말씀

코로나로 어려움 겪은 수험생들
수능 시험에서 좋은 결과 기대

 내 마음속 우리 님의 고운 눈섭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섣달 날으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서정주, ‘동천’

#교과서들은 ‘동천’의 ‘님’을 오랜 그리움과 정성이 빚어낸 가치의 표상으로, ‘눈섭’을 그 얼굴의 고결함을 담은 비유로 설명한다. 그것을 밤하늘에 옮겨 놨더니 미물인 ‘새’마저도 거기 깃든 특별한 마음을 아는 시늉을 하며 스쳐 지나간다는 것이다. 세부 내용에 작은 차이는 있어도 하나같이 동의하는 바는, 저 ‘눈섭’을 초승달로 본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한겨울 하늘의 작은 초승달 곁을 나는 새의 몸짓이 시인의 육안에 잘 보일까. 눈썹을 씻어 하늘에 심는다는 것이 꼭 눈썹 한 낱에 대한 말일까. 이분의 다른 시에 이런 예가 있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추석이라
 밝은 달아

 

 너 어느 골방에서
 한잠도 안 자고 앉었다가
 그 눈섭 꺼내 들고
 기왓장 넘어 오는고
-서정주, ‘추석’

한가위 보름달을 ‘눈섭’에 비유하고 있다. 이를 보면 ‘동천’의 ‘눈섭’은 초승달의 은유가 아니라 보름달의 제유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눈썹이 초승달이 되면 얼굴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내가 또 유랑해 가게 하는 것은
 내가 거짓말 안 한
 단 하나의 처녀 귀신이 나를 찾아오기 때문이다.
 문둥이산 바윗금 속에서도 길을 내여
 그 눈섭이 또 다시 나를 찾아오기 때문이다.
-서정주, ‘내가 또 유랑해 가게 하는 것은’

화자를 정신적 유랑으로 내모는 것이 ‘처녀 귀신’이라는 내용을 적은 시다. 여기서도 부분인 ‘눈섭’으로 귀신 얼굴 전체를 표현한다. ‘동천’의 눈썹은 만월이고, 만월은 하늘에 드높인 임의 얼굴이라 읽는 편이 온당할 것 같다. 인용한 세 편은 모두 시집 『동천』(1968)에 수록돼 있다. 서정주는 ‘귀신을 본다’고 직접 말하고 그걸 시에도 적은 특이한 시인이다. 그의 시력은 여귀 비슷한 인물과의 악전고투를 그린 맥락을 포함하고 있다. ‘동천’의 환한 풍경화는 이 혼란이 수습된 어느 고요의 순간을 그린 것 같다.

윤동주의 ‘서시’는 ‘부끄러움 없는 삶에 대한 소망과 고뇌’, ‘보편적 인간애와 미래 삶에 대한 다짐’, ‘현실적 시련의 자각’이라는 세 매듭으로 흔히 설명된다. 무리한 해석들은 없어 보인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서시’

이 시에는 윤동주 시 이해를 위한 열쇠 말들이 다 들어 있다. 하늘, 바람, 별, 사랑에 길까지. 그리고 이것은 서‘시’다. 압축하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나는 교과서적 설명에 따라 시의 내용과 화자의 섬세하고 견결한 마음의 움직임을 음미할 수 있다. 하지만 딱 하나 형체 없는 ‘바람’에 걸린다. 3행의 바람과 결구의 바람은 다른 바람일까. 교과서는 앞의 바람을 양심적 가책을 유발하는 힘으로, 뒤의 바람을 어두운 시대의 엄습, 즉 시련과 역경이라 설명한다. 하지만 바람이 부정적인 힘이었다면 윤동주는 시집 제목에 이 말을 넣지 않았을 것 같다.

 하얗게 눈이 덮이었고
 전신주가 잉잉 울어
 하나님 말씀이 들려온다.

 무슨 계시일까.
-윤동주, ‘또 태초의 아침’

 어둔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치럼 바람이 불어온다.
-윤동주, ‘또 다른 고향’

윤동주의 시에서 다수의 ‘바람’들은 ‘하나님 말씀’이다. 당연히 부정적인 의미를 띠지 않는다. 1941년 무렵 윤동주의 종교 시편들은 신앙, 현실, 시의 세 꼭짓점들 사이에서 펼쳐지는 번민과 성찰을 적고 있다. 그의 시와 민족주의는 바로 그 성찰의 근원인 하나님과의 대화를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그는 간절히 묻고 경건히 답을 기다렸는데, 말씀은 주로 불분명한 ‘바람’으로 전해진다. 형체 없는 바람은 모호하지만, 윤동주는 그 속에서 오래 귀 기울여 어떤 신념의 깊이에 도달했다. 바람은 그저 외부의 시련이 아니라 그의 양심을 울리는 하나님의 재촉과 격려였다.

 

#서정주는 내면의 적을 지극 정성으로 순치해 사랑으로 승화시켰다. ‘새’ 또한 그를 오래 괴롭혔던 환청의 이미지인데, 만월과 어우러짐으로써 고요한 화해의 세계에 참여한다. 윤동주는 뭇 생명에 대한 사랑을 하늘의 별에 받들어 올리고, 거기 하나님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서정주는 1941년에 젊은 혈기로 만주 땅 용정을 방황한 적이 있다. 용정 출신 윤동주는 서울의 연희전문에 다니며, 2년 선배 서정주의 『화사집』이 좋아 공책에 손수 필사를 했다. 바로 이 해에 ‘서시’를 썼다

.

‘동천’의 언어에는 오십대 명장의 숨결이 배어난다. 그리고 그 곁에 걸어 두어도 전혀 빛을 잃지 않는 이십대 청년의 ‘서시’는 놀랍고 감동스럽다. 그가 나중까지 살았으면 어떤 시를 썼을까 궁금하기만 하다. 그런데 내가 명시에 감탄만 하려고 이 글을 적은 것은 아니다.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다. 유례없는 역병 사태로 어렵사리 공부한 올해의 수험생들이 큰 시험을 앞두고 있다. 저마다 애쓴 만큼 좋은 결과가 있기를 빈다.

이영광 시인·고려대 교수
고려대 국문과 대학원에서 서정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8년 계간 문예중앙으로 등단했다. 서정성과 불온함이 공존하는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시집 『끝없는 사람』 『깨끗하게 더러워지지 않는다』 등을 냈다. 고려대 미디어문예창작과 교수.